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선생문집해제-신경철

 

艮齋先生文集 解題 

Ⅰ. 序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의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큰 격동기였다. 사회적으로는 封建社會에서 開化와 近代化로의 전환기였고, 국가적으로는 植民 帝國主義의 外勢로부터 國家와 民族을 지키려는 民族運動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知識人들의 삶은 매우 괴롭고 힘들었다. 近代化와 國權 維持의 두 문제는 그것에 대한 인식과 자세, 이념과 사상, 수단과 방법 등에 따라 해결 방안이 다르고 그들의 삶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두 문제는 현실적으로 外勢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혼란하고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80 평생을 오로지 꿋꿋하게 學問과 後學 養成에 전념한 삶을 산 학자가 있으니 그가 艮齋 田愚 선생이다. 선생은 50여 권이나 되는 방대한 문집을 남겼다. 선생의 글들은 모두 학문에 관한 이론이요 주장들이다. 남에게 보낸 서간문도 안부나 소식을 전하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학문에 관한 자기의 견해와 논리를 전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선생의 논리는 정연하고 일관되어 있다. 이 점이 다른 문집과 크게 다르다.
그런데,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艮齋集은 完本이 없었다. 그러다가 艮齋의 제자 慕菴 李仁矩 선생이 가재를 들여 집안에서 판각하여 인쇄한 木板과 그 初刊本이 그의 후손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번에 발행되는 艮齋田愚先生全集이 바로 그것을 축소 영인한 것이다. 木板들은 일부가 결손된 채 후손 李錫羲가 大田大學校 박물관에 기증하여 현재 보관되고 있다.
이에, 艮齋 선생의 生涯와 學問, 간재집의 板本, 그리고 艮齋先生文集을 판각 인쇄하여 배포한 李仁矩 선생과 이를 전국에서 수집 보관해 온 그 후손들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Ⅱ. 艮齋 先生의 生涯

