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 03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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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세계사 속에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 역사

단군과 조선의 실체에 대하여 기록된 역사서는 필자가 확인한 것만도 아래와 같다. 아직도 단군조선이 ‘신화’라며 단군을 곰의 자식이라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는 역사학계와 일반인들의 잘못된 교육과 인식의 차이를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금이라도 역사의 실체를 똑똑히 찾고 배워서 역사를 바로 정립하여 민족정기가 구현 되었으면 한다.

먼저 필자가 확인한 단군조선과 관련하여 기술된 역사서이다.

「한단고기」, 「부도지」,「삼국사기」,「고조선기」,「삼국유사」,「단군세기」,「북부여기」,「세종실록」, 「태백일사」,「응제시주」,「용비어천가」 9장 주, 「동국여지승람」, 「고려사」, 허목의 「동사(東事)」,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신 채호의 「조선상고사, 「용비어천가」 42장 주… 문헌이 모두 단군을 기록했다.

중국 사서에 기록된 단군과 조선에 관한 기록이다.
「사고전서」, 「사기」,「산해경」,「후한서」, 「위서」, 「고기」, 「산해경광주」,「한서 위지 동이전」,「삼국지 위서 집해」, …

여기서 중국 사서 중 한가지 특이할 만한 것은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세계 최대의 총서로 ‘사고전서’가 있다.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의 역사서이다.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이 사서에는 단군조선역사를 기록 하였는데 자부에 3개, 사부에 4개,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인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있다. 이자료를 공개하면서 선생은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라고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정통사서들이 분명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교육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등을 한권의 책으로 엮어 펴낸를 조작된 사서라고 부정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강단사학들이 부정하는 이유는 ‘문화, 평등’ 같은 근대적 술어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그들만의 이너서클과 문화의식,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살아 온 삶 자체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의 진실은 외면하고 부정하는 참담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 계연수의 스승이던 이기(왼쪽)선생과 한단고기 저자 계연수 초상화.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것인데 이 초상화는 만화가 오선일씨가 그렸다.
우리의 시원 역사를 원형대로 기록하고도 단지 근대적 용어가 들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 학자들(이병도 신석호 후학과 일파)에게까지 인정을 못 받고 있는는 불구대천의 한을 품고 있다. 후세에 모본을 토대로 역사서를 지을때 그 시대에 맞는 용어가 들어가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당시 나라를 빼앗겨 통한에 빠진 국민에게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의 술어로 기술한 것이 잘못일 수가 없는데도 이들은 부정만 하고 있다. 읍소하고 청원하여도 이들은 ‘나발만 불어라’는 식이고 요지부동이다.

특히 서울대 한영우 교수와 박창범 교수가 한단고기가 모본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견해를 밝혔고,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13대 흘달단군 5년(BCE1733)에 일어났던 목성-화성-토성-금성-수성 다섯 행성의 결집현상을 컴퓨터 시물레이션으로 확인한 결과 사서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과학적으로 밝혀냈지만(2편에 소개), 그들은 묵묵부답이다.

그렇다면 세계사에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세계 각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하고 확인하였지만, 통탄스럽게도 고대 우리 민족의 실체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제대로 된 기록이 없었다.

심지어 “한반도 북부는 한사군을 통해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며 중국과 일본의 주장이 진실인양 그대로 유포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일제시대 금서룡(이마니시 류)은 우리 조국을 왜곡하고 축소, 날조하여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에 민족배신자 이병도와 신석호 등이 난도질하였고 그들의 후학과 이를 따르는 강단사학자들이 지금까지 왜곡시키고 있다.

즉, 중국 요서를 지금의 한반도 대동강변으로 옮겨 놓았고, 광개토태왕 비문을 날조하여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두어 한반도 남부를 200년 동안 지배(남선경영)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한반도 북부는 중국이, 한반도 남부는 일본이 지배했다고 세계사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근거로 삼아 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의 한국학과 학장인 베이커(Don Baker)라는 자는 ‘조선과 단군은 뚜렸한 증거가 없으므로 ’신화‘라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는, 즉 믿을 수 없는 역사’라고 규정짓고 있었다.

특히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우리 민족이)중국에서 쫒겨나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했다’고 나와 있다. 하와이 미노아 대학 슐츠(Xdward J. Schulrz)라는 교수는 ‘한사군이 한국고대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조직적인 국가로 성립하는데 촉진제가 되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또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한반도의 평양까지 중국의 영토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강단사학자와 통칭 말하는 실증사학자들이 논리를 개발하여 눈으로 안보고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은 거짓이고 신화라는 잘못된 인식를 가진 종자들로서 학벌지상주의로 일제에 개가 되어 끼리끼리 해쳐먹었던, 아니 ‘떼법’이 통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며 이들 후학들 덕분?에 일본과 중국의 주장대로 받아 들이고 기술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 국가도 국민도 우리 민족도 1천년의 초라한 역사를 갖기에 이르게 될 것.

