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재유고(遯齋遺稿)와 병신일기(丙申日記)

 

돈재유고(遯齋遺稿)

조선말, 대한제국 시기에 순릉참봉, 혜민원 참서를 역임하신 돈재 이학희 선생은 자는 여경, 호는 돈재인데 1845년 10월 7일 부친인 돈녕도정(敦寧都正) 정복(廷馥)과  모친인 남양홍씨의 아들로 평안북도 삭주의 시골집에서 태어났으며 1921년 2월 29일에 작고하였다. 젊어서는 배움에 뛰어남을 보여 이십이 못되어 사서오경을 모두 읽고 백가에 통하는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식구를 이끌고 경상도 풍기 땅으로 이주하였으며 한양에 진출하여 많은 벗들을 사귀었고 경자년에 순릉참봉, 신축년에 혜민원 참서 등 조선왕조, 대한제국의 행정부에서 일하였다. 경술국치, 대한제국 패망의 현장을 목도하고  일제의 경복궁 침탈과정과 당시 궁내에서 벌어진 패망의 과정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록한 병신일기(丙申日記)를 남겼다. 이후 낙향하여 충청남도 계룡산 아래 봉림동(신도안)으로 이주하였고 간재 전우, 병암 김준영 등과 교유하였다. 그가 남긴 유고를 모아 2003년 돈재유고(遯齋遺稿)를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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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일기(丙申日記)

돈재(遯齋) 이학희(李學禧, 1845년 10월 7일 ~ 1921년 2월 29일) 선생은 구한말, 대한제국 시대에 순릉참봉(順陵參奉), 참서관(參書官), 통정(通政) 등의 벼슬을 지내셨는데, 조선이 무너지고 일제 강점기로 빠져들어가는 격랑의 시대를 궁내에서 지켜보신 분이다. 그분의 유고집인 돈재유고(遯齋遺稿) 내에 수록된 병신일기(丙申日記)는 1896.6.21.~1896.7.3.간의 짧은 기간의 일기로 일제의 경복궁 침탈과정과 당시 궁내에서 벌어진 일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의 전후로 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머물렀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어서 1897년 대한제국선포 등으로 이어진다. 이 일기의 기간은 1896년(丙申년) 6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제의 경복궁 침탈사건은 1894년(甲午년) 6월의 일로써 2년의 차이가 있게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상으로는 일제의 경복궁 침탈사건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궁 내부에서 근무하던 저자가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니 널리 공유하고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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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6. 21.

병신년(丙申,1896년) 6월 21일 인시(寅時)에 왜병 만여명이 대궐문을 에워싸는 한편 한 부대는 운현궁을 에워싸고 한 부대는 신대장 정희(申大將 正熙)의 집을 에워싸더니 석유를 영추문에 뿌려 불을 지르고 구멍을 내어 마침내 문을 열고 난입했던 바, 혹은 높은 사다리를 놓아 사면으로 담장을 넘어 들어가 삼전(三殿)을 에워쌈으로써 그 곤경(困境)의 핵심(核心)에 있었다.

그 운현궁을 에워싼 자들은 창을 들고 국태공(國太公) 곧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침소를 침입하였던 바, 당시 국태공은 설사병으로 편치 못하던 중에 억지로 붙들어 앉아 있는데 저 왜병들이 보고 지나되 서로 대함이 거만하였다.

