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천년 한민족사는 신화가 아니라 현실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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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172017
 

1. ‘고기’의 존재
‘삼국유사’에는 단군조선의 건국이 요임금 50년 때, 그러니까 경인庚寅년이라 쓰여 있다. 이는 그저 책을 쓴 일연 스님의 추정이나 생각이 아니다. 당시에는 실재하던 ‘고기古記’라는 역사책을 그대로 인용하는 대목에서 이 연도가 나온다. 같은 고려시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를 요임금 즉위 원년인 무진년이라 했다. 단군조선과 요임금의 나라가 같은 해 건국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 편찬된 대표적인 관찬官撰 사서인 ‘동국통감’에는 ‘당요 25년 무진년’이라 하고 있다. 즉 요임금 시대의 무진년이 그 원년인지 아니면 25년인지 ‘제왕운기’와 ‘동국통감’의 견해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만약 무진년을 요임금 25년이라고 한다면 그가 즉위한 원년은 갑진년(서기전 2357년)이 된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서도 당시 전해지던 ‘고기’라는 역사책을 그대로 인용해 단군왕검의 재위 원년을 무진년으로 못박고 있다. ‘단군세기’가 ‘삼국유사’처럼 ‘고기’를 인용하면서도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고기’의 판본이 여럿 존재했으며 그 판본들의 내용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조선의 역대 47세 단군들의 역년歷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에 바탕해서 역산을 해보면 무진년은 서기전 2333년이 된다. 참고로 요임금이 무진년에 즉위했다는 ‘무진년 원년설’은 중국의 정사 기록들에서도 많이 채택하고 있는 설이다.

2.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한민족이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가 대략 서기전 1500년에서 1300년이라고들 말한다. 만약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가 서기전 2333년이라면 청동기시대보다 훨씬 앞선 신석기시대에 나라를 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 발굴된 고고학 유물들은 동북아의 청동기시대, 그 연대를 학계가 추정해오던 것보다 훨씬 앞선 쪽으로 올려놓았다. 1980년대 중국 요령성 건평현 우하량에서는 청동기를 주조한 흔적이 있는 토기 도가니 파편과 청동제 고리, 거푸집 등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발견됐다. 또 인근 내몽골 적봉시 오한기에서는 청동 거푸집까지 나왔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 청동 유물들의 연대를 약 5000년 전으로 추정한다. 그 전까지 중국학자들은 중국의 청동기시대 상한上限 시기를 서기전 2000년경으로 보았는데 앞의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그 연대가 10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단군조선은 분명히 청동기시대에 출현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이 신석기시대에 건국되었다? 그것은 맞지 않다. 단군조선보다 앞선 배달국 치우천황이 이미 금속 무기를 만들었다는 역사 기록을 감안해도 단군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건국된 것이 분명하다.

3. 단군조선의 건국
‘삼국유사’에 처음 나온다. 문제는 거기서 단군조선의 건국과정을 신화 같은 이야기로 간략히 소개한 것이다. 나중에 그것을 빌미로 일제가 실제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왜곡해서 지금까지 단군조선은 신화다, 하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게 됐다.
특히 단군조선을 건국하는 과정과 관련해 ‘삼국유사’에서 곰과 호랑이 운운한 대목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실을 단순히 신화 형태로 서술한 것이다. 일찍이 천손天孫족을 자처하며 동방으로 이주한 환웅족이 동방의 토착 원주민이던 호족虎族과 웅족熊族을 아우르는 과정에서 호족 아닌 웅족과 손잡고 나라 세운 사실史實을 신화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단군조선의 건국에 대해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은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다. 이암은 ‘고기’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단군조선의 건국자인 단군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熊이요, 어머니는 웅씨 왕의 따님이다. 그런데 단군왕검은 일찍이 14세에 웅씨국의 비왕裨王(한 지역을 맡아 다스리는 군왕)이 되었다.
여기서 웅씨국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국가로 추정된다. ‘단군세기’에서는 이 나라를 대읍국大邑國#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배달국에서도 중심이 되는, 큰 세력을 가진 나라로 보인다.
대읍국 통치 경험을 쌓은 단군왕검은 38세에 아사달에서 백성들의 추대로 천제의 아들, 곧 천자天子가 되었다. 그는 이처럼 왕의 자리에 오른 직후 이전까지 아홉 갈래로 갈라졌던 환족(=九桓族)을 하나로 통일했다.
단군왕검이 배달국을 계승했다는 것은 ‘삼국유사’의 단군조선 건국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만 실제로 ‘단군세기’에 남겨진 기록, 곧 ‘왕검이 신시 배달의 법규를 되살렸다’는 대목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단군조선이 당당하게 실재한 국가였음을 증명하는 기록 중에는 갑골문도 있다. 갑골문에 따르면 은나라 제22세 왕인 무정武丁(서기전 1325∼서기전 1266년)은 수많은 정벌전쟁을 벌였는데 지금의 섬서성과 산서성 서북 일대에 살던 북방족인 귀방鬼方을 공격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도 그대로 쓰여 있다. “제21세 소태단군 47년(서기전 1291년)에 은나라 제22세 왕 무정武丁이 전쟁을 일으켜 귀방을 물리치고 나서 다시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을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다.
이처럼 시대를 달리 하는 여러 기록들이 단군조선이 분명한 우리 역사였음을 생생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4. 단군조선에서 북부여로 이어지는 과정? 부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단군조선 말기의 정치상황부터 돌아봐야 한다.
단군조선은 삼한관경제가 삼조선제로 바뀌면서 점점 그 세력이 약해졌다. 그러다 제43세 물리단군 때 사냥꾼인 우화충이 역모를 일으켜 도성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물리단군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그 도중에 붕어崩御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당시 욕살(=지방장관) 구물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평정한다. 그러고는 주위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제44세 단군에 즉위한다. 이 분이 구물단군!!
구물단군의 즉위는 단군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점이 되는데 먼저 그는 도읍을 종래 백악산에서 장당경으로 옮기면서 단군조선의 제3왕조 시대를 열었다. 나아가 국호도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꾸었다. 이때까지도 나라의 틀이 형식상으로는 삼조선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진조선이 대부여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기존의 다른 두 조선, 그러니까 번조선과 막조선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대부여와 함께 여전히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던 것!!
그런데 이들 번조선과 막조선이 점차 독자적인 병권兵權을 가지면서 대부여의 통제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독립국이 된다. 이 때문에 종래 단군조선의 통치체제인 삼한관경제가 유명무실해지고 이로 인해 대부여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약화된다. 대부여의 제47세 고열가단군을 끝으로 대부여(=진조선)는 그 역사의 막을 내리고(서기전 239년) 그 뒤를 해모수의 북부여가 계승한다. 진조선은 이처럼 대부여를 거쳐 북부여로 계승된다.

5. 국사 교과서를 보면 단군조선 다음에 북부여가 아니라 위만조선?
위만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정확한 명칭은 위만정권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단군조선의 서쪽 영토 일부를 일시적으로 장악했던 지방 정권에 불과했다.
대륙의 북부여가 진조선을 계승한 직후 그 서쪽의 번조선 땅에는 중국에서 넘어온 난민들로 넘쳐났다. 위만은 그런 난민들의 우두머리격 인물이었다. 당시 번조선을 다스리던 준왕이 위만을 받아들이고 번조선의 서쪽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 그런데 정작 위만은 자신의 임지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서기전 194년 준왕의 왕검성을 친 것이다. 그렇게 준왕을 몰아내고는 스스로 ‘번조선 왕이다’ 칭하고 왕위를 차지하는 배은망덕한 일을 저질렀다.
이 같은 위만정권을 일연의 ‘삼국유사’, 나아가 지금의 강단사학계에서 버젓이 위만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호칭이다. 위만정권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서는 안된다.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을 이루던 삼조선의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중심은 진조선이었다. 그 진조선의 국통은 분명히 구물단군의 대부여를 거쳐 해모수의 북부여로 이어졌다. 그것이 올바른 국통 맥이다. 반란을 통해 그저 일시적으로 왕위를 찬탈했던 위만에게 단군조선의 계승국을 의미하는 조선이란 명칭을 붙여서는 안 된다.

6. 북부여의 제6세 고무서단군이 후사 없이 죽자 그 사위인 주몽이 대통을 이어받았다. 고구려의 시작!!
주몽은 잘 알려진 것처럼 유화부인의 아들이다. 유화부인은 혼인 전 몰래 임신해 부모에게서 쫓겨났는데 마침 동부여의 해부루 왕이 그녀를 동부여로 데려갔다.
이렇게 해서 주몽은 동부여의 왕궁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동부여 사람들의 질시로 신변의 위협을 받자 (자기의 고향이라 할) 북부여로 탈출한다. 그리고는 북부여를 다스리던 고무서단군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 고무서단군의 사위가 되어 나중에 왕위를 물려받고 고구려를 열게 된다.
이처럼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가 일찍이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환단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삼국유사’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 ‘삼국사기’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광개토왕비 역시 주몽의 출자가 북부여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앞선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이 정확한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7. 백제와 신라
백제는 고구려에서 직접 갈려나온 나라.. 소서노의 아들 온조와 비류가 함께 남쪽으로 이주해 백제를 세웠다.
신라 역시 부여와 밀접한 관계 속에 나라가 세워졌다. 일찍이 북부여 제실의 딸인 파소婆蘇(삼국유사에는 사소娑蘇라고 기록됐는데 북부여 고두막한의 딸로 추정됨)가 아버지 없이 아이를 잉태하는 바람에 뭇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되자 당시 진한 땅으로 이주한다. 그렇게 이주한 뒤 낳은 아들이 곧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이다. ‘삼국유사’에는 파소가 중국 제실의 딸이다, 그렇게 쓰여 있는데 이는 북부여의 제실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신라에서 성산으로 모시는 성모산의 ‘성모聖母’#가 바로 이 파소 부인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건국한 시조들뿐 아니라 그 주민들 또한 대부분 단군조선의 유민들이었다. 한민족의 후예들인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이처럼 단군조선과 북부여의 국통 맥을 이은 한민족의 나라들이었다.

8. 고대 우리 민족의 문화
단군조선의 강역이던 요령성에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때는 적어도 서기전 2500년경이다. 이에 비해 중국 황하 유역의 청동기 문화는 단군조선보다 훨씬 뒤인 기원전 2200년경에 시작됐다. 여느 지역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시작된 단군조선의 청동기 문화는 농기구, 제기, 무기 등 제반 도구의 제작기술 수준에 있어서 다른 데보다 높았다. 나아가 단군조선 때는 이미 직물의 생산기술 역시 상당히 발전했다.
지금까지 발견, 발굴된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고대 한민족이 비단을 생산하기 시작한 시기는 중국과 비슷한 서기전 2700년경이다. ‘환단고기’에 보면 초대 단군왕검이 하백의 딸을 황후로 맞이해 누에치기를 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배달국 말기에 이미 비단이 생산됐음을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를 통해 뒷받침된다. 단군조선에서 재배한 뽕나무와 그것으로 기른 누에는 중국 것과는 엄연히 다른 품종이었다. 또 비단의 직조방법과 염색기술도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것이었다. 단군조선의 직조織造기술은 중국보다 앞섰으며 비단의 종류 또한 단군조선에 더 많았다. 단군조선 시대의 유물, 홍산문화권의 유물, ‘환단고기’의 기록 등을 근거로 동서양 교류 역사를 담고 있는 기존의 실크로드(Silk Road 비단길) 역사까지도 새로 쓰여야!!
이미 고대 한국에서는 서기전 25세기에 청동 단추로 장식된 복식을 착용했고 그 뒤에는 갑옷과 투구에 이를 응용했다. 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가 서기전 1800년경에 시작되었으니(학계 추정) 단군조선은 중국과 북방 민족들보다 훨씬 앞서 가장 이른 시기에 청동 단추로 장식한 갑옷을 생산한 것이다. 묶은 머리(상투)를 고정시키는 옥고玉箍#를 통해 고대 한국인의 문화적 우수성을 볼 수 있다.
단군조선 시대의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저 홍산문화 유적지에서는 옥으로 만든 옥고가 대량 발굴됐다. 바로 이 옥고에서 우리 금관의 기본 양식이 비롯되었다.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발굴된 옛 금관의 3분의 2가 우리나라에서 나왔다. 금관의 종주국!!

9. 현 상황
일제는 식민지 문화정책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왜곡하고 나중에는 아예 우리 역사에서 송두리째 들어냈다. 그 바람에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한 이후 단군조선의 역사는 그저 신화로 이야기되고, 한민족사는 이른바 위만정권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축소, 서술됐다. 개탄스러운 것은 그렇게 왜곡된 단군신화론 나아가 위만정권 이후 2000년으로 쪼그라든 한민족사가 마치 진실인 양 이 땅의 주류 사학자들에 의해 후세들의 뇌리에 뿌리를 박았다. 그들은 이른바 실증사학을 앞세우면서 일제가 남긴 식민사학의 해독을 이 나라에 퍼뜨려 왔다.
나라가 광복된 지 70년 가까이 됐어도 우리 역사는 광복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우리 눈을 가렸던 저 식민사관과 중화사관의 안대를 벗어버리고 한민족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9천년 한민족사는 신화 따위가 아니다. 힘겨운 고비는 많았지만 국통이 끊어진 적 없이 지금까지 생생한 현실로, 당당한 역사로 이어져 왔다.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이영희 님의 글을 퍼옴.

 Posted by at 9:23 AM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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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12014
 

“하늘은 한민족을 위해 『환단고기』를 내어 주셨다! 한민족의 장엄한 9천 년 역사 가운데 잃어버렸던 7천 년이 비로소 되살아났다.” 안경전安耕田 증산도 종도사는 일갈한다. 한민족사의 뿌리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7천 년 역사는 또한 어떤 것인가.