艮齋 선생의 姓은 田이요 本貫은 潭陽이다. 初名은 慶倫 또는 慶吉이라 했는데 愚로 개명하였다. 字는 子明이고, 號는 臼山 臼翁 艮參 秋潭으로도 나오나 艮齋로 널리 알려져 있다. 父는 聽天翁 在聖이고 母는 南原 梁氏이다. 伯氏 慶俊은 僉正公 宜聖의 後로 出系하였다.
선생은 憲宗 7년(1841,신축) 1월 13일 全州府 靑石里에서 태어나 7세 때 입학하였는데 日課에 힘쓰고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났다고 한다. 14세 때 서울로 이사하고, 21세 때 큰 선비로 뒤에 좌의정을 지낸 文敬公 申應朝(1804∼1899)의 권고로 뒤에 대사헌을 지낸 학자 任憲晦(1811∼1876)에게 가서 15년간 모시며 배우고, 尹致中 徐廷淳과 함께 그의 高弟가 되었다. 그의 학풍은 李珥 宋時烈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1880년 40세에 繕工監役 典役司別提 江原都事에, 또 1894년(고종 31년) 54세 때 司憲府 掌令으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20여년간 주로 충청도 여러 곳으로 옮겨 살다가 72세 때 全北의 界火島로 가서 10여년간 後學 養成과 著作에 힘쓰다가 1922년(임술년) 7월 1일에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艮齋 선생은 목숨을 내걸고 직접 義擧나 排日運動·獨立運動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선생은 官職에 나아가지 않고 전통적인 道學의 中興이 主權의 회복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일생을 바쳤다. 선생은 義理를 숭상하여 조선조의 趙光祖 李滉 李珥 金長生 宋時烈을 ‘東方의 五賢’이라 보고 그들의 문집에서 좋은 글을 모아 「五賢粹言」을 엮어냈다. 선생은 일본인들은 상대하지도 않고 세금도 안 냈으며, 제자가 개화하면 명단에서 이름을 지웠다. 또 正統 王權의 계승만이 國權의 회복이라 하여 巴里長書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秋潭別集」에 선생은 巴里長書에 대하여 “國權을 회복한다고 하면서 外勢와 손잡게 되면 이는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夷狄이 되는 것이니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고 하였고, “500년 宗社도 중요하지만 3000년의 道統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삶에서 우리는 亂世에 대처하는 儒學者의 또 다른 한 유형을 볼 수가 있다. 선생의 삶이 죽음만이 능사가 아닌 학자로서의 꿋꿋한 태도와 삶의 자세를 지키려는 확신에 찬 신념에서 나온 것임도 알 수 있다.
간재 선생은 學問은 ‘誠’과 ‘敬’으로, 修身은 ‘愼’으로 근본을 삼았다고 한다. 선생의 제자 李仁矩는 서재 벽장문에 ‘誠’과 ‘敬’을 써 붙여 놓고 본받았고, 다른 제자 柳永善도 제자와 후손에게 늘 이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艮齋先生文集」(54책, 李仁矩 編),「艮齋私稿」(30책, 金炯觀 刊), 「秋潭別集」(2책), 「臼山雜著」, 「艮齋先生禮說」(權應斗 編), 「艮齋性理類選」(柳永善 編), 「臼山先生四書講說」(吳震泳 編) 등이 있다. 제자는 吳震泳 崔秉心 李炳殷 宋基冕 權純命 등 3000여명이나 된다.
세상 사람들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艮齋가 죽지 않고 세상을 외면한 사실을 비난하자 ‘艮門의 子貢’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선생의 제자 柳永善이 “出仕하지 않은 선비는 어려운 때를 만나면 義를 지키고 道를 講해서 士道를 지키고 後學을 길러야 한다.”고 글을 써서 일축해 버렸다고 하는데 艮齋 선생의 삶을 잘 대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田艮齋의 骨髓가 다 柳永善의 肺腑로 들어가 버렸다.”고 했다는 당시 儒林의 평은 이를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선생은 界火島의 繼陽祠·宜寧의 宜山祠·高敞의 龍巖祠·井邑의 台山祠 등에 祭享되고, 제자 柳永善이 공부하던 高敞邑 蛛谷里의 玄谷精舍 기둥들에는 艮齋 선생의 친필로 된 朱子의 敬齋箴 20쪽이 붙여져 있다.

주요 연보는 다음과 같다.