국태공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내가 국태공의 존귀한 신분으로 어찌 너희 나라의 이름 없는 졸개들에게 가히 예로 굴복하겠느냐? 내 머리를 가히 벨지언정 내 목은 굽히기 어렵다”하니 저네들이 마침내 허물을 뉘우치고 대궐에 들어가 일을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국태공이 이르시기를 “내 나이 일흔 다섯으로 늙고 병듦이 이미 극에 다다르고 또한 국가의 정사를 간여하지 않은지 이미 십여년인데 어찌 국가의 대계(大計)를 알겠느냐?”면서 누워 일어나지 않으니 저네들이 혹은 좋은 말로 달래고, 혹은 강한 말투로 핍박하고, 혹은 위태로운 말로 협박하였다. 그러나 국태공께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더니 사시(巳時)에 이르러 중사(中使, 내시)가 궁내(宮內)로부터 전지(傳旨)를 가져와 국태공께 입궁하도록 전하자 국태공께서 드디어 일어나 중사(中使)를 앞에 앉히고 물으시기를 “과연 전하(殿下)의 친명(親命)이시냐? 중전(中殿)이 또한 부르심이냐?” 하시니 중사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또 물으시기를 “과연 그런가?” 하시니 중사가 아뢰기를 “어떤 존엄한 곳인데 감히 속되게 거짓으로 부를 이치가 있겠나이까?” 하였다.

국태공께서 드디어 미음을 마시고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사인(四人)이 매는 남녀(藍輿)를 타고 청개(靑盖)를 덮은 후에 길을 나섰는데 전후좌우로 겹쳐 호위하는 자들은 모두 일병(日兵)이었다.

이보국(李輔國), 이참판(李參判) 또한 뒤따라 모시고 들어갔는데 이때 궐내는 왜병이 철통같이 에워싸 물 샐 틈이 없었고, 각 궁청(宮廳)의 입직관료(入直官僚)들은 모두 쫓겨나고 시종(侍從)하는 신하로는 다만 이포장(李捕將) 봉의(鳳儀), 이참판(李參判) 범진(範晋), 이승지(李承旨) 채연(采淵), 김가진(金嘉鎭), 안동수(安駧壽), 조희연(趙羲淵) 뿐이었고 신장신(申將臣) 및 조독변(趙督辨)은 왜병에게 쫓겨 들어오고 승합(承閤, 承政院) 및 훈합(勳閤, 忠勳府)에서도 서로 이어 삼전(三殿)으로 들어왔다.

혜경당(惠敬堂)에 포위되어 있던 왕대비(王大妃)께서는 피하여 홍순형(洪淳馨)의 집으로 나가셨는데 시위병정(侍衛兵丁)들은 모두 군복과 전립(氈笠)을 벗고 도망하였으며 유독 서영(西營)의 병정(兵丁) 오백명이 후원(後苑) 및 춘생문(春生門)에 나뉘어 있으면서 굳게 막고 화포(火砲)를 쏘아댔다.

이때 주상(主上)으로부터 칙지(勅旨)가 내려 화포(火砲)를 쏘아 사람을 상하지 말라 함으로 이에 서영(西營)의 병정(兵丁)들이 조총(鳥銃)을 깨뜨려 버리고 흩어져 도망하였다.

잠시 후에 왜병 한 부대가 삼군부(三軍府)를 탈취(奪取)하고 한 부대는 총어영(銃禦營)과 장위영(壯衛營) 양영(兩營)을 탈취(奪取)하였는데 당시 포성이 우뢰와 같고 곡성(哭聲)이 들끓는 것 같았다. 한편 사내는 짐을 지고 계집은 짐을 머리에 이고, 노인은 붙들고 어린애는 이끌고서 도망하는 자가 휩쓸려 붙잡히고 시끄러워 온 성(城)이 마침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이때 왜병들은 마침내 사대문 및 각 벽문(壁門)을 파수(把守)하여 빠져 나가도록 하되 들어오는 자는 저들 공관(公舘)의 인표(印標)를 얻어야 들어갈 수 있도록 하니 사람의 어깨가 서로 맞닿고 온 성 안의 집들이 모두 텅 비었으며 대궐문(大闕門)은 사문(四門) 모두 굳게 닫히고 다만 광화문(光化門) 서쪽 협문(夾門)만을 통하는데 출입자는 저 일본 공관(公館)의 인표(印標)를 취득한 연후에야 비로소 막힘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저 일본의 주된 뜻은 오로지 우리나라를 개화(開化)하는데 있었고 개화하는 뜻은 청국(淸國)을 등지고 왜국(倭國)을 따르게 하며 우리 조정(朝廷)의 옛 제도를 아주 바꾸고자 함이었다. 국태공 또한 부득히 아지 못하여 따르며 이르기를 “가히 따를 만한 것을 따르라”운운(云云)하시었다.

