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경쟁공화국

 교육  Comments Off on 마케터의 경쟁공화국
Jul 252011
 

2010 프로야구 ‘SK 와이번스’ 우승

최근 몇 년 한국 프로야구를 평정한 구단은 SK였다. 그야말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07년, 08년 2회 연속 우승에 이어 2010년에도 삼성라이온스를 내리 4연승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그 동안 SK가 거둔 승리는 가공할만하다. 특히 08년 SK가 거둔 83승 43패는 승률 6할5푼9리의 성적으로 이는 27년 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 높은 승률이다. 2위와는 무려 13게임차가 나는 압도적 승차였다. 뿐만 아니다. SK는 09년 시즌 막판 19연승이라는 프로야구 연승신기록을 세우고 이를 2010년까지 이어가면서 22연승의 대기록으로 남겼다. 투수력, 타력, 수비와 주루능력 등등 야구의 모든 분야에서 최근 3~4년 SK의 전력은 나머지 7개 구단을 완전 압도했다. 전문가들은 SK가 한국 프로야구 수준을 뛰어넘어 일본 프로야구 리그에서도 중상위권에 통할만한 실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SK는 처음부터 강팀은 아니었다. SK는 만년 하위팀 쌍방울을 모태로 2000년 재창단한 구단이다. 하지만 불과 3~4년 사이에 팀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2007년부터는 한국야구가 진작 경험해 보지 못한 최강의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역대로 우수한 선수들을 보유했고 과감한 투자와 더불어 빅마켓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가진 LG, 롯데, KIA의 순위와 비교해볼 때 SK의 괄목할만한 성적의 원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SK 와이번스의 경쟁 시스템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입을 맞춘 듯이 ‘김성근 SK 감독의 지도력과 그에 기반한 특유의 경쟁 시스템’ 을 이유로 든다. 김성근 감독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은 워낙 알려진 바가 있으니 그렇다 쳐도, 여기서 주목을 끄는 건 바로 ‘경쟁 시스템’이라는 단어다.

SK 야구를 이른바 ‘벌떼야구’ 라고 한다. 상황별 선수기용의 폭이 넓은 야구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수들의 수준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SK는 투수, 내야수, 외야수 가릴 것 없이 하나의 포지션에 여러 선수들이 치열한 주전경쟁을 벌인다. 이러다 보니 선수들이 항상 긴장하게 되고 컨디션을 최대로 끌어올리려 노력하게 된다. 사실 김성근 감독은 이런 방면에서 도가 튼 사람이다. 절대적으로 많은 훈련량을 요구하고, 이를 경쟁화 시켜 먼저 목표에 달성한 선수들에게 우선 선발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3,4년 이런 SK의 ‘경쟁 시스템’은 장안의 화제였다. 결국 이는 하나의 전형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다른 팀들에게도 확산되었다. 07년, 08년 SK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고 그로인해 라이벌 구도를 만든 두산베어스도 SK처럼 포지션 경쟁이 잘 이루어진 팀 중 하나다. 결국 SK 와이번스의 성공비결은 ‘효율적인 경쟁시스템 도입과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지도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말한대로 SK의 사례가 결과로 입증되자 다른 팀들도 서로 다투어 포지션 경쟁 체제를 만들려고 아우성들이다. 그러나 모두 포지션 경쟁시스템을 만든다고 SK와 같은 성공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한국야구는 선수층이 엷다. 불과 50개 남짓한 고교야구가 선수수급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경기에 나설 선수기반이 부족하다. 우수자원은 한정되고 이로 인해 폭넓은 포지션 경쟁을 시키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선수간에 경험과 기량의 차이가 지나치게 현격하다 보니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경쟁자체가 의미 없어지기도 한다.

결국 SK와 같은 팀 경쟁력을 갖으려면 안정된 선수 수급과 이들을 기초부터 잘 육성하거나 재활용하는 시스템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말해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선 재료를 꾸준히 공급해서 실력을 배양할 토대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SK는 신인 수급도 수급이지만 특히 선수재활용 부분에서 각별한 노력을 기했다. 기회를 재생산 하는 구조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엄청난 훈련량을 요구하는 경쟁시스템을 무리없이 받아들였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경쟁의 승리자들

이렇듯 경쟁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경쟁구도를 인정해야만 이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혁신과 성장이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SK 야구팀의 사례처럼 경쟁이 기업이나 시장의 영역에서 경쟁력을 만들어 내는 사례는 많았다. 90년대 중반 크라운 맥주는 비열처리 맥주인 하이트 맥주를 등장시켜 30년 절대 아성의 OB맥주를 무너뜨렸다. 시장지배력에서 한참을 앞서가던 OB맥주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경쟁제품 극복을 절대사명으로 걸고 신기술 개발과 마케팅에 주력했던 하이트 입장에선 어쩌면 당연한 결론인지도 모른다. 그 뒤 국내 맥주시장은 새로운 브랜드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경쟁구도가 확산되었고 이를 통해 본격적인 시장 확대가 진행 되었다. 이 흐름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이는 경쟁이라는 구도가 가져온 선순환의 흐름(경쟁이 가속화될수록 전체 맥주시장은 거대해졌다)이라고 볼 수 있다.

삼성과 LG가 세계 가전시장에서 일본의 SONY를 제친 것도 비슷한 경쟁신화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미국시장에서 삼성의 제품은 지금의 중국산처럼 싸구려 이미지가 강했다. 미국의 할인매장 월마트의 먼지나는 한구석에서 연중세일 품목처럼 삼성의 전자레인지가 놓여 있었던 것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가전제품은 놀라운 혁신을 달성한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SONY의 제품과 치열한 경쟁구도를 거치더니 이제는 당당히 세계 1위의 브랜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실제 삼성 LCD TV는 북미시장에서 SONY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 마찬가지로 LG전자의 냉장고 에어콘 같은 백색가전제품들도 파나소닉과 필립스 등을 제치고 중국, 러시아 등에서 호평 받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외시장에서 성과) 삼성과 LG의 사례가 반드시 경쟁지상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삼성과 LG는 국내시장에서 볼 때는 되려 경쟁이 없는 독점적 구조를 즐기고 있다. 특히 이들에 기술과 부품을 제공하고 있는 벤처업체, 중소기업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정해진 기득권을 지배하는 독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삼성과 LG같은 대기업들은 시장의 위험요인은 중소 부품업체로 떠넘기고 자신들의 이익률은 고수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전형적인 독점 기업의 모습이다. 솔직히 말해 이건 경쟁이 아니다. 경쟁을 빙자한 일종의 불공정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게 경쟁이라는 구도속에서 미화되고 조작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쟁신화’가 이데올로기처럼 조작 될 수 도 있다는 점이다. 경쟁은 항상 선의로 해석하면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제는 독점을 즐기면서 겉으로 경쟁구도만 만들어 내면 무조건 혁신이 되는 것처럼 상황을 호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경쟁 시스템이 경쟁력이라는 효과를 생산하려면 올바른 경쟁의 기반이 필요하다. 이것이 안 된 상황에서 무조건 경쟁이라는 시스템을 돌리게 되면 경쟁 = 경쟁력의 선순환은 사라지고 독점지배력 강화, 경쟁력 약화라는 악순환이 되어 버린다. 이점을 경계해야 한다.