“일본 헌병들이 『환단고기』를 펴낸운초 선생의 사지를 잘라 압록강에…”

– 목숨 걸고 지켜온 한민족 9천 년의 정통 유일 역사서 『환단고기』


●대담 박정하 ■ ■ 본지와 대담하는 안경전 종도사

“독립운동가인 운초 계연수 선생은 우리 역사와 옛 문헌에 관심이 많았던 분입니다. 그가 여러 집안에서 소장되어온 신라, 고려조와 조선조 때 다섯 석학이 쓴 다섯 권의 옛 사서들을 한 권으로 묶어 펴낸 것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된 이듬해, 1911년의 일이지요. 운초 선생은 그로부터 9년 뒤 일제 경찰에 의해 처형, 아니 무자비하게 살해당합니다.”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한 후미진 골짜기.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혼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운초를 체포하고 운초와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 안경전 종도사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환단고기』도 포함돼 있었을 것입니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가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곧 처형해 버렸어요. 그것도 사지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습니다. 너희 조선 놈들 엉뚱한 생각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봐라, 그랬던 것이죠. 일제는 혹시라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인류의 시원역사가 되는 우리의 뿌리역사가 드러날까 겁먹은 나머지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우리 동포들이 눈물과 비탄 속에 한 점 한 점 수습을 했습니다. 목숨 걸고 지켜온우리 역사서 ― 『환단고기』압록강 가에서 사람들이 운초 시신을 수습하던 장면을 한 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열네 살, 그의 제자인 재야 역사학자로 활동하신 한암당 이유립 선생입니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
부터 배달의숙에서 운초에게 배웠어요. 물론 운초와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고요. 운초와 그처럼 깊은 인연을 가졌던 이유립은 스승의 장례 아닌 장례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어렵사리 보존된 『환단고기』 원본 한 부를 품에 안고 1948년에 월남했어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환단고기』의 생생하고 고귀한 내용을 전해 주었습니다. 오로지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다 내놓았던 이러한 분들의 위대한 희생과 노력 덕분에 오늘 우리가 『환단고기』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사를 대입 수능 필수과목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논란을 벌이더니, 지금은 국가 검정檢定교과서 8종의 현대사 부분을 놓고 우편향이다 좌편향이다, 이념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안경전 종도사는 “9천 년 한민족사 가운데 장대한 7천 년 뿌리가 뭉텅 잘려나갔는데도 역사학자나 제도권 인사란 사람들은 그것을 도외시한 채 그저 최근세사를, 그것도 좌우 어느 입맛대로 쓸 거냐 하는 정파 이해를 놓고 티격태격 싸운다.”고 개탄하면서, “그 또한 필요한 일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한민족 정신의 근원 바탕이요 기틀인, 뿌리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지난 100년이 아닌, 통째로 잃어버린 7천 년의 뿌리역사부터 엄정하게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한민족사의 뿌리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7천 년 역사의 내용은 또 무엇이고, 그 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안경전 종도사와의 세 번째 역사 이야기―『환단고기』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본다.

◎ ◎『환단고기』는 언제, 어떻게 쓰인 책인가요?
『환단고기』는 시대를 달리하는 다섯 석학의 글을 모은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것은 신라 때의 승려 안함로安含老가 쓴 『삼성기』입니다. 안함로는 안홍 법사, 안함 법사 등으로도 불렸던 인물인데 고려 때의 『해동고승전』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안함로는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세속의 속박을 벗어나 왕래와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동도성립기』라는 책을 지었다는 것과 이웃 나라들의 침입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경주의 대궐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문이 고국으로 귀국할 해 등을 모두 정확히 예견하
여 명성이 높았던 승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법만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사상과 역사에도 해박한, 유불선을 초월한 당대 최고의 도승이었습니다. 안함로의 『삼성기』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약간 차이가 있는 책이 원동중의 『삼성기』입니다.

원동중의 『삼성기』에서는 환국이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 치우천황과 배달국의 18세 환웅들의 역년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기록을 남긴 원동중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 이전에 살았던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세조실록』에 실린 금서목록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고려 때 사람이 아닌가 싶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책은 『단군세기』로 이는 47세에 이르는 단군조선의 연대기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혼자서 1,500년을 통치한 전설적 인물처럼 그려져 있지만, 『단군세기』에는 달리 47명의 단군들이 대를 다스린 2,0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들 47명의 단군들이 모두 같은 왕조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일부는 백성들의 추대를 받거나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들이지요. 『삼국유사』보다는 훨씬 더 사실에 충실한 역사서인 『단군세기』는 공민왕 12년(1363)에 행촌 이암이 썼다고 저자와 저술연도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책입니다. 행촌 이암은 고려 말의 고위 관료이자 학자로서 재상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그는 홍건적의 난이 끝난 후 관직을 물러나 강화도로 들어가 자신이 그토록 남기고 싶어 했던 우리의 상고사를 썼던 것입니다. 네 번째 책은 『북부여기』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역사서입니다.

이 책을 찬술한 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인 복애거사 범장입니다. 그도 이암처럼 고려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했는데 벼슬이 간의대부까지 올라갔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두문동에 은거하였습니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 임금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고향인 광주로 내려와 학문에 몰두했던 인물입니다. 범장은 벼슬하기 전 젊은 시절에 행촌 이암, 이명과 함께 소전거사라는 인물로부터 우리 역사기록이 담겨 있는 고서를 전수받았는데 아마 이러한 고서들이 그가 「북부여사」를 남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북부여기』는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으로부터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형식이 『단군세기』와 유사합니다. 다섯 번째 책은 『태백일사』로 조선 중종 때의 관리였던 일십당 이맥이능력이 있어서 천리 밖에서 싸우는 신라 군사가 전쟁에 패할 일, 삼국통일이 이뤄질 해, 왕자 김인편찬한 책입니다. 이맥은 고성 이씨로서 행촌 이암의 현손이었습니다. 『환단고기』를 우리에게 전수해준 이유립은 이맥의 직계 후손입니다. 『태백일사』를 소장하고 있던 해학 이기 선생도 고성 이씨로서 행촌 이암의 후손이었습니다. 고성 이씨는 이런 면에서 참으로 우리 역사에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이맥은 『태백일사』에 붙인 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간단히 적어놓았습니다. 연산군 때 괴산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곳에서 무료한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들과 또 자신이 찬수관으로서 있을 때 내각에 비장하고 있던 옛 사서들을 읽고 쓴 책이 『태백일사』였습니다. 『태백일사』에는 그가 여러 사서들에서 본 내용들을 그대로 전재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귀중한 상고사의 기록들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환단시대의 옛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등의 본문이 그 가운데 실려 있고 또 고조선의 일부였던 마한과 번한 통치자들의 명단과 역년이 실려 있습니다. 이맥은 자신이 쓴 책이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용납하지 못할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내놓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 이름을 ‘태백의 숨은 이야기’라는 뜻으로 ‘태백일사’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신라 진평왕 때부터 16세기 전반의 조선 중종 때까지 근 천년에 걸쳐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들이 우리의 주체적 사관에 입각해서 쓴 역사기록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1911년에 독립운동가면서 우리 역사와 고서에 관심이 많았던 운초 계연수 선생이 이 기록들을 한권의 책으로 모아 간행하였습니다.”

◎ ◎대부분 책 제목을 보면 그 뜻이 금방 와 닿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뜻도 모르겠고 해석도 쉽지 않습니다. 어떤 뜻을 담고 있습니까. 

“먼저 ‘환桓’은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하늘의 광명, 즉 천광명天光明을 뜻합니다. ‘환’은 지금도 자주 쓰는 말로서, “달빛이 환하다”, “대낮같이 환하다”라고 할 때의 ‘환’이 바로 이 천광명의 환입니다. ‘단檀’은 박달나무 단 자인데, 여기서 박달은 ‘밝은 땅’이란 뜻입니다. 달은 양달, 응달에서 알 수 있듯 땅을 가리키고요. 단은 곧 땅의 광명, 지광명地光明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환단은 천지의 광명입니다. 그리고 ‘고기古記’는 오래된 옛 기록이란 뜻인데, 『환단고기』 범례를 보면 고기의 인용이 『삼국유사』로부터 시작됐으나 지금은 고기를 볼 수 없어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단군세기』를 합본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환단고기』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기는 한민족사를 우리 손으로 기록한 옛 역사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역사 문화의 핵심이란 광명사관이기에 ‘환단고기’라 한 것입니다.

『환단고기』란 곧 천지의 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태곳적 한민족과 인류의 삶을 기록한 옛 역사이야기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또 이 하늘, 땅과 더불어 우주를 구성하는 인간의 광명, 인광명人光明을 따로 일러 ‘한’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한’ 속에는 환단, 즉 천지 광명이 함께 내재돼 있습니다. 인간은 천지가 낳은 자식이므로 그 안에 천지부모의 광명이 그대로 다 들어있는 것이죠. 한은 그 뜻이 수십 가지에 이르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천지광명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하늘, 땅, 인간의 밝음은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 “대시大始에…언제나 오직 한 광명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하나의 광명입니다. 그 빛이 3수 원리에 따라 셋으로 나뉘어 우주를 열었던 것이며, 『환단고기』는 우리 옛 조상들이 그 빛을 신의 모습으로 이해했다고 전합니다. ‘한’으로 산다는 것, ‘한’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내 안의 밝은 본성을 틔워 천지의 뜻에 따라 이 땅을 광명한 세상으로 이룩하며 사는 삶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는데, 『환단고기』를 『한단고기』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릇된 명칭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한은 인간의 내면에 깃든 무궁한 천지광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질은 동일하다 하더라도 환과 한은 분명 서로 구별돼야 합니다. 이 책의 제호가 반드시 ‘환단고기’여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환·단·한의 광명 정신은 동방 한민족 9천년 역사에 그대로 실현됐습니다. 환국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나라 이름들이 한결같이 광명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환국은 ‘환’ 그 자체고요,

배달은 ‘밝다’를 뜻하는 ‘배’와 땅을 뜻하는 ‘달’이 모여 ‘동방의 밝은 땅’을 뜻합니다. 고조선의 조선도 ‘아침 햇살을 먼저 받는 곳[朝光先受地]’을 가리킵니다. 고조선의 국통을 이은 북부여의 부여도 ‘불’이란 말로서 광명을 나타내고, 고구려 유민이 세운 대진국, 그리고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또 다른 이름 발해 역시 각각 ‘동방의 광명의 큰 나라’, ‘밝은 바다’를 의미합니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의 ‘대한’이란 말에도 ‘한’의 광명 정신이 어김없이 담겨 있으며, 오늘의 국호인 대한민국은 이 대한제국에서 나왔습니다.

더불어 각 시대 창업자의 호칭에서도 한·단·한의 광명 정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과 ‘단’이 들어 있는 환인, 환웅, 단군의 세 호칭은 모두 ‘광명문화의 지도자’를 가리키고,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성씨인 ‘해’ 또한 우리말로 광명의 태양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밝다’는 뜻의 박朴 자로 성을 삼았고, 이름에 ‘빛날 혁赫’ 자를 써서 광명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양조선의 이성계는 즉위 후 이름을 땅 위에 해가 떠오르는 모양의 ‘새벽 단旦’ 자로 바꿨는데, 이 또한 광명을 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계는 고조선의 영토와 문화를 회복하여 과거 한민족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웅지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것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새벽 단’ 자로 개명한 것이죠. 환국 이래 동북아 한민족의 모든 역사 과정은 실로 환단, 천지광명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기록한 책이 『환단고기』입니다.”

◎ ◎일제의 탄압과 한국전쟁 등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를 감안하면 『환단고기』가 그런 고비들을 넘어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과정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환단고기』가 편찬, 간행된 것은 조선이 일본에 망한 후 1년(1911)이 지난 때 였습니다. 『환단고기』의 앞에 붙어 있는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에 따르면 계연수 선생은 자신의 동지이자 벗인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지원으로 30부를 간행했다고 합니다. 범례에 ‘기궐剞劂’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목판에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유감스럽게도 원본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천우신조로서 『환단고기』가 이유립이라는 인물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유립 선생은 1907년생으로서 해학 이기의 제자이자 계연수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13세 때 삭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계연수를 위시하여 최시흥, 오동진 등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특히 교육운동에 뜻이 있어 33세 때에는 신풍학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1948년 남한으로 월남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남북한 간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아 북한을 두어 차례 더 왕래하였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내려올 때 『환단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때 사용했던 교재가 『환단고기』였던 것입니다. 이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종현梁宗鉉 씨가 필자에게 직접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양씨는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유립 선생에게 사사했던 분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은 1976년경에 분실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유립은 월간 『자유』지를 운영하고 있던박창암 장군(1923-2003)의 도움을 받아 의정부에 살고 있었는데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걸로 착각하고 집세 대신에 이유립 선생의 책들을 모조리 팔아버린 겁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환단고기』 원본이 사라지는 바람에 『환단고기』 위서론이 나오게 된 것이죠.”
◎ ◎그렇게 원본이 분실되기까지 했던 『환단고기』가 어떻게 그 내용이 보존되고, 또 대중에 알려지게 되었나요? “『환단고기』가 분실되기 전의 일입니다만 이유립 선생의 제자 가운데 오형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형기는 이유립 선생보다 10년 정도 연배가 젊은 사람이었는데 이유립 선생이 오형기의 형과 친한 터라 그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양종현 씨가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오형기가 이유립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를 빌려가 필사를 하게 됩니다. 오형기 말로는 이유립 선생이 자신에게 『환단고기』 정서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양종현 씨 증언으로는 오형기가 그 책을 필사하기를 원하자 이유립 선생이 허락하여 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형기도 그 책이 대단한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권 소장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요.

