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선생문집해제-양기정
한국고전번역원(http://www.itkc.or.kr/)의 한국고전종합DB에서 검색된 간재선생문집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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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문집(艮齋先生文集)
기사전거 : 年譜(金澤述 編, 田愚全集), 年譜(柳永善ㆍ權純命 編, 艮齋先生全集)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李珥, 金長生, 宋時烈, 金昌協, 金元行, 朴胤源, 洪直弼, 任憲晦로 이르는 畿湖學派의 주요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전국에 걸쳐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性을 理로 파악하고 心을 氣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기호학파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心을 理로 파악하는 학설에 맞서기 위해 ‘性師心弟說’, ‘性尊心卑說’ 등의 독특한 학설을 제기하였다.
저자는 자신의 글을 ‘私稿’라는 이름으로 정리해 두고 있었는데, 〈私稿自序〉에는 자신의 글이 定本이 아닌 草稿이고, 또 감히 남에게 내보일 수 있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자의 글이 본격적으로 정리되는 것은 저자의 나이 60세를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門人 吳震泳의 年譜에 기록된, 1902년 겨울에 저자 文稿의 寫編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 이후로도 꾸준히 草稿의 정리가 이루어지는데, 저자가 古阜 百千齋에 머무르던 1906년 3월에는 金駿榮으로 하여금 草稿를 수습하게 하여 文稿 36冊으로 刪定해 두었고, 1912년 11월에는 1906년에 刪定해 두었던 文稿 36책에, 成璣運이 1906년 이후 수집해 둔 글을 합하여 成璣運, 權純命, 柳永善 등이 編輯하고 저자가 직접 25책으로 산정하여 ‘前稿’라고 하였다. 이것을 이듬해 宋炳華에게 보내어 교정과 산정을 부탁하였는데, 본서의 저본이 된 龍洞本의 前編續 末尾에 수록된 跋은 이때 지어진 것이다. 1921년 3월부터 6월 사이에는 권순명과 유영선 등이 1913년 이후로 매년 모아 둔 저자의 草稿를 정리하였고, 이를 저자가 직접 刪定한 뒤에 門人들로 하여금 나누어 繕寫하게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後稿’로서, 앞서의 前稿 25책과 합하면 모두 50여 책이었다. 저자가 卒한 직후인 1922년 9월에는 문인들이 1921년 7월부터 1922년 7월까지의 글을 모아 몇 책의 ‘再後稿’로 편차함으로써, 저자 문집의 稿本이 前稿, 後稿, 再後稿 등 모두 60여 책으로 완결되었다.
1922년 9월 저자의 卒哭을 마친 다음 날, 문집의 간행을 논의하기 위해 저자의 아들 田華九를 비롯하여 문인 吳震泳, 金澤述, 崔秉心, 南軫永, 成璣運, 權純命, 柳永善, 金洛奎 등이 繼華島의 講堂에 모였다. 저자는 일찍이 日帝의 許可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文集을 刊行하지 말 것을 子孫과 門人에게 당부한 바 있었으나, 문인들 대다수는 이번 기회에 문집을 간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간행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제의 허가를 받아 간행할 바에야 中國의 上海에서 간행하여 몰래 국내로 들여오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위험하고도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또 다른 의견은 당시에 널리 통용되는 방법으로써, 刻手로 하여금 대신 허가를 받게하여 간행하자는 것이었는데, 논의 끝에 문인들이 모두 이 방법으로 간행하는 것에 찬동하였다. 그 결과, 1922년 10월에는 淸道에 소재한 成璣運의 書齋인 悳泉齋에 刊所가 설치되고 刊役이 시작되었다. 청도에 간소를 설치한 것은 木板으로 간행함에 있어서, 掌財를 맡을 사람을 정하고, 板木과 刻手를 조달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刊役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崔秉心이 저자를 대신하여 지은 〈少尹崔公神道碑〉의 제목과 내용에 대해 오진영이 문제를 제기하여 오진영과 최병심 사이에 틈이 벌어졌고, 11월에는 金洛奎 등이 일제의 허가를 얻어 간행하는 것은 先師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刻手가 대신 허가를 받아서 간행하는 것도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이러한 일 등이 빌미가 되어 1923년 3월에 최병심은 김택술, 김낙규 등과 함께 益山 玄洞의 저자 묘소 아래에 따로 刊所를 설치하고 별도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문인들이 오진영을 중심으로 하는 嶺南派와 최병심을 중심으로 하는 湖南派로 兩分되어 反目하였고, 淸道나 玄洞 모두 刊役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오진영은 결국 1923년 10월에 淸道의 刊所를 撤收하고, 권순명, 유영선 등과 함께 上海에서 간행할 방법을 모색하였으나, 그 계획 역시 1924년 1월경 日帝에게 발각되어 무산되고 말았다.
최병심, 김택술 등은 일제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문집을 간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간행의 방법을 포기하고, 우선 1922년에 정리된 稿本을 筆寫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1923년부터 시작하여 1924년 7월에 필사를 완료했는데, 前稿 13책(前編 20권, 前編續 6권), 後稿 12책(後編 24권), 再後稿 3책(再後編 6권), 別稿 1책(別編 2권) 合 29책이고, 제목은 「艮齋私稿」이다. 이 가운데 別稿는 排日에 관련된 글만을 별도로 모은 것이다.《華島手定本》 화도수정본은 필사된 이후로 김택술 등에 의해 간행이 시도되기도 하였지만, 끝내 간행되지 못하다가 1984년에 이르러 김택술의 아들 金炯觀이 亞細亞文化社를 통해 「田愚全集」으로 影印하였다. 이 影印本에는 위의 29책 이외에 拾遺 4권과 年譜가 추가되었는데, 습유는 1940년에 김택술이 화도수정본에서 누락된 글과 刪削된 글을 모아 編次한 것이고, 연보 또한 김택술이 편찬한 것이다.