▲ 일본 국보1호인 미륵반가사유상(사진 오른쪽).일본 학자들은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정밀 조사를 한 결과, 나무의 재질이 일본에는 없는,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소나무로 밝혀졌다. 우리나라 금동반가사유상(왼쪽)은 만든 기법부터 중국과 일본의 것을 뛰어넘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배달국 조선국으로 내려 온 1만년의 역사가 1천년 역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9천년을 잃어 버렸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 온 민족인지 뿌리채 정체성이 없어져 버리게 되었다. 즉 형편없는 민족이 된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세계인이 알고 있는 한국사에 대한 인식이고 우리 민족에 대한 판단이다. 즉 우리 역사를 머리와 사지를 절단하여 우리 민족을 폄하하고 비하하며 식민지노예근성을 가진 민족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도록 정치적 종교적으로 막고, 분열과 깊은 어둠에 휩싸여 불구대천의 한을 품게 만들고 있다. 한국 배달국 조선국으로 이어져 온 한인 한웅 한검(단군)이 우리 국조이고 시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일부를 제외하면 10%도 안 될 것이다. 오로지 아브라함, 예수님, 공자님, 부처님, 성모마리아님만 찾는다.

과거를 모르면 미래가 없듯이 역사를 잃어버리면 타민족으로 동화되고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의 죽음만 있을 뿐이다. 돌이켜 보라, 고려와 조선(후조선)시대 불교와 유교를 숭상하며 우리 역사, 특히 상고사(한인 한웅 한검에 대한 기록서)를 모두 거두어들이고 사대한 결과, 원나라와 일제에게 치욕스럽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는가? 당시 우리 젊은이들과 처녀들은 공출되었고 거리에서, 일터에서, 빨래터에서 갑자기 끌려가 처참하게 죽고 강간당하고 성 노리개가 되었던 역사의 상징성을… 그들의 울부짖음과 절규는 당시 우리의 역사정신과 혼이 파멸당하면서 터지던 곡소리와 비명, 핏기서린 피눈물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중국과 일본은 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려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우리 민족은 동방문명의 종주로서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아랍 등 전세계적으로 문물과 문화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중심이요 만국의 중심’이란 기치를 내걸고 2020년이면 미국를 제치고 세계 최대강국이 되겠다는 중국이나 일본이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는 5천년이며 일본의 역사는 3천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의 시원 역사가 곧 우리민족(동이족)에 의해 왕조나 기타 물질문명으로 이루어 졌다는 ‘뿌리 깊은 역사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보다 더 악감정과 열등감을 품고 있다. 그들 국보1호인 미륵반가사유상이 한국에서 건너간 것으로 판명이 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침략을 감행해 우리 민족사를 말살하고 문화와 물질을 강탈하고 죄 없는 우리 민족을 끌고 가 무자비하게 부려 먹다 죽이고 강간하고 성 노리개로 만들었다.

토인비가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기 위해서는 그 민족과 조국의 역사를 말살하라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라고 명언을 남겼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 및 말살 만행을 지금부터라도 단호히 분쇄하고 우리 역사를 되찾고자 하는 노도와 같은 물결이 온 나라를 뒤덮여야 할 것이다.

친일주구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왜곡되고 점철되어진 천하디 천한 민족으로 전락하기 직전인 현 상황. 일제개들에 의해 작성된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지 못해 민족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10여년 전, 이러한 역사를 복원시키고 민족정기를 구현해 내고자 우리 국조이신 단군상을 제작하여 비치했지만, 신은 믿지 않고 종교를 믿는 자들에 의해 목이 잘리고 훼손되고 말았다. 우리 조상은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한 행위자와 사주한 자들은 장담컨대 저 세상으로 결코 갈 수 없는 구천을 맴도는 불쌍한 영혼들이 될 것이라고 전해주고 싶다.

[이어서 ‘[제2편] 정통사서들이 왜 연구되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을까?’라는 제목으로 칼럼이 이어집니다.참조/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제2편] 정통사서들이 왜 연구되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을까?