좌우간 이 오형기 덕에 『환단고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어요. 1979년에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환단고기』는 바로 오형기가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을 간행한 것입니다. 출판을 했던 사람은 이유립 선생의 문하에 있던 조병윤으로 스승의 허락도 없이 간행한 터라 이유립 선생이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가 필사본에 쓴 발문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이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아 1983년에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한 『환단고기』를 다시 간행했습니다. 배달의숙본이 나오기 바로 전해에는 가지마 노보루(鹿島昇)라는 일본인 변호사가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는데 이 일본어본이 역으로 국내에 수입되어 한국사학계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조병윤이 간행한 광오이해사본과 이유립 선생이 간행한 배달의숙본 모두 한문 원문만 실려 있는데 이후 여러 출판사들에 의해 『환단고기』 번역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 ◎아무리 이래저래 소실되고 분실됐다 해도 『환단고기』 말고도 지금도 전해지는 우리 고유한 사서들이 있기는 있을 텐데요. 이번 기회에 그런 사서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십시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지금 그 자취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습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입니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습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입니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습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환단고기』와 상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입니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합니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옵니다. 이들 고유 사서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음악, 국제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최고봉이라 하겠습니다.”

◎ ◎말씀해주신 사서들과 비교해 『환단고기』가 갖는독보적인 특징 같은 것들이 있겠지요?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지요.첫째, 『환단고기』는 동방 한민족 뿌리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한민족사의 유일한 사서입니다. 『삼성기 상』의 첫 문장은 ‘吾桓建國이 最高라(우리 환족의 나라세움이 가장 오래되었다)’하여, 한민족이 환국을 세웠으며 그 환국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삼성조三聖祖 시대로 묶어 전합니다. 이 7천년 삼성조 동안 역대 임금의 이름, 재위연수, 치적 등을 기록하여 한민족 시원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책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둘째, 『환단고기』는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맥을 명확하게 잡아줍니다. 『환단고기』의 5대 사서 가운데 『북부여기』는 특히 삼성조로부터 고려·조선에 이르는 우리 국통 맥을 바로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역사서입니다. 국통 맥의 잃어버린 고리인 부여사(북부여, 동부여를 비롯한 여러 부여의 역사)의 전모를 밝혀, 고조선 이후의 단절된 역사를 이어주기 때문입니다.

셋째,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고대 종교와 사상인 신교 삼신문화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배달과 고조선 시대에 신교의 삼신 원리에 따라 전도佺道, 선도仙道, 종도倧道라는 유불선 삼교의 모태가 되는 원형 삼도가 출현하였습니다. 유불선과 신교문화를 회통한 안함로安含老를 위시한 『환단고기』 집필자들에 의해 동북아의 원형 문화이자 인류의 시원 문화인 신교문화는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신교는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신앙입니다. 환국, 배달, 고조선 시대 이래로 우리 조상들은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려 그 은혜와 덕을 칭송하고 상제님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넷째, 『환단고기』는 하늘, 땅, 인간 즉 천지인 삼재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 줍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을 『환단고기』는 신교의 신관, 인간관, 우주관, 역사관에 바탕하여 종합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신과 기, 신과 천지인, 천지와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의 탄생 원리 등의 심오한 진리 주제를 총망라하여 싣고 있는 철학 경전이요 문화 경전이라 하겠습니다.

다섯째, 『환단고기』는 천지와 인간의 광명정신인 환桓, 단檀, 한韓의 원뜻을 밝혀줍니다. ‘환’은 ‘하늘의 광명’이요, ‘단’은 ‘땅의 광명’이므로, ‘환단’은 ‘천지의 광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천지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천지 부모의 광명을 그대로 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광명人光明인 ‘한’입니다. 이 ‘한’ 속에는 ‘환단’, 즉 ‘천지의 광명’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환단’은 천지 광명의 역사를 드러냈던 시원역사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환단고기』는 삼성조 시대의 국가 경영 제도를 전하는 사서로서 만고불변의 나라 다스림의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신교의 삼신문화가 국가 경영 원리로 정착된 가장 결정적인 제도는 다름 아닌 고조선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입니다. 대단군이 중앙의 진한을 다스리면서 두 명의 부단군을 두어 번한과 마한을 다스리게 한 이 제도는 고조선 국정 운영의 핵심 제도였습니다. 고조선은 삼한관경제의 성쇠와 운명을 같이 하였습니다. 『환단고기』는 우리 상고시대의 정치를 드러내주는 정치학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일곱째, 『환단고기』는 배달과 고조선의 문자 창제를 기록하여 한국이 문자 문명의 발원처임을 밝혀줍니다.문자는 문명 발상의 필수 요소로서, 한민족은 배달시대부터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초대 환웅천황(BCE 3897~3784)이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을 창제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문자로 평가받는 BCE 3,000년경의 쐐기문자(수메르)와 상형문자(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세계 최초의 문자입니다. 고조선 3세 가륵단군은 이 문자를 수정 보완하여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가림토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창제된 한글과 매우 흡사합니다. 여덟째, 『환단고기』에는 상고시대 한민족의 대외 교섭사와 함께 중국과 일본의 왕조 개척사가 밝혀져 있습니다.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적지 않은 기록들이 나옵니다. 중국의 고대 왕조 요·순 시대뿐 아니라 하·상(은)·주 3대 왕조와의 대외교섭사가 나옵니다. 고조선은 하·상(은)·주 왕조들의 개국 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 예가 단군왕검이 치수治水법을 우禹에게 가르쳐주어 당시 중국을 괴롭히던 9년 홍수를 성공적으로 다스리게 하여 그 공으로 하나라를 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백일사』에는 아직도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 일본의 개국 과정을 밝힐 수 있는 단서들이 실려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환단고기』는 왜곡된 한·중·일의 고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입니다.”

◎ ◎『환단고기』가 그처럼 가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선뜻 받아들였을 텐데, 어떤 까닭인지 당장 우리 역사 교과서에 언급조차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서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습니다. 이 두 사서가 중요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편 사서 집필에 있어 사대주의적 관점이나 신라중심의 서술 등의 문제점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환단고기』는 기존의 사서와는 다른 파격적인 내용과 상세한 기술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내용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고조선의 성립 기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라든가 47대에 이른 단군의 명칭과 재위년도 등은 고조선을 지금으로부터 겨우 2,700년 전에 건국된 청동기 시대 부족국가로 보는 식민사학의 논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역사학계에서 볼 때 『환단고기』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박병섭 박사가 지적하듯이 그들은 이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축소 지향적으로 접근하여 그 가치를 폄하하고, 『환단고기』의 허점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고 침소봉대하여 『환단고기』 전체를 근세에 지어낸 책이거나 조작된 책으로 낙인찍으려 했습니다.

강단사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환단고기』 위서론’이라고 부릅니다. 위서론이라고 하면 무언가 학술적인 이론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논리적 관점이나 학술적 논증이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해 온 『환단고기』 역주본 작업을 마무리 지으면서 지금까지 학계에서 발표한『환단고기』 진위 논쟁에 대한 세미나 자료와 논문, 서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체계적으로 점검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위서라는 주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환단고기』의 소중한 가치가 정말 부당하게 흠집이 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주류 강단사학계가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위서론자들은 책 제목인 『환단고기』의 뜻조차 모르고 있으며, 『환단고기』를 단 한 번도 깊이 있게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불선 경전을 비롯한 동북아의 고전과 인류의 시원 종교인 신교의 우주론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위서론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환단고기』는 조작된 책이라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범례에서도 나오듯이 이 책은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입니다. 『환단고기』를 이유립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 발문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유립의 제자 양종현은 원본 책을 직접 본 사람인데, 책의 제목이 ‘『환단고기』’라고 분명히 증언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 방대한 역사적 내용들을 시기적으로 정합할 수 있도록 창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둘째,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환단고기』에 근대 술어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국가·문화·평등·자유·헌법·인류·세계만방·산업 같은 근대용어가 쓰였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는 최근세에 쓰인 책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서에 현대에서만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면 당연히 그 저술 연대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근대술어라는 것이 고대에도 사용된 전거들이 무수히 발견됩니다. ‘문화’나 ‘인류’는 최소한 1,600년 전부터 고전에서 사용되었으며, 구마라습鳩摩羅什의『금강경』에는 ‘평등’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주역』에서는 ‘국가’, 전국시대 역사서인 『국어』에서는 ‘헌법’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을 돌이켜보면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와 다소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시원 역사,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韓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계연수가 처음 펴낸 후 70년이 지나 이유립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환단고기』를 다시 펴낼 때 가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도적인 조작과 첨삭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꼭 이뤄져야 할 보정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보정도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아주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넷째, 후대의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사서들을 표절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는 자명한 것입니다.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還至 17세손世孫’에 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 특히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구려 900년 설’의 진실은 오직 『환단고기』와 대조,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섯째,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라는 『세조실록』의 기록은 보지 않고 그보다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합니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만 지적하더라도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양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태도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꼬투리를 잡다보니 ‘잠청배’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잠청배는 원래 이암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인데 원나라 간섭기 때 고려 인물로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과 류청신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위서론자들은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하여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 지식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낸 주장입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입니다.”

◎ ◎제도권 사학자들이 위서론을 들면서 『환단고기』와 그 내용을 외면하려 한다면 거꾸로 그 내용이 진실임을 보여주는, 가령 ‘진서론’ 같은 주장도 충분히 있지 않겠습니까.“진서론이란 말이 어폐가 있는데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정통 역사서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체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 뿐입니다.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굳이 증명하라고 한다면 중국, 일본, 중동 등지의 고대사 역사 현장을 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곳을 답사해 보면 『환단고기』는 진실이 가득 찬 역사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과 인류의 잃어버린 태고 역사를 되찾아 줄 유일한 역사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최근 중국 정부에서도 인정한,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문명이자 동북아 창세시대의 문명인 홍산문화(일명 ‘발해연안문명’) 유적지에 가본다면 『환단고기』의 내용이 유물과 유적으로 증명됨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위서론자들이 그곳에 가봤는지 물어보고 싶네요.

물론 위서론이 하도 판을 치니까 여러 학자들이 그에 맞서 『환단고기』의 내용을 검토하여 진서임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를 진서론으로 부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몇 가지 주장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먼저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을 지금의 과학을 통해 증명한 것입니다. 천문학자인 박창범, 나대일 두 교수는 천문현상기록을 근거로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입증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시대에 일어난 천문현상에 관련된 기록만도 12회나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기록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BCE 2333년까지 역추적하여 실제 일어난 자연현상과 사서에 나타난 기록을 과학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사서의 기록이 진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한 예가 BCE 1733년 흘달屹達단제 50년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기록입니다. 오성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5개 행성들이고, 루는 24수 중의 하나로 그 주성主星은 양자리의 베타별(β Aries)입니다. 그 두 과학자들이 검증한 결과 BCE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태양으로부터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 등이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 장관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고, 또 한 번은 1953년 2월 25일 새벽에 한 번 있었다고 합니다. 행성결집현상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인데 이를 감안해 볼 때 단군조선 때의 기록은 1년 차이지만 주목할 만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 29세 단군 마휴 9년(BCE 935)에 “남해의 조수가 석자나 물러났다[南海潮水退三尺].”이라는 기록이나 일식기록에 대한 기록도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검토는 『환단고기』가 최근에 저술된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명백한 반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그 내용이 유물로 입증된 사례도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장수왕의 연호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이 1915년에 발견된 불상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서 입증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건흥 연호가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역사기록의 진실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를 과학적 용어로 검증이라고 합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밝혀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됩니다.

천남생묘지 비문도 그러한 예가 될 것입니다. 천남생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의 큰 아들입니다. 그의 묘비명이 1923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 할아버지 태조, 증조부 자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태백일사』가 『조대기』를 인용하여 밝힌 기록과 일치합니다. 이 책은 여기에 남생의 고조부, 즉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 17세손’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환단고기』를 보면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됩니다. 『환단고기』에는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제1세 해모수(BCE 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추모(고주몽, 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몽의 선조는 해모수이며 그로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7세가 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도 광개토대왕비도 모두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환단고기』가 해명해준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환단고기』가 후대의 창작이 아닌 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알려주는 여러 증거들이 『환단고기』 자체 내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그 증거들을 일일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왜 자세히 연구하고 검토하지 않고 굳이 위서라고 낙인찍는가 하는 것입니다. 『환단고기』 연구는 완전히 새로 출발해야 합니다. 민족사학자이건, 역사학계의 주류 사학자이건 누구라도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우선 『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열린 태도와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 ◎화제를 좀 돌려서, 종도사님과 『환단고기』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어떻게 처음 책을 접하셨습니까. 또, 직접 역주본을 내신 계기나 이유는 어떤 것입니까.