사실 대한민국에선 경쟁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전적 의미를 보더라도 경쟁이란 생물이 생존을 위해 한정된 자원을 쟁탈하는 본능적 의미를 말한다. 과정을 유추해 보더라도 이건 상당히 공격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결국 경쟁이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르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어쩌면 파괴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사회의 인간이라면 오히려 경쟁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안전장치를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게 옳다.

그러나 희한한건 대한민국의 시류에는 ‘경쟁’ 이라는 단어가 ‘능력’ 과 ‘효율’이라는 개념으로 엄청나게 격상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우리에게 무한경쟁을 기반으로 성장한 성공신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경쟁이라는 단어는 대단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 경쟁이 신화처럼 미화된 것은 입신양명이라는 유교적 관습이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과 결합되었고 이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압축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시스템의 경쟁구도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은 세 가지 독특한 경쟁구도를 가지고 있다.

첫째, 경쟁의 목표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 교육이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학문체계의 다양함과 창조성을 경쟁화 하는 쪽으로 했다면 이는 대단한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시스템이 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성과보상에 대한 결과도 다양하게 제시되었을 것이고 경쟁 결과가 획일화 되지 않고 개인별로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복잡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다. 경쟁이 목표가 엄청 단순하고 뚜렷했다. 학벌이라는 간판을 획득하면 경쟁의 승리로 간주하는 그 뚜렷하고 단순한 목표설정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은 엄청난 집중력과 동력을 갖게 될 수 있었다.

둘째는 승자독식 구조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은 경쟁에서 이기는 자가 다음단계로 올라 갈 때 패자의 몫을 완전히 다가져간다. 패자는 경쟁의 결과물은 물론 발언권 자체가 없이 역할에서 완전 배제된다. 결국 이런 구조에서 교육시스템 내부의 경쟁은 학문과 지식의 경쟁이 아닌 이른바 신분의 경쟁이 된다. 교육이 콜로세움에서 신분상승을 두고 벌이는 검투사의 경쟁처럼 되어버린 상황이라면 그 집중도와 몰입도가 도대체 어느 정도이겠는가! 따라서 강요하던 강요하지 않던 그 가공할 에너지 모여서 압축성장의 무시무시한 동력원이 되었다

셋째는 교육경쟁력의 세습화라는 점이다. 교육의 경쟁구도가 본인 세대에 머무르지 않고 자식세대로 세습화 된다는 엄청난 “사회적 합의(?)”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버렸다. 사실 이런 구도를 인정했다는 게 어쩌면 말이 안 된다. 이는 부모의 집중적인 노력으로 자식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막연한 욕심에서 기인한 듯하다. 물론 그 욕심이 100%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식을 잘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부모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선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입장으로 볼 때는 선한의지였더라도 이런 의지들이 한 공간에서 무차별적으로 경쟁된다면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들을 낳는다. 그 기형적인 결과물이 바로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사교육 시장의 폭발이다.

“경쟁신화”라는 건 이렇게 성공에 대한 갈망이라는 밑바닥 에너지가 대한민국 특유의 교육시스템과 결합되어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누군가 보다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얻기를 원한다. 이는 경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를 회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 질서 속에서 사는 우리가 경쟁구도를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게다가 우리는 경쟁을 뚫고 신분상승과 물질적 풍요를 달성한 사람들에게 성공의 가치를 두는 역사적 전통이 있다. 과다한 교육열이 그렇고 뭐든지 빨리빨리 조급하게 해치우려는 습성 역시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에서 기인한 바가 있다.

이런 분위기에선 누구도 함부로 경쟁을 회피할 수 없게 된다. 괜히 회피 하려는 자는 무능력한자, 용기 없는 자 라는 낙인을 찍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이른바 경쟁 만능주의가 나오고 경쟁이 없는 곳은 마치 모든 것이 뒤쳐지고 도태되는 듯한 느낌도 준다. 이것이 경쟁 공화국을 사는 오늘 우리의 일반적이 모습이다.

http://grands.egloos.com/2724801

 

(2) 경쟁, 그리고 사회적 책임

 


사회에 경쟁구도가 도입되는 이유는 경쟁구도가 새로운 기술과 혁신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소비에트 방식보다 우월한 결과를 만들었다는 이미 증명된 바 있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월이라는 것이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산량과 생산성에 있어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소비에트 시스템을 능가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쟁이 언제나 효율과 혁신을 이끌어 내는 건 아니다. 알다시피 세상에는 경쟁을 빌미로 오히려 자유와 정의를 억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현재 우리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자리잡은 양극화, 기회의 박탈, 약자의 소외, 물신풍조 등은 모두 잘못된 경쟁 심리로 파생된 개념들이다. 따라서 경쟁구도를 올바르게 바로 잡지 못하면 경쟁이 주는 이득보다 부작용이 사람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든 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다.

경쟁은 이렇듯 양날의 검과 비슷하다. 문명의 발전을 위해 경쟁은 필요하지만 이 경쟁이 되레 인간의 삶을 해치게 만들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우리사회가 경쟁의 조건에 대해 보다 엄격한 잣대를 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경쟁은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든 사회가 경쟁시스템의 합리성을 따질 땐 전제로 하는 기준이 있다.

 

첫째가 공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경쟁하자고 해놓고 불공정한 기준으로 사기 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누구는 100m 앞에서 뛰고 누구는 100m 뒤에서 뛰는 상황을 만들어선 안 된다. 화투 뒷면에 표시를 해놓고 누구는 이것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고스톱을 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행위는 모두 경쟁을 빙자한 사기다.

결국 경쟁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런 반칙과 특권 그리고 기만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선 이런 식의 무늬만 경쟁인 사기 상황이 태반이다. 이렇게 반칙과 특권 그리고 몰상식이 강하게 존재하는 한 그 바닥에서 경쟁은 비합리를 부추길 뿐 혁신과 효율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둘째, 경쟁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패자부활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패자 부활전이란 다시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재도전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패배를 극단으로 몰고가지 않는 일종의 관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합리적 경쟁구도를 통해 결과물을 쟁탈하지만 그것이 All or nothing 이 되어선 곤란하다. 이런식으로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결과가 반복된다면 경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앞서 말한 특권과 반칙, 그리고 승리지상주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반칙을 저질러서라도 무조건 승리하고픈 유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이 가진 권리와 기회를 침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득권이다.

뿐만 아니다. 경쟁시스템에 관용과 패자부활전이 없다면 패자가 승자에게 쉽게 승복하는 문화도 만들기 어렵다. 이는 패배의 절망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패자가 패배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반드시 후유증을 동반하고 사회전체의 비효율을 만들어 낼 것이다.