1896. 6. 22.

동월 22일 궐내의 소식을 들으니 전날 국태공께서 처음 들어가시면서 대전(大殿) 앞에서 손을 땅에 기대고 연이어 크게 부르짖기를 “어찌하여 국사(國事)가 이런 극도에 이르렀는가?” 하시니 대전(大殿)의 임금님께서도 눈물을 뚝뚝 떨구시며 이르시기를 “이는 모두 이 자식의 죄입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부주(父主)께서 저를 살려 주십시오. 부주(父主)께서 저를 살려 주십시오” 하시고, 중궁전(中宮殿)께서는 양사(洋紗) 푸른 치마와 흑각(黑角) 비녀의 복장으로 입안에서 다만 이르기를 “국태공이 아니면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나이다” 하였다고 한다.

국태공께서 드디어 대전 뜰을 돌아 보시고 이르시기를 “만국(萬國)의 공법(公法)이 어찌 이웃나라의 임금을 핍박하는 이 같은 의리(義理)가 있겠는가? 가히 한 걸음 물러나 나와 일을 의논해 보자” 하니 왜병(倭兵)들이 드디어 합문(閤門) 밖으로 조금 물러나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벌려 진(陣)을 치고 있는 한편 각 전각(殿閣)과 여러 공해(公廨)를 그들이 모두 웅거하고 내탕고(內帑庫) 등 여러 창고의 많은 화폐(貨幣)를 온통 니현공관(泥峴公館)으로 실어내니 가히 통탄(痛歎)할 일이었다.

이 날 임금님께서 전지(傳旨)에 이르시기를 “백성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은 곧 국가를 저버림이라. 백성이 의지하여 살 수 없으니 어찌 국가라 하겠는가?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전하니 그 행적을 가리기 어렵다. 좌찬성(左贊成) 민영준(閔泳駿)은 오로지 취렴(聚斂)을 일삼고 원성(怨聲)을 돌리어 자기 배만 불리었으니 이는 보통으로 처리하지 못할 바로서 먼 악도(惡島)에 안치(安置)시킬 것이며, 전(前) 통제사(統制使) 민형식(閔炯植)은 탐학(貪虐)함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고 그 류독(流毒, 害毒)이 이웃 지경에까지 두루 미쳤으니 먼 악도(惡島)에 안치(安置)시킬 것이며, 전(前) 총제사(摠制使) 민응식(閔應植)은 병영(兵營)을 지어 변경함이 많고 세금을 거두어 물의(物議)를 일으켰으니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할 것이며, 전(前) 개성유수(開城留守) 김세기(金世基)는 잔학(殘虐)하여 시끄러운 일을 야기시키고 요행히 도망하여 염치(廉恥)와 예방(禮防)을 무너뜨렸으니 먼 악지(惡地)에 정배(定配)할 것이며, 경주부윤(慶州府尹) 민치헌(閔致憲)은 여러 고을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분수넘친 탐욕(貪慾)으로 백성들을 구학(溝壑,塗炭)에 빠뜨리되 그침이 없었으니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할 것이다. 이는 내가 생령(生靈,百姓)을 위하고 또한 세도(世道)을 보전하고자 하는 고심(苦心)에서 아울러 영(令)하노니 곧바로 속히 거행(擧行)하도록 하라” 하시었다.