“이유립 선생과 나의 선친인 안운산 증산도 태상종도사님은 같은 대전에서 살았고 또 우리 역사되찾기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이유립 선생이 펴냈던 『커발한』이라는 잡지도 굴러다니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10대 소년시절부터 우리 시원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환단, 삼한관경, 삼신일체 등 국사책에서는 볼 수 없던 말들이 어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죠. 그래서 박창암 장군이 간행했던 『자유』지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유립 선생의 역사논문들이 많이 실렸어요. 그러다 내가 『환단고기』 원본을 처음 접한 것은 20대 후반이었던 1980년대 초예요. 내가 이 책을 처음 손에 넣은 날, 그 감동을 잊을 수 없어요. 밥상에 흰 종이를 깔고 경건한 마음으로 정신없이 책을 읽다보니 어느덧 동이 터왔습니다. 우리의 뿌리 역사와 원형문화가 이 책에 담겨 있음을 확인하고 그야말로 전율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또 내가 몸담은 증산도에서 이 책을 교재로 삼아 원문강독을 했지요. 내가 1983년에 낸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은 상당한 수의 독자들에게 읽혔는데 이 책에도 『환단고기』의 내용의 핵심 몇 가지를 소개하였습니다. 그 후에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원문 번역을 하고 동서양의 연관서적들을 수집하며 틈틈이 역사현장 답사를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환단고기』에 입각하여 우리 역사를 한번 정리해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한의 뿌리와 미래』라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어요. 이 책은 근 천 쪽에 달하는데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이제까지 많은 출판사들이 『환단고기』를 번역, 간행했지만 나는 무엇보다 이 책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의 번역만으로는 미흡하고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상세한 주석과 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해제를 작성하다보니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말할 것도 없고 환국과 연관된 수메르문명과 히브리문명, 배달시대의 동이족 문화인 홍산문화, 고대 동북아시아의 주역이었던 동이족, 고조선 시대부터 한민족과 밀접한 연관을 가져온 북방유목민족, 고조선문화와 연관성이 높은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 우리 옛 신교와 연관된 서양의 신관 등 여러 문제들을 파고들다보니 해제의 분량만 약 600쪽이 되었어요. 글쎄 이렇게까지 방대한 해제가 필요할까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환단고기』와 연관된 역사문제를 누군가는 폭넓게 다루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작용한 것이죠. 이 책을 간행하고 나서는 인생의 큰 짐을 하나 벗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제 이 책을 우리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번역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원본의 영어번역은 상당히 진행되어 끝난 상태지만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환단고기』는 그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 안에 우리 옛 문화의 원형, 신교사상이 들어 있는데 번역하기가 만만치 않아요.”

◎ ◎종도사님께서 상고시대 이래 우리 한민족의 종교이자 생활문화인 이른바 ‘신교神敎’ 사상을 바탕으로 『환단고기』 역주본을 풀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신교’ 혹은 신교사상이란 어떤 내용인가요.
“우리 민족에게 유교, 불교 등이 들어오기 전 고유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과 가르침의 근본이었으며 일상적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을 신교라 부릅니다. 신교는 문자 그대로 ‘신의 가르침’을 뜻하고, 구체적으로는 ‘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교라는 말은 『환단고기』에 실린 『단군세기』의 ‘이신시교以神施敎’, 조선 숙종 때 북애자가 저술한 『규원사화』의 ‘이신설교以神設敎’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교는 달리 풍류風流라고도 불렸는데, 신라의 지성 최치원 선생은 난랑鸞郞이란 화랑을 기리는 비문에서 우리민족 고유의 신앙인 풍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나라에는 지극히 신령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하며, 유불선의 기본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다.’

신교는 환국 시대 이래 환족의 이동과 함께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 나가 수메르 문명, 인디언 문화 등 인류 정신문화의 뿌리를 이루게 됩니다. 인류 고대 문명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수록 태곳적 인류의 공통된 기층문화인 신교의 실체가 뚜렷이 드러나고, 인류 역사란 곧 신교 확장의 역사임이 밝혀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신교는 요컨대 인류의 시원종교며 원형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교에서 받드는 신은 누구일까요? 그 분은 인간과 천지만물을 모두 다스리는 통치자 하나님인 삼신상제님입니다. 창세 이래 우리 한민족의 신교문화권에서는 천상의 하느님을 ‘상제님’ 또는 ‘삼신상제님’이라 불러왔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삼신과 한 몸이신 상제님)’ 또는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삼신은 곧 한 분이신 상제님)’라 하여 우주 통치자 하나님의 존재와 본래 호칭을 더욱 더 명확히 알려줍니다.

여기서 삼신이란 우주의 근원인 신성을 말합니다. 대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주된 근거를 이르는 것이죠. 삼신은 우주 만물은 낳아 기르고(造化) 깨달음을 열어 주고(敎化) 질서 있게 다스려 나가는(治化) 방식으로 작용하기에 석 삼三자를 붙여 삼신이라 이릅니다. 이 신의 본질은 광명으로서 앞서 ‘환단’의 설명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천광명, 지광명, 인광명으로 나뉘어 하늘, 땅, 인간과 만물의 생명으로 그 안에 깃듭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 땅, 인간은 각기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삼신에게서 부여된 신성과 광명을 가진 삼위일체적 존재가 됩니다. 나아가 천, 지, 인이 살아있는 삼신입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은 단순히 피조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물주인 그 신의 자기 현현인 것입니다.

우주 통치자 하나님은 이 삼신의 조화권능을 써서 현실 세계를 맡아 다스리시기에 삼신상제님, 삼신일체상제님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신교문화의 우주 사상은 한민족의 3대 경전에 전하고 있는데, 신교 우주관의 정수를 기록한 「천부경天符經」, 신교의 신관이 집약된 「삼일신고三一神誥」, 신교의 인간론을 담은 「참전계경參佺戒經」이 그것입니다. 일찍이 우리 민족은 천제天祭를 올려 상제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천제는 고조선 22세 색불루 단군 때의 제문祭文에서 알 수 있듯, 상제님께 폐백을 바쳐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번영을 기원하며 상제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국가 행사였습니다. 천제를 올린 뒤에는 모든 백성이 음주와 놀이를 즐기며 대동과 소통을 도모하는 제전祭典의 장을 열기도 했습니다. 9천년 역사의 첫머리인 환국을 연 환인천제를 시작으로 역대 통치자들은 천제 봉행을 국가 경영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환인과 환웅의 제천문화 전통을 계승한 고조선의 역대 단군은 매년 봄 대영절大迎節(음력 3월 16일)에 강화도 마리산에서, 가을(음력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서 천제를 거행하였습니다. 천제문화는 그 후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고려 때 국가 최고의 의례인 팔관회 역시 불교 행사가 아니라 신라 때부터 이어져 온 제천행사였습니다. 한민족의 제천행사는 비록 일시적인 단절을 겪기도 하지만, 마지막 왕조 조선과 대한제국(1897~1910)에 까지 이어집니다. 한민족은 환국 이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그 은혜와 덕을 칭송하는 한편 상제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해온 것입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제천단인 강화도 참성단, 태백산 천황단, 지리산 노고단 등은 천제문화의 흔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상고 시대 우리 조상들은 천제를 소도蘇塗라 불리는 신성한 곳에서 올렸는데 아직도 드물게 마을 어귀에서 볼 수 있는 솟대는 소도의 풍습이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천제문화의 유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민족의 천제문화는 일찍이 중국 땅으로 전파돼 중국의 역대 왕들도 천제를 봉행하였습니다. 중국의 대표적 역사책인 『사기』의 「봉선서封禪書」는 춘추 시대까지 72명의 왕들이 현 산동성의 태산에 올라 천제를 지냈다고 전합니다. 산동성은 원래 배달 시대 때 동이족들의 주된 근거지 중 하나였던 곳입니다. 지금도 태산 꼭대기에는 옥황대제玉皇大帝라는 위패를 써 붙인 황금빛 상제님 상像을 모신 옥황전玉皇殿이 보존돼 있습니다. 대진국 이후 만주 땅에 세워진 요나라, 금나라 등 북방민족도 한민족의 제천풍속을 받아들여 국가행사로 거행하였습니다. 또한 천제문화는 일본으로 전해져 신사神社 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밖에도 신교가 퍼져나간 세계 각처의 문화권에서 모두 제천을 행한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수메르 문명과 이집트 문명, 중남미 마야, 아즈텍 문명의 지구라트와 피라미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교의 핵심은 신의 뜻을 지상에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의 뜻은 하늘을 대신하여 다스림을 폈던 통치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홍익인간으로 요약됩니다. 홍익인간은 환인천제로부터 환웅에게로 이어진 국가 통치이념으로서 이를 고조선의 국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홍익인간의 뜻은 무엇보다도 고조선 11세 도해道奚 단군이 선포한 염표문念標文에 들어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의 풀이를 통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신[일신]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 사람의 성품은 삼신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 인간은 누구나 우주 광명과 통해 있는 신령한 존재이니 삼신의 가르침으로 일깨워서 천지의 뜻과 대이상을 펼치는 존재가 되게 하여 이 세상을 광명한 세계로 만들어라. 이것이 홍익인간의 궁극입니다. 홍익인간의 도를 실천할 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위격이 마침내 바로 서게 됩니다.

요컨대 한민족의 나라 다스림과 가르침, 또 생활문화의 중심이었으며, 나아가 인류의 정신문화의 기층을 이뤘던 신교의 대강령은 삼신상제님을 받들고 그 뜻에 따라 나와 이웃이 홍익인간으로 열매 맺는데 있습니다. 신교의 우주 사상, 인간론 등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환단고기』에 대해,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이제 『환단고기』와 관련하여, 군軍과일반 독자들에게 강조하시고 싶은 말씀으로 오늘자리를 마무리해 주십시오. “먼저 국민 각 개개인이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고유 역사서들을 찾아서 많이 읽고 주위에 소개하고 해야 합니다. 역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뿌리를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 조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과 중국은 우리 역사를 도둑질하고 뿌리를 잘라내고 있습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이에 대응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 우리 민족과 문화의 시원을 부정하고 국가의 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역사에 무관심할수록 이러한 일은 더 자주 더 심각하게 발생할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고, 참 역사를 찾고 가르치는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두 번째로는 『환단고기』가 가진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환단고기』가 우리 상고사를 정확히 전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환단고기』는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환단고기』는 우리의 종교와 문화와 철학을 온전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우리 시원종교와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환단고기』가 없었다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9천년 민족혼의 참모습이 들었기 때문에 『환단고기』의 가치는 더 높이 평가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환단고기』를 단지 한민족의 역사서로 한정해서 볼 것이 아니라 인류 창세문화의 원전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즉 『환단고기』는 인류의 기원과 문화의 뿌리를 전하는 창세기록이며 신교문화의 성전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 『환단고기』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삼성기』는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 문장은 동서양 4대 문명권의 발원처가 되는 인류 창세문명의 주체를 밝힌 짧지만 매우 강력한 문장입니다. 그 주체는 바로 ‘오환건국’이라는 말에 나오는 환桓으로, 한민족의 시원 조상인 환족을 가리킵니다. 오늘의 인류 문명은 바로 우리 환족이 세운 환국에서 비롯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을 반도사관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사서와는 달리 대륙의 지배자이자 세계문화의 창시자로 기록하고 있는 『환단고기』에서 누구나 가슴 떨리는 감동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역사서라는 울타리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뿌리 역사와 원형문화의 교과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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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제갈공명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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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042014
 

삼국지 ‘제갈공명의 허상’
제갈은 제 나라가 50년 후에 멸망하는 것도 몰랐다.

장병영 칼럼니스트
제갈공명 (諸葛孔明)은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승상. 양야양도(山東省沂水縣) 출신. 본명이 양(亮)이어서 제갈량이지만 자(字)인 공명(孔明)이다.

“제갈은 제 나라가 50년 후에 망한다.”는 사실도 예언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무학대사’와 ‘도선국사’는 ‘고려의 500년’, ‘조선의 500년’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나관중이 ‘중국 삼국지’에서 ‘제갈’이나 ‘사마의(司馬懿)’의 뛰어난 활약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춘추필법’으로 병들게 했는데, 과연 그 시점의 고구려는 어떠했을까?

제갈이 위나라의 사마의에 의해 처참한 패배 끝에 결국 생을 마감하고, 사마의는 서안평의 전투에서 고구려의 국상 ‘명림어수’의 치밀한 전략에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삼국지연의’의 위 ․ 촉 ․ 오는 창업에서 패망에 이르기까지 60년이 채 안 되는, 중국에서도 가장 치욕적인 역사이다.

‘진수의 삼국지’를, 나관중이 그럴듯하게 윤색하여「삼국지」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를 현혹시키며, 중화사상을 퍼뜨리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이다. ‘삼고초려’도 나관중의 머리에서 나온 허구다.

제갈이 사마의와의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하면서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 후의 일이다.
위나라에 반기를 든 공손연을 토벌하기 위해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했고, 동천왕은 흔쾌히 군을 출동시킨다.

그렇지만 ‘동천왕의 속내’는 다른 곳에 있었다. 위나라를 도와주는 척 하면서, 그 혼란을 틈타 ‘대무신왕’ 때 이미 정복했던 ‘화북'(북경을 포함한 인근지역)을 되찾으면서, ‘요서로의 진출’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위나라 군에 쫓기는 반란군을 가볍게 물리친 고구려 군은 쉽게 서안평을 점령했다.

서안평에 주둔한 고구려군은 토벌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물리지 않았다. 이에 사마의는 환도성으로 사신을 보내 군사를 물릴 것을 요구했지만, 동천왕은 차일피일 미룬다.
그러는 사이, 위나라의 명제가 세상을 뜨고 변경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는 틈을 타서, ‘동천왕’은 드디어 서안평을 고구려 영토로 선포하기 이른다.

이에 놀란 ‘사마의’는 조카 ‘사마강’으로 하여금 고구려 정벌군을 출동시키며, 세세하면서도 치밀한 전략을 하달하지만, 사마의 전술과 전략을 간파한 ‘고구려의 국상 명림어수’에 처참한 참패를 당하고야 만다.

그에 대한 복수로 유주자사 관구검으로 하여금 재공략에 나서게 했고, 동천왕의 과욕으로 생긴 허점을 찌른 관구검은 환도성을 짓밟지만,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결국은 퇴각하고야 만다.

삼국지는 중국의 역사는 알아도 우리 역사를 모르게 만들었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뿌리깊이 심어주었다.

위 ․ 촉 ․ 오는 창업에서 패망에 이르기까지 60년도 안 되는 역사의 나라다. 세 나라 간에 온통 속이고 속이는 추악한 권모술수로 점철된 역사를 어떻게 당당하게 정도를 걸어온 천년에 가까운 고구려 역사와 비교를 하는가?