째, 비슷한 수준 내에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보면 경쟁할 수준에 있지 않은 사람들끼리 경쟁하는 경우도 있다. 이건 경쟁 자체의 공정성이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이미 불공정한 경쟁 구도다. 어차피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은 생물학적 능력과 사회적 자산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무더기로 이들을 경쟁시킨다면 이건 경쟁을 빙자한 일종의 고문이나 다름이 아니다. 경쟁할 수준과 능력이 안되는 사람들은 (사회가) 보호하고 배려해야 한다. 특히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그들이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보고 훈련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이런 조치 없이 경쟁이 무조건 효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찌 보면 우리 대학입시 현실이 이런 형편과 비슷하다. 지금 보면 대학을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아이들까지 입시전쟁을 치르게 하는 일종의 시험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학문연구와 전문기술을 배우기 위해 대학을 갈 아이들과 대신 사회교육, 직업교육을 받을 아이들이 동시에 경쟁한다는 것, 이것 자체가 심각한 모순이다.

예를 들어 체육대회가 벌어지고 있다 치자. 어차피 트로피를 받을 아이들은 1, 2, 3등이다. 나머지는 어차피 트로피 못받는다. 그런데 왜 나머지 아이들까지 1000등, 1001등 이렇게 가슴팍에 등수를 박아줘야 하는것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공정한 기준, 패자부활전, 수준끼리 경쟁 등 경쟁의 올바른 기준이 담겨있는 경쟁만이 혁신과 효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 말은 쉽지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향한 각개약진을 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어렵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올바른 정치집단과 올바른 언론등이 등장하여 사회구성원을 설득해야 하는데 이런 사회적 합의를 구축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공동체가 경쟁에 대한 합리성을 보유하려면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이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가진 자, 배운 자, 그리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자 나서는 전통이 있다.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통해 경쟁의 공정성을 사회적으로 담보했다.

영국의 사례를 보자. 80년대,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을 할 당시 영국왕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류 왕자를 전선으로 보낸다. 왕자를 전선에 보낸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바로 앤드류 왕자의 임무였다. 헬기 조종사로 종군한 앤드류 왕자에게 맡겨진 임무는 적의 미사일이 날아올 때 구축함을 보호하고자 미사일 궤도에서 레이더 교란 장치를 발사하는 것이 이었다. 영국왕실은 이를 왕실의 전통이라며 수용했다.

하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6세도 해군장교로 1차 대전에 참전한바 있고 여왕도 역시 2차 대전에 수송병으로 트럭운전을 손수 한바 있다. 전통은 이어져 내려와 여왕의 손자인 (찰스황태자와 다이애나 사이의 둘째 아들) 해리왕자도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전투에 참가한바 있다. 이렇듯 선진국은 가장 높은 계급인 왕족이 전쟁이 나면 목숨을 걸고 참전하여 가장 어려운 일을 수행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통합력을 발휘하고 경쟁시스템에 대해서 신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미국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몇 년 전 조지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정부가 상속세를 폐지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빌게이츠와 조지 소로스 같은 억만장자들이 나서서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피력했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빌게이츠는 이때 이렇게 말했다. “내 가족들은 직접 회사를 만들고 키우는데 기여한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상속시 이득을 받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게임의 룰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경쟁의 최일선에서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는 글로벌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부와 자선, 사회활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이런 활동들이 공정한 경쟁시스템을 만들고 경쟁 참여자들의 신뢰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아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언론기사다.

기업의 선량한 사회적 책임이 궁극적으로 일류기업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된 사례는 적잖게 찾아볼 수 있다. 커피 한 잔 값이 직장인들의 하루 점심 값에 맞먹는 스타벅스의 경우 커피를 공급하는 농장이 고용한 노동자를 제대로 대우해주는지를 구매조건으로 삼아 프리미엄을 얹어줘 커피의 품질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기업의 이미지도 좋게 한 사례로 꼽힌다. 이와는 반대로 얼마 전 블룸버그가 제기했던 미국 포드사의 경우 하청업체가 아마존강가의 노예에게 부품을 생산하게 했다는 것이 사회적 비난거리가 됐다.

이 두 사례는 현대사회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는지를 극명하게 입증해준다. 특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 범위가 하청업체에까지 미친다는 점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 기업들 가운데는 제품의 하자나 고객과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참으로 대조적인 상황이다.

13년 전 지역 매체로 출범한 케이블TV의 경우 그동안 일궈온 성장의 과실을 지역주민과 나누려는 다양한 활동이 최근 몇 년간 부쩍 늘고 있다. 수익의 1%를 불우아동과 청소년을 위해 사용하는가 하면 아예 복지재단을 만들어 의료비 지원 사업에 한해 4억 원 이상 후원하는 케이블방송국도 있다. 지역의 장애인을 후원하고 지역채널을 통해 공익 캠페인을 전개하는 일 등은 전국 케이블TV 사업자들의 평상시 일과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변화가 거대통신사와 맞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효과적인 방책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소비자에 대한 인식의 대 전환은 시청자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케이블TV사업자에도 긍정적인 변화의 조짐이라고 보인다. 기업이 성장 과실의 상당 부분을 소비자에게 되돌려주겠다는 자세의 변화는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한국일보 기사참조)

한국의 기업들도 이제는 단순히 경쟁이 효율을 낳고 그 효율이 만든 생산성이 고객만족을 창출한다는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 기업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모두가 신뢰하는 공정한 경쟁의 룰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목표가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만족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향후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비즈니스와 별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러한 활동들이 성과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앞으로 고객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겠다”.

(* 한겨레 신문 참조)

위 말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 통신회사 CEO의 선언인데, 현실에서 진짜 저런 마인드로 경영을 한다면 정말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이 올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그 정도 신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런 사고가 유지되는 곳이어야 비로소 경쟁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대한민국은 이런 점이 아직 대단히 부족하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라는 천민의식이 지도층은 물론 사회구성원 전반의 의식에 남아 있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아직 갈 길이 참 멀다고 느껴진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경쟁이라는 단어는 겉으로는 효율이나 능력으로 여겨지지만 본질적으로는 진짜 원시적인 의미 그대로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경쟁구도에 반칙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해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본질적 문제해결을 위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고민하려 하기 보다는 “부자 되기” 같은 희망고문으로 개인이 각자 알아서 해결하려고 한다. (한국사회에) 사회적 책임이 갖추어진 경쟁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아직은 요원한 것 같아 답답한 노릇이다.

출처:(2) 경쟁, 그리고 사회적 책임

 

 Posted by at 11:18 AM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역사  Comments Off on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Jul 112011
 

(민족사학의 큰 스승 “한암당 이유립 선생”)

(편집부)

지구상에 난무하는 사건 하나 하나가 모두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건의 미치는 파장과 영향력이
역사가들에 의해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어야
비로소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역사가들의 임무는
바로 어떤 사건을 역사적인 것과 그 밖의 것으로 구분짓는 데서 그 위력이 잘 드러난다.

따라서
이 역사가가 어떤 사고방식(여기서는 사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사건의 취사선택과 평가는 전혀 달라지게 되는데
민족사관의 경우 역사발전의 주체를 ‘민족’이란 단위로 인식하고
모든 판단의 기준을 ‘민족’에 두고 있는 사관을 말한다.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을 민족사학자라고 말하는데,
이들의 생각은 개인보다는 ‘민족’이란 단위의 생존, 발전, 영광을 우선한다.