  • 1841년(헌종 7년, 신축) – 全州 교외 靑石洞에서 출생
  • 14세(1854) – 서울 貞洞으로 이사, 또 三淸洞으로 이사, 筆法 神妙로 명성
  • 18세(1858) – 朴氏와 결혼
  • 21세(1861, 철종 12년) – 牙山 新陽의 全齋 任憲晦 선생에게서 공부, 朱子大全 탐독
  • 23세(1863) – 右相 朴珪壽가 輔養官으로 천거했으나 聽從되지는 않음
  • 25세(1865) – 부친이 全齋를 따라 公州 明剛으로 이사, 전재 선생을 매일 侍奉
  • 27세(1867) – 모친상, 18일 뒤에 부친상
  • 30세(1870, 고종 7년) – 全齋가 王의 召命으로 알현하고 艮齋를 인재로 추천
  • 34세(1874) – 부인 朴氏喪
  • 36세(1876) – 朱氏와 재혼, 全齋가 公州 星田으로 이거하자 燕岐 竹岸으로 이사
  • 38세(1878) – 부인 朱氏喪, 4월에 陰城 三峴으로 이거
  • 40세(1880) – 恩津 宋氏와 三婚. 8월 領相 洪淳穆의 주청으로 繕工監役, 9월 典役司別提·江原都事 임명에 부임 않음. 10월 5선생의 사적을 모아 ‘淵源正宗’ 편성.
  • 41세(1881) – 尙州 壯岩으로 이거, 聞慶 深源寺에 거처하며 講規를 定함
  • 46세(1886) – 鎭川 晩竹으로, 47세에  洞으로, 48세에 文泉으로, 52세에 栗里로 이거
  • 54세(1894, 고종 31년) – 司憲府 掌令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않음
  • 55세(1895) – 3월 朴泳孝가, 또 李承旭 등이 수구파의 괴수니 田愚 죽일 것을 주청. 明成皇后 시해에 門人들에게 역적 토벌 선언, 다음 해에 泰安으로 이거
  • 60세(1900) – ‘心本性說’ 저술, 독일인 花之安의 ‘西敎之書’에 대해 ‘自西 東辨’을 지음. 鳳棲寺 체류 학도가 7,80명 모여 ‘山房規約’ ‘陽明心理說辨’ 지음. 公州 薪田으로 이사, 定山 龜洞의 勉庵 崔益鉉 방문
  • 65세(1905) – 10월 21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7일 5賊 처단을 상소
  • 66세(1906) – 윤 4월 崔勉庵의 의거 소식을 듣고 편지로 격려
  • 67세(1907) – 海牙 밀사사건 뒤 李儁 열사 찬양시 지음, ‘中庸諺解’ ‘梁集請說辨’ 지음
  • 70세(1910) – 4월 安重根 의사 찬양시 지음, 合邦 소식에 門人과 입산 수일간 통곡. 李寒洲의 ‘心卽理說’ 비판, ‘海上記聞’ ‘朱子心說’ 지음
  • 72세(1912, 壬子年) – 旺嶝島에서 君子島로, 다시 繼華島의 壯子洞으로 이사. 門人들이 私稿의 前編 편성
  • 74세(1914) – 講堂 확장, ‘海上散筆’ 成篇, 11월 경찰 호출에 불응, 다음 해에 墓誌 自作
  • 79세(1919) – 巴里長書에 서명 불응
  • 81세(1921) – ‘華島 錄’ ‘朱書標疑’ 지음
  • 82세(1922) – ‘讀論語’ ‘讀孟子’ 지음. 5월에 임자년(1912) 이후의 글을 모아 私稿後編으로 하고 “今後의 書는 再後編으로 하라”고 지시. 7월 1일 노병으로 4일만에 서거. 9월 13일 益山의 玄洞 後麓 先塋 아래 艮坐의 언덕에 장사