또 전지(傳旨)에 이르시기를 “춘천유수(春川留守) 민두호(閔斗鎬)를 교체하고 대호군(大護軍) 이규석(李奎奭)을 제수(除授)하노라” 하시고, 또 전지(傳旨)에 이르시기를 “안치죄인(安置罪人) 이용원(李容元)과 도배죄인(島配罪人) 권봉희(權鳳熙), 안효제(安孝濟), 여규형(呂圭亨)은 모두 방면(放免)하라” 하시고, 또 전지(傳旨)에 이르시기를 “병조판서(兵曹判書) 민영규(閔泳奎)를 교체하고 김학진(金鶴鎭)을 제수(除授)하노라” 하시고, 또 전지(傳旨)에 이르시기를 “강화유수(江華留守)를 교체하고 전(前) 판서(判書) 김윤식(金尹植)을 제수(除授)할 것이며 총제영(摠制營)을 폐지하고 해군절제영(海軍節制營)을 심영(沁營,江華營)에 이속(移屬)시키도록 하라” 하시었다.

전지(傳旨)에 이르시기를 “삼왕(三王)은 예(禮)를 한가지로 하지 않고 오제(五帝)도 악(樂)을 한가지로 하지 않는 등 때에 따라 제도를 맞게 하였거니 하물며 정치(政治)인데야! 돌이켜 보건대 우리나라는 동구(東區)의 가장 중요한 지역에 끼여 있으되 약하여 떨치지 못하였으니 곧 정치가 쇠퇴하고 문란하되 변통(變通)을 생각하지 않은 때문이다. 무릇 국가를 일으키는 도(道)는 인재 임용을 선무(先務)로 삼아야 하나니 그 사색(四色)으로 한 당파(黨派)에 치우친 의논은 일체 타파하고 문벌에 구애치 않고 오직 어진 이와 재능 있는 이를 천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치(內治)와 외무(外務)에 있어서는 시의(時宜)를 좇으기를 힘쓸 것이며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은 각기 분발 면려할 뜻을 닦아 덕(德)이 적고 식견(識見)이 어두운 나를 능히 도와 새로운 정치로써 국가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히 하는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하시었다.

이 날 정사는 총어사(摠禦使) 겸 경리사(經理使) 이봉의(李鳳儀), 우포장(右捕將) 안동수(安駧壽), 좌포장(左捕將) 이원회(李元會), 장위사(壯衛使) 조희연(趙羲淵), 통어사(統御使) 신정희(申正熙), 외무독변(外務督辨) 김가진(金嘉鎭), 외무참의(外務參議) 유길준(兪吉濬), 병조판서(兵曹判書) 김학진(金鶴鎭),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 박재순(朴齋純), 강화유수(江華留守) 김윤식(金尹植) 등 백관(百官)이 정부(政府)에서 회의를 하였다.

나는 전복(戰服)으로 가서 참석하였는데 경성(京城)의 재상(宰相) 아무 아무 및 영남 사람으로 경성에 머무르는 자가 모두 와서 참석,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서로 가엾어 할 뿐이었다.

1896. 6. 23.

동월 23일 궐내의 대강 소식을 들으니 일전에 청나라를 배격하는 논란을 국태공이 죽기를 작정하고 좇지 않았을 때에는 오히려 청병(淸兵)이 구해 줄 바램이 있었는데 이제 비로소 더듬어 살펴보니 청나라 외교관, 소위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이 일인(日人)의 뇌물(賂物)을 받고 군병을 움직이지 않으므로 원대인(袁大人,袁世凱) 또한 어쩔 수 없이 피하여 갔다고 한다.

당시 나라의 임금이 칼과 창이며 총탄 속에 갖혀 있어 저들의 요청을 순종하지 않으면 편안하지 못하게 되므로써 어쩔 수 없이 청나라를 배척하고 자립하여 남의 보호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일인(日人)의 의논을 따르게 되었으며 또한 저들의 요청에 따라 아산(牙山)에 주둔하여 있던 청병(淸兵)을 몰아내고자 군병(軍兵)을 내어 내려가게 되었다.