우리 겨레에게 있어 민족사관의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 문화와 민속이 이 민족을 단위로 형성 발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민족사학의 입장에서
우리 민족사의 가교역할을 해온 민족사학자들을 시대를 거슬러 재조명 해본다.

우리 사학,
즉 한국사학의 진로 설정에 참고가 될 것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 )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세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
「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 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24세인 1930년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 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1942년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등
12항을 이유로 강제 폐쇄 당했다.

39세인 1945년
「단학회(檀學會)」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69세인 1975년 5월 8일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東源論)》을
미국의 하버드. 워싱턴. 콜롬비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 갔다.

70세인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제씨와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하신 이듬해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1986년이니 이제 15년을 지나고 있다.

다행히 생존해 계실 때 교류하던 인사들이 상당수 있어
그분들로부터 한암당 선생에 대하여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박정학 한배달 치우학회장이 전하는 내용이다)

박정학씨는 한암당 선생을 만난 기억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일로 3가지를 꼽는다.

그 첫째는 빼어난 기억력이다.

한암당 선생과 교류하던 당시
“10여세 때 들었던 내용을 확인하고 싶으니 이러저러한 책들을 구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필요한가를 되물었더니
“옛날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은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40여종의 도서 80여 곳에 대한 복사를 요청받고 국립도서관을 방문.
상당수 책이 귀중본. 희귀본이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것임을 알게 되고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더니 도서를 찾던 담당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도대체 이런 책을 누가 보느냐?”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지하실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이런 책이 수북히 쌓여있다” 며
요청한 자료를 준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원하는 책의 복사부분을 상자에 담아 전해드렸다
(그러나 이 상자를 뜯어보지도 못하고 선생님은 세상을 뜨셨다).

아마 한번 들었던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대한독립소년단 시절 전령으로 활약할 때는 편지대신 외워서 전달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속독에 의한 뛰어난 독서력이다.

한 번은 조선왕조실록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마찬가지로 과거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책을 구해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배달 창립 멤버인 모 회사 사장에게 부탁하여 사장이 직접 책을 전해드렸다.

책을 받아 본 선생님은 매우 기분 좋아하시며 책을 펼쳐 보시더니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겨 읽으면서도
필요한 부분을 정확하게 찾아내 쪽지를 끼워 표시해 놓고 원고를 완성하는데 사용하셨다.

순 한문으로 된 책을 그렇게 빠르게 읽는 것은 처음 보았으며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셋째는 빼어난 건강이다.

79세의 노인이 젊은 제자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데
젊은 제자들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산을 오르셨다.
몸이 아주 가벼워 보였다.

< 운초 계연수 선생과의 만남 >

계연수 선생은 호를 운초라고도 하고 일시당(一始堂)이라고도 하는데.
한암당 선생 아버지와는 광복운동을 함께한 관계로 어릴 때부터 가까이서 자주 접해온 사이였다.

그러던 1943년 어느날.
계연수 선생이 집으로 찾아와서 어린 이유립을 부르더니
“너는 머리가 좋고 하니 네가 우리 역사를 공부해라”고 부탁 겸 타이르셨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정치에 더 관심이 있던 이유립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3일 후 목이 잘린 계연수 선생의 시신이 대동강변에서 발견되었다.

불과 몇일전에 자신에게 일렀던 말들이 선생의 유언처럼 들리고.
마침내 운명처럼 ‘우리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틈틈이 계연수 선생에게 들었던 이야기에다
신채호. 이덕수 선생들과 교류하면서 전해 듣는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하였다.

(한암당 선생의 민족사 체계)

“서로의 원수를 잊고
세나라(고구려. 백제. 신라)가 힘을 함쳐 당나라를 쳐 없애자는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장군의 제의는 무시되고.
한, 단, 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 고려로 이어지는 국통, 국학, 사관이 올바로 풀리지 못하고…”

이 말은 한암당 선생의 사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암당 선생의 민족사에 대한 체계는,
물론 한암당 선생의 수많은 논저를 읽고 난 후에야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다음의 몇 가지 주장에서 그 맥락을 읽을 수가 있다.

(1)
우리 민족의 정통성은
한국에서 이주해온 한웅천왕의 배달 건국으로부터 비롯하여
단군조선-북부여(원시고구려)-고구려(본고구려)-대진(大震-중고구려)-고려(후고구려)-조선-임시정부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2)
세계문명은 서(西)에서 동(東)으로 온 것이 아니라
동(東)에서 서(西)로 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민족사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에 있었던 한웅천왕의 태백산 천강과 함께 이룩된
신시개천에서 찾아야 한다.

(4) 단군조선은 엄연히 실존했던 역사이며,
아사달시대(1048년),
백악산 아사달시대(860년),
장당경시대(188년)를 통해 2096년의 역년을 셈할 수 있고,

통치방법으로 신한(진한), 말한(마한), 불한(변한)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본 뜬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적용되었다.

(5) 고구려 건국 연도는 북부여 원년(신시개천 3659년)으로부터 기산되며
보장제(帝)의 27년까지는 907년이 되지만(신시개천 4565년)
해모수 8년(신시개천 3666년)의 부여 고향 수복으로부터는 정확히 900년이 된다.

(6) 기자조선은 환작(幻作)된 것으로서 민족의 정통 역사로 볼 수 없다.

(7)
위만은 요예(遼濊)의 변경을 침략하여 지금의 창려(昌黎-하북성)를 점거해
조선이라고 잠칭하고 있던 떼도적의 두목에 불과하며,
의문 투성이의 ‘한사군’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8)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성제의 위업으로 이룩된 영락대통일은
따무르자주의(漢寇擊退完我舊彊)를 완전히 성취한 것인 동시에 민족사의 영원한 이상을 제시해 준다.

☞ 한구격퇴완아구강(漢寇擊退完我舊彊) : 한나라 도적들을 퇴거하고 온전한 우리의 옛 강토를 되찾자

(9)
신라 ‘삼국통일’이란 허구에 찬것이며,
‘발해삼인당일호(발해 사람 셋이 모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해낸다)’에서도 나타나는
대진의 웅혼한 기상에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

(10)
한양 조선은 신시개천 5816년(1919년)에 종식된 것으로 보며
동년 4월부터 옛 고구려 송강현(지금의 상해)에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법통을 잇는다.

물론 이러한 주장외에도 광범위한 사론(史論)이 펼쳐져 있지만
더 요약한다면

‘고구려 중심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 천부경,
– 삼일신고,
– 참전계경,
– 신시개천경(단군고기),
– 광개토지경(비문),
– 훈민정음경(반포문)을

우리정신. 역사를 찾은 근본서적으로 중요시 하였다.

한암당 선생과【한단고기】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일생을 통털어 최대의 민족사적인 사건은
【한단고기(桓檀古記)】와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사를 논할 때 불가분『한단고기』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럴 때마다 한암당선생은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되고 만다.

『한단고기』의 탄생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

– ‘삼성기전 상편’. ‘삼성기전 하편’.
– ‘단군세기’.
– ‘북부여기’ 상. 하.
– ‘태백일사’를 한데 묶어
『한단고기』라는 제목으로 30부를 발간한 데서 비롯된다.