▲ 단군조선 영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

1만년 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기록을 하는 일이 쉬울 수가 없다. 더욱이 고증과 문헌 등을 종합해서 정확한 기록을 하기는 참으로 어렵고 또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우리 역사의 기록에 대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파악된 한나라시대 사마천이란 자가이란 지리지에 4천년 전의 시대를 기록해 놓은 것도 100%정확할 수가 없고, 또한 한나라 무제때부터 역사왜곡을 했던터라 29세의 약관의 나이로 더구나 적국이나 다름없는 동이족 역사에 대해 정확성을 떠나 객관적 서술로서 기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 단군의 어린시절과 어머니 웅녀황비(韓人聖母 雄女皇妃) 초상화
사마천의 기록을 토대로 여러 관점에서 서술된 사서를 중심으로 비교 분석이 가능한데, 우리의 역사서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일본이나 중국이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으리란 추론과 함께 그 사실이 조금은 밝혀지고 있기는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해 중국에는가 있고 일본에는가 있고, 우리 역사서 중에를 비롯해등이 있다. 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믿을 수 없다며 위서로 단정짓고 있다. 민족진영에서 수없이 반론하고 연구하고 족적을 찾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정부의 지원이 없이는 고증이나 발굴 등 충분한 연구를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하였으나, 강단사학이라 일컫는 부류들은 무조건 위서로 몰아붙이고 충분한 고증이나 발굴 등 연구도 하지 않고 있는 것같다.

지금이라도 중국, 일본 고대기록 등과 우리 사서들은 비교하며 활발한 비교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차차 열거해 객관적인 판단을 구하고자 한다.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id=kda)를 살펴보면,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 하백(非西岬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 왕(東扶餘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 – 요임금)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임금의 도산(塗山) 모임에,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참가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 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원문)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 檀君聘娶非西岬河伯之女生子, 曰夫婁, 是謂東扶餘王。 檀君與唐堯同日而立, 至禹會塗山, 遣太子夫婁朝焉。 享國一千三十八年, 至殷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爲神, 今文化縣九月山。

위에서처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 《단군고기(檀君古記)》를 인용하여 한인임금, 한웅임금, 단군임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까지는 《단군고기(檀君古記)》라는 책이 있었다는 얘기고 조선왕조실록에 공식적으로 인용될 정도로 공인을 받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삼국유사는 위서(魏書)와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임금에 대한 기록을 전했는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기(古記)의 내용과 조선왕조실록이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의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즉 그 두 책은 서로 다른 책이라 하겠고 단군임금에 대한 기록은 여러 책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실록에 인용한 《단군고기(檀君古記)》는 지금은 왜 전해지지 않고 있고, 도대체 왜 우리 선조가 쓴 고대기록은 후대에 전해지기가 어려웠을까?

[조대기(朝代記)]-> [진역유기(震域游記)]-> [규원사화(揆園史話)]로 이어지는 즉, 조대기는 발해때 단군조선시대를 기록한 책이고 진역유기는 단군조선시대 진한에 대해 쓴 책이라고 전해지며 규원사화는 이 두 책을 바탕으로 쓰여진 현존하는 책이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광복 직후 국립중앙도서관 직원이 서울의 한 책방에서 구입하여 1946년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 629번, 고서 2105-1번으로 등록되었다. 조선 숙종 2년(1675년) 때 쓰여진 진본이라는 감정결과가 이미 나와 있다.

[한단고기]는 [규원사화(揆園史話)]등을 모본으로 하여 집필하였고 또 그 내용이 거의 비슷하니 [한단고기] 또한 무조건 위서로 몰아붙일 일이 아님에도 근대적인 술어로 기록했다고 무작정 위서로 단정짓는 행태는 역사가로서, 학자로서, 후손으로서의 양심을 벗어난 반민족적인 자라고 단정지을만 하고, 훗날 이들에 대해 용서없이 가혹하게 단죄를 내려야만 민족정기가 구현되고 민족정체성이 바로설 수 있다.

규원사화, 한단고기, 부도지가 위서라고 주장하고 또 강단사학계의 정설이라면 필자는 한 가지만 묻고 싶어진다. 후대에 창작했다면서 위서라고만 주장할게 아니라 당신들이 위 고서처럼 창작하여 보라. 그러면 위서인지 진서인지 알게 아닌가? 그러면 현행하는 세계 최고상이라 불리어지는 노벨상을 한 천개는 받을 테니까.

위 실록에 나오는《안함로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와 《삼성밀기(三聖密記)》는 한단고기의 한 부분인 [삼성기(三聖記)]와 상통한다.

또《지리성모 하사량훈(智異聖母 河沙良訓)》은 지리(智異)산의 성모(聖母) 즉 한반도 남부지방의 고대 여성 지도자 즉 [마고할머니]에 대해서 쓴 책으로 보이는데 [부도지]와 상통한다.

그런데 위에 열거된 역사서가 지금은 다 어디로 갔나?