어떻게 그런 추악한 권모술수로 점철된 내용을, 우리에게 처세의 명저로 행세하며, 내일의 주역들인 아이들에게 논술 필독서로 권하는가?

일본이 무력으로 독도를 침공한다는 가상적 설정으로 쓴 소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작가 김 진명은, “전설적 작가’들은 앞을 다투어『삼국지』를 편역하여 내고, 사회에서도『삼국지』를 읽지 않으면 이단아나 저능아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이러고서야 어떻게 저들의 동북공정을 격파하겠는가?” 라고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는 “16년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遼東 : 郡)의 서안평현(西安平縣: 지금의 安平洞 유역)을 습격하여 깨뜨렸다”라고만 나와 있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1406&section=section78&sect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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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와 고성 이씨家의 오랜 인연

 역사  Comments Off on 『환단고기』와 고성 이씨家의 오랜 인연
Mar 132014
 

『환단고기』의 있고 없는 것은 이처럼 민족사의 사활과 관련되는 것이다. 고성 이씨 가문이 환단고기와 만나는 것은 고려가 몽고침략을 받는 시기부터 시작된다. 이존비李尊庇(1233-1287)는 어느 날 왕자를 가르치는 서연書筵에서 고려의 자주부강론을 역설한다. “우리나라는 환단 이후 북부여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부강하고 자주독립을 지켜온 나라인데 최근 원(몽고)의 내정 간섭으로 나라에 사대주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자주오사自主五事를 상주하였다. (태백일사 고려국 본기)

이존비의 자주독립론을 이어받은 사람이 행촌 이암(1297-1364)이었다. 이암은 이존비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와 똑같은 자주책을 임금에게 상주하고 1) 태백진훈 2) 도학심법 3) 농상집요農桑集要 등 행촌삼서杏村三書를 남겼다. 지금까지 이암에게 삼서만 있다는 사실만 전해지고 그가 남긴 『단군세기』는 숨겨져 있었다. 이암이 『단군세기』를 비롯한 여러 비서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일처럼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천보산天寶山에 올라갔을 때 소전이란 사람이 태소암에 진서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말을 하여 가서 읽어 보니 모두가 환단 시대의 신서神書와 진결眞訣이었다는 것이다. (고려국 본기 제8)

또 한 분, 고성 이씨 문중에 이맥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 연산군과 중종 때 사람으로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아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하도 무료하여 집에 고이 간직했던 고서와 이웃 고노들에게서 들은 구전口傳 그리고 자신이 관직에 있을 때 발견한 내각의 비밀문서들을 참고하여 『태백일사』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이맥이 후손들에게 이 책을 비장(숨겨 보관함)하라 일렀다.

그러니 『태백일사』는 500년간이나 고성 이씨 문중에 비장된 것이다.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의 핵심부분을 이룬다. 만일 이 책이 보존되지 않고 사라졌더라면 민족사는 회복할 길이 없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맥은 물론 그 후손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모르는 일이다.

이암과 이맥이 남긴 비서는 한말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 1909)에 의해 공개되어『환단고기』(1911년)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원본은 지금 없다. 그러나 원본은 분명 이기와 그 제자 계연수가 읽었다. 대종교와 단군교를 중광한 나철(弘巖 羅喆 1863- 1916)과 정훈모도 읽었다. 이기 나철 그리고 정훈모는 각기 다른 이름의 종교단체를 조직하였으니 이기는 단학회, 나철은 대종교, 그리고 정훈모는 단군교를 창설하였고 단학회를 계승한 이기의 책은 이유립에게 전수되었다.

이유립은 광복 후 『커발한』이란 신문에 『환단고기』원고 일부를 발표하던 중 일본의 재야사가 녹도승(鹿島昇)에게 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건네주었는데 녹도승이 원고를 넘겨받아 신의 없이 약속을 깨고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내고 말았다.

이존비, 이암, 이맥, 이기 그리고 이유립 등 고성 이씨 문중에 전해 내려 온 경위는 위와 같았으나 출판되어 나온 것이 너무 늦어 세상 사람들이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역사에 불만이 많았던 분들은 크게 환영하여 국론이 딱 둘로 갈라졌다.

북한학자들이 『환단고기』를 인용하고 대한민국에서도 단군학회가 조직되어 활발히 상고사를 연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불안하다. 대학의 강단을 점령하고 있는 한국사 교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멈칫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고 『환단고기』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였기에 그렇게도 말이 많았는가 하는 이야기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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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의 저자, 이암李嵒

[고려사] <열전>에 올랐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그가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행촌 이암(1297~1364)

그는 뛰어난 학자와 관리가 배출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으며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

에 급제하여 文翰학사 및 進賢館 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의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할아버지 이존비의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후손이 바로 행촌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강화도 마리산의 보제사에 들어가 3년 동안 유가의 경전과 우리 고

대사에 대한 기록을 탐독하였다.

 

부모님이 그리울 때면 마리산 꼭대기의 참성단에 올라, 수천 년 전 그곳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단군왕검의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겼다. 그 때 지은 시①를 보면, 십대의 어린 나이에 나라의 평안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염

원을 세우고 있다.

 

17세(1313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암은, 고려가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던 시기의 여덟 국왕 가운데 여섯 분을 모시

면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충선왕 때 나라의 관인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시작하여 두 차례 유배를 당하고, 왕의 책봉

을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62세(1358년) 때 공민왕의 부

름에 환도하여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개혁군주이다. 그러한 공민왕의 곁에 이암이 있

었다. 문하시중이 된 그 다음 해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적군 4만 명

을 격퇴시켰고, 1년 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경북 안동으로 피난가는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임금 앞에서 자신을 ‘臣’ 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친원파의 간신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암은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권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홍건적을 격퇴하고 왕을

호종한 공로로 좌정승에 제수되기까지(1361년) 했지만, 공민왕의 부름에 응한 지 5년 만에(1363년) 사퇴하고 야인

이 되었다.

 

행촌에게는 고려와 조선의 여느 정치가, 학자와는 남다른 면모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 서적만이 아니라 동서

문화의 원류인 신교 사서를 탐독하여 신교의 삼신문화에 정통하였다. 첫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3년을 보낼 때도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 등을 연구하는 독서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나(1335년) 천보산 태소암

에서 1년간 머물 때, 소전素佺거사②로부터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환국-배달-조선)시대를 lrfhr한 고서

적들을 전수받았다. 신교문화에 통한 이암을 소전거사가 알아보고서 석굴 속에 감춰져 전해오던 사서를 전해준 것이

다.

 

이암은 나중에 그것을 근거로 <단군세기>를 쓰고, 당시 소전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 <태

백진훈太白眞訓>을 지었다. 이때 복애거사 범장과 청평거사 이명도 소전거사에게 비기秘記를 전수받아, 범장은 <북

부여기>를, 이명은 <진역유기>를 저술하였다. <단군세기>와 함께 이 사서들은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문화의 본래 면

목을 드러낸 소중한 문헌들이다.

 

이암이 언제부터 <단군세기>를 집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그는 67세(1363년)에

사직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건너가 선행리 홍행촌에 海雲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단군세기>의 마지막 손질에 혼신

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③

 

민족의 현실을 통탄하며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웅변하는 <단군세기> 서문에서 그는 ‘인간은 어떻

게, 왜, 무엇을 위해 생겨나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멋진 삶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명쾌한 필치로 밝

히고 있다. 인성론을 중심으로 신교의 역사관을 정리한 이 서문은 대학자로서의 지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만고의 명문장이다. 행촌 이암, 그는 동방 한민족의 역사를 유교사관도 불교사관도 아닌 한민족 고

유의 신교사관으로 저술한, 신교사관의 정립자이다.

 

<태백일사>의 저사, 이맥李陌

이맥(1455~1528)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며 행촌 이암의 고손자다. 1474년(서종 5) 진사시에 합

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

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이때 장숙용(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내세워 분에 넘치는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결국 괴산에 유배되었다(1504). 귀양살이 시절에, 집안 대대로 내려

오던 책들과 노인들에게서 채록한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높은 관직을 제수받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 때문

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에 머물렀다. 이는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 내에 적이 많았던 때문으로, 1517년(중종

12)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에 그가 취한 입장에서도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그는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

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 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66세 때인 1520년,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인 찬수관撰修官이 디어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

여 궁궐 깊이 감춰 둔 상고 역사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금서들의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시절에 정리해둔 글들

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태백일사>, 즉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④의 역사’ 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서 벗어나는 학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로 인해 그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태백일사>는 한민족의 7천 년 상고 역사를 환국, 배달, 고조선 각 시대별로 세밀하게 다루면서 당시 신교 문화의 신

관, 우주관, 인간관, 역사관, 윤리관을 조목조목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교 문화 역사서의 완결본인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가히 한민족 신교문화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 )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세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
「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 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24세인 1930년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 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1942년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등
12항을 이유로 강제 폐쇄 당했다.

39세인 1945년
「단학회(檀學會)」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69세인 1975년 5월 8일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東源論)》을
미국의 하버드. 워싱턴. 콜롬비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 갔다.

70세인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제씨와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하신 이듬해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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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비극

 교육, 역사, 페이스북  Comments Off on 우리 역사의 비극
Jan 222014
 

우리 역사의 비극.

우리는 대동단결을 이룬 적이 별로 없다. 사회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

1. 자신의 사익만을 추구하는 기득권을 가진 힘센 보수꼴통들
2. 역사를 진보시키지 못하는 허약한 진보세력들
3.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을까 눈치보느라 무관심한 척 하는 중간의 백성들

세종시대의 융성도 한세대를 넘기지 못하고 뒤집어졌으며 정조의 개혁도 보수꼴통들에게 금세 뒤집혔다. 자신의 이익이 우선인 권력자 무리들이 일제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나라를 팔아넘겨 일제시대의 치욕을 겪게 했다.

지금의 우리 역사는 어디쯤 있는가? 후세들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가?

건강한 시대정신을 가진 몇십, 몇백년의 꾸준한 대동단결을 이룬다면 세계 정상의 문화국가가 될텐데 이런 꿈이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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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갔을까?

 교육, 소셜네트워크, 역사  Comments Off on 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갔을까?
Jan 062014
 

글을 퍼오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데, 널리 퍼지면 좋은 글일 듯 하여 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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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중에 일부분인데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대략 우리가 좀 비루하게 인식하기도 하는 조선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가 하는 부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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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 여기서부턴 수학에 관한 내용인데, 관심있는분만 읽어보셔요 ————-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2차 출처: http://baseballpark.co.kr/bbs/board.php?bo_table=bullpen3&wr_id=290837

http://dotty.org/2699099

http://baseballpark.khan.co.kr/bbs/board.php?bo_table=bullpen3&wr_id=290837

2차 저자: 네로울프

원출처: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중

 Posted by at 6:51 AM

백년전쟁 – 프레이저보고서

 역사  Comments Off on 백년전쟁 – 프레이저보고서
Dec 122012
 

[백년전쟁 스페셜 에디션] 프레이저 보고서 1부

‘박정희의 경제 신화’를 파헤친다.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 요인은 무엇일까?
학자들은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럼 누가 이 전략을 수립하고 이끌었을까?

한국의 중장년층은 박정희가 주인공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비밀이 해제된 미국 기밀문서들은 박정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도대체 누구인가?

백년전쟁 스페셜 에디션 ‘프레이저 보고서’ 1부가 그 진실을 추적한다.

 Posted by at 2:12 PM

데일리전북 연재 – 홍익인간 7만년 역사

 역사  Comments Off on 데일리전북 연재 – 홍익인간 7만년 역사
Dec 052011
 

http://www.dailyjeonbuk.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563

[홍익인간 7만년 역사 1] 마고할미에서 단군까지 [총론]

 

데일리전북이 단기 4344년 단군절(檀君節)을 맞아 ‘홍익인간 7만년의 역사’ 연재를 시작합니다. ‘홍익인간 7만년의 역사’는 27년 이상 족보와 한중일의 역사를 연구해 오신 조홍근씨(51)께서 부도지, 한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년 역사를 풀어갈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

우리 한국의 역사는 반만년이 아니라, 단군 이전에 한웅천왕의 배달나라 시대가 1,565년간 있었으며, 그 이전에 한인천제의 한국(桓國) 시대가 3,301년간 있었고, 또 그 이전에 한국의 전(前)시대로 63,182년간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역사는 서기전70378년부터 올해 2011년까지 72,389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임금은 마고(麻姑)이다. 마고는 마고할미라고도 불리우며, 우리 민속에서는 삼신할미라고 불리기도 한다. 철학적 종교적으로  삼신(三神)은 천신(天神), 지신(地神), 인신(人神)을 가리키며 원래 하나인 일신(一神)이 된다. 그래서 삼신일체(三神一體)라 한다. 인신(人神)은 다시 말하면 조상신(祖上神)이다. 그래서 삼신은 자식 생산에 관여하는 신(神)이 되는 것이다.

마고할미가 우리 조상으로서 백성들을 다스리던 시대는 서기전70378년 계해년부터 서기전7197년 갑자년까지 63,182년간에 해당한다. 물론 마고할미 한분이 63,182년간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마고라 불리는 여성 임금이 대를 이어가며 다스린 것이 된다. 마고할미가 다스리던 나라가 마고성(麻姑城)이며, 역사적으로 말하면 성곽의 나라가 된다. 이 마고성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지금의 파미르고원에 있었다.