Ⅲ. 艮齋 先生의 學問

艮齋 선생의 學問에 대하여 柳正基 박사는 “知識이 博洽하고 文章이 能熟한데 그의 學問은 오직 經傳에 관한 儒學이고 心性에 對한 理學이다.”고 요약하였다. 특히, 艮齋의 학문은 ‘性師心弟의 說’이 핵심인데 이에 대하여 艮齋 스스로 『性師心弟의 四字는 내가 創說한 것인데 六經에 累萬言이 無非 다 이 眞理를 發明해서 一貫한 것이다. 이것을 中夜에 고요히 생각하면 스스로 즐거워서 手舞足蹈를 하노라.』고 한 것으로 보아 큰 自信을 가졌던 것 같다.
유 박사는 의 『理氣에 帥가 되고 卒이 되며 學問에 主理하고 主氣함은 士者가 알지 못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생각건대 太極은 陰陽의 主니 바로 朱子의 말한 바 性은 氣의 主가 된다는 說이고, 陰陽은 太極이 運用하는 것이니 바로 橫渠가 말한 바 心은 性情을 統한다는 說이다. 性과 太極은 無爲之理인 것이고 心과 陰陽은 有爲之氣인 것이다.』와 의 『太極에 動靜의 理는 있어도 動靜은 없으며, 陰陽은 動靜의 理를 갖고서 能히 動靜을 하는 것이니; 또한 人性이 寂感의 理는 있어도 寂感은 없으며, 人心은 寂感의 理를 갖고서 能히 寂感함과 같은 것이다.』를 통하여 “性은 太極이고 心은 陰陽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性은 理의 體고 心은 氣의 用으로 보았으니 이것은 바로 理性과 心氣인 것이다.”, “그의 所謂 性은 原理原則인 것이고 心은 作爲作用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하고 ‘性師心弟의 說’을 “要는 우직 性을 理로 보고 心을 氣로 보아서 理性이 師傅가 되어 心情을 弟子로 해서 그의 가르치는 대로만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의 『成己하려는 者는 먼저 明己해서 勝己하고, 明己해서 勝己하는 데는 먼저 千萬人의 中에서 有己함을 알아야만 하니 暗室에 혼자 있어도 能히 畏己를 하는 것이다.』에서 “儒學이란 것은 이러한 自己 完成에 努力하는 것이다. 그의 根本的인 手段으로는 心性理氣를 探究하고 그의 終極的인 目的으로는 治國平世를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艮齋 선생은 서양의 새로운 학문에 대하여서는 강하게 배척하였다.
에서 『무릇 저들이 勸하는 것은 모두 우리에는 害로운 것이고 저들에만 利로운 것이며, 저들이 禁하는 것은 모두 저들에게는 害로운 것이나 우리에게는 利로운 것이니 무릇 우리들 國家를 爲하는 뜻을 가진 者는 마땅히 選擇할 바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저들의 胸中에는 다만 하나의 利字만 있을 뿐이니 그의 利益만 힘을 쓰는 害毒은 門을 열고 盜賊을 맞아드려 君國을 팔아 먹는데 이르렀으니, 무릇 우리들은 반드시 한 義字만 가지고 骨子를 세워서 死生을 해야만 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학문에 대한 태도는 나라를 지키려 하는 愛國心과 직결되는데 현실적으로는 開化를 내세워 侵奪해 오는 일본을 강력하게 排斥하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時輩는 開化로써 賣國하여 島倭로 하여금 大闕을 向해 發砲케 하고 國王을 拘執하였다.』, 『지금은 邪說 暴行이 交作해서 外國에 開化할 줄만 알고 我國의 社稷은 모른다.』, 『天下萬國은 義擧를 일으켜서 日本을 討伐하라.』, 『우리 搢紳의 士는 모두 切齒腐心해서 天地神明께 盟誓하고 倭人의 臣妾은 되지 말자.』 등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排日思想은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 해 11월에 國賊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상소까지 썼지만, 勉庵 崔益鉉의 의거에는 가담하지 않았고, 면암의 순국 소식을 듣고 지지하는 시를 짓게 하여 17명이나 보내게 하였다.
柳正基 박사는 선생의 학문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解題를 쓰려고 內容을 보니 거의 다 學問的인 辯說이니 簡單한 것은 아니라 十日 以上이나 걸리게 되었다.…… 艮齋는「自西 東辨」이니「梁集諸說辨」이니 하는 등의 辨說로서 東洋文化를 擁護했던 것이다. 그래서 世上은 다 極西化하여도 艮齋만은 極東的이였던 것이다.”
艮齋 선생의 학문적 특징에 대해서는 이렇게 결론해 내었다.
“要컨대 ‘性師心弟’라는 艮齋의 學名은 조금 怪僻하기는 하지마는 그것은 理性을 師傅로 하고 心氣를 弟子로 해서 眞理가 氣勢를 가르치고 氣勢는 眞理를 배운다는 學說이니 이것은 實로 至當한 것이니 이것이 眞理만 崇尙하는 儒學의 特徵인 것이다.”