조선시대 이러한 사서를 수거한 조정이 이를 모두 불태우거나 없애지는 않았을 것이고 조선의 국립도서관인 [규장각]의 창고에 많은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규장각의 책들은 1911년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이때 넘어간 도서는 5,353부 10만 187책, 각종 기록은 1만 730책. 총독부는 전국에 고대사서를 수거하여 20만여권을 불태우고 귀중한 사료는 일본으로 가져갔다. 또 일본왕실사고에 근무했거나 양심있는 학자들에 의해 우리 고대 사서들이 일본사고에 수북이 쌓여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 예로 일제시대 우리 역사관련 책자에 대해 분류 작업한 박창화씨가 광복직후 최기철 명예교수에게 “1933년부터 12년간 일본 궁내청 쇼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고 그곳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다”고 최기철(崔基哲)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털어놨다.”고 최씨가 1999년 언론을 통해 증언했다.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해 강단사학에서 위서라고 주장하는 [한단고기]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입증한 서울대 박창범 교수’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 대해서 본지 우기수 칼럼니스트의 글을 싣는다.

천문과학으로 증명된 단군조선의 실체
서울대 박창범 교수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 역사’

▲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쓴 국내최초 천문학에 의한 역사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 편집부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 (僞書) 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관심을 끌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한 결과 상당 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들의 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 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 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와에 들어 있는이다.

는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서와 옛 비문, 현장 답사 등 13년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엮은 단군조선사이다. 제1세 단군왕검으로부터 제47대 단군까지 약 2천여 년의 역사를 역대 임금의 재위 기간과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름만 전해 오던 것을, 구한말의 한학자인 유응두가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고려시대 행촌 이암이란 선비가 저술한 단군조선 시대 역사서로,의 서술 내용과 큰 줄기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 오행성 결집, 큰 썰물 현상 모두 “사실”

이 서적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제 식민 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조선 말살 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의 고대사 관련 사료는와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 온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 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와에는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인 ‘오행성 결집 현상’이 한군데,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 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
나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홀달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무진 오십년 오성취루(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개 별이 루성(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 오성취루 현상.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 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 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이 날은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 1733 년을 기점으로 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 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 BC 1733년 홀달 단제 시대 단군 조선인들이 보았을 오행성의 결집 현상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컴퓨터 합성기법으로 시각화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 큰 썰물 현상
오행성 결집 현상과 함께 박교수팀이 주목한 것은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다. 두 사서 모두 제29세 마휴단제 9년 (BC 935년) 때 `남해조수퇴삼척(南海潮水退三倜)` 라 하여 남해의 바닷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적혀 있다.

오행성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BC 935년을 기점으로 전후 2백년 간에 나타난 조석력의 작용을 조사해 본 결과, 기록에 나타난 해로부터 4년 후인 BC 931년 11월 22일에 이 기간중 가장 큰 조석력이 작용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기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후 2백년 기간에 가장 큰 조석력이 4년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박교수는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후대의 누군가가 작위로 이 기록을 써넣었을 가능성은 0.04%에 지나지 않았다.

* 일식기록 분석
박교수팀이 처음 연구에 착수할 당시 가장 크게 기대했던 것은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다. 일식 현상은 그것을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달리 보이기 때문에, 일식 기록에 대한 분포도를 작성하면 단군 조선의 수도나 강역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단군 조선기에 실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는 일식 현상이 약 1천 5백회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비해 기록은 10개밖에 안돼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다만 중국의 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일식 기록이 주나라 때인 BC 776년인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제2세 부루단제 때인 BC 2183년 일식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중국 기록보다 적어도 1천 4백여 년이나 앞선다는 점, 그리고 10여 개의 일식 기록 중 다섯 개의 기록이 실제 현상과 일치하고, 그중 두개는 해뿐 아니라 달까지 일치하고 있는 점 등은 주목할 만하다고 박교수는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조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 기성 사학계도 연구 결과 인정

박교수팀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 는 “그 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조선사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박성수 교수 (정신문화연구원, 사학)는 “기존 학계의 그릇된 통념을 깨는 획기적인 연구다. 이들 역사서의 내용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해도, 연구도 해보지 않고 이를 백안시해 온 학계의 풍토는 개선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교수팀의 연구에 대해서는 그 동안 상고사 서적들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 온 `한국 상고사학회` 측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이들의 연구 결과가 기성 사학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상고사학회는 10월에 발간할 예정인 이 학회 연구 논문집에 박교수팀의 논문을 게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단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와 관련해 상고사학회의 실무를 맡고 있는 최몽룡 교수 (서울대, 고고학)는 “연구 결과의 중요성을 인정해 논문집에 싣기로 결정했다. 단군 조선에 대한 연구는 결국 한국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연구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문헌사적인 연구뿐 아니라 자연과학적인 연구도 활발하게 벌일 필요가 있다” 라고 말했다.