1925년 10월에는 吳震泳, 權純命, 柳永善, 崔愿, 金楨鎬, 任坎宰, 河裕植, 鄭衡圭, 趙瀚奎, 田璣鎭 등이 晉州에 모여 刊行을 결의하고 晉陽印刷所에 刊所를 설치하였다. 김정호가 掌財를 맡고 최원이 작업을 主幹하여, 1926년 10월에 鉛活字를 사용하여 인쇄를 완료하니, 이것이 바로 原編 43권, 續編 16권 합 30책의 「艮齋私稿」로서, 간재 문집의 初刊本이다.《晉州本》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동곡古3648-문67-8, 의산古3648-문67-5),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416),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14) 등에 소장되어 있고, 「추담별집」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경화당D1-B5),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1049) 등에 소장되어 있다. 진주본을 화도수정본과 비교해 보면, 대체로 화도수정본 前編의 글은 진주본의 原編에 수록되어 있고, 화도수정본 前編續의 글은 續編에 수록되어 있으며, 화도수정본의 後編과 再後編에 수록되어 있는 글은 중요도에 따라 진주본의 原編과 續編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다. 이를 다시 아래의 龍洞本과 비교해 보면, 용동본의 前編과 後編에 수록된 글은 진주본에는 대부분 原編에 수록되어 있고, 용동본의 前編續과 後編續에 수록된 글은 진주본에는 대부분 續編에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진주본과 용동본의 底本이 동일한 계통상의 稿本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1922년 10월 淸道에서 처음 문집의 간행이 시도되어 稿本의 再編과 校正이 이루어질 때, 저작 시기를 기준으로 나뉘어 있던 後編과 再後編의 글이 합쳐져서, 중요도에 따라 再編된 것이 용동본의 底本이 되었고, 이것이 다시 原編과 續編으로 再編된 본이 진주본의 저본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926년 인행된 진주본과는 별도로 1929년 7월에는 오진영이 時諱에 저촉되어 原集과 續編에 수록하지 못했던 글을 4권 2책으로 편차하여 ‘秋潭別集’이라 이름 짓고, 南信夏를 上海에 보내 연활자로 간행하도록 한 뒤에, 몰래 國內로 반입하여 유포하였다. 「秋潭別集」에는 화도수정본이나 용동본의 別編보다 많은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日帝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排日에 관련된 글은 모두 빼 두었다가, 별편에 수록되어 있던 글과 합쳐 「추담별집」으로 간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주본에는 私箚가 없는데, 사차에 있던 〈與申仰汝〉와 〈守玄齋偶記〉는 原編에 수록되었고, 〈自西徂東辨〉과 〈梁集諸說辨〉은 「추담별집」에 수록되었다. 1984년에 保景文化社에서는 진주본을 저본으로 하여 「艮齋先生全集」을 影印하였는데, 「秋潭別集」, 「艮齋禮說」, 「艮齋尺牘」과 附錄(年譜, 家狀, 觀善錄 등)을 추가로 수록하였다.
한편 1925년 겨울에는 저자의 문인이자 孫婿인 李仁榘가 저자의 長孫 田鎰孝와 함께 論山 龍洞에 있는 鳳陽精舍에 刊所를 설치하고, 淸道의 梁基韶 집에 보관되어 있던 별도의 稿本을 가져다 1926년 봄부터 독자적으로 문집의 간행에 착수하였다. 宋毅燮과 李相珪, 李光珪 등이 刊役에 참여하였고, 平安道 朔州에서 木材를 실어 왔으며, 서울과 嶺南의 刻手 7, 8명이 투입되어 1927년경 木板으로 간행을 완료하였다. 卷首題는 「艮齋先生文集」이고, 前編 17권, 前編續 6권, 後編 22권, 後編續 7권, 別編, 私箚 합 52책이다.《龍洞本》 현재 이 본은 국립중앙도서관(한44-가25),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98/전우/간-목), 李仁榘의 曾孫 李炳天 家에 소장되어 있다. 용동본을 화도수정본과 비교해 보면, 前編과 前編續은 分卷에 따른 卷數의 차이가 있을 뿐 내용과 편차는 거의 동일하다. 다만 화도수정본에서 前編 권19~20으로 편차되어 있는 私箚를 용동본에서는 前編에서 분리하여 卷次를 붙이지 않고 별도로 편차하였다. 용동본의 後編과 後編續은 전체적인 내용상으로는 화도수정본의 後編과 再後編과 거의 동일하지만, 화도본의 後編과 再後編이 단순히 시기(1921년 6월)를 기준으로 편차된 것임에 비하여, 용동본의 後編과 後編續은 내용의 중요도에 따라 再編된 것이다. 別編의 경우에는 화도수정본이 2권으로 되어 있는 반면, 용동본은 卷次가 나누어져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보면 용동본은 화도수정본과 편차와 내용이 거의 동일하지만, 간혹 화도수정본에는 別編이나 拾遺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 용동본에는 前編續 및 後編, 後編續 등에 수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장본과 연세대학교장본은 日帝의 檢閱을 피하기 위해 排日에 관련된 내용이 삭제된 채 간행된 본이다. 두 본 간에도 삭제된 부분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아마도 印刷나 頒帙할 때의 상황에 따라 삭제의 정도가 조절된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이병천 소장본은 간행을 주관했던 이인구의 집에 秘藏되어 전해지던 본으로서, 삭제된 부분이 없고, 다른 두 본에는 누락된 別編까지 포함하고 있는 完帙이다. 충남대학교 도서관에서는 1999년에 이병천 소장본을 「艮齋先生文集」이라는 이름으로 영인하였는데, 柳永善이 편찬한 年譜와 문인들이 지은 祭文을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현재 대전대학교 박물관에는 용동본 板木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927년경 論山 龍洞의 鳳陽精舍에서 간행된 목판본으로서 前編, 前編續, 後編, 後編續, 私箚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고, 別編은 李炳天씨 소장본이다. 본 영인 저본 중 前編 권1의 제23ㆍ24ㆍ38판, 권8의 제7판, 권11의 제5ㆍ6판, 권15의 제47판, 권16의 제58판, 권17의 제7ㆍ12판, 後編 권9의 제23판, 권18의 제22ㆍ39ㆍ40ㆍ42ㆍ52ㆍ54ㆍ55ㆍ56판, 後編續 권2의 제38판은 日帝의 檢閱로 인하여 내용의 일부 또는 전부가 삭제되어 있으므로 同一本인 이병천씨 소장본으로 대체하였다. 그리고 前編 권3의 제81판과 제82판이 錯簡되어 있어 이를 바로잡았고, 後編 권7의 제95판은 落張이므로 이병천씨 소장본으로 보충하였다. 이외에 前編 권6의 제83판은 卷次가 ‘五’로 後編續 권1의 제33판은 板次가 ‘五十三’으로 誤記되어 있고, 後編 권7의 제79~91판은 모든 板次가 誤記되어 있으며, 前編續 권4는 판차 ‘七十六’이 누락되어 있다.