서기전27178년경부터는 마고할미의 장손이 되는 황궁씨(黃穹氏)가 백소씨(白巢氏), 청궁씨(靑穹氏), 흑소씨(黑巢氏) 등에 속한 네 씨족을 화백(和白)으로 다스리던 시대가 되었다. 이때부터는 마고할미를 이미 조상신인 삼신(三神)으로 모신 것이 된다. 황궁씨가 마고할미를 대신하여 다스린 곳도 또한 파미르고원의 마고성(麻姑城)에 있었으므로 마고시대, 마고성 시대가 되는 것이다.

황궁씨가 네 씨족의 장(長)이 되어 화백제도로서 서기전7197년 갑자년까지 다스리기 약 2만년이 흘러, 이후에는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이 하늘나라가 되고, 파미르고원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사는 곳은 땅나라가 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땅에 출현하여 정착한 시조가 우리역사에서 인류조상이라 불리는 나반(那般)이다.

나반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아버지와 같다. 나반의 형제족들이 모두 12형제족이다. 파미르고원에서 네 씨족장을 따라 각 씨족장의 아들이 되는 각각의 3형제족이 동서남북으로 분거하여 약1,000년에 걸쳐 정착이 이루어졌다.

서기전7197년 갑자년 분거시부터 정착이 이루어진 때까지 약 1,000년에 걸쳐 황궁씨가 천산(天山)을 수도를 삼고, 각 형제족들을 주도하여 마고할미가 베풀었던 파미르고원의 낙원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였고, 홍익인간 세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정립하였다.

이후 황궁씨는 천부삼인을 유인씨(有因氏)에게 전수하였다. 이 유인씨가 한인씨(桓因氏) 이전의 삼신(三神)으로서 조상인 나반이 된다. 나반은 불가(佛家)에서 나반존자라 하는 독성자(獨聖者)이며, 절의 독성각(獨聖閣)에 모셔져 호랑이를 데리고 있는 산신령으로 표현되는 분이고, 황궁씨의 뒤를 이어 다스린 임금이다.

나반이 되는 유인씨가 서기전6100년경부터 서기전5000년경까지 약 1,000년을 다스렸다. 유인씨 시대는 이미 정착이 이루어진 시대로서 각 지역에 문명이 존재하는 것이 되며, 실제로 우리조상들의 문명이 되는 소위 요하문명은 황궁씨 시대 말기로부터 유인씨 시대를 거쳐 이어져 온 것이 된다.

유인씨는 다시 한인씨(桓因氏)에게 천부삼인을 전수하였다. 유인씨, 한인씨 모두 수도는 천산(天山)이었다.

한인씨의 나라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부르고 기록되고 있는 한국(桓國)이다. 한인씨가 유인씨의 뒤를 잇고 유인씨가 황궁씨의 뒤를 이었으므로, 이로써 유인씨와 황궁씨의 나라도 또한 한국이 되는 것이다. 한인씨는 서기전5000년경부터 서기전3897년 갑자년까지 약1,000년을 다스려, 황궁씨, 유인씨, 한인씨가 다스린 전체 한국시대는 서기전7197년 갑자년부터 서기전3897년 갑자년까지 3,301년간이 된다.

한인씨 한국 시대에 한인은 모두 7분으로 기록되고 있다. 약1,000년간이니 한인 한분이 평균 150년간씩 다스린 것이 된다. 한국(桓國) 시대는 한인의 아들 한웅(桓雄)이 세운 배달나라(박달나라, 檀國)에 비하여 하늘나라로 받들어진다. 그래서 한웅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운 인물로 기록되는 것이다.

한국의 7대 지위리 한인이 한웅에게 호족(虎族)과 웅족(熊族)의 전쟁으로 시끄러워 진 세상을 바로잡아 다스리라 하며 천부삼인을 전수하였고, 이에 한웅이 태백산 쪽으로 가서 태백산 아래 신시(神市)를 열고 호족과 웅족의 전쟁을 평정하여 홍익인간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이를 개천(開天)이라 하는데, 개천이란 하늘을 열다라는 의미로서 단순히 하늘을 연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인 한국(桓國)의 홍익인간의 도(道)를 땅에 시행하였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천부삼인(天符三印)에 담긴 철학이 바로 홍익인간 철학이다.

호족과 웅족의 전쟁이 발발하였던 곳은 삼위산(三危山) 남쪽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으로서 황하(黃河) 중상류에 위치한 서안(西安) 남쪽의 태백산이다. 한국(桓國) 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황하 북쪽으로 천산의 동북쪽으로 펼쳐진 몽골, 만주 땅이 한국(桓國)의 본토가 되는데, 특히 한인씨의 한국 본토는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땅과 거의 일치하게 되며, 황하 남쪽은 지방으로서 땅나라가 된다. 한웅이 태백산을 수도로 삼아 배달나라를 세우고 제후가 봉해지면서 배달나라 자체가 하늘나라가 되며, 지방의 제후는 천하로서 땅나라가 되는 것이다.

배달나라는 서기전3897년 갑자년 10월 3일에 세워져 서기전2333년까지 1,565년간이 된다. 배달나라를 다스린 임금을 한웅(桓雄)이라 하며 모두 18분이 계셔 한웅 한분이 평균 약87년간씩 다스린 것이 된다. 한국의 한인을 천제(天帝)라 함에 비하여 한웅을 천왕(天王)이라 부른다.

천왕이란 천제자(天帝子)이기도 하며 천제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인 것이다. 제후는 천왕이라 불리지 않는다. 배달나라의 제후를 높여서 천(天)자를 붙여서 천자(天子)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실제 중국의 역사에서 고대중국의 조상이 되는 소위 삼황오제는 태호복희가 천군(天君)이었고 그외는 모두 천자였다.

한웅의 뒤를 이어 단군(檀君)이 나라를 다스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서기전2333년 10월 3일 아사달에서 조선(朝鮮)을 세우신 이후, 서기전232년에 해모수 북부여에 정식 접수되기까지 2,102년간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이에 해모수가 단군조선의 정통을 이었으므로 또한 단군이라 불리운다. 단군은 글자 그대로 박달임금이라는 말이며, 배달나라 작은 임금으로서, 원래는 한웅천왕의 아들인 천군(天君)이기도 하고, 단군조선의 본 임금이 되니 천왕(天王)이라 받들어지며, 후대인들로부터 삼신일체(三神一體) 사상에 의하여 천제(天帝)로 받들어지는 것이다.

서기전70378년 계해년부터 서기전232년까지 약 7만년의 끊이지 않은 우리 조상들의 역사가 있었으며, 이후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 후삼한의 역사가 있었고, 이어서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그리고 고구려를 이은 대진국(발해)과 고려, 조선의 역사가 있어 지금의 대한민국에 이르러, 올해까지 72,389년간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마고할미에서 단군까지 실제적인 정치, 제도, 종교, 철학, 과학,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역사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

[필자 프로필] 조홍근(曺洪根, 51세). 트위트 역사당 부당주. 현 법무사. 

27년 이상 족보와 한중일의 역사를 연구해 오면서, 부도지, 한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등 귀중한 역사자료를 통하여, 우리역사 1만년을 넘어 마고(麻姑) 시대를 포함한 7만년 역사를 밝히고 있음.

*일본 이세신궁 원시한글 축문 국내 최초 역사적 해독 및 해석
*소위 우왕비(우 치수기념 부루공덕비)문 국내 최초 역사적 해석
*명도전 최초 해독학자 허대동선생<저서 고조선문자>의 가림토 해독 검증 참여


 

 

 Posted by at 6:37 PM

사라져 가는 우리역사와 ‘단군신화’

 역사  Comments Off on 사라져 가는 우리역사와 ‘단군신화’
Dec 03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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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세계사 속에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 역사

단군과 조선의 실체에 대하여 기록된 역사서는 필자가 확인한 것만도 아래와 같다. 아직도 단군조선이 ‘신화’라며 단군을 곰의 자식이라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는 역사학계와 일반인들의 잘못된 교육과 인식의 차이를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금이라도 역사의 실체를 똑똑히 찾고 배워서 역사를 바로 정립하여 민족정기가 구현 되었으면 한다.

먼저 필자가 확인한 단군조선과 관련하여 기술된 역사서이다.

「한단고기」, 「부도지」,「삼국사기」,「고조선기」,「삼국유사」,「단군세기」,「북부여기」,「세종실록」, 「태백일사」,「응제시주」,「용비어천가」 9장 주, 「동국여지승람」, 「고려사」, 허목의 「동사(東事)」,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신 채호의 「조선상고사, 「용비어천가」 42장 주… 문헌이 모두 단군을 기록했다.

중국 사서에 기록된 단군과 조선에 관한 기록이다.
「사고전서」, 「사기」,「산해경」,「후한서」, 「위서」, 「고기」, 「산해경광주」,「한서 위지 동이전」,「삼국지 위서 집해」, …

여기서 중국 사서 중 한가지 특이할 만한 것은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세계 최대의 총서로 ‘사고전서’가 있다.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의 역사서이다.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이 사서에는 단군조선역사를 기록 하였는데 자부에 3개, 사부에 4개,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인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있다. 이자료를 공개하면서 선생은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라고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정통사서들이 분명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교육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등을 한권의 책으로 엮어 펴낸를 조작된 사서라고 부정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강단사학들이 부정하는 이유는 ‘문화, 평등’ 같은 근대적 술어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그들만의 이너서클과 문화의식,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살아 온 삶 자체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의 진실은 외면하고 부정하는 참담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 계연수의 스승이던 이기(왼쪽)선생과 한단고기 저자 계연수 초상화.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것인데 이 초상화는 만화가 오선일씨가 그렸다.
우리의 시원 역사를 원형대로 기록하고도 단지 근대적 용어가 들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 학자들(이병도 신석호 후학과 일파)에게까지 인정을 못 받고 있는는 불구대천의 한을 품고 있다. 후세에 모본을 토대로 역사서를 지을때 그 시대에 맞는 용어가 들어가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당시 나라를 빼앗겨 통한에 빠진 국민에게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의 술어로 기술한 것이 잘못일 수가 없는데도 이들은 부정만 하고 있다. 읍소하고 청원하여도 이들은 ‘나발만 불어라’는 식이고 요지부동이다.

특히 서울대 한영우 교수와 박창범 교수가 한단고기가 모본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고,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13대 흘달단군 5년(BCE1733)에 일어났던 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 다섯 행성의 결집현상을 컴퓨터 시물레이션으로 확인한 결과 사서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과학적으로 밝혀냈지만(2편에 소개), 그들은 묵묵부답이다.

그렇다면 세계사에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세계 각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하고 확인하였지만, 통탄스럽게도 고대 우리 민족의 실체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제대로 된 기록이 없었다.

심지어 “한반도 북부는 한사군을 통해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며 중국과 일본의 주장이 진실인양 그대로 유포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일제시대 금서룡(이마니시 류)은 우리 조국을 왜곡하고 축소, 날조하여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에 민족배신자 이병도와 신석호 등이 난도질하였고 그들의 후학과 이를 따르는 강단사학자들이 지금까지 왜곡시키고 있다.

즉, 중국 요서를 지금의 한반도 대동강변으로 옮겨 놓았고, 광개토태왕 비문을 날조하여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두어 한반도 남부를 200년 동안 지배(남선경영)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한반도 북부는 중국이, 한반도 남부는 일본이 지배했다고 세계사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근거로 삼아 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의 한국학과 학장인 베이커(Don Baker)라는 자는 ‘조선과 단군은 뚜렸한 증거가 없으므로 ’신화‘라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는, 즉 믿을 수 없는 역사’라고 규정짓고 있었다.

특히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우리 민족이)중국에서 쫒겨나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했다’고 나와 있다. 하와이 미노아 대학 슐츠(Xdward J. Schulrz)라는 교수는 ‘한사군이 한국고대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조직적인 국가로 성립하는데 촉진제가 되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또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한반도의 평양까지 중국의 영토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강단사학자와 통칭 말하는 실증사학자들이 논리를 개발하여 눈으로 안보고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은 거짓이고 신화라는 잘못된 인식를 가진 종자들로서 학벌지상주의로 일제에 개가 되어 끼리끼리 해쳐먹었던, 아니 ‘떼법’이 통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며 이들 후학들 덕분?에 일본과 중국의 주장대로 받아 들이고 기술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 국가도 국민도 우리 민족도 1천년의 초라한 역사를 갖기에 이르게 될 것.

▲ 일본 국보1호인 미륵반가사유상(사진 오른쪽).일본 학자들은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정밀 조사를 한 결과, 나무의 재질이 일본에는 없는,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소나무로 밝혀졌다. 우리나라 금동반가사유상(왼쪽)은 만든 기법부터 중국과 일본의 것을 뛰어넘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배달국 조선국으로 내려 온 1만년의 역사가 1천년 역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9천년을 잃어 버렸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 온 민족인지 뿌리채 정체성이 없어져 버리게 되었다. 즉 형편없는 민족이 된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세계인이 알고 있는 한국사에 대한 인식이고 우리 민족에 대한 판단이다. 즉 우리 역사를 머리와 사지를 절단하여 우리 민족을 폄하하고 비하하며 식민지노예근성을 가진 민족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도록 정치적 종교적으로 막고, 분열과 깊은 어둠에 휩싸여 불구대천의 한을 품게 만들고 있다. 한국 배달국 조선국으로 이어져 온 한인 한웅 한검(단군)이 우리 국조이고 시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일부를 제외하면 10%도 안 될 것이다. 오로지 아브라함, 예수님, 공자님, 부처님, 성모마리아님만 찾는다.