이와같이 천문을 관측하고 기록했던 단군조선을 ‘신화’라고 말하고 있는 매국식민사학계는 정말이지 오강들고 벌서야 한다.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이 천문을 계속 관측하고 있었단 말이다. 천문에 대한 기록은 국가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이토록 위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나라 단군조선을 아직도 신화속의 이야기라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법한 이야기인가!!! 위대한 자기 조상을 신화 운운하는 식민사학계는 전부 쪽바리의 자식들이나 뛔놈의 후예들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망발을 함부로 말한단 말인가?

[참조/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한국고대사). 역사서에 기록된 단군과 조선]

[제3편] 2편에서 이어집니다.

 

[제3편]단군조선의 실체와 삼천구백년 후 조선시대에 재현된 문화와 과학

일제시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하기 위해 생겨난 ‘조선사편수회’가 있다. 민족반역자로는 이병도와 신석호가 대표격이며 단군조선 등 우리 상고사가 ‘신화’라며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전설이라고 명문화하여 지금껏 종교주의자들과 호홉을 같이하며 우리 조상인 한인임금, 한웅임금, 한검임금을 모시면 우상숭배라고 맹공을 퍼붓고 단군상을 훼손했던 것으로 민족정체성을 뿌리채 없애려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해왔다.

또 이들 민족반역자들은 광복 후에도 마치 우리나라를 위해 독립운동한 것처럼 교묘하게 속여 국가 요직을 두루 두루 차지했다. 사망하기 몇해전 역적 이병도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단군은 실존인물이며 조선은 실제로 있었다’고 참회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후학들과 강단사학계는 지금까지 주장하고 밥벌이 수단으로 이용하여 왔던 것이 화가 미칠까 봐, 노망한 미친 늙은이로 취급해 버렸다. 그들이 지금 우리 역사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니 어디 역사바로세우기나 민족정기가 바로 설 수가 있는가?

그런데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등을 살펴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고 축소 내지 왜곡하는데 앞장선 일제만을 위한 식민사학자와 어용사학자들이 유일하게 인정한 역사서가 있었다.

바로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백문보(?~1374)가등을 토대로 몽골 즉 원나라가 물러간 뒤 민족정체성과 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해 단군기원을 쓰자고 건의한 내용이다.

이들의 말만 믿고 광복 후 지식인과 지도자들은 우리 역사가 반만년(오천년)이라고 외쳐 댄 것이다. 이는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웠다고 주장하는 데, 그 연대는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고려 말인 13세기 말에 건의한 것을 근거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이들 주장을 엄밀히 따지고 보면 반만년이 아니라 천년도 채 안 된 700년 정도이다.

▲ 삼일신고와 상응하는 단기고사. 사진은 캠퍼스와 곱자를 든 복희와 여와
이것이 우리 역사라고 함정을 파놓고 진실을 숨기고 역사를 말살했던 일제와 민족반역자들의 의도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속임수는 단군 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신화로 치부해 버렸기 때문이다.와를 일제가 가져가지 않고 남겨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는 점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바로 이점을 우리 역사학계나 모든 국민이 올바로 알고 대처하여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확립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그간 우리 지도자들이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강조할때마다 그들 민족반역자와 일제는 얼마나 박수치고 통쾌해 했을까?

그렇다면 이들의 간악한 속임수에 속지 않고 한중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과 선조들의 기록을 살펴 대처하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우리 역사를 찾는 방법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서라도 면밀하게 살펴보고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아야 한다. 그저 책상머리나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강의를 들려주고 밥이나 빌어 쳐 먹는 인간들을 제쳐놓더라도 양심있고 의식 있는 민족사학자 몇명만 있어도 된다. 필자가 지금까지 또 앞으로 열거해 놓은 것만이라도 충분히 연구한다면 우리 역사는 올바르게 정립 될 수 있고 민족정기 구현은 물론 민족정체성도 확립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동녕부를 토벌할 때 금주와 복주 등지에 방문(榜文)을 부치기를 ‘우리나라는 당요와 같은 때 건국했다(「용비어천가」 42장 주)’ 하고, 고려 공민왕때 백문보(白文寶)가 언사소(言事疏)를 올리기를 ‘우리 동방은 단군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3천6백년이 되었다(「고려사」)’고 했다.