그 가운데 1부가 한암당 선생에게 전해져 칠십년 대 초반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의정부에서 셋방을 얻어 있다가
너무나 어려워 군산으로 잠깐 내려가 있었다.

그 사이 주인은.
방세도 못내는 노인이 어디 갔는지 나타나지도 않자 책을 내다 팔아 버렸다.
이때 그『한단고기』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한암당 선생은【한단고기】1권 정도는 이병도씨 집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음)

급기야 기억을 되살려【한단고기】를 다시 써야 했다.

워낙 공부를 많이 하고 어려서 전령으로 활동할 때 문건보다는 외워 전달했던 것이나
속독으로 훈련된 탓에 새로이 한단고기 내용을 기억하여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후 잘못된 부분이 몇 군데 제자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맞을 거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선생의 인품을 의심하는 사람은(식민사학자들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문건은
1970년대 후반〈한단고기 정해〉라는 제목으로
서문까지 완성된 상태에서 출판사 선정을 위한 협의 도중

당시 월간《자유》의 발행인인 박창암으로부터
‘출판에 도움이 될 재일교포가 있으니 원고를 달라’는 요청을 받고 건네졌으며.
불과 3일이 지나지 않아 박창암으로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원고를 돌려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에서『한단고기』초판이 나왔는데,
일부 내용의 해설이 임의로 바꾸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초판은 우리나라에 전해져 제일 먼저 김은수 선생의 번역판이 나왔고.
이유립 선생의 ‘한단고기정해’가 대배달 민족사에 실리게 되었으며
이어서 임승국선생의 한단고기.
강수원 선생의 한단고기.
85년 배달문화원에서 발행한 한단고기,
오정윤 선생의 한단고기(도서출판 창해 刊) 등이 연이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 이 외에도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83년에 발행한 ‘한단고기’ 필사본.
– 1979년 조병윤씨가 오형기씨에게 부탁하여 필사한 ‘한단고기’
(광오이해사 발행. 100부 한정판. 이 내용이 일본인 ‘녹도 승’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일본인 ‘녹도 승’이 쓴 ‘한반도의 우가야왕조사-한단고기’등이
한배달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 한암당 이유립과 (사)한배달 >

(역시 이유립 선생을 직접 만났고 (사)한배달의 설립에 결정적인 산파역할을 맡았던 박정학(치우학회장)씨의 증언이다)

1982년에 한미 연합 사령부 교양강좌 때 만났던, 한암당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985년이다.

8월 9일자 신문에「백운대 쇠말뚝 제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는 순간,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말로 우리 겨레의 얼을 찾는 일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다음날인 10일,
이전부터 알고있던 한암당 선생의 제자 전형배군(당시 고려대 대학원 재학중)을 찾아서
함께 김포읍 산자락에 거처하시는 선생을 찾아갔다.

새로 지은 집이었는데 조그만 별채로 방 하나, 부엌 하나였으며,
혼자서 연탄도 반찬도 없이, 그야말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몇몇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라면을 한꺼번에 3개를 삶아 놓고
소금이나 간장을 반찬 삼아 아침, 점심으로 조금씩 끼니를 들고 있던 때였다.

제자의 안내로 선생을 뵙자마자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나는 이제 안합니다.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재차 물으니,
“상황이 쉽지 않습니다. 국사찾기는 이제는 안합니다.
책도 팔아버리고…왕조실록하나 구하려고 해도 돈이 없어 못구하고…나는 안 합니다”
라며 완강히 거부하셨다.

나는 ‘이제는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선생님은 “이제 끝났다”고 말씀하시니 난감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어렵사리『조선왕조실록』을 구해 드렸다.
그리고 다시 댁을 찾아가 보니 책은 펼쳐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다.

3번째 방문할 때는 ‘두 아들’을 데리고 갔다.
절을 올리면서 “우리 이 아이들을 만주를 찾는 선봉장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아내 전유선(한암당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서 현재 ‘한암당 이유립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의
말을 듣고는 마침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우선 거처를 정하여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살도록 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김포에, 부인은 군산에, 시집 안간 막내 딸은 대전에
각각 흩어진 이산가족이 되어있었다.
이런 선생께 1200만원을 마련하여 화곡동에 전셋집을 마련해드리고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살도록 터전을 구해 드렸다.

이후 선생님은 집필에만 전념하여
도서출판 고려원에서【대배달민족사(전 5권)】을 발간하기에 이르렀고.

집을 마련하는데 재정을 지원했던 사람들이 모여
한암당 선생의 제자(현재 부부인 전형배 고성미)를 초청.
우리 역사에 대하여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4월 17일 저녁 7시 인사동 소재 당시 도서출판 고려원 사장(김낙천) 사무실에서
직접 한암당 선생을 모시고 질의응답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9시 20분이 될 즈음)
“이것은 정말 당신들이 해야 될 일이요”라고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셨다.

재빨리 선생을 의자에 앉혀드리고 청심환을 드렸는데,
15분이 지나서도 깨지 않아 인근 혜정병원으로 옮겼다.

뇌출혈이었다.

중구 필동의 성심병원 응급실로 급히 옮겨 하루를 지낸 다음날
아침 잠깐 의식이 돌아오는 듯 했으나 낮 12시쯤 재차 진행된 뇌출혈로 의식불명에 빠졌다.
그 상태로 자정을 넘기고 다음날 새벽 1시에 운명하셨다.

선생의 장례를 단단학회장으로,
강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재정을 부담하여 정성껏 치렀다.

장례를 마친 후
“이것은 정말 당신들이 해야될 일이요”라는 마지막 말씀을 유언으로 해석하여
‘역사 찾기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재정지원에 참가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단체 설립을 준비하여
7월 1일 종로 인사동에서 사무실을 열었다.

그리고 그해 말 마침내 “사단법인 한배달”이란 이름으로 서울시 교육청에 등록되었다.

오늘날 15년의 역사를 가진 사단법인 한배달의 창립은
바로 민족사학자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뿌린 씨앗이 싹튼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역사가 이유립은
그의 호 ‘한암당(寒闇堂)’이 풍기는
‘춥고 어두운’ 분위기 만큼이나(대부분의 광복군과 그의 후예들이 그렇듯이)
어려운 삶을 살았다.

자생 신앙결사인 ‘태백교’의 부활을 꿈꾸기도 하였고.
또 한 때는 정치에 뜻을 두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사론만이 후세에 남아 ‘국사바로잡기’의 험한 길 위에 비치는 찬연한 등불이 되고 있다

< 참고 자료 >

한암당 선생이 남긴 논저들은『대배달 민족사』에 실려있습니다.
필요한 분은 한배달로 연락하시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대배달 민족사(전5권)』(고려원 刊)
– 구입문의 : 월간 한배달사 편집부 (02) 747-8984

————————————————————————

< 민족사학자들의 행보 >

우리 배달Baedal 민족의 장대한 역사를 태풍의 격렬한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그 태풍의 중심이 되고있는 태풍의 눈은
배달Baedal의 정신입니다.