기사전거 : 自序, 年譜(金澤述 編, 田愚全集), 年譜(柳永善ㆍ權純命 編, 艮齋先生全集), 吳震泳年譜(石農年譜), 權純命年譜(陽齋年譜), 柳永善年譜(玄谷年譜), 成璣運年譜(悳泉年譜), 後滄集(金澤述), 欽齋集(崔秉心), 務實齋私稿(南軫永), 春溪集(宋毅燮), 儒學近百年ㆍ續儒學近百年(琴章泰) 등에 의함
저본의 구성과 내용
본집은 前編 17권, 前編續 6권, 後編 22권, 後編續 7권, 別編, 私箚 합 5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序는 없고, 1913년 門人 宋炳華가 저자의 부탁을 받고 ‘前稿’를 校正한 후 지은 跋이 前編續의 뒤에 수록되어 있다. 각 編마다 總目이 있고, 다시 卷별로 目錄이 있다.
前編 권1~11은 書 1,109편이다. 권1은 全齋 任憲晦, 肅齋 趙秉悳, 苟菴 申應朝 등 스승과 선배 17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임헌회에게 올리는 편지는 氣質, 心性, 中正, 仁義 등 성리학의 명제에 대해 질정한 내용이 많고, 1893년에 신응조에게 올린 편지는 異端을 朝廷이 막지 못하면 儒者라도 나서서 口說과 文墨으로라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권2에는 宋秉珣, 金平默, 柳重敎 등 16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06년에 송병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송병순의 형인 淵齋 宋秉璿의 殉國을 위로하고 아울러 儒者로서의 處義를 면려하였고, 1876년에 김평묵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孤子가 出後하는 일, 長子를 위해 입는 服制 등에 대해 논하였다. 권3은 宋炳華, 吳正根, 王性淳 등 47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1년에 송병화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韓日合邦 때에 순국한 烈士들을 찬양한 뒤에 자신의 처신에 대해 언급하였고, 이어 ‘陽下尫人’이라고 自號를 지은 사연을 설명하였다. 1899년에 오정근에게 답하는 편지는 吳熙常의 「老洲集」 全帙을 보내 준 것에 감사하는 내용이고, 1903년에 왕성순에게 답하는 편지는 處世와 應變에 대한 질문에 답한 것으로서, 저자의 處世觀이 잘 드러난 글이다. 권4는 李聖烈, 林炳郁, 任震宰 등 60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896년에 이성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賢者가 세상을 피해 사는 것은 세상을 외면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고, 같은 해에 임병욱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國母의 服制에 대해 논하였다. 권5는 徐政淳, 沈宜允, 趙章夏 등 26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877년에 서정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省齋 柳重敎의 本心說을 비판하였고, 같은 해에 심의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華西雅言」에 수록된 心性說의 誤謬에 대해 논하였다. 권6은 金駿榮, 崔命喜, 安晦植 등 44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06년에 김준영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宋時烈의 長子服制說과 翼宗에 대한 純祖의 服制에 대해 언급하였고, 1894년에 최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지난달 掌令의 除授에 대한 자신의 出處를 설명하고, 鳳峀 金炳昌의 出處에 대해 알아보고 전해 달라고 하였다. 권7은 李鐸謨, 金思禹, 沈能浹 등 29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0년에 이탁모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性情이 모두 心이라고 한 寒洲 李震相의 학설을 辨破하였고, 1892년에 김사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家狀, 行狀과 같은 狀德文字에 經義와 禮說 등을 雜多하게 기록하는 풍조에 대해 비판하였다. 권8은 李喜璡, 宋毅燮, 尹澮榮 등 67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1년에 이희진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近齋 朴胤源의 危微非病說에 대하여 논하였고, 1896년에 윤회영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毅菴 柳麟錫에 대해 논하면서 그의 행동이 지나친 점은 있었지만, 그를 ‘匪類’라고 비난한다면 비난하는 사람이 도리어 義理를 모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권9는 吳震泳, 李起煥, 林炳志 등 61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08년에 오진영과 子孫, 諸生에게 주는 편지에서는 梁啓超의 思想을 비판하면서, 지금의 新學問이 여기서 나왔다면 자신의 頑固함을 지킬지언정 開明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하였고, 1896년에 이기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變服을 하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을 倭奴로 규정하고, 儒者의 本分을 목숨을 걸고 지킬 것임을 말하였다. 권10은 崔秉心, 房煥永, 李炳殷 등 109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2년에 최병심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倭가 주는 이른바 ‘恩賜金’과 爵位를 거리낌 없이 받는 人事들의 작태를 개탄하였고, 1906년에 이병은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천하의 혼란이 극에 달한 지금과 같은 때에는 爲善의 方便으로 常道를 지키면서 天道가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권11은 成璣運, 從兄 田憙, 長男 田晦九 등 60여 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2년에 성기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六經에서 언급한 性善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며, 心을 性으로 오인하여 異端에 빠져서는 안 됨을 말하였고, 1890년에 전회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肉身의 죽음보다 절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권12~15는 雜著 140편이다. 辨, 說, 論, 記疑, 問答, 雜識 등 저자의 思想을 살필 수 있는 다양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㤓言〉은 心性ㆍ理氣ㆍ出處ㆍ禮義 등에 대한 斷想을 여러 해에 걸쳐 기록하여 1906년에 완성한 글로서, 別編에도 1條가 수록되어 있다. 〈猥筆辨〉은 蘆沙 奇正鎭이 〈猥筆〉을 지어 栗谷 李珥의 학설을 비판하자 이를 반박하기 위해 1902년에 지은 글이고, 같은 해에 지은 〈心說正案辨〉은 省齋 柳重敎가 그의 스승인 華西 李恒老의 心說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調律하여 지은 〈心說正案〉을 條目別로 辨破한 글이다. 〈靜中有物說〉은 ‘靜中有物’에 대한 程子와 朱子의 학설을 佛家의 知覺說과 비교하여 설명한 세 편의 글로서, 앞의 두 편은 1892년에, 나머지는 1893년에 지은 것이다. 〈衣制問〉은 조정에서 靑衣를 입으라는 명령이 外勢의 압력에 의한 것이므로 따를 수 없음을 밝힌 글로서 1896년에 지은 것이고, 〈栗尤宗旨〉는 이기와 심성에 대한 李珥와 宋時烈의 학설을 인용하여 기정진과 이항로의 주장을 반박한 짧은 글로서 1903년에 지은 것이다.