한편 전에 일본국을 왕래하며 개화의 논(論)을 주장하던 자들은 모두 화려한 관직에 제수되었던 바 주사(主事)로써 승지(承旨)가 된 자가 있었으니 이응익(李應翼), 김하영(金夏英) 이인(二人)이 바로 그들이었으며 민영달(閔泳達)은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제수되고 중궁전(中宮殿) 승후관(承候官)에는 민영환(閔泳煥)이 빈궁전(嬪宮殿) 승후관(承候官)에는 민영소(閔泳韶)가 기용되었다.

이에 도하(都下), 곧 장안(長安)의 물의(物議,評論)가 청병(淸兵)이 만약 며칠 안되어 도달할진대 사망자가 필시 많으리라 운운(云云)하였다. 때문에 이 때 흉흉한 조짐이 이전보다 심하여 십리를 가는데 가마 삯이 100냥에 이르고 담세(擔貰), 곧 메고 가는 삯이 30-40냥이며, 한 사람의 강을 건너는 삯이 15냥이라 이르더라.

식사 후에 또 정부에 나가 보니 모인 자가 전날보다 많았다. 광화문 안을 보니 땔나무가 처마에 닿게끔 쌓여 있고 남쪽을 향하여 대포가 안치되어 있었다.

왜장(倭將)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교만하게 드나들며 곁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듯 거침이 없었다. 문루(門樓) 및 정각(丁閣)은 모두 왜병이 파수를 보고 근시(近侍)로써 왜인의 신표(信標)를 지참하고 출입하는 자들은 다만 립자(笠子), 곧 전모(戰帽) 전복(戰服)을 착용하였으며 정부에 모인 자들은 어떤 사람은 전복을 착용하고 어떤 사람은 창의(敞衣)을 착용하고 또 소창의(小敞衣)를 착용한 자가 많으며 금관자(金貫子), 옥관자(玉貫子)를 떼어 버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신(重臣)들이 모두 도보(徒步)로 다니었다.

1896. 6. 24.

동월 24일에 들으니 일병(日兵) 한 부대는 양근(楊根)으로 내려가고 한 부대는 춘천(春川)으로 내려가고 한 부대는 심도(沁島,江華島)로 내려갔는데 도중에 노략질이 비할데 없다 하며 전하는 말에 대궐안의 동정은 자상히 알 수 없으나 여러 병영의 군기(軍器)를 탈취한 자들이 군기를 때려 부수어 궐문 안에 쌓아 놓고 여러 영문(營門)에 감추어진 재물을 탈취한 자들은 또한 국태공 앞에 환납(還納)을 청하였는데 국태공께서 이르시되 “우선 쌓아 그곳에 두어라”고 운운(云云)하셨다고 한다.

1896. 6. 25.

동월 25일 인천에서 전보하기를 팔미도(八尾島)에서 진시(辰時)부터 사시(巳時)까지 포성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공관에서 방(榜)을 내었는데 그에 이르기를 일병(日兵)이 우(右)와 같이 백성의 재물을 탈취한다 하니 빼앗긴 사람은 와서 본관(本館)에 아뢰라고 하였다 한다. 주상(主上)께서 명하시어 선전(宣傳) 한 사람이 신표(信標)를 가지고 나가 죽은 병정(兵丁) 두 사람을 들것에 실어 동협문(東夾門) 밖에 내다 버리었다.

1896. 6. 26.

동월 26일 들으니 청나라 병선(兵船) 두척이 팔미도(八尾島)에서 패전하여 청나라 장수(將帥)로서 사망자가 3명이었다 한다.

주상께서 명하시어 인천 수령더러 도피(逃避)하라 이르시는 한편 성내에 머물러 있는 왜병을 다 쫓아내고 운현궁(雲峴宮)을 파수하는 왜병 또한 철거시킬 것이며 통어영(統御營), 장위영(壯衛營) 양영(兩營)에 주둔하는 병사 및 용산창(龍山倉)에 주둔하는 대병(大兵)을 또한 모두 철거하고 청나라 군병을 맞아들이도록 하라 하시었다.