그 배달의 정신은
– 천부경,
– 삼일신고,
– 366사(참전계경),
– 단군팔조 등

십수권의 배달Baedal 민족 고유의 경전에서 설명되는
인류의 보편적 진리가 설명합니다. 

<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전래 >

교과서에 없는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등이 어떻게 지금까지 전래되었는가 ?
라는 의문을 제기해주신 분들의 요청에 의해 그 자료의 전래내용을 첨부합니다.

< 1. 한단고기 >

한단고기는
천부경, 삼일신고의 원문과 366사(참전계경)에 대한 자료등이 실려있는 책으로서
이 책이 전래되는 과정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곧 이 경전들의 전래와 직접관계가 있다.

고려말 좌의정을 지낸 행촌杏村 이암선생은

1313년(충선왕5)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이 그를 아껴 부인符印을 맡겨 비성교감秘省敎勘에 임명했다.
그 후 좌정승을 마지막으로 관직에 물러난 인물로 단군세기의 저자이다.

태백일사를 찬한 이맥李陌선생은

행촌선생의 고손高孫으로
1474년(연산군4)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
중종반정때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성균관사예와 사헌부장령을 겸하고 동지돈영부사에 이르른 인물이다.

행촌선생과 이맥선생은 모두 고성固城이 본관이다.

여기에서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전래와 직접 연관이 있는
또 다른 고성 이씨인 구한말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기李沂선생을 소개할 차례이다.

이기李沂선생을 소개함에는 실로 많은 지면이 필요하나 중요한 내용만 간단히 요약하면

을사5조약이 체결된 후 후일 대종교를 창건하였을 뿐 아니라
혁혁한 독립운동가인 나인영(나철)선생과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함께 을사오적을 주살할 것을 결의하고

자신회自新會을 조직하여 권중현權重顯을 총살하였으나 실패하고,
박제순朴齊純등에 대해서도 살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던 혁혁한 애국독립투사이며 자주를 주장한 유명한 학자이다.

합방을 예견하고 비분을 참지못하고 단식끝에 운명을 맞았다한다.
이기선생은 단학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지냈다.

한단고기를 전한 계연수桂延壽선생은

이기李沂선생이 한단고기를 직접 감수監修했다고 밝히고 있음으로
스스로 고려말부터 구한말에 이르는 배달Baedal 사상을 잇는
중요한 갈래의 한부분을 담당했음을 한단고기에서 밝히고 있다.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묘향산 단군암에서 한단고기를 쓰는 비용을 역시
혁혁한 독립운동가인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선생이 대어주었음을
한단고기는 밝히고 있다.

계연수선생은

이기선생의 단학회를 이어받아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하여 정신적, 사상적 계몽협조를 했다.

1920년 계연수 선생은 일본인 스파이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그 다음 단학회의 한단고기의 전래는
천마대天摩隊대장 최시흥崔始興선생에게 이어졌고
다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 선생에 이어졌으나
이덕수 선생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침체되었다.

해방후 일제에 의해 수감되었던 이용담선생이 출옥하면서 평양에서 그 맥을 이었으나
기관지 태극에서 신탁통치반대론을 주장함으로서
태극의 주간 이유립선생이 구속되면서 단학회의 활동은 다시 중단된다.

그 후 이유립선생이 월남에 성공함으로서
단단학회를 세워 계연수 선생의 한단고기는 다시 세상에 전해질 계기가 생겨났다.
작고하신 이유립선생은 1979년 한단고기를 세상에 펴낸다.

그러나 1982년 이 이유립선생의 한단고기가 한글로 번역이 되기도 전에
천만뜻밖에도 일본의 가지마가 일본어로 번역하여 발행을 해서 세상에 펴내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라는 배달Baedal 민족 최대의 암흑기에도
위대한 인물들이 마치 릴레이를 하듯 서로 이어받고
그 가난했던 시기에도 자금을 대고해서 전해진 한단고기가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소위 단군이래 가장 잘 살게되었다는 1980년대초에 어이없게도 일어로 먼저 번역된 것이다.

자손만대를 위한 소중한 민족적 지적재산이 국내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는 수모를 우리 모두는 당한 것이다.

그 시대의 우리는 진정 중요한 일을 하는 인물들이 단돈 몇푼의 출판자금이 없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초를 살았던 한국인중 한사람으로
당시에 한단고기의 존재를 몰랐다해도 한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한단고기에는 천부경, 삼일신고가 원문 그대로 전해지며
또한 366사는 참전계경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이유립선생에 의해 전해진다.

한편
이 한단고기는 제대로된 증거조차 제시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위서로 매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위서라는 보편타당성을 갖춘 주장을 아직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만일 제 2의 일본인 가지마가 출현하여
한단고기등에서 전하는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참전계경)을 세계의 문화시장에 내놓고
이를 일본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나 지금이나 일본인은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지식정보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정작 우리의 소중한 지적재산이 무언지도 모르는
이 기막힌 현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 시대에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진다.
 

< 2. 묘향산석벽본(妙香山石壁本) >

천부경 81자에 대한 자료로 잘 알려진 묘향산석벽본은
1917년(丁巳年 正月 初十日) 계연수선생이 묘향산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탑본하여
당시 서울의 단군교 앞으로 서신을 보낸것으로 알려져있다.
단군교부흥경략(1937년)에는 이 서신과 함께 천부경 81자가 전해지며 또한 삼일신고의 원문도 전한다.

< 3. 최문창후 전집 >

성균관대학교 소장의 최문창후전집의 고운선생사적孤雲先生事跡에는
천부경 81자의 원문이 기록되어있다.
다만 이 기록에는 한단고기 태백일사와 묘향산 석벽본의 천부경 81자와는 약간 다른 글자가 보인다.
析을 碩, 衍을 演, 動을 同, 昻을 仰, 地를 中으로 하는 등의 것이다.

이 두가지 출처의 내용은 음은 같지만 표기가 틀린것이 대부분이다.

< 4. 삼일신고 >

삼일신고는 발해의 석실본과 천보산 태소암본, 고경각의 신사기본의 세가지 이본異本이 전해진다.

< 5. 366사(참전계경) >

366사(참전계경)은 단군교팔리, 성경팔리상하, 단군예절교훈, 참전계경등이 전해진다.

< 참고문헌 >

–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 한국정신문화원
– 한단고기 : 계연수저 임승국번역, 주해 1986년 정신세계사
– 단군교부흥경략 : 정진홍 1937년 계신당
– 삼일철학역해종경합편 : 대종교 출판사 1992년
– 한민족뿌리사상 : 송호수저 1991년 기린원
– 커발한문화사상사 : 이유립著 1976년 커발한 개천각

———————————————————————–

< 단군팔조교 >

단군팔조교는 단군Tangun의 위대함을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경전에서 전하려는 메세지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그것은『너희들도 단군이 되거라 !』는 말입니다.

이 경전은 누구나 단군Tangun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간단한 문장에 압축하여 제시한 경전입니다.