권16은 序 23편, 記 21편, 題跋 32편, 銘 16편, 贊 1편, 告祝 7편이다. 序로는 李穡의 「牧隱集」, 李夏源의 「藕裳集」, 金鍾順의 「直軒遺稿」, 金駿榮의 「炳菴集」, 林奭榮의 私稿 등 문집에 대한 序文과 임헌회의 명을 받아 靜菴 趙光祖, 退溪 李滉, 栗谷 李珥, 沙溪 金長生, 尤菴 宋時烈의 글을 모아 편차한 「五賢粹言」에 쓴 서문 등이 있다. 記로는 朴斗元과 任泰春의 旌閭記, 張錫軫의 서재에 써 준 〈常齋記〉, 趙章夏의 書齋에 써 준 〈履齋記〉 등이 있다. 題跋로는 崔致遠이 眞鑑碑序와 智證碑銘을 지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를 文廟에 配享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견해를 밝힌 〈跋眞鑑智證二碑〉, 임진왜란 때의 節臣 宋象賢의 문집에 쓴 〈泉谷集跋〉, 門人 金駿榮이 柳重敎의 「省齋集」 가운데 저자를 비방한 부분을 변론하기 위해 지은 〈柳集辨〉에 대해 쓴 〈題柳集辨〉 등이 있다. 銘 가운데 〈松笄銘〉은 太祖 李成桂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咸興의 소나무로 만든 비녀에 대해 지은 것이고, 〈四銘〉은 四勿箴을 일상생활에 적용하여 익히기 쉽도록 부연하여 지은 것이다. 贊으로는 老柏書堂의 섬돌 곁에 있는 石人의 엄숙한 氣象을 찬양한 〈石丈贊〉이 있고, 祝文으로는 孔子와 朱子의 肖像에 고한 글, 先師 任憲晦의 墓에 고한 글, 先考妣의 墓를 移葬할 때 올린 글 등이 있다.
권17은 祭文 19편, 上樑文 1편, 神道碑銘 2편, 碑 1편, 墓表陰記 4편, 墓誌銘 2편, 諡狀 1편, 行狀 5편, 詩 49제이다. 제문은 任憲晦, 申應朝, 李象秀, 金炳昌, 崔益鉉 등에 대한 것이고, 상량문은 井邑의 瀛洲精舍에 대해 지은 것이다. 신도비명은 鮮于浹과 任憲晦에 대한 것이고, 碑는 저자의 선조인 埜隱 田祿生, 耒隱 田貴生, 耕隱 田祖生의 事蹟을 기록한 〈三隱先生遺墟碑〉이다. 묘표음기는 저자의 12世祖 田洽, 11世祖 田萬福, 10世祖 田鶴齡, 9世祖 田允亮에 대한 것이고, 묘지명은 저자 자신과 長子 田晦九에 대한 것이다. 시장은 任徵夏에 대한 것이고, 행장은 先考 田在聖, 先妣 南原梁氏, 亡室 密陽朴氏, 從兄 田慶俊의 妻 李氏, 東洲 成悌元에 대한 것이다. 詩는 1872년부터 1910년대 초반에 지은 것을 연도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따라서 1891년과 1910년 사이에 수록된 〈雪中〉의 脚註에 ‘丙子’(1876년)로 표기된 것은 아마 ‘庚子’(1900년)의 誤字일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 유학자의 문집에는 시가 많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이 문집도 예외가 아니다. 1872년에 지은 〈催菊〉과 〈代菊答〉은 菊花가 피기를 기다리는 저자의 마음을 먼저 표현하고, 이에 대한 국화의 답을 저자가 대신하여 지은 시이다. 〈次華西鼓風板韻〉은 華西 李恒老가 心을 理로 본 견해를 비판하면서 지은 시이고, 〈憶亡子〉는 죽은 아들 田晦九를 그리며 손자 田鎰孝, 田鎰悌에게 부친 시이다.
