미국, 육·해·공·우주 이어 사이버공간=제5전장 규정
‘해커 10명’이면 미국 공격 충분…피해는 상상 초월
유엔 ITU총장 “사이버전쟁 금지조약 맺자” 호응 없어
» 미국 공군 사이버 사령부 대원들이 사이버전쟁 시뮬레이터를 조작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5월 사이버 사령부를 출범하고 본격적인 사이버전쟁 대응 태세에 나섰다. 미국 공군 제공
#1
지난달 30일, 미국 공영방송 <피비에스>(PBS)의 대표적인 뉴스 프로그램 ‘뉴스아워’ 사이트에는 ‘투팍 샤쿠르’(1996년 사망한 전설적인 래퍼)가 아직 뉴질랜드에 살아 있다는 깜짝 기사가 실렸다. 물론 거짓 기사였다. 자신을 ‘룰즈섹’이라고 밝힌 4명의 해킹 그룹이 ‘재미삼아’ 저지른 짓이었다.
하지만 만일 정치적·전략적 목적를 지닌 해커가 ‘알카에다가 뉴욕을 공격했다’는 따위의 위험한 기사를 올렸다면 어땠을까. 미국의 국가안보에 곧바로 영향을 끼치는 대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2
구글은 1일 자사의 이메일 서비스인 지메일 계정 수백개가 해커들에게 공격당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해킹당한 이메일이 미국의 군 관계자, 관료, 한국의 관료, 중국의 반체제 인사 등의 계정이었다는 점이다. 해커는 이들의 이메일 전달 설정을 조작했고, 이들이 받은 메일은 고스란히 다른 곳으로 전달됐다. 이메일 내용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이 알 수 있게 된 셈이다. 미국은 해킹의 진원지로 중국을 지목했지만, 중국은 부인하고 있다.
이른바 ‘제5의 전장’이라 불리는 사이버 공간에 ‘전쟁’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최근 한달 사이에도 <피비에스>, 구글 지메일, 록히드 마틴 등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기관이나 기업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 이뤄졌다. 미국의 보안전문 업체 ‘애플리케이션 시큐리티’의 대표 조시 샤울은 “2011년은 사이버 공격과 관련해 기념비적인 해가 될 것”이라며 최근의 급증세를 우려했다.
잇단 해킹 사건은 재래식 전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는 미국도 이 전장에서는 그다지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잇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지난해 초 국방검토 보고서를 통해 사이버 공간을 육·해·공·우주에 이은 제5의 전장으로 공포했다. 이어 지난해 ‘사이버 사령부’를 창설하는 등 엄청난 재원도 쏟아부었다.
하지만 투자만큼 효과는 크지 않았다. 사이버전쟁의 가장 큰 특징이 ‘비대칭성’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린 국방부 차관이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서 지적한 대로, 미국을 공격해 큰 충격을 주는 데는 수십만명의 병력이 아닌 ‘10여명의 결의에 찬 해커’가 필요할 뿐이다.
» 사이버 공격 트래픽 상위 10개국 비율
사이버 공격에 뚫릴 경우 해당 국가나 기업의 직간접적인 안보 피해는 상정하기조차 힘들다. 이스라엘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란의 핵시설을 교란한 웜바이러스 ‘스턱스넷’ 같은 프로그램은 제2의 체르노빌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핵무기나 무인기 조종시설이 해커에게 뚫리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악몽’이다.
사이버 공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린 차관은 지난 1월 100여곳에 이르는 나라의 정보기관이 하루에도 수백만번씩 미국의 군사기밀을 빼가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에이피>(AP) 통신에 밝힌 바 있다. 유명 인터넷 백신업체 카스퍼스키의 설립자 나탈리아 카스퍼스키는 “매일 7만개의 공격 바이러스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지난해에만 200명이 넘는 사이버 범죄자를 체포했다.
급기야 견디다 못한 미국이 사이버 공격을 받으면 이를 ‘전쟁 행위’로 규정해 미사일로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최근 보도했다. 하지만 공격의 진원지를 증명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데다, 사이버 공격이 대개 ‘비국가적 행위자’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특성으로 미뤄볼 때 실현되기 어려운 ‘엄포’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전세계 사이버 국가안보 수장들도 1~2일 영국 런던에서 ‘세계 사이버안보 정상회의’를 열어 사이버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으나 뾰족한 수를 찾지는 못했다. 유엔 산하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하마둔 투레 사무총장은 “다음번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 장소는 사이버 공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며 “사이버전쟁 확산 금지 조약을 맺자”고 주창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각국이 허둥대고 있는 사이 사이버전쟁의 위협은 한발한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