스스로가 자아를 말살하고 마치 어린아이나 원시인처럼
원하는 것을 갖게 해달라고 비는 일은 진정한 문명인이 취할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첨단적인 물질문명에서 이같이 유치하고 원시적인 정신상태의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단군팔조교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평등한 수평적 관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단군팔조교 뿐 아니라 모든 배달민족의 고유한 경전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이 개념이 곧 천손사상天孫思想입니다.
우리민족 모두는 하나님의 자손이며 인류 모두가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배달경전에서 전하고져 하는 지식정보는
『너희가 곧 단군이고 너희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위한 방법론이 십수권의 한민족 고유의 경전에 압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아를 말살하는 대신 보호를 요청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사소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건 보호가 아니라 억압인 것입니다.
억압받음으로서 외롭지 않다면 이미 문제가 없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없이 억압받는 사람들은 아무리 권력이 크든,
아무리 재물이 많든 항상 권력과 재물등에 굶주려 있습니다.
따라서 정작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경멸함으로서 자신의 불행을 감추고 싶어합니다.
기회가 닿으면 인정사정없이 불행한 사람을 짓밟음으로서
자신이 불행하지 않음을 증명하려 하는 것은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입니다.

배달민족의 경전들은 자아의 중심이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신이나 구세주에게 어린아이나 원시인처럼 매달리는 상태를 극도로 경계합니다.

대신 피와 땀과 눈물로 열심히 일을 하여 재세이화하고,
그래서 쌓인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홍익인간을 함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라고 합니다.

단군팔조교는
단군왕검께서 단군조선을 세우시면서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진리를 압축하여 전하신 경전입니다.

이 경전의 8개 조목중에서 3개의 조목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경전이 우리민족과 완전한 한 덩어리임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은 우리민족이 단군조선이 출발할때의 정신세계가
지금에 와서도 별반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 경전 한권만으로도 유불선을 비롯한 만교가 이미 우리의 정신세계에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을 거듭해서 읽으면
우리 민족의 모두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힘들때면 항상 잔잔하게 들려오던
다정스러운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이며,
무엇을 말해 오던 것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단군팔조교(檀君八條敎) >

제 1 조

하늘의 법法은 오직 하나요,
그 문門이 둘이 아니다.
너희는 오로지 순수한 정성이 하나 같아야 하며,
이로써 너희 안(마음)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

천범유일 불이궐문 이유순성일 이심내조천
天範惟一 弗二厥門 爾惟純誠一 爾心乃朝天

 
제 2 조

하늘의 법은 언제나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스스로를 살펴서 마음을 바로하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하늘의 법에 부합되게 할 수 있다면
나아가 만방에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천범항일 인심유동 추기병심 이급인심 인심유화 즉합천범 내용어우만방
天範恒一 人心惟同 推己秉心 以及人心 人心惟和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제 3 조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님으로부터 연유하였으며,
부모님은 하늘에서 강림하셨도다.
오로지 부모님을 바르게 모시는 것이 하느님을 바르게 모시는 것이며,
이것이 나라에까지 미치니 충성과 효도이다.

이 도道로써 부지런히 힘써 정도正道를 이룬다면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반드시 먼저 벗어 나리라.

이생유친친강자천 유경이친내극경천 이급우방국시내충효
爾生惟親親降自天 惟敬爾親乃克敬天 以及于邦國是乃忠孝

이극체시도 천유붕 필선탈면
爾剋體是道 天有崩 必先脫免

 
제 4 조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을 다니는 짐승도 짝이 있고,
다 떨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들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합하여 원한하는 일이 없게 하고,
질투함이 없게 하고, 음탕함도 없게 하라.

금수유쌍 폐리유대 이남녀 이화 무원무투무음
禽獸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無怨無妬無淫

제 5 조

너희들은 열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손가락이 크던 작던 똑같이 아프지 아니한가 ?
서로 사랑하되 헐뜯음이 없고, 서로 도와주되 서로 다툼이 없다면
가정도 나라도 모두 부흥하리라.

이작십지 통무대소 이상애 무서참 호우 무상잔 가국이흥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 無胥讒 互佑 無相殘 家國以興

 
제 6 조

너희는 소와 말을 보아라.
그들도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아니한가 ?
너희는 서로 양보하고, 서로 빼앗는 일 없이 함께 일하며,
서로 훔치는 일이 없어야 가정과 나라가 충실하여 번성하게 되리라.

이관우마 유분궐추 이호양 무서분 공작 무상도 국가이은
爾觀牛馬 猶分厥芻 爾互讓 無胥奪 共作 無相盜 國家以殷

 
제 7 조

너희는 호랑이를 보아라.
힘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스스로 천박하게 되었도다.
너희는 사납게 날뛰지 말 것이며,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항상 하늘의 법에 따라 만물을 사랑하거라.

너희는 남이 기울어질때 붇들어주되 모욕을 줌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가 만일 이를 어긴다면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네몸과 가정이 함께 망하게 되리라.

이관우호 강포불령 내작얼 이무걸목이장성 무상인 항준천범극애물
爾觀于虎 彊暴不靈 乃作孼 爾無桀鶩以 性 無傷人 恒遵天範克愛物

이부경 무능약 제휼 무모비 이유월궐즉 영부득신우 신가이운
爾扶傾 無陵弱 濟恤 無侮卑 爾有越厥則 永不得神佑 身家以殞

 
제 8 조

너희가 만일 논의 벼에 불을 질러 벼들의 씨가 멸하면
신神과 인간이 함께 노여워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이를 숨기고져 아무리 두껍게 싼다해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올 것이다.

너희는 항상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니되 간사함을 감추거나, 악함을 숨김이 없어야 하며,
화를 일으킬 마음도 두지 말아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내면 너희는 이로서 복록이 무궁하리라.
너희 오가五加와 64민은 이 뜻을 받들어 공경할지어다.

이여유충화우화전 화가장진멸 신인이노 이수후포 궐향필누
爾如有衝火于禾田 禾稼將殄滅 神人以怒 爾雖厚包 厥香必漏

이경지이성 무회특 무은악 무장화심 극경우천 친우민
爾敬持彛性 無懷慝 無隱惡 無藏禍心 克敬于天 親于民

이내복록무궁 이오가중기흠재
爾乃福祿無窮 爾五加衆其欽哉

☞참고사이트 : http://www.tangun.ca

http://magic.ne.kr/zbxe/?mid=m8&document_srl=33074

 Posted by at 12:16 AM

단군조선 실존 알려주는 중국 사고전서 기록 밝혀내

 역사  Comments Off on 단군조선 실존 알려주는 중국 사고전서 기록 밝혀내
Jul 012011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 자부에 3개, – 사부에 4개, –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집)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전부(錢溥)가 지은 ‘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
(‘산해경광주’ 18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 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集部) 편에 역대의 부(賦)를 모은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 ‘어정역대부휘’ 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심박사는 이를 두고
“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

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 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 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 ‘조선세기’(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 ‘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 “가화합(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19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

 Posted by at 9:30 PM

한자(漢字)조차 또하나의 ‘한글’이다

 역사  Comments Off on 한자(漢字)조차 또하나의 ‘한글’이다
Jul 012011
 

“한자(漢字)조차 또하나의 ‘한글’이다”

故 임승국 교수

(블로거의 글) 오늘 조선 닷컴 1면 ‘오늘의 블로그’ 에는 실로 역사적인 글이 하나 떴습니다. 바로 ‘한문과 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하는 글입니다. 밑의 글은 이에 화답하는 의미에서 띄우는 것으로, 영문학을 전공했음에도 백제사등 고대사 연구에 일생을 바친 선비이신 임승국 교수의 육성입니다.