前編續 권1~3은 書 319편, 雜著 14편이다. 권1은 任憲晦, 金炳昌, 田秉淳 등 86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01년에 김병창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資治通鑑綱目」이 朱子가 미처 修補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주자의 저술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고, 1890년에 전병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三隱 先祖의 合稿를 간행하면서 그 後孫들의 事蹟을 編入시켜서는 안 됨을 말하였다. 권2는 崔命喜, 徐柄甲, 林章佑 등 86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887년에 서병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새로 門下에 들어 온 金駿榮과 沈能浹의 學究熱에 대하여 칭찬하였고, 1896년에 임장우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학문이란 바로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라고 하였다. 권3은 崔秉心, 敬淳上人, 아들 田華九 등 61인에게 보낸 편지와 說, 論, 疑義, 記疑 등 雜著이다. 1903년에 최병심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太極, 動靜과 관련하여 ‘機自爾’의 ‘機’ 字가 지칭하는 것에 대해 논하였고, 경순상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佛家와 儒家에서 지칭하는 ‘性’의 의미는 근본부터 다른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잡저 가운데 1901년에 지은 〈心本性說〉은 모든 일은 먼저 理致가 있고 난 뒤에 그 이치를 바탕으로 마음을 발휘하여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고, 〈論民擾〉는 1901년에 參判 趙漢國이 來訪하여 盜賊의 橫行에 대한 對策을 물은 것을 계기로 지은 것으로서, 백성을 안정시킬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것을 논하는 글이다.
권4는 雜著 48편, 序 31편이다. 잡저 가운데 〈觀金監役節義說〉은 「昭儀新編」에 수록된 金平默의 節義說에 任憲晦와 그 문인들을 조롱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 지은 글이고, 〈星田執燭錄〉과 〈執燭別錄〉은 1876년 임헌회가 죽기 직전에 身後의 일에 대해 저자에게 당부한 것을 기록한 글이다. 序에는 文集과 族譜에 대한 序를 비롯하여 送序, 贈序 등이 있다. 文集序로는 河憕의 「滄洲集」, 李星益의 「龜菴集」, 鄭在弼의 「薇齋集」, 金在羲의 「東谷文稿」, 金成吉의 「麥老遺稿」, 金愼德의 「遜菴遺稿」, 申宅周의 「後松文稿」, 田慶源의 「松梧遺稿」, 宋顯道의 「芹邨遺稿」 등에 쓴 것이 있고, 送序로는 蔡龍臣, 田熙舜, 崔觀鉉, 黃光漢, 安晦植 등에게 지어 준 것이 있다.
권5는 記 27편, 題跋 48편, 銘 10편, 贊 3편, 字辭 1편, 昏書 4편, 祭文 7편, 墓表 8편이다. 記로는 孝子 李峽, 金昕의 妻 烈女 金氏, 李永哲의 처 烈女 陳氏 등의 旌閭와 礱巖 金宅三의 遺墟, 潭陽鞠氏의 墓齋인 慕華齋, 樂安吳氏의 墓齋인 鳳棲齋 등에 쓴 것이 있다. 題跋은 遺事, 行錄, 家狀 등에 題한 것이 많고, 이외에 文集과 書冊 등에 쓴 것이 있다. 이 가운데 〈跋皇明遺韻〉은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잡혀갔다가 중국으로 탈출한 우리나라의 文臣 魯認이 중국의 文人들에게 받은 詩와 序를 모은 書帖에 쓴 것이다. 銘 가운데 〈雜銘〉은 부모님이 평소 쓰시던 佩刀, 鍮簪, 木梳, 梳刷, 革瓢 등의 물건들에 대해 명을 지어 思慕의 정을 표현한 글이고, 贊은 金致明, 金禮喜와 金鎭宇의 妻 宜寧南氏에 대한 것이다. 字辭는 李用庠에게 지어 준 것이고, 昏書는 仲子 田華九, 孫子 田鎰悌ㆍ田鎰健, 長孫女 李氏婦를 위해 지은 것이다. 祭文은 任憲晦, 尹孝演, 魯永東, 아들 田晦九 등에 대한 것이고, 墓表는 延井渫, 朴載緯, 宋基仁, 金鍾順 등에 대한 것이다.
권6은 墓碣銘 10편, 墓誌銘 8편, 行狀 10편, 行錄 4편, 傳 14편, 詩 42제이다. 墓碣銘은 李時益, 劉暹, 任弘亮, 金復元 등에 대한 것이고, 墓誌銘은 房應賢, 金在赫, 吳致性, 沈琦澤 등에 대한 것이고, 行狀은 洪理禹, 尹致中, 徐一源, 金旻煥 등에 대한 것이다. 行錄 가운데 〈仲子婦金氏行錄〉은 次子 田華九의 妻 安東金氏에 대한 것이고, 〈殤女娩貞行錄〉은 19세로 夭折한 딸 田娩貞에 대한 것이다. 傳으로는 孝子 權萬齊ㆍ金致奉과 의로운 商人 李養植, 衙前 出身으로서 학문에 뛰어났던 李敦在 등에 대한 것이 있다. 시는 1880년부터 1905년까지의 시가 문체나 시기에 관련 없이 혼재되어 있고, 내용은 대체로 학문에 관련된 것이 많다. 〈贈崔亨植四十八字〉는 理氣의 역할과 學問의 차례를 읊은 것이고, 〈有感〉은 奉處中의 孝誠을 읊은 것인데, 모두 6言詩이다.
권말에 1913년 門人 宋炳華가 쓴 跋이 있다.