또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세종실록」에 단군이 다스렸다(檀君之理) 한 것을 단군의 후손(檀君之裔)이라 적고 있으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평양은 본시 선인왕검의 댁(宅)으로 혹 말하기를 왕의 도읍지를 왕검(王儉)이라 하였다’하니,

정인보는 이것이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이 비판한 것과 같이 사마천의 「사기」에서 위만을 언급하다가 ‘왕지도왕검(王之都王儉)’이라 나오는 글귀를 표절한 것이라 말한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 ‘단군어미가 짐승 곰이었다 하더라’고 하는 신화문제에 대해 정인보는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한다.

“’고기’ 또는 ‘본기’에 신화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신화 부분은 신화로 돌아갈 것이로되 신화 아닌 부분까지 신화로 끌어들일 수 없다고 강력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름하여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이때가 중국의 당요 즉위 50년인 경인년에 해당하는데 도읍을 평양성에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號曰檀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 始稱朝鮮)”는 부분까지 신화라 할 수 없지 않는가.“라고 삼국유사의 잘못됨을 정면으로 거론하며 지적한 것.

사마천이 서이족에서 서하족으로 그리고 화하족으로 발전해 나아간 지나족의 중심 역사를 독립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 뿌리가 되는 동이족의 역사를 지나족의 역사에 부속적인 것으로 비틀어버렸는데 먼저 나온 이 철옹성의 책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군조선의 기록이 지리서의 형태 속에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단군조선이 실체했고 단군왕검이 실제 존재했다는 것을 중국 최고로 오래된 지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단군신화’라며 전설로 치부한 자들은 도대체 어느나라 국민이고 민족일까?

▲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져 있는 “한인, 한웅, 단군왕검”의 초상화. 중국 사서에 구월산은 단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산이기 때문에 그곳에 삼신전을 모시고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니산에는 단군 할아버지께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천단이 지금도 남아있다. 대한제국때까지 집집마다 이 영정을 걸어 정안수 떠놓고 빌었던 우리민족. 식민지화되면서 사라진 우리의 뿌리… 종교때문에 우리들은 조상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필자 주]

정인보가 주장한 내용을 더 살펴 보자.「삼국유사」보다 앞선 기록인 신라인 박제상이 고기(古記)를 인용한 「부도지(符都志)」제 1장에 “단군 임검이 불함산에 천부단을 쌓고 그곳을 조선(朝鮮)이라 하여 사해(四海)를 화합하게 했다”고 했다.

대진국(발해.중국측 사료)을 개국한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은 단군 조선의 2천 년 역사를 대진국어로 기록하게 한 「단기고사(檀奇古史)」 역시 단군 조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책은 그 후 3백 년 뒤 황조복(皇祚福)이 한문으로 번역 출판했다.

「상고조선 3천년사」를 지은 최재인(崔在仁)은 발해 대조영(699-719) 때 발간된 「단기고사」와 그 후 천년이 지난 조선 숙종(1675-1720) 때 북애자 노인이 저술한 「규원사화(揆園史話)」와 독립군이자 애국지사 계연수의「환단고기」가 모두 단군조선의 역대 년표와 역대 왕명이 일치할 뿐 아니라 단군세가(檀君世家)까지 모두 일치한다 말하고,

「단기고사」가 「부도지(符都志)」보다 뒤의 것이기는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는 4백 여 년 앞서 단군 조선을 입증했으며 일연의 「삼국유사」보다 5백 여 년이나 앞서 단군 조선을 입증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단기고사」가 우리 민족에게 널리 전해지지 못한 것은 발해가 건국된 지 2백 여 년 만에 거란의 요(遼)에게 망한 뒤 고려가 금의 눈치를 살피느라 발해사마저 우리 국사에서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므로 해서 「단기고사」가 널리 전해질 수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미수 허목(許穆)의 「동사」는 단군 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환웅이 9이(九夷)의 조상이라는 것과 환웅의 신시(神市)로부터 단군 조선이 개국되었다는 것과 주(周) 무왕의 때에는 단군조선의 단궁(檀弓)을 수출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단군이 개국한 조선은 동방일출 광명의 진리를 상징하는 국호라는 설명과 역대 단군 세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역대 단군의 통치가 1048년간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고 기자조선으로 설명이 이어지는 책이다.

한편,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중원의 요 임금때 단군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으로 했다는 것과 단군은 천자 성손(聖孫)이라는 것과 그때의 9이(九夷)가 단군을 임금으로 섬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우리민족의 옛 이름은 조선(朝鮮)으로 조선이란 광명을 뜻한다 했다. 조선족은 최초에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인 간방을 찾아 동방으로 진출, 백두산 일대와 그 부근에 자리잡아 조선이라 불렀다 했다.