이 날 종로의 여러 점포에서 차차 저자를 열고 회의에 차출된 당상관(堂上官) 몇 사람 및 낭청(郎廳) 몇 사람이 궐내(闕內)에다 회의청(會議廳)을 설치하였다 한다. 또한 김만식(金晩植)을 평안감사(平安監司)로 삼고, 김춘희(金春熙)를 황해감사(黃海監司)로 삼고, 남학희(南學熙)를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삼고, 김익용(金益容)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고, 한기동(韓耆東)을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삼고, 이남규(李南珪)를 승지(承旨)로 삼았으니 색론(色論)에 구애하지 않았음을 가히 보겠다.

1896. 6. 27.

동월 27일 회의청(會議廳)에서 의논하기를 옛 관사(官司)의 관함(官啣,官名)을 모두 고쳐 특히 십부(十府)를 설치하였는데, 첫째 궁내부(宮內府)로써 주상(主上)께서 주장하시되 궐내(闕內) 각 관서(官署)를 그에 예속하며, 다음은 의정부(議政府)로써 대신(大臣)은 김홍집(金弘集)이요 참의(參議)는 정경원(鄭敬源)이며, 다음은 내무부(內務部)로써 대신(大臣)은 박정양(朴定陽)이요 참의(參議)는 이응익(李應翼)이며, 다음은 외무부(外務部)로써 대신(大臣)은 김가진(金嘉鎭)이요 참의(參議)는 서상집(徐相集)이며, 다음은 도지아문(度支衙門)으로 대신(大臣)은 민영달(閔泳達)이요 참의(參議)는 이원긍(李源兢)이며, 다음은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대신(大臣)은 안동수(安駧壽)요 참의(參議)는 김하영(金夏英)이며, 다음은 학무아문(學務衙門)으로 대신(大臣)은 유길준(兪吉濬)이요 참의(參議)는 박준양(朴準陽)이며, 다음은 농무아문(農務衙門)으로 대신(大臣)은 이윤용(李允用)이요 참의(參議)는 ??이며, 다음은 군무아문(軍務衙門)으로 대신(大臣)은 조희연(趙羲淵)이요 참의(參議)는 권형진(權瀅鎭)이며, 다음은 공무아문(工務衙門)으로 대신(大臣)은 김종한(金宗漢)이요 참의(參議)는 김학우(金鶴羽)이다. 당하(堂下)는 다만 주사(主司) 몇 서기(書記) 몇을 두고 옛 관사(官司)의 제반 관원(官員)은 각기 분류 예속시키는 한편 쓸데 없는 인원은 모두 줄인다고 이른다. 또 제도상(制度上) 봉록(俸祿)은 내직(內職)을 중(重)히 외직(外職)을 경(輕)히 하는 제도를 쓰고 팔도의 관부(官府)는 다만 일백군(一白君)을 둔다고 이른다.

전지(傳旨)에 이르시기를 “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을 교체하고 조희연(趙羲淵)을 제수(除授)하노라” 하시었다.

1896. 6. 28.

동월 28일 들으니 왜병이 청병으로 더불어 소세평(小洒坪)에서 마주 대하여 진을 치고 있다 하는데 소세평(小洒坪)은 곧 호서(湖西)의 땅으로 호남(湖南)과 경계이다. 거리가 수원(水原)에서 멀지 않아 태창(太倉,廣興倉)에 쌓여 있는 미곡(米穀)을 모두 진소(陣所)로 운반하고 궐내(闕內) 및 각 영내(營內)에 있는 탄환(彈丸)을 모두 수송(輸送)한다 하며 오강(五江)에서 상마(商馬), 곧 장사하는 말을 탈취해 간 것이 천여필(千餘匹)이라고 한다.

청나라 원세개(袁世凱)의 관소(館所)에 있던 장수(將帥)의 깃발이 일인(日人)들의 손에 찢겨 넘어짐에 이르러 청장(淸將) 탕대인(湯大人)이 통곡하고 떠났으니 이는 병가(兵家)에서 깃발을 빼앗기는 것은 장수(將帥)의 목을 베이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라 이른다.