後編 권1~12는 書 1,796편, 雜著 54편이다. 권1은 金鶴洙, 宋炳華, 金在敬 등 65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3년에 김학수에게 답한 편지는 金在範의 「梅山集」을 刪定하고 그 序文을 써 달라는 부탁을 승낙하는 내용이고, 같은 해에 송병화에게 보낸 편지는 자손과 문인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誌狀을 짓지 말라고 하였으니, 훗날 지장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더라도 거절하라는 내용이다. 권2는 鄭承鉉, 姜震馨, 任坎宰 등 108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5년에 정승현에게 답한 편지는 海島에 들어온 이후 10년 동안 墓文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모두 거절하였다고 하면서 정승현이 부탁한 묘문을 거절하는 내용이고, 1913년에 임감재에게 보낸 편지는 지난날 柳相浚이 임헌회의 「鼓山集」을 몰래 刊行하려다 物議를 일으켰던 일의 顚末과 이 일에 대한 자신의 對處가 정당했음을 밝힌 글이다. 권3은 田相武, 徐柄甲, 李喜璡 등 77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22년에 전상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이 派譜를 編修하게 된다면 斷髮과 變服을 받아들인 宗人을 譜牒에 수록하지 않겠다고 하였고, 1916년에 서병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志山 金福漢의 乙巳討賊疏를 읽은 감회를 전하고 있다. 권4는 宋毅燮, 魚在源, 吳震泳 등 46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04년에 송의섭에게 주는 편지에서는 ‘性師心弟’의 의미에 대해 논하였고, 1919년에 오진영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康有爲가 지은 「中庸」과 「孟子」의 改注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의 학문이 紀昀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하였다. 권5는 金炳周, 高在鵬, 李澤寧 등 86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20년에 김병주에게 보낸 편지는 先帝를 원수로 삼고 孔子를 해치는 자들을 誅討해야 한다는 내용이고, 1921년에 이택녕에게 보낸 편지는 三綱을 窮理實踐함으로써 굳게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권6은 金炳玹, 成璣運, 李鍾欞 등 91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6년에 성기운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存心養性의 방법에 대해 논하였고, 1914년에 이종령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學問의 要諦는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권7은 韓恒, 鄭海潤, 徐鎭英 등 119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2년에 한항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性尊心卑’의 說에 대해 논하였고, 1919년에 정해윤과 韓晉澤에게 답한 편지에서 性은 理이고 心은 氣라는 것은 孔子 이래 전해 온 宗旨라고 하였다. 권8은 田璣鎭, 權純命, 李徽在 등 97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3년 전기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중용」의 ‘天命之性’과 「대학」의 ‘天命之德’의 차이에 대해 논하였고, 1917년에 권순명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氣質之性’에 대해 논하였다. 권9는 柳永善, 朴基春, 崔艮 등 109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3년에 유영선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華西學派가 栗谷과 尤菴에 근본하면서도 心을 性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였고, 朴基春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배움에 있어서 극복해야 할 네 가지로 氣質의 偏僻, 習慣의 害毒, 物慾의 얽매임, 他人과 나 사이의 사사로운 마음을 꼽았다. 권10은 金龜洛, 文泰益, 金建植 등 137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5년에 김귀락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지금과 같이 어려운 시기에는 剛毅한 자만이 禮義를 지킬 수 있는데, 剛毅하기 위해서는 經傳을 窮究하여 心術을 밝히고 誠을 爲主로 하여 거짓과 끊어야 한다고 하였고, 1918년에 문태익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性이 心의 主宰라는 것을 모른다면 頭緖없는 공부일 뿐이라고 하였다. 권11은 金璡植, 盧海文, 金琪煥 등 90여 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21년에 김진식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九容이 心身을 檢束하는 데 가장 절실한 것이라고 하였고, 1917년에 김기환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공경할 줄 알아야 임금과 부모를 소중히 여기고 공경할 수 있다고 하였다. 권12는 아들과 손자, 증손자에게 보낸 편지와 잡저 54편이다. 1915년에 田華九에게 부친 편지에서는 財産은 남겨 줄 것이 없고, 모아 둔 藏書를 열심히 읽고 실천하여 집안을 일으킬 것을 당부하였다. 잡저는 주로 자손들과 문인들을 면려하면서 준 글과 辨, 疑義, 問目, 或問 등이다. 이 가운데 1916년에 지은 〈示兒輩〉는 退溪, 栗谷, 沙溪, 尤菴, 農巖 등의 先賢을 하늘처럼 존숭하고 믿으라고 당부한 글이고, 1920년 4월에 지은 〈示諸生〉은 先聖을 모욕한 朴泳孝를 聲討하는 글이다.
권13~17은 雜著 71편이다. 권13에는 경전이나 타인의 문집을 읽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것이 많고, 권14 이후는 주로 성리설에 대한 논설이 많다. 이 가운데 〈兩家心性尊卑說〉은 ‘性尊心卑’와 ‘心尊性卑’의 차이를 설명한 글이고, 〈論嘉金祭梅山先生文〉은 金平默이 梅山 洪直弼의 門人으로 자처하면서도 홍직필에게 올린 祭文에 譏弄하는 뜻이 있음을 밝힌 글이며, 〈觀洪在龜所撰其師行狀〉은 임헌회에 대해, 김평묵이 ‘松栢荷蕙’라고 譏弄한 것과 김평묵의 문인 洪在龜가 ‘倭洋血黨’이라고 비난한 사실을 기록한 글이다. 〈心疑似〉 上中下 3편은 佛家와 陽明學, 寒洲 李震相의 心說을 비판한 글이고, 〈海上散筆〉은 1914년에 쓴 것으로서, 이진상의 心理說을 辨破하는 내용이 많다. 〈海屋病語〉는 鄭世永과 李喜璡이 性理가 氣質에 따라서 다르게 稟賦된다는 說을 주장하자 그것을 辨破하기 위해 1915년에 지은 글이다.