Ⅳ. 艮齋集의 版本

① 艮齋先生文集 龍洞本

艮齋先生文集 龍洞本은 간재의 제자 慕菴 李仁矩 선생이 주동해서 忠南 論山郡 豆磨面 龍洞里 鳳陽精舍 자택에서 1924년∼1928년에 木板本으로 쇄출한 것이다. 초판본은 총 54권 54책인데 수십 질만 간행하여 신청자에게만 배포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전질을 구하기가 매우 힘들다.
용동본은 總目 1권, 前編 17권, 前續編 6권, 後編 22권, 後續編 7권, 別編 1권, 총 54권 54책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5174장에 권당 평균 96장 정도로 분책되어 있다. 각 권의 크기는 대략 가로 20.0㎝ 세로 29.0㎝이고, 半廓은 가로 16.0㎝ 세로 19.8㎝ 정도이다. 紙質은 楮紙이고 四周雙邊에 界線이 있고 每面은 10行 20字인데 注는 雙行이다. 標題는 「艮齋先生文集」이라 墨書했으나 板心題는 「艮齋集」이며, 上下內向 二葉紋黑魚尾로 되어 있다. 別編은 板心題가 「艮齋別集」, 私箚은 「艮齋私箚」이다. 5孔 線裝이다. 판각과 쇄출의 경비는 李仁矩 선생이 가산을 기울여 거의 전담하였고, 맏아들 基福은 부친의 명을 따라 이 일을 적극 도왔다.
龍洞本은 총독부의 허가를 받기 위하여 일본 관련 내용을 제외하고 1924년에 발행한 晋州本이 잘못되었다 하여 간재집 전부를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간재 선생이 “훗일에 만약 이것을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발간한다면 이것은 내가 屈辱이 되는 것이다.”라고 유언하였기 때문이다. 이 龍洞本의 草本은 간재 선생이 繼華島에서 직접 手定한 것이라고 하는데 艮齋 선생의 모든 글을 다 모아 실어서 艮齋集 최대의 全集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書簡文인 書가 가장 많은데 거의 모두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의견과 논의 비판 등인 것이 특색이다. 받은 사람도 전편 권 1,2에 스승인 全齋를 비롯하여 肅齋 趙秉悳, 苟菴 申應朝, 溪運 金洛鉉, 芸鹵 朴性陽, 鳳峀 金炳昌, 堂 李象秀, 混泉 金萬壽, 渾齋 安敎翼, 敎官 任百熙, 默信齋 李鎭玉, 勉菴 崔益鉉, 年吉 朴世和, 參判 沈琦澤, 聖皐 趙鎭鶴, 東玉 宋秉珣, 敎理 權鳳熙, 參判 權膺善, 判書 申正熙, 都正 禹成圭, 參判 趙章熙 등 당대의 學者와 高官들이고 그 數도 많아 交流의 폭이 매우 넓음을 알 수 있다.
용동본의 板木은 후손이 3대를 이어 보관하여 오다가 일부는 훼손되고 몇몇은 망실되었는데, 1988년에 慕菴의 장손인 慕雲 李錫羲 선생이 大田大學校에 기증하여 현재 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龍洞本의 體裁와 內容은 다음과 같다.

艮齋先生文集 總目 : 전편총목 전편속총목 후편총목 후편속총목 합 9장
각권별 목록 139장, 합계 148장

前編 권 1∼11 : 書
권 12∼15 : 雜著
권 16 : 序 記 題跋 銘 贊 告祝
권 17 : 祭文 上樑文 神道碑銘 碑 墓表陰記 墓誌銘 諡狀 行狀 詩

前編續 권 1∼2 : 書
권 3 : 書 雜著
권 4 : 雜著 序
권 5 : 記 題跋 銘 贊 字辭 昏書 祭文 墓表
권 6 : 墓碣銘 墓誌銘 行狀 行錄 傳 詩

後編 권 1∼12 : 書
권 13∼17 : 雜著
권 18 : 序 記 題跋 銘 箴 贊 告祝 祭文 神道碑銘 碑 墓誌 行狀 傳 詩
권 19 : 大學記疑
권 20 : 中庸記疑
권 21 : 朱子大全標疑第一
권 22 : 朱子大全標疑第二