단재는 조선족이 처음 개척한 나라가 부여이며, 한국문화의 원시시대의 발원지가 옛 이름이 부여인 만주의 송화강 연안 하얼빈 부근이라 말한다.

또 단군왕검은 지나의 수재(水災:9년 홍수) 구제차 2세 단군이 된 장남 부루 태자를 사천성 유도( 都:지금의 중경) 양자강 상류을 굽어보는 도산(塗山)에 서행(西行)케 하여 순(舜)의 명을 받은 하우(夏禹)에게 덕치의 교의를 가진 수두교를 전하는 선구적 업적을 성취하게 했다고 말한다.(이로 인해 서경 속에 등장하는 3신 상제님을 치제하는 상제 봉선(천제) 의식과 천일, 지일, 태일의 3신관이 자리잡게 됨)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단군 조선과 기자가 5천명의 피난민과 함께 조선에 가서 무왕의 봉작을 받아 조선 왕이 되었다며 조선에 관한 모든 기록에 항상 기자조선을 근거 삼아 단군(고)조선을 축소시켰고 복속시키려는 중국

그 뒤, 주(周) 나라가 흥하자 단군을 하늘로 받들며 도산신서(塗山神書) ‘홍범구주’를 신봉하는 은나라 왕족 기자가 무왕을 피하여 수두교의 조국인 조선으로 동래했다고 말한다.(이와 더불어 강태공은 동방 신교의 도통(道統)을 중국의 한족(漢族)에 전수한 바 있다)

신농의 후손에 강태공은 동방 신교의 도통(道統)을 중국의 한족(漢族)에 전수한 사람이라. (道典1:11:6)

지금은 인터넷 시대이다. 한문이 어렵다면 인터넷판을 검색하면 한글로 되어 있어서 찾기도 쉬울뿐더러 이해하기도 쉽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단군에 대한 기록에 대해가 많이 인용되어 있다. 산국유사나 삼국사기 같은 사대주의 입각해 저술한 역사서보다는 《단군고기》를 연구하여 역사를 바르게 정립될 시기가 되었다.참고로 단군에 대한 기록을 좀 더 열거한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의 기록이다.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위서에 말하기를,지난 2천 년 전,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과 같은 때이다. … 《삼국유사》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일연이라는 중이 위서와 고기를 들먹이며, ‘단군의 어미가 짐승 곰이었다고 나오더라‘하고 없는 사실을 왜 기록했을가? 누차 주장했지만 일연은 스키타이 족속으로 사대모화사상에 찌들어 그 관점에서 기록하고 이 땅을 불국정토로 만들려고 그 짓을 했을 것. 조선사편수회를 맡은 일제어용학자 금서룡(이마니시 류)이란 자가 훌륭한 책이야‘ 라며 무릎을 치며 기뻐하고는 ’단군신화‘로 치부해 버렸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뿌리가 없는 즉, 7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초라한 민족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땡 중 일연이 인용했다는 위서와 고기에는 단군 어미가 곰이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러한 사실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자들의 말만 믿지 말고…

《세종실록》〈오례>에 인용된 《위서》의 기록이다.
《魏書》云, 檀君王儉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위서(魏書에 말하기를,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과 같은 때이다. … 《세종실록》〈오례〉

《삼국사기 》에는 단군 왕검에 대한 기록이 있다.
王以丸都成經亂, 不可復都, 築平壤成, 移民及廟社
平壤者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왕이 환도성이 난리를 치러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디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혹은 ‘왕의 도읍 왕험’ 이라 한다.

《세종실록》〈지리지〉「평양부」에서는‘당요 무진년’까지 언급되고 있다. 평양에 도읍한 단군을 전조선과, 기자의 후조선 41대, 위만조선, 한사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알려져 있었던 내용들을 모아 정리한 것.

(강화는)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으로,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마리산이 남쪽에 있다. 산 정상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이라고 한다. 전등산은 삼랑성이라고도 하는데, 세간에 이르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게 했다고 한다. 문화현(文化懸) … 유주. 원래 고구려의 궐구(闕口). 구월산(세간에 이르기를 아사달산), 장장평(세간에 이르기를 단군이 도읍했던 곳으로, 곧, 당장경), 삼성사(三聖祠 ; 단인, 단웅, 단군의 사당)이 있다.

▲ 단군조선시대의 선기옥형(천문)을 재현해 낸 조선 세종시대의 혼천의(선거옥형 이라고도 함) .