과거를 모르면 미래가 없듯이 역사를 잃어버리면 타민족으로 동화되고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죽음만 있을 뿐이다. 돌이켜 보라, 고려와 조선(후조선)시대 불교와 유교를 숭상하며 우리 역사, 특히 상고사(한인 한웅 한검에 대한 기록서)를 모두 거두어들이고 사대한 결과, 원나라와 일제에게 치욕스럽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는가? 당시 우리 젊은이들과 처녀들은 공출되었고 거리에서, 일터에서, 빨래터에서 갑자기 끌려가 처참하게 죽고 강간당하고 성 노리개가 되었던 역사의 상징성을… 그들의 울부짖음과 절규는 당시 우리의 역사정신과 혼이 파멸당하면서 터지던 곡소리와 비명, 핏기서린 피눈물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중국과 일본은 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우리 민족은 동방문명의 종주로서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아랍 등 전세계적으로 문물과 문화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중심이요 만국의 중심’이란 기치를 내걸고 2020년이면 미국를 제치고 세계 최대강국이 되겠다는 중국이나 일본이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는 5천년이며 일본의 역사는 3천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의 시원 역사가 곧 우리민족(동이족)에 의해 왕조나 기타 물질문명으로 이루어 졌다는 ‘뿌리 깊은 역사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보다 더 악감정과 열등감을 품고 있다. 그들 국보1호인 미륵반가사유상이 한국에서 건너간 것으로 판명이 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침략을 감행해 우리 민족사를 말살하고 문화와 물질을 강탈하고 죄 없는 우리 민족을 끌고 가 무자비하게 부려 먹다 죽이고 강간하고 성 노리개로 만들었다.

토인비가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기 위해서는 그 민족과 조국의 역사를 말살하라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라고 명언을 남겼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 및 말살 만행을 지금부터라도 단호히 분쇄하고 우리 역사를 되찾고자 하는 노도와 같은 물결이 온 나라를 뒤덮여야 할 것이다.

친일주구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왜곡되고 점철되어진 천하디 천한 민족으로 전락하기 직전인 현 상황. 일제개들에 의해 작성된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지 못해 민족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10여년 전, 이러한 역사를 복원시키고 민족정기를 구현해 내고자 우리 국조이신 단군상을 제작하여 비치했지만, 신은 믿지 않고 종교를 믿는 자들에 의해 목이 잘리고 훼손되고 말았다. 우리 조상은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한 행위자와 사주한 자들은 장담컨대 저 세상으로 결코 갈 수 없는 구천을 맴도는 불쌍한 영혼들이 될 것이라고 전해주고 싶다.

[이어서 ‘[제2편] 정통사서들이 왜 연구되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을까?’라는 제목으로 칼럼이 이어집니다.참조/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제2편] 정통사서들이 왜 연구되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을까?

▲ 단군조선 영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

1만년 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기록을 하는 일이 쉬울 수가 없다. 더욱이 고증과 문헌 등을 종합해서 정확한 기록을 하기는 참으로 어렵고 또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역사의 기록에 대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파악된 한나라시대 사마천이란 자가이란 지리지에 4천년 전의 시대를 기록해 놓은 것도 100%정확할 수가 없고, 또한 한나라 무제때부터 역사왜곡을 했던터라 29세의 약관의 나이로 더구나 적국이나 다름없는 동이족 역사에 대해 정확성을 떠나 객관적 서술로서 기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 단군의 어린시절과 어머니 웅녀황비(韓人聖母 雄女皇妃) 초상화
사마천의 기록을 토대로 여러 관점에서 서술된 사서를 중심으로 비교 분석이 가능한데, 우리의 역사서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일본이나 중국이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으리란 추론과 함께 그 사실이 조금은 밝혀지고 있기는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해 중국에는가 있고 일본에는가 있고, 우리 역사서 중에를 비롯해등이 있다. 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믿을 수 없다며 위서로 단정짓고 있다. 민족진영에서 수없이 반론하고 연구하고 족적을 찾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정부의 지원이 없이는 고증이나 발굴 등 충분한 연구를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하였으나, 강단사학이라 일컫는 부류들은 무조건 위서로 몰아붙이고 충분한 고증이나 발굴 등 연구도 하지 않고 있는 것같다.

지금이라도 중국, 일본 고대기록 등과 우리 사서들은 비교하며 활발한 비교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차차 열거해 객관적인 판단을 구하고자 한다.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id=kda)를 살펴보면,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 하백(非西岬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 왕(東扶餘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 – 요임금)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임금의 도산(塗山) 모임에,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참가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 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원문)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 檀君聘娶非西岬河伯之女生子, 曰夫婁, 是謂東扶餘王。 檀君與唐堯同日而立, 至禹會塗山, 遣太子夫婁朝焉。 享國一千三十八年, 至殷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爲神, 今文化縣九月山。

위에서처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 《단군고기(檀君古記)》를 인용하여 한인임금, 한웅임금, 단군임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까지는 《단군고기(檀君古記)》라는 책이 있었다는 얘기고 조선왕조실록에 공식적으로 인용될 정도로 공인을 받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삼국유사는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임금에 대한 기록을 전했는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기(古記)의 내용과 조선왕조실록이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의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즉 그 두 책은 서로 다른 책이라 하겠고 단군임금에 대한 기록은 여러 책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실록에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는 지금은 왜 전해지지 않고 있고, 도대체 왜 우리 선조가 쓴 고대기록은 후대에 전해지기가 어려웠을까?

[조대기(朝代記)]-> [진역유기(震域游記)]-> [규원사화(揆園史話)]로 이어지는 즉, 조대기는 발해때 단군조선시대를 기록한 책이고 진역유기는 단군조선시대 진한에 대해 쓴 책이라고 전해지며 규원사화는 이 두 책을 바탕으로 쓰여진 현존하는 책이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광복 직후 국립중앙도서관 직원이 서울의 한 책방에서 구입하여 1946년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 629번, 고서 2105-1번으로 등록되었다. 조선 숙종 2년(1675년) 때 쓰여진 진본이라는 감정결과가 이미 나와 있다.

[한단고기]는 [규원사화(揆園史話)]등을 모본으로 하여 집필하였고 또 그 내용이 거의 비슷하니 [한단고기] 또한 무조건 위서로 몰아붙일 일이 아님에도 근대적인 술어로 기록했다고 무작정 위서로 단정짓는 행태는 역사가로서, 학자로서, 후손으로서의 양심을 벗어난 반민족적인 자라고 단정지을만 하고, 훗날 이들에 대해 용서없이 가혹하게 단죄를 내려야만 민족정기가 구현되고 민족정체성이 바로설 수 있다.

규원사화, 한단고기, 부도지가 위서라고 주장하고 또 강단사학계의 정설이라면 필자는 한 가지만 묻고 싶어진다. 후대에 창작했다면서 위서라고만 주장할게 아니라 당신들이 위 고서처럼 창작하여 보라. 그러면 위서인지 진서인지 알게 아닌가? 그러면 현행하는 세계 최고상이라 불리어지는 노벨상을 한 천개는 받을 테니까.

위 실록에 나오는《안함로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와 《삼성밀기(三聖密記)》는 한단고기의 한 부분인 [삼성기(三聖記)]와 상통한다.

또《지리성모 하사량훈(智異聖母 河沙良訓)》은 지리(智異)산의 성모(聖母) 즉 한반도 남부지방의 고대 여성 지도자 즉 [마고할머니]에 대해서 쓴 책으로 보이는데 [부도지]와 상통한다.

그런데 위에 열거된 역사서가 지금은 다 어디로 갔나?

조선시대 이러한 사서를 수거한 조정이 이를 모두 불태우거나 없애지는 않았을 것이고 조선의 국립도서관인 [규장각]의 창고에 많은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규장각의 책들은 1911년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이때 넘어간 도서는 5,353부 10만 187책, 각종 기록은 1만 730책. 총독부는 전국에 고대사서를 수거하여 20만여권을 불태우고 귀중한 사료는 일본으로 가져갔다. 또 일본왕실사고에 근무했거나 양심있는 학자들에 의해 우리 고대 사서들이 일본사고에 수북이 쌓여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 예로 일제시대 우리 역사관련 책자에 대해 분류 작업한 박창화씨가 광복직후 최기철 명예교수에게 “1933년부터 12년간 일본 궁내청 쇼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고 그곳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다”고 최기철(崔基哲)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털어놨다.”고 최씨가 1999년 언론을 통해 증언했다.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해 강단사학에서 위서라고 주장하는 [한단고기]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입증한 서울대 박창범 교수’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 대해서 본지 우기수 칼럼니스트의 글을 싣는다.

천문과학으로 증명된 단군조선의 실체
서울대 박창범 교수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 역사’

▲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쓴 국내최초 천문학에 의한 역사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 편집부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 (僞書) 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관심을 끌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한 결과 상당 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들의 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 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 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와에 들어 있는이다.

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서와 옛 비문, 현장 답사 등 13년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엮은 단군조선사이다. 제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제47대 단군까지 약 2천여 년의 역사를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란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 시대 역사서로,의 서술 내용과 큰 줄기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모두 “사실”

이 서적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제 식민 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조선 말살 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의 고대사 관련 사료는와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 온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 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와에는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이 한군데,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 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
나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홀달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무진 오십년 오성취루(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개 별이 루성(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 오성취루 현상.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 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 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이 날은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 1733 년을 기점으로 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 BC 1733년 홀달 단제 시대 단군 조선인들이 보았을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컴퓨터 합성기법으로 시각화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 큰 썰물 현상
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다. 두 사서 모두 제29세 마휴단제 9년 (BC 935년) 때 `남해조수퇴삼척(南海潮水退三倜)` 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오행성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 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 931년 11월 22일에 이 기간중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 일식기록 분석
박교수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밖에 안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 2183년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여 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두개는 해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조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 기성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박교수팀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 는 “그 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조선사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박성수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다. 이들 역사서의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연구도 해보지 않고 이를 백안시해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교수팀의 연구에 대해서는 그 동안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 상고사학회` 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의 연구 결과가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학회는 10월에 발간할 예정인 이 학회 연구 논문집에 박교수팀의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싣기로 결정했다. 단군 조선에 대한 연구는 결국 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문헌사적인 연구뿐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

이와같이 천문을 관측하고 기록했던 단군조선을 ‘신화’라고 말하고 있는 매국식민사학계는 정말이지 오강들고 벌서야 한다.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이 천문을 계속 관측하고 있었단 말이다. 천문에 대한 기록은 국가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이토록 위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 단군조선을 아직도 신화속의 이야기라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법한 이야기인가!!! 위대한 자기 조상을 신화 운운하는 식민사학계는 전부 쪽바리의 자식들이나 뛔놈의 후예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망발을 함부로 말한단 말인가?

[참조/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한국고대사). 역사서에 기록된 단군과 조선]

[제3편] 2편에서 이어집니다.

 

[제3편]단군조선의 실체와 삼천구백년 후 조선시대에 재현된 문화와 과학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하기 위해 생겨난 ‘조선사편수회’가 있다. 민족반역자로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대표격이며 단군조선 등 우리 상고사가 ‘신화’라며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전설이라고 명문화하여 지금껏 종교주의자들과 호홉을 같이하며 우리 조상인 한인임금, 한웅임금, 한검임금을 모시면 우상숭배라고 맹공을 퍼붓고 단군상을 훼손했던 것으로 민족정체성을 뿌리채 없애려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해왔다.

또 이들 민족반역자들은 광복 후에도 마치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운동한 것처럼 교묘하게 속여 국가 요직을 두루 두루 차지했다. 사망하기 몇해전 역적 이병도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단군은 실존인물이며 조선은 실제로 있었다’고 참회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후학들과 강단사학계는 지금까지 주장하고 밥벌이 수단으로 이용하여 왔던 것이 화가 미칠까 봐, 노망한 미친 늙은이로 취급해 버렸다. 그들이 지금 우리 역사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니 어디 역사바로세우기나 민족정기가 바로 설 수가 있는가?

그런데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등을 살펴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고 축소 내지 왜곡하는데 앞장선 일제만을 위한 식민사학자와 어용사학자들이 유일하게 인정한 역사서가 있었다.

바로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백문보(?~1374)가등을 토대로 몽골 즉 원나라가 물러간 뒤 민족정체성과 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단군기원을 쓰자고 건의한 내용이다.

이들의 말만 믿고 광복 후 지식인과 지도자들은 우리 역사가 반만년(오천년)이라고 외쳐 댄 것이다. 이는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웠다고 주장하는 데, 그 연대는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고려 말인 13세기 말에 건의한 것을 근거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들 주장을 엄밀히 따지고 보면 반만년이 아니라 천년도 채 안 된 700년 정도이다.

▲ 삼일신고와 상응하는 단기고사. 사진은 캠퍼스와 곱자를 든 복희와 여와
이것이 우리 역사라고 함정을 파놓고 진실을 숨기고 역사를 말살했던 일제와 민족반역자들의 의도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속임수는 단군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신화로 치부해 버렸기 때문이다.와를 일제가 가져가지 않고 남겨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는 점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바로 이점을 우리 역사학계나 모든 국민이 올바로 알고 대처하여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확립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그간 우리 지도자들이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강조할때마다 그들 민족반역자와 일제는 얼마나 박수치고 통쾌해 했을까?

그렇다면 이들의 간악한 속임수에 속지 않고 한중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과 선조들의 기록을 살펴 대처하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우리 역사를 찾는 방법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서라도 면밀하게 살펴보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야 한다. 그저 책상머리나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강의를 들려주고 밥이나 빌어 쳐 먹는 인간들을 제쳐놓더라도 양심있고 의식 있는 민족사학자 몇명만 있어도 된다. 필자가 지금까지 또 앞으로 열거해 놓은 것만이라도 충분히 연구한다면 우리 역사는 올바르게 정립 될 수 있고 민족정기 구현은 물론 민족정체성도 확립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동녕부를 토벌할 때 금주와 복주 등지에 방문(榜文)을 부치기를 ‘우리나라는 당요와 같은 때 건국했다(「용비어천가」 42장 주)’ 하고, 고려 공민왕때 백문보(白文寶)가 언사소(言事疏)를 올리기를 ‘우리 동방은 단군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3천6백년이 되었다(「고려사」)’고 했다.