권18은 序 17편, 記 5편, 題跋 26편, 銘 17편, 箴 1편, 贊 8편, 告祝 2편, 祭文 20편, 神道碑銘 2편, 碑 3편, 墓誌 2편, 行狀 1편, 傳 2편, 詩 52제이다. 序로는 李齊賢의 「益齋集」, 成三問의 「梅竹軒集」, 李甫欽의 實記, 蘇世良의 「困菴集」, 洪錫의 「遜愚集」, 金時瑞의 「自然堂遺稿」, 金在範의 「梅山集」, 徐贊奎의 「臨齋集」, 田秉淳의 「扶溪集」, 沈奎澤의 「西湖集」, 尹致中의 「篤守齋集」, 金萬壽의 「景山集」, 宋炳華의 「蘭谷集」, 韓愉의 「愚山集」을 비롯하여 저자 자신의 私稿에 쓴 것과 趙弘淳, 金秉燮 등에게 지어 준 送序 등이 있다. 記는 瀛陽祠, 孝子 趙宗榮의 旌閭, 景慕齋, 竹林精舍, 宜寧縣의 興學堂에 대해 쓴 것이다. 題跋은 「畜德錄」, 「顔氏家訓」, 鄭載圭의 〈猥筆辨辨〉, 金冲漢의 實記, 鄭汝昌의 「一蠹集」 續集, 蘇世讓의 「陽谷集」 등에 쓴 것이다. 銘 가운데 〈鬯涵二室合銘〉은 金光彦의 書室인 鬯菴과 涵齋에 지어 준 것이고, 〈靑藜杖銘〉은 宋祺日이 보내 준 지팡이에 대해 지은 것이고, 〈四六精舍銘〉은 金演穆이 同志들과 江陵에 세운 學舍에 지어 준 것이다. 〈九容箴〉은 足, 手, 目, 口, 聲, 頭, 氣, 立, 色의 아홉 가지에 있어서 君子가 지녀야할 자세를 주제로 지은 것이다. 贊은 宋寅, 金忠善, 金應河, 李述原, 朴奎燦, 李聖烈, 金光國, 黃熙根 등에 대해 지은 것이고, 告祝은 闕里祠에 聖賢의 影幀을 다시 봉안할 때와 正祭를 오랫동안 올리지 못하다가 다시 올렸을 때 지은 것이다. 이외에 金鶴洙, 宋炳華, 李聖烈, 金頤壽 등에 대한 祭文, 竹川 朴光前과 西齋 任徵夏의 神道碑銘, 止浦 金坵의 遺墟碑陰記, 先考 田在聖과 아들 田敬九의 壙誌, 金駿榮의 行狀, 李有白과 李益洙 妻 鄭氏의 傳 등이 있다. 詩는 1916년부터 1922년 사이에 지은 것이 뒤섞여 있는데, 卒하기 바로 전인 1922년 6월에 지은 시가 많다. 〈簡同志〉는 李珥와 宋時烈을 추숭하는 내용의 시로서, 이이를 ‘海東孔子’로, 송시열을 ‘海東朱子’로 표현하였다. 〈宮娥詞〉는 몸은 쇠하였지만 절개를 변치 않는 몰락한 王朝의 늙은 宮女를 읊은 시이다.
권19는 大學記疑, 권20은 中庸記疑, 권21~22는 朱子大全標疑이다.
後續編 권1~4는 書 843편이다. 권1은 李柄逵, 朴泰璿, 居昌愼氏門中 등 146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22년에 박태선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逸話를 인용하여 어른을 봉양하는 올바른 자세에 대해 일깨웠고, 1921년에 거창신씨 문중에 답한 편지에서는 「一蠹集」에 잘못 수록된 ‘補說’의 처리에 대해 조언하였다. 권2는 安鼎鎬, 崔命喜, 李丙默 등 120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4년에 최명희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梅泉 黃玹의 동생 黃瑗이 「梅泉集」과 함께 편지를 보내어 저자가 황현의 殉節을 듣고 지었다는 詩文의 眞僞를 물었다고 하였고, 이병묵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身分이 낮은 여자와 혼인을 한 族人을 族譜에서 삭제하고 門中에서 放黜하는 것은 人情으로나 이치로나 옳지 않다고 하였다. 권3은 成璣運, 文濟衆, 崔秉祖 등 174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20년에 성기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현재 學問의 疲弊함을 근심하면서 禮義를 功利로 삼고 性善을 스승으로 삼아 邪說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하였고, 같은 해에 문제중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金平默과 柳重敎의 心說에 대해 崔益鉉의 年譜에는 두 사람이 끝내 합치되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김평묵의 글에서는 마침내 합의되었다고 하여 서로 상반되는데, 어떤 것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권4는 李昌煥, 朴相燮, 邊恒植 등 205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1916년에 이창환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理氣說을 공부하면서 朱子의 註를 熟讀하지 않고 임의대로 천착하고 억측한 것을 꾸짖었고, 1922년에 박상환과 文炳燮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梁啓超의 학문이 康有爲의 ‘三綱平等說’을 근거로 하여 尊卑의 秩序가 없으므로 이것에 현혹되지 말고 綱常을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권5~6은 雜著 171편, 序 21편, 記 12편, 題跋 84편이다. 잡저는 주로 문인들에게 학문을 면려하는 내용으로 지어 준 글과 辨, 疑, 疑義, 說, 論 등이다. 잡저 가운데 1911년에 쓴 〈告諸子孫兼示諸君〉과 1913년에 쓴 〈示子孫門人〉, 1920년에 쓴 〈告門人兼示子孫〉은 日帝의 許可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문집을 간행하지 말 것과 遺稿를 함부로 添削하지 말 것 등을 자손과 문인에게 당부하는 글이다. 1920년에 지은 〈曺兢燮答韓氏書辨〉은 高宗이 이미 廢位된 상황에서 옛 임금을 위해 服을 입을 수 없다는 曺兢燮의 주장을 반박한 글이다. 序로는 徐再謙의 「竹溪逸稿」, 洪南玄의 「華谷集」, 房元井과 그 자손들의 「房氏三世合稿」, 房錫弼의 「直齋遺稿」, 許萬璞의 「蒼崖集」 등에 대한 文集序, 楚基演, 吳孔烈, 金允煥 등에게 지어 준 贈序, 崔燉膺, 成寶運 등에게 지어 준 送序 등이 있다. 記는 孝子 田漢老의 旌閭, 礪山宋氏의 墓閣인 永護齋, 鄭海直의 書室인 茅堂, 張宗勳의 書社인 務實齋 등에 대해 지은 것이다. 題跋은 書札, 懇篤, 筆跡, 文集, 行狀, 家狀, 行錄 등 다양한 종류의 글과 책에 대해 지은 글인데, 문집에 대한 것으로는 沈相直의 「竹西遺稿」, 韓岑範의 「小松遺稿」, 張錫軫의 「常齋遺稿」, 柳鍾源의 「敬勝齋遺稿」, 李秉珪의 「樂吾遺集」 등에 쓴 것이 있다.