後編續 권 1∼4 : 書
권 5 : 雜著
권 6 : 雜著 序 記 題跋
권 7 : 銘 頌 箴 贊 字辭 告祝 祭文 神道碑銘 碑 墓銘 墓表 語錄 詩

別編 권 1 : 疏 書 雜著 記 題跋 銘 贊 告祝 祭文 詩

私箚目錄 : 書 記 辨

총 54책 = 總目 1 + 前編 17 + 前編續 6 + 後編 22 + 後編續 7 + 別編 私箚目錄 1

이 영인본 艮齋田愚先生全集은 이 龍洞本 完本에다 ‘艮齋集 附錄’ 10권을 추가한 것이다. 이 부록은 내용이 간재의 제자들이 쓴 追悼文 祭文 祝文 들인데 모두 필사본들이다. 10권 10책은 ‘甲 乙…… 壬 癸’로 分卷했는데 그 필체는 여러 가지이다. 甲 乙은 백지에 每面 10行, 24字씩 되었으나 그 밖의 것은 19∼23자 정도이다. 丙 丁 戊와 壬 癸는 界線紙에, 나머지는 백지에다 썼다. 총 747장인데 권당 54장∼108장으로 일정하지 않다. 이 부록 부분은 다른 판본에는 없는 것인데 지은이의 姓名이 명시되어 있어 간재의 弟子와 學脈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용동본 간행자인 李仁矩의 후손 집에서 발견된 文集 印刷時의 任員과 勤務錄 壹(丁卯十月二十二日) 및 勤務錄(己巳十一月印出時), 艮齋集頒送錄(일부)에서 간행 근무자와 반송처가 다음과 같이 일부 확인된다.

印刷時 任員(丁卯年) : 都有司 宋毅燮 總務 宋鍾弼 外務 李光珪 宋淵求 掌財 李仁矩 監印 崔性謙 書司 孫明淳
刊行勤務者(丁卯年) : 李錫龜(印刷 印花 拉丈 再結 루라 附衣), 李基五(印刷 雜役 루라 附
衣 再結), 李錫麟(印刷), 李錫鳳(印刷 附衣 再結), 李錫福(初結 印刷 分丈 루라 衣 印花 再結), 李錫權(初結 分丈 拉丈 衣 再結 附衣), 兪相根(分丈 拉丈 初結)
(己巳年) : 李鍾錫(印刷 分丈 再結 印花), 李錫奎(印刷 分丈 拉丈 附衣 再結),
李基善(印刷 拉丈 初結 分丈 再結 附衣), 李鍾學(分丈 拉丈 初結 再結), 李仁準(拉丈 初結 印刷), 李延河(拉丈), 金鍾純(印刷 分丈 拉丈), 金石運(分丈 拉丈), 明在學(拉丈 再結 附衣 分丈 衣), 李錫福(分丈 印刷 拉丈 初結 附衣 再結), 姜大鉉(印刷 分丈 拉丈 拉衣), 李錫鳳(印刷 分丈), 金泓基(分丈)

頒送處 : 의령 田衡煥, 예천 梁柱彦, 청도 梁基韶, 제주 康用範, 강릉 崔大洙, 울진 崔性
謙, 길주 許順泳, 갑산 鄭禮殷, 덕원 金潛, 단천 尹秉極, 홍원 洪翼裕, 안변 金榮 , 함흥 崔觀鉉, 북청 太致中, 명천 全時權, 의주 李承學, 대동 朱烈祖, 용강 金聲煜, 서산 金選儒, 서산 崔欽, 구성 田壎, 청주 李鍾榮, 청주 金允洙, 청주 成璣運, 진주 許万憲, 김해 魚允甲, 산청 韓恒, 달성 金重鉉, 합천 權政熙, 함안 趙瀚奎, 김해 李普林, 거창 愼宗 , 영광 文寓權, 청주 田鎰悌, 장수 韓容麟, 남원 吳龜泳, 울진 田在中, 단천 沈正勳, 공주 徐廷世, 익산 姜修馨, 김제 孫明淳, 함흥 韓泳夏, 용천 文如海 등

② 晉州本

진주본은 1924년에 晉州에서 艮齋 선생의 제자 吳震泳이 주동하여 新活字로 출간한 것이다. 標題는 艮齋私稿로 되어 있는데 43권에 속집 16권 합 30책이다. 책의 크기는 29.3×19.1㎝이고 4·6배판 크기에 1면을 上下 2단으로 조판하였다.
진주본은 艮齋集에서 일본 관련의 내용을 빼어 버리고 일본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간행한 것이다.