또 들으니 청병 10만명 가운데 5만명이 곧장 일본 대판성(大坂城)으로 향하며 3만명이 북해(北海)를 돌아오고 2만명은 소세평(小洒坪)에 와서 정박(碇泊)한다고 한다.

황해감사(黃海監司) 김춘희(金春熙)가 사직(辭職) 단자(單子)를 올려 교체한 후 정현석(鄭顯奭)을 제수하고 이남규(李南珪)를 장흥부사(長興府使)에 제수하고 이채연(李采淵)을 하동부사(河東府使)에 제수하였다.

1896. 6. 29.

동월 29일 회의소(會議所)에서 의논하여 이서(吏胥,胥吏), 원역(員役), 곧 각 관청의 아전들을 거의 줄인다고 이르는데 경중(京中) 각 관사(官司)의 이역배(吏役輩) 만여인(萬餘人)이 궐문 밖에 모여 흉흉함으로 끝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의제(衣制)에 있어 임금께 알현(謁見)하는 복장은 사모(紗帽), 각대(角帶)와 장복(章服)으로 시행하되 장복(章服)은 소매를 좁게 할 것이며 조정의 관리는 연복(燕服)과 사대(絲帶)를 시행할 것이며, 사서인(士庶人)은 주의(周衣)와 사대(絲帶)를 시행하되 기한은 7월 초 10일까지이다.

1896. 7. 1.

7월 초 1일 회의소(會議所)에서의 의결된 안건을 조목조목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전권대신(專權大臣)을 여러 나라에 특별히 파견하여 조선(朝鮮)의 자주독립(自主獨立)을 알릴 것
  • 광서(光緖, 淸 德宗)의 연호(年號)를 폐지하고 새로 조선 연호를 세울 것
  • 문벌(門閥)과 양반(兩班) 상인(常人)의 격식(格式)을 깨뜨리고 귀천(貴賤)은 물론하고 인재를 골라 쓸 것
  • 문무(文武)와 존비(尊卑)의 차별을 폐지하고 다만 품계(品階)에 준할 것
  • 뇌물을 받거나 억지로 수색(搜索)을 행하거나 관물(官物)을 사사로이 소유하거나 또는 아무 허물이 없는데도 꾸미어 남을 욕보이거나 아무 단서도 없이 관부(官府)나 사가(私家)에 붙잡아 보낸 자는 중죄로 다스릴 것
  • 부모, 처자, 형제, 친척, 고구(故舊)에 대한 연좌(連坐)의 형벌을 폐지할 것
  • 거상(居喪)의 제도를 고쳐 비록 상중(喪中)에 있더라도 공사 사무를 집행하는데 방해하지 않을 것
  • 부녀(婦女)의 재가(再嫁)에 방해가 되는 것은 해제할 것
  • 공천(公賤), 사전(私賤) 노비(奴婢)의 제도를 폐하고 사람의 자녀를 사고 파는 것을 금할 것
  • 일찍 결혼시키는 폐단을 바로 잡을 것
  • 승려(僧侶)가 민간에 들어옴을 금하는 것을 폐할 것
  • 무릇 국가를 다스리는데 관계되는 일이면 비록 천민이라도 의견이 있는 자는 마땅히 국정, 군사에 관한 중요한 일을 글로 올려 논할 것

1896. 7. 2.

초 2일 주상께서 전지(傳旨)에 이르시되 “전(前) 사간(司諫) 권봉희(權鳳熙)와 전(前) 정언(正言) 안효제(安孝濟)를 함께 부수찬(副修撰)에 제수하노라” 하시고 전지(傳旨)에 이르시되 “관성장(管城將,北漢山城將) 이유인(李裕寅)을 남병사(南兵使)에 제수하노니 며칠 내에 속히 부임(赴任)하기 바란다” 하시었다.

1896. 7. 3.

초 3일 전지(傳旨)에 이르시되 “안변부사(安邊府使)를 교체하고 이범진(李範晋)을 제수하노라”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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