《조선왕조실록》에 단군과 조선에 대한 실체뿐만 아니라 구월산과 단군사당의 제례 의식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다. 살펴 보자.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임금이며,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입니다. … 태조, 예조판서 조박

우리 동방은 단군, 기자가 모두 그 역년이 1천 년이 됩니다. … 태종 5년 의정부 상서

단군, 기자가 모두 1천 년이며, 한 사람이 아닌 왕조였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몇 대를 이어온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평양은 단군과 기자가 도읍을 세운 뒤로 서북지방의 본영이 되었습니다. … 태종 7년 평양 부윤 윤목

즉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모두 서북의 평양에 도읍하였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에 대해 세종대왕(9년)은 “단군이 삼국(진한 마한 번한)을 통일했는지 내가 듣지 못하였다.”라고 답변한다.

단군 조선 때는 이름을 아사달산이라 하였고, 신라 때에 궐산(闕山)로 고쳐 불렀으며, 그 때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闕口縣)으로 이름하였습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 수 없으며, 북쪽 벽은 단웅 천왕, 동쪽 벽은 단인 천왕, 서쪽 벽은 단군 천왕이니, 문화현 사람들은 항상 삼성당(三聖堂)이라 부릅니다. … 세종 10년 우의정 유관

즉 단군과 관련된 지명이 신라 시대 이전에 기원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위에 언급된 궐(闕)에 대하여《규원사화》에서는 ‘궐(闕)년’은 1만 년을 뜻하고, 단군 이전의 환웅시대를 궐백년(1만 1백 년) 또는 궐천 년(1만 1천 년)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황극경세서》의 1원(元)인 10,800년과도 비슷하다.

태고의 처음에 혼돈이 개벽하여, 먼저 하늘이 생기고 나중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가 있은 연후에 기가 화하여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어찌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겠습니까. … 세종 10년 우의정 유관

그 근거는 알 수 없지만, 하늘과 땅의 역사를 수십만 년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단군이 요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신라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의 왕씨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3천 9백 년이 되었습니다. 성종 12년 남원군 양성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부터인데 단군이 맨 먼저 나왔으며, 기자가 동쪽으로 건너 온 이후로 삼한으로 나뉘고 구이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습니다. … 정조 23년 지중추부사 홍양호

지금까지 조선시대 단군조선에 관해 임금과 신하가 말한 대목을 열거해 보았다. 놀랍지 않는가? 그런데도 ‘단군신화라’고 떠벌린 자들이 지금도 도처에 갈려 있다. 특히 친일친미사대주의자와 특정종교론자들에 의해서….신자나 신도들은 신을 믿지 않고 구세자 또는 구도자 행세를 하며 자칭 일부 종교지도자인 이들을 믿고 따르는 결과 무지에서 또 자신들 외 다른 종교는 이단이나 사탄으로 취급하는 무식자 내지 광적인 자들이 되었고 자신의 뿌리나 조상도 모르고 사는 천한족속이 된 것이다. 안타까울 뿐이다. 하루라도 빨리 역사의 진실을 알았으면 한다.

《세종실록》, 단군조선의 문화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에 주목해야

▲ 선기옥형. 이를 근거로 혼천의가 재현되었다. 북두칠성과 비교해보면 답이 나올 것 .
옛일이 이미 멀어서 제도가 퇴폐하여졌으니 책에 실려 있은 들 그 뜻을 뉘가 알리오. 신성하신 임금이 시대에 응해 나셔서, 요·순의 법을 받아 표(表. 수표)와 누(漏. 물시계)와 의(儀. 천체)와 상(象.천체)의 옛제도를 회복했네. 요가 희·화에게 명하여 책력에 일월성신을 형성하고, 순은 ‘선기옥형[璇璣玉衡] ‘을 만들어 칠정을 바로잡았으니 …

‘혼천의(渾天儀)’의 경우, 하늘의 축에 의해 바퀴가 회전하도록 되어 있으며, 365 1/4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그 유물로 보더라도, 당시 나무를 다루는 기술은 조선 세종때의 기술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부도지》에서는 ‘자방(磁方)’을 이용하여 도읍을 정하는 내용이 나오는 단군조선 당시에도 방향의 측정에 자석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즉 자북이 북동쪽이라고 했는데, 전문가들이 연구하면 연제든지 확인이 가능하고 이미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밝혀낸 부분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혼천의가 재현될 시점으로 봐서 3천 9백년 전에 단군조선 문화가 이토록 발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근거로 3900년경 후에 재현하면서 기록에는 ‘요·순 임금’이 등장하는 것은, 실제는 명나라의 시선을 의식해 이들을 내세워 단군조선의 문화를 되살렸던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며, 이것은 중국 한나라 이전의 잊혀진 제도였지만 조선 세종때 명나라 시선을 피해 재현해 낸 것으로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참조/ 인터넷판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한국고대사).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단군과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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