③ 艮齋私稿本

艮齋私稿本은 간재의 門人 後滄 金澤述이 간재가 繼華島에서 手定한 원본을 그대로 필사해서 보존해 오던 것을 영인한 것이라 한다. 해방 뒤 출판하려다가 작고하자 井邑의 그 아들 金炯觀이 1975년에 발행하였다. 서울 光成文化社에서 인쇄하고 반포처는 대전 寶文山房으로 되어 있다.
이 사고본은 총 62권 2책인데 상하 2단으로 축소 영인하였으며, 전편 전편속 후편 재후편 별편과 연보로 짜여 있다. 맨앞에 艮齋私稿自序가 있고 德殷 宋炳華의 跋이 있다. 뒤에 붙인 艮齋先生私稿(영인본)發刊顚末은 1975년에 蔡鎭斗 成九鏞 宋烈 金炯觀 증손 田世淇가 각각 썼고, 23명의 명단이 든 同刊錄도 들어 있다.
내용은 龍洞本과 거의 같은 것으로 여겨지며 용동본보다 더 分冊하여 책수가 늘었다. 龍洞本과 면밀하게 비교해 보면 그 差異와 正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④ 田愚全集本

田愚全集本은 韓國學文獻硏究所에서 編하고 1984년 5월 25일자로 亞細亞文化社에서 韓國近代思想叢書로 발행한 것인데 全8卷으로 되어 있다. 1978년에 쓴 한국학연구소 편집실의 간행사와 1984년에 쓴 전 忠南大 大學院 柳正基 교수의 艮齋私稿 解題가 있다. 뒤에는 成九鏞 金炯觀 등이 만들고 金澤述이 편집한 艮齋年譜 2권과 金炯觀의 跋이 있다.
이 전집본은 앞 艮齋私稿本을 1단으로 풀어서 재영인한 것으로 본문 내용은 앞 私稿本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Ⅴ. 慕菴 李仁矩와 그 後孫

① 慕菴 李仁矩

艮齋先生文集을 최초로 板刻하여 出刊한 李仁矩 선생은 初名은 仁矩, 字는 敬循, 號는 慕菴이다. 本貫은 固城이고 祖는 敦寧都正 廷馥, 父는 參書 遯齋 學禧이다. 艮齋 田愚의 門人이다. 고종 27년(경인년, 1890) 3월 30일에 나서 1952년(임진년) 3월 26일에 63세로 작고하였다. 부인 潭陽 田氏는 艮齋 선생의 손녀이다. 基福(春)과 基善 두 아들을 두었다. 1982년에 門人과 後孫들이 묘소에 實績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宋悌永이 지었다.
學行이 있고 孝親으로 소문이 났는데 父母의 喪에 묘소에 廬幕을 지어 3년간 상복을 벗지 않고 시묘를 하였다. 스승 艮齋가 작고한 뒤에 遺稿 編纂에 의견이 분분하자 의연히 스승의 遺言을 따라 일본 관련 내용까지 모두 넣고 家財를 기울여 板刻 刊行하여 세상에 전하게 하였다.

                            李仁矩
                    +---------+---------+
                  李基福(春)          李基善
       +------------+-------+
     李錫羲       李錫煥  李錫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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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政 李炳天 李炳宇

② 東樵 李基福(春)

李仁矩의 맏아들 基福은 일명 춘(春)으로 字가 子華, 自號를 海東樵夫(東樵)라 하였다. 隆熙 7년(정미, 1907) 6월 6일에 나서 1957년(정유년) 정월 26일에 50세로 작고하였다. 부인은 全州 崔氏이고 錫羲 錫煥 錫健의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부친의 명을 받들어 艮齋集의 板刻 일을 도왔다. 鐵驥 李範奭의 光復靑年運動을 일찍부터 도운 뒤 論山郡 豆磨面 龍洞里에서 살면서 經史에 힘썼다. 文行이 있고 글씨로 유명한데, 大田 寶文山의 市民憲章碑 글씨는 그가 쓴 것이다.