또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세종실록」에 단군이 다스렸다(檀君之理) 한 것을 단군의 후손(檀君之裔)이라 적고 있으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평양은 본시 선인왕검의 댁(宅)으로 혹 말하기를 왕의 도읍지를 왕검(王儉)이라 하였다’하니,

정인보는 이것이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이 비판한 것과 같이 사마천의 「사기」에서 위만을 언급하다가 ‘왕지도왕검(王之都王儉)’이라 나오는 글귀를 표절한 것이라 말한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 ‘단군어미가 짐승 곰이었다 하더라’고 하는 신화문제에 대해 정인보는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한다.

“’고기’ 또는 ‘본기’에 신화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신화 부분은 신화로 돌아갈 것이로되 신화 아닌 부분까지 신화로 끌어들일 수 없다고 강력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름하여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이때가 중국의 당요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해당하는데 도읍을 평양성에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號曰檀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 始稱朝鮮)”는 부분까지 신화라 할 수 없지 않는가.“라고 삼국유사의 잘못됨을 정면으로 거론하며 지적한 것.

사마천이 서이족에서 서하족으로 그리고 화하족으로 발전해 나아간 지나족의 중심 역사를 독립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 뿌리가 되는 동이족의 역사를 지나족의 역사에 부속적인 것으로 비틀어버렸는데 먼저 나온 이 철옹성의 책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군조선의 기록이 지리서의 형태 속에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단군조선이 실체했고 단군왕검이 실제 존재했다는 것을 중국 최고로 오래된 지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단군신화’라며 전설로 치부한 자들은 도대체 어느나라 국민이고 민족일까?

▲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져 있는 “한인, 한웅, 단군왕검”의 초상화. 중국 사서에 구월산은 단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산이기 때문에 그곳에 삼신전을 모시고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니산에는 단군 할아버지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천단이 지금도 남아있다. 대한제국때까지 집집마다 이 영정을 걸어 정안수 떠놓고 빌었던 우리민족. 식민지화되면서 사라진 우리의 뿌리… 종교때문에 우리들은 조상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필자 주]

정인보가 주장한 내용을 더 살펴 보자.「삼국유사」보다 앞선 기록인 신라인 박제상이 고기(古記)를 인용한 「부도지(符都志)」제 1장에 “단군 임검이 불함산에 천부단을 쌓고 그곳을 조선(朝鮮)이라 하여 사해(四海)를 화합하게 했다”고 했다.

대진국(발해.중국측 사료)을 개국한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은 단군 조선의 2천 년 역사를 대진국어로 기록하게 한 「단기고사(檀奇古史)」 역시 단군 조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책은 그 후 3백 년 뒤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 출판했다.

「상고조선 3천년사」를 지은 최재인(崔在仁)은 발해 대조영(699-719) 때 발간된 「단기고사」와 그 후 천년이 지난 조선 숙종(1675-1720) 때 북애자 노인이 저술한 「규원사화(揆園史話)」와 독립군이자 애국지사 계연수의「환단고기」가 모두 단군조선의 역대 년표와 역대 왕명이 일치할 뿐 아니라 단군세가(檀君世家)까지 모두 일치한다 말하고,

「단기고사」가 「부도지(符都志)」보다 뒤의 것이기는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는 4백 여 년 앞서 단군 조선을 입증했으며 일연의 「삼국유사」보다 5백 여 년이나 앞서 단군 조선을 입증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단기고사」가 우리 민족에게 널리 전해지지 못한 것은 발해가 건국된 지 2백 여 년 만에 거란의 요(遼)에게 망한 뒤 고려가 금의 눈치를 살피느라 발해사마저 우리 국사에서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므로 해서 「단기고사」가 널리 전해질 수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미수 허목(許穆)의 「동사」는 단군 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환웅이 9이(九夷)의 조상이라는 것과 환웅의 신시(神市)로부터 단군 조선이 개국되었다는 것과 주(周) 무왕의 때에는 단군조선의 단궁(檀弓)을 수출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단군이 개국한 조선은 동방일출 광명의 진리를 상징하는 국호라는 설명과 역대 단군 세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역대 단군의 통치가 1048년간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고 기자조선으로 설명이 이어지는 책이다.

한편,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중원의 요 임금때 단군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으로 했다는 것과 단군은 천자 성손(聖孫)이라는 것과 그때의 9이(九夷)가 단군을 임금으로 섬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우리민족의 옛 이름은 조선(朝鮮)으로 조선이란 광명을 뜻한다 했다. 조선족은 최초에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인 간방을 찾아 동방으로 진출, 백두산 일대와 그 부근에 자리잡아 조선이라 불렀다 했다.

단재는 조선족이 처음 개척한 나라가 부여이며, 한국문화의 원시시대의 발원지가 옛 이름이 부여인 만주의 송화강 연안 하얼빈 부근이라 말한다.

또 단군왕검은 지나의 수재(水災:9년 홍수) 구제차 2세 단군이 된 장남 부루 태자를 사천성 유도( 都:지금의 중경) 양자강 상류을 굽어보는 도산(塗山)에 서행(西行)케 하여 순(舜)의 명을 받은 하우(夏禹)에게 덕치의 교의를 가진 수두교를 전하는 선구적 업적을 성취하게 했다고 말한다.(이로 인해 서경 속에 등장하는 3신 상제님을 치제하는 상제 봉선(천제) 의식과 천일, 지일, 태일의 3신관이 자리잡게 됨)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단군 조선과 기자가 5천명의 피난민과 함께 조선에 가서 무왕의 봉작을 받아 조선 왕이 되었다며 조선에 관한 모든 기록에 항상 기자조선을 근거 삼아 단군(고)조선을 축소시켰고 복속시키려는 중국

그 뒤, 주(周) 나라가 흥하자 단군을 하늘로 받들며 도산신서(塗山神書) ‘홍범구주’를 신봉하는 은나라 왕족 기자가 무왕을 피하여 수두교의 조국인 조선으로 동래했다고 말한다.(이와 더불어 강태공은 동방 신교의 도통(道統)을 중국의 한족(漢族)에 전수한 바 있다)

신농의 후손에 강태공은 동방 신교의 도통(道統)을 중국의 한족(漢族)에 전수한 사람이라. (道典1:11:6)

지금은 인터넷 시대이다. 한문이 어렵다면 인터넷판을 검색하면 한글로 되어 있어서 찾기도 쉬울뿐더러 이해하기도 쉽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단군에 대한 기록에 대해가 많이 인용되어 있다. 산국유사나 삼국사기 같은 사대주의 입각해 저술한 역사서보다는 《단군고기》를 연구하여 역사를 바르게 정립될 시기가 되었다.참고로 단군에 대한 기록을 좀 더 열거한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의 기록이다.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위서에 말하기를,지난 2천 년 전,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과 같은 때이다. … 《삼국유사》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일연이라는 중이 위서와 고기를 들먹이며, ‘단군의 어미가 짐승 곰이었다고 나오더라‘하고 없는 사실을 왜 기록했을가? 누차 주장했지만 일연은 스키타이 족속으로 사대모화사상에 찌들어 그 관점에서 기록하고 이 땅을 불국정토로 만들려고 그 짓을 했을 것. 조선사편수회를 맡은 일제어용학자 금서룡(이마니시 류)이란 자가 훌륭한 책이야‘ 라며 무릎을 치며 기뻐하고는 ’단군신화‘로 치부해 버렸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뿌리가 없는 즉, 7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초라한 민족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땡 중 일연이 인용했다는 위서와 고기에는 단군 어미가 곰이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러한 사실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자들의 말만 믿지 말고…

《세종실록》〈오례>에 인용된 《위서》의 기록이다.
《魏書》云, 檀君王儉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위서(魏書에 말하기를,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과 같은 때이다. … 《세종실록》〈오례〉

《삼국사기 》에는 단군 왕검에 대한 기록이 있다.
王以丸都成經亂, 不可復都, 築平壤成, 移民及廟社
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왕이 환도성이 난리를 치러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디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혹은 ‘왕의 도읍 왕험’ 이라 한다.

《세종실록》〈지리지〉「평양부」에서는‘당요 무진년’까지 언급되고 있다. 평양에 도읍한 단군을 전조선과, 기자의 후조선 41대, 위만조선, 한사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알려져 있었던 내용들을 모아 정리한 것.

(강화는)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으로,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마리산이 남쪽에 있다. 산 정상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이라고 한다. 전등산은 삼랑성이라고도 하는데, 세간에 이르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게 했다고 한다. 문화현(文化懸) … 유주. 원래 고구려의 궐구(闕口). 구월산(세간에 이르기를 아사달산), 장장평(세간에 이르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으로, 곧, 당장경), 삼성사(三聖祠 ; 단인, 단웅, 단군의 사당)이 있다.

▲ 단군조선시대의 선기옥형(천문)을 재현해 낸 조선 세종시대의 혼천의(선거옥형 이라고도 함) .

《조선왕조실록》에 단군과 조선에 대한 실체뿐만 아니라 구월산과 단군사당의 제례 의식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살펴 보자.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며,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입니다. … 태조, 예조판서 조박

우리 동방은 단군, 기자가 모두 그 역년이 1천 년이 됩니다. … 태종 5년 의정부 상서

단군, 기자가 모두 1천 년이며, 한 사람이 아닌 왕조였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대를 이어온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평양은 단군과 기자가 도읍을 세운 뒤로 서북지방의 본영이 되었습니다. … 태종 7년 평양 부윤 윤목

즉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모두 서북의 평양에 도읍하였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에 대해 세종대왕(9년)은 “단군이 삼국(진한 마한 번한)을 통일했는지 내가 듣지 못하였다.”라고 답변한다.

단군 조선 때는 이름을 아사달산이라 하였고, 신라 때에 궐산(闕山)로 고쳐 불렀으며, 그 때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闕口縣)으로 이름하였습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 수 없으며, 북쪽 벽은 단웅 천왕, 동쪽 벽은 단인 천왕, 서쪽 벽은 단군 천왕이니, 문화현 사람들은 항상 삼성당(三聖堂)이라 부릅니다. … 세종 10년 우의정 유관

즉 단군과 관련된 지명이 신라 시대 이전에 기원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위에 언급된 궐(闕)에 대하여《규원사화》에서는 ‘궐(闕)년’은 1만 년을 뜻하고, 단군 이전의 환웅시대를 궐백년(1만 1백 년) 또는 궐천 년(1만 1천 년)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황극경세서》의 1원(元)인 10,800년과도 비슷하다.

태고의 처음에 혼돈이 개벽하여, 먼저 하늘이 생기고 나중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가 있은 연후에 기가 화하여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어찌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겠습니까. … 세종 10년 우의정 유관

그 근거는 알 수 없지만, 하늘과 땅의 역사를 수십만 년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단군이 요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신라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의 왕씨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3천 9백 년이 되었습니다. 성종 12년 남원군 양성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부터인데 단군이 맨 먼저 나왔으며,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 온 이후로 삼한으로 나뉘고 구이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습니다. … 정조 23년 지중추부사 홍양호

지금까지 조선시대 단군조선에 관해 임금과 신하가 말한 대목을 열거해 보았다. 놀랍지 않는가? 그런데도 ‘단군신화라’고 떠벌린 자들이 지금도 도처에 갈려 있다. 특히 친일친미사대주의자와 특정종교론자들에 의해서….신자나 신도들은 신을 믿지 않고 구세자 또는 구도자 행세를 하며 자칭 일부 종교지도자인 이들을 믿고 따르는 결과 무지에서 또 자신들 외 다른 종교는 이단이나 사탄으로 취급하는 무식자 내지 광적인 자들이 되었고 자신의 뿌리나 조상도 모르고 사는 천한족속이 된 것이다. 안타까울 뿐이다. 하루라도 빨리 역사의 진실을 알았으면 한다.

《세종실록》, 단군조선의 문화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에 주목해야

▲ 선기옥형. 이를 근거로 혼천의가 재현되었다. 북두칠성과 비교해보면 답이 나올 것 .
옛일이 이미 멀어서 제도가 퇴폐하여졌으니 책에 실려 있은 들 그 뜻을 뉘가 알리오. 신성하신 임금이 시대에 응해 나셔서, 요·순의 법을 받아 표(表. 수표)와 누(漏. 물시계)와 의(儀. 천체)와 상(象.천체)의 옛제도를 회복했네. 요가 희·화에게 명하여 책력에 일월성신을 형성하고, 순은 ‘선기옥형[璇璣玉衡] ‘을 만들어 칠정을 바로잡았으니 …

‘혼천의(渾天儀)’의 경우, 하늘의 축에 의해 바퀴가 회전하도록 되어 있으며, 365 1/4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그 유물로 보더라도, 당시 나무를 다루는 기술은 조선 세종때의 기술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부도지》에서는 ‘자방(磁方)’을 이용하여 도읍을 정하는 내용이 나오는 단군조선 당시에도 방향의 측정에 자석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즉 자북이 북동쪽이라고 했는데, 전문가들이 연구하면 연제든지 확인이 가능하고 이미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밝혀낸 부분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혼천의가 재현될 시점으로 봐서 3천 9백년 전에 단군조선 문화가 이토록 발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근거로 3900년경 후에 재현하면서 기록에는 ‘요·순 임금’이 등장하는 것은, 실제는 명나라의 시선을 의식해 이들을 내세워 단군조선의 문화를 되살렸던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며, 이것은 중국 한나라 이전의 잊혀진 제도였지만 조선 세종때 명나라 시선을 피해 재현해 낸 것으로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참조/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한국고대사).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단군과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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