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상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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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재 이학희 (遯齋  李學禧, 1845. 10. 7 ~ 1921. 2. 29)

조선말, 대한제국 시기에 순릉참봉, 혜민원 참서를 역임하신 돈재 이학희 선생은 자는 여경, 호는 돈재인데 1845년 10월 7일 부친인 돈녕도정(敦寧都正) 정복(廷馥)과  모친인 남양홍씨의 아들로 평안북도 삭주의 시골집에서 태어났으며 1921년 2월 29일에 작고하였다. 젊어서는 배움에 뛰어남을 보여 이십이 못되어 사서오경을 모두 읽고 백가에 통하는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식구를 이끌고 경상도 풍기 땅으로 이주하였으며 한양에 진출하여 많은 벗들을 사귀었고 경자년에 순릉참봉, 신축년에 혜민원 참서 등 조선왕조, 대한제국의 행정부에서 일하였다. 경술국치, 대한제국 패망의 현장을 목도하고  일제의 경복궁 침탈과정과 당시 궁내에서 벌어진 패망의 과정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록한 병신일기(丙申日記)를 남겼다. 이후 낙향하여 충청남도 계룡산 아래 봉림동(신도안)으로 이주하였고 간재 전우, 병암 김준영 등과 교유하였다. 그가 남긴 유고를 모아 2003년 돈재유고(遯齋遺稿)를 발간하였다.

재목은 큰데 세상에 쓰임은 작으니 큰 재목은 나한테 있지만 작은 쓰임은 하늘에 달려 있었다. 나에게 있는 재목이 갖추어졌으나 하늘에 달려 있는 쓰임은 어찌 말하랴.



모암 이인구 (慕菴 李仁矩, 1890.3.30 ~ 1952.3.26)

艮齋先生文集을 최초로 板刻하여 出刊한 李仁矩 선생은 初名은 仁矩, 字는 敬循, 號는 慕菴이다. 本貫은 固城이고 祖는 敦寧都正 廷馥, 父는 參書 遯齋 學禧이다. 艮齋 田愚의 門人이다. 고종 27년(경인년, 1890) 3월 30일에 나서 1952년(임진년) 3월 26일에 63세로 작고하였다. 부인 潭陽 田氏는 艮齋 愚의 손녀이다. 基福(春)과 基善 두 아들을 두었다. 1982년에 門人과 後孫들이 묘소에 實績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宋悌永이 지었다.

學行이 있고 孝親으로 소문이 났는데 父母의 喪에 묘소에 廬幕을 지어 3년간 상복을 벗지 않고 시묘를 하였다. 스승 艮齋가 작고한 뒤에 遺稿 編纂에 의견이 분분하자 의연히 스승의 遺言을 따라 일본 관련 내용까지 모두 넣고 家財를 기울여 板刻 刊行하여 세상에 전하게 하였다.



동초 이기복 (東樵 李基福(또는 春), 1907.6.6 ~ 1957.1.26)

李仁矩의 맏아들 基福은 字가 子華, 自號를 海東樵夫(東樵)라 하였다. 隆熙 7년(정미, 1907) 6월 6일에 나서 1957년(정유년) 정월 26일에 50세로 작고하였다. 부인은 全州 崔氏이고 錫羲 錫煥 錫健의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부친의 명을 받들어 艮齋集의 板刻 일을 도왔다. 鐵驥 李範奭의 光復靑年運動을 일찍부터 도운 뒤 論山郡 豆磨面 龍洞里에서 살면서 經史에 힘썼다. 文行이 있고 글씨로 유명한데 大田 寶文山의 을유해방기념비와 석교동에 있는 봉소루(鳳巢樓)의 유허비 (사진) 글씨는 그가 쓴 것이다.



모운 이석희 (慕雲 李錫羲, 1927.1.27 ~ 1994.4.27)

李仁矩의 맏손자 錫羲는 字가 子文, 號가 慕雲인데 1927년(정묘년) 정월 7일 충남 논산군 두마면 용동리에서 나서 1994년 4월 27일에 작고하였다. 1949년 申應澈과 결혼하여 政, 炳天, 炳宇의 세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祖父가 운영하는 興學堂에서 漢學을 공부한 뒤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의 悳泉 成璣運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용동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인쇄소를 경영하여 각종 文集과 族譜 등을 出版하였다. 청년회장·이장으로 오래 봉사하면서 새마을운동에도 앞장서서 활동하였고, 밤마다 후학들을 가르쳤다. 孝心이 극진하여 祖母를 103세까지 성심으로 봉양하고, 상중 3년 동안에는 상복을 입은 채로 강의를 하였다.

1980년 大田으로 이사한 뒤 대흥동에서 明倫學院을 설립하여 四書五經을 講讀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四書五經의 註의 번역과 口訣吐의 정비에 심혈을 기울이다가 건강을 해쳐 별세하였다. 또한 祖父가 심혈을 기울여 판각한 艮齋先生文集 龍洞本이 애초에 수십 질밖에 인쇄 배포되지 않았고, 집에도 完秩을 소장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전국을 수소문하여 완질을 이루자 민족문화추진회를 통하여 영인 출판을 추진하던 중 유언으로 남겼다. 방대한 분량의 艮齋文集 板木은 사저에 계속 보관해 오다가 1988년에 大田大學校 博物館에 기증하여 영구 보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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