③ 慕雲 李錫羲

李仁矩의 맏손자 錫羲는 字가 子文, 號가 慕雲인데 1927년(정묘년) 정월 7일 충남 논산군 두마면 용동리에서 나서 1994년 4월 27일에 작고하였다. 1949년 申應澈과 결혼하여 政 炳天 炳宇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祖父가 운영하는 興學堂에서 漢學을 공부한 뒤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의 悳泉 成璣運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용동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인쇄소를 경영하여 각종 文集과 族譜 등을 出版하였다. 청년회장·이장으로 오래 봉사하면서 새마을운동에도 앞장서서 활동하였고, 밤마다 후학들을 가르쳤다. 孝心이 극진하여 祖母를 103세까지 성심으로 봉양하고, 상중 3년 동안에는 상복을 입은 채로 강의를 하였다.
1980년 大田으로 이사한 뒤 대흥동에서 明倫學院을 설립하여 四書五經을 講讀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四書五經의 註의 번역과 口訣吐의 정비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건강을 해쳐 별세하였다. 또한 祖父가 심혈을 기울여 판각한 艮齋先生文集 龍洞本이 애초에 수십 질밖에 인쇄 배포되지 않았고, 집에도 完秩을 소장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전국을 수소문하여 완질을 이루자 민족문화추진회를 통하여 영인 출판을 추진하던 중 유언으로 남겼다. 방대한 분량의 艮齋文集 板木은 사저에 계속 보관해 오다가 1988년에 大田大學校 博物館에 기증하여 영구 보존하게 하였다.
이 艮齋全集의 영인 出刊은 그의 뜻을 따른 子孫들과 忠南大學校 圖書館의 협조로 이루어진 것이다.

Ⅵ. 結 語

艮齋 田愚 선생은 梅泉 黃玹 선생과 함께 韓末의 양대 學脈을 이루었다는 평을 듣고 있는 큰 학자이다.
선생은 권력에는 관심이 없고 學問의 世界에만 충실한 學者의 삶을 고수하였다고 할 수 있다. 벼슬을 여러 차례 내려도 나아가지 않았고, 排日思想도 강했지만 일본의 세력에 직접 나서서 대항하지는 않았다. 강대한 일본 세력에 의거를 일으키고 외국 사람들에게 長書를 보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으로 여기고, 차라리 學問을 하고 著述을 하며 後生을 위하여 敎育에 전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전통적인 道學의 中興이 主權 回復의 기본이며 첩경이라 여기고 이에 일생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艮齋 선생의 문집은 지금까지 몇 종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著述들을 다 모아서 간행한 것은 李仁矩 선생이 家財를 기울여 판각 인쇄한 艮齋先生文集 龍洞本뿐이다. 이제 李仁矩 선생의 후손들이 수집 보관해 온 龍洞本의 完秩을 影印하면서 여기에 艮齋의 門人과 後學들의 祭文 祝文 追悼文까지 함께 묶어 영인하여 艮齋田愚先生全集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는 艮齋 선생의 높은 學問과 그 門人 慕菴 李仁矩의 精誠이 다시 찬란하게 빛나게 된 것으로 學界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오래 동안 심혈을 기울여 이 全集의 完秩을 蒐集하고, 또 이를 학계에 출판·배포하도록 흔쾌히 제공해 준 慕雲 李錫羲 선생 내외분과 자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한 출판을 기꺼이 맡아 주신 忠南大學校 圖書館 여러분들께도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서기 1999년 1월

문학박사 申 景 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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