권7은 銘 18편, 頌 1편, 箴 3편, 贊 6편, 字辭 5편, 告祝 4편, 祭文 8편, 神道碑銘 1편, 碑 1편, 墓銘 5편, 墓表 1편, 語錄 1편, 詩 60제이다. 銘은 주로 문인들의 書齋를 두고 지은 것이 많은데, 金容益에게 지어 준 〈懶齋集〉, 都虞模에게 지어 준 〈務精齋銘〉, 鄭斗鉉에게 지어 준 〈敬愼銘〉 등이 있다. 〈李氏槐頌〉은 후손에게 경사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징조를 보인다는 延安李氏 집안의 오래된 홰나무를 두고 지은 것이다. 〈友石箴〉은 立石에 사는 金錫奎가 ‘友石’으로 自號를 짓자 勉勵의 뜻을 담아 지어 준 글이다. 贊은 朴重賢, 朴漢弘, 李思永ㆍ李思昌 형제의 孝行과 田在悅, 金洛弼의 德行, 田熙舜의 妻 金氏의 貞節을 기린 글이다.
字辭는 柳永善, 魚命徹, 李焞, 曾孫女 田貞順에게 지어 준 것이다. 告祝 가운데 〈告梅竹軒成先生祀板〉은 成三問의 祀板을 外孫家에서 族孫 成周英의 집으로 옮길 때 대신 지어 준 것이고, 1877년에 지은 〈告先師墓文〉은 金平默이 任憲晦에게 올린 祭文에 譏弄하는 뜻이 있음을 알고서 任憲晦의 靈前에 그 사실을 告한 글이다. 祭文은 任公熺, 李啓禹, 金憙述, 徐承模 등에 대한 것이고, 신도비명은 烟村 崔德之에 대한 것이다. 碑는 宋復의 墓碑이고, 墓銘은 柳志聖, 鄭寧朝, 金秉義 등에 대한 것이다. 묘표는 安敬智에 대한 것이고, 語錄은 1866년과 1867년, 1872년에 임헌회에게 수학할 때 기록한 것이다. 시는 1917년부터 1922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서, 景物을 읊은 시는 거의 없고, 感懷를 읊거나 문인들에게 지어 준 시가 많다. 이 중 〈鼕鼕曲〉은 栗谷, 尤菴의 학설과 다른 주장을 하는 무리들을 宣祖 연간에 선비들을 모아 放達한 행동을 일삼으며 동동곡을 지어 불렀던 柳克信에 비유한 시이다.
別編은 疏 3편, 書 40편, 雜著 11편, 記 1편, 題跋 1편, 銘 1편, 贊 1편, 告祝 1편, 祭文 2편, 詩 16제이다. 〈因變亂疏〉는 1905년에 乙巳勒約의 소식을 듣고 ‘五賊臣’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이고 〈再疏〉는 앞서의 상소가 시행되지 않자 다시 올린 것이다. 書는 李象秀, 崔益鉉, 任喆常 등 28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1881년에 이상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言路를 열어 外勢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을 세울 것, 倭人들이 국내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國政의 虛實을 탐지하지 못하게 할 것 등을 건의하였고, 1906년에 최익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洪州에서 擧義했다는 소식을 듣고 慰勉하는 내용이다. 雜著 가운데 1903년에 지은 〈華夷鑑〉은 中華와 夷狄의 구분은 禮의 有無에 있음을 論한 글이고, 〈時義〉는 자신이 夷狄을 피해 섬으로 들어가 사는 정당성을 피력한 뒤에, 외부의 상황에 따른 자신의 대처를 밝힌 글이다. 1901년에 지은 〈飛飛亭移建記〉는 任實의 桂月村에 옮겨 세우는 飛飛亭에 대한 것이고, 1905년에 지은 〈題泰安忠節錄〉은 1894년 東學徒가 泰安을 함락했을 때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에 쓴 것이다. 〈時義銘〉은 時事를 듣고서 臥薪嘗膽하여 倭賊을 물리치고, 그들의 服制와 斷髮을 따르지 말 것을 자손과 문인에게 당부하는 글이고, 〈女範二賢婦贊〉은 「女範捷錄」에 수록되어 있는 蓋나라의 丘將婦와 魯나라의 義母의 故事에 감명을 받고 지은 것이다. 〈國變進疏告家廟文〉은 1905년에 ‘乙巳五賊’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家廟에 고한 글이고, 祭文은 洪疇厚와 沈能浹에 대한 것이다. 詩는 海上記聞으로서, 韓日合邦의 소식을 듣고 殉節한 분들을 기리며 지은 것이다.
私箚는 書 2편, 記 1편, 辨 2편이다. 書는 모두 1878년과 1879년에 申斗善에게 보낸 것인데, 金平默이 지은 任憲晦에 대한 祭文에 대해 신두선이 처음에는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이후에 柳重敎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도리어 김평묵을 옹호하고 저자를 비난하자, 신두선의 飜覆과 矛盾을 힐책하고 그 사유를 해명할 것을 요구한 글이다. 1878년에 지은 〈守玄齋偶記〉는 김평묵이 沈琦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조목조목 辨破한 글이다. 1901년에 지은 〈自西徂東辨〉은 독일의 宣敎師 花之安(Ernst Faber, 1839~1899)이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지은 책인 「自西徂東」을 읽고 변파한 글이고, 〈梁集諸說辨〉은 梁啓超의 「飮氷室全集」을 읽고 비판한 글이다.
필자 : 양기정(梁基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