꼿꼿이 목소리를 높이다 가신 님은 다시 뵐 수 없지만, 인터넷의 바다에서는 이 글이 마치 7,80년대 검은 기름종이 등사판에 긁혀진 시국 선언문 유인물처럼 젊은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이전 말로 ‘지하’ 혹은 ‘재야’라는 단어속에 그냥 묻혀버리던 지난날과는 달리 인터넷과 블로그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이러한 쟁점들이 공개적인 논의의 장소를 찾은 것 같아 실로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그분의 3주기를 맞아 탈자 파자만 잇고 제목만 감히 ‘한자조차 우리 민족이 만든 또하나의 한민족 글자’라는 뜻에서 후학이 새로 붙입니다. (남산 딸각발이 배)

고쳐야 할 事大主義

시간이 조금 더 남았으니, 그럼 ‘똥되는 놈'(중국인, 뒈놈에 대한 고인 특유의 하대칭-블로거주)얘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오늘 제가 자꾸 똥되는 놈이라고 해서 미안하지만, 국호문제에 있어서 ‘중국(united states of china)’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똥되는 놈이 우주의 가운데, 즉 태양이라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제후국(諸侯國)’이 됩니다.

이것은 아주 원초적인 사대주의 발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중국이라 하지 말고 ‘지나'(支那)라고 하면 됩니다. 이웃 일본인도 지나라고 하고 서양사람들도 차이나라고 하는데, 유독 우리만 중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잘생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 나와있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라는 구절도 사대주의적 발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글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글만 우리 글자입니까? 아니 우리 역사가 몇년인데 한글만 우리 글자입니까? 우리 문화사가 500년밖에 안됩니까? 서양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까 한자를 중국글자(Chinese character)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서양 중심의 가치관에서 하는 말이고, 이제부터의 세계는 우리 중심의 문화세계, 우리 중심의 가치관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저는 과거에 알파벳을 가르칠 때 영문학 교수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백인종이 모여 세운 나라가 USA인데, 앵글로 색슨족이 주류족입니다. USC라고 하면 차이나를 말합나다. 똥되는 놈들 민족 가운데 주류족은 USA의 앵글로 색슨족에 해당되는 한족(漢族)입니다. 이 한(漢)은 민족의 이름도 나라의 이름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한테서 표절을 해 갔습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할 때의 ‘한'(桓, 원음은 ‘환’)에서 한이라는 발음을 따 갔던 것입니다. 이 한(桓)은 원래 한족(漢族)이 아닙니다. 동이족(東夷族)입니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 동이족입니다.

여기서 이(夷)자를 흔히 오랑캐라고들 합니다. 중국 25사 가운데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한 제목이 동이열전(東夷列傳)인데,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전부 다 나옵니다. 그러면 그 후손인 우리는 전부 오랑캐가 되어 버립니다. ‘나는 오랑캐 올시다’라는, 성은 오씨요 이름은 랑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북경 근처 만리장성의 설경. 진시황이 소위 기마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하지만, 실제 는 고조선(가깝게는 백제)의 고토를 그들의 영토로 뺏어놓고 지은 방어진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인 성은 쌓을수 있었지만 그들이 막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말 곧 글자로 대표되는 문화(文化)였다. 이 ‘글자’와 ‘말’속에 한민족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고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들어있다.

고쳐야 할 사대주의 사상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의 중국이라는 용어도 문제이지만, 이(夷)자를 오랑캐라고 훈을 붙인 옥편의 저자는 더 문제가 많습니다. 한문옥편의 원조가 되는 것은 허신(許愼)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인데, 이 옥편의 역사가 약 200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夷)자를 찾아보면,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그 다음에 ‘고문인동(古文仁同)’이라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랑캐란 말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누가 이(夷)를 오랑캐로 말하면,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古文仁同'(옛부터 인이라는 말과 같이 쓰였다)이라는 한마디로써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동양오행철학에 의하면 木은 東, 火는 南, 金은 西, 水는 北, 土는 中央에 해당됩니다. 오행을 색깔로 말하면 東은 靑, 西는 白, 南은 赤, 北은 玄이고 中央은 黃입니다. 오상(五象)을 방위에 배치하면 仁은 東, 禮는 南, 義는 西, 智는 北, 信은 中央입니다. 동양철학 속에서 그 근거를 지니고 있는 글자인 仁을 오랑캐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동이족이야말로 중국대륙 가운데 가장 비옥한 땅에서 사는 민족이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지역을 백제가 경영했습니다. 따라서 중국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민족이 동이족이고, 동이족은 즉 우리 선조들은 지나라는 연합민족국가를 형성한 원류(原流)입니다.

우리의 5000년 역사가 중국문화의 지류를 따라 흘러서 겨우 마시고 살아 연명해 온 역사라고 붓놀리는 사람들이 그따위 수작을 해 왔지만, 우리 민족이 과연 끊어질듯 끊어질듯 하면서도 목숨을 겨우 연명해 온 민족입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동양의 역사문화 속에서 질풍노도와 같이 군림한 역사문화민족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알맹이요, 핵심입니다. 이제부터는 반대로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백제의 최대영토(중국 25사 삼국사기 최치원조 등 종합)
[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강병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등지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으며 수 황제의 멸망도 요동의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최치원’조

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자는 지나의 글자가 아니라 우리 글자입니다. 약 4만 3천여 자가 옥편 속에 있는데, 글자 하나 하나마다 대개 발음기호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學’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우리는 ‘學’이라는 발음기호를 적었을테고, 지나인은 한글을 모르니까 자기네 발음기호를 적었습니다. 즉 ‘轄覺切’으로 표시되어있습니다. 여기서 ‘切’은 ‘轄覺切’이 발음기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읽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첫글자에서는 자음(하)만 취하고 두번째 글자에서는 모음(가)과 받침(가)을 취해 읽으라는 뜻입니다.

[ha ( 轄 )+ ak (覺)= 학 (hak) 블로거주 ]

이렇게 ‘轄覺切’로 중국옥편에는 2000년동안 적혀 내려오고 있는데, 지나인(북경 사투리)은 ‘學’발음을 못하고 ‘쉬에'(xue)라고 합니다. 가,띵,밑으로 끝나는 글자를 사성 중 입성이라고 하는데, 지나인은 입성을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문자(漢文字)는 지나인들이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것이고, 한민족의 발음으로서만이 완벽히 소리낼 수 있는 것입니다. 100% 우리말로 적혀있는 것이 지나인의 옥편이고, 따라서 우리가 표준어를 쓰고 있는 한문자의 주인공입니다. 한글만이 우리문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문자야말로 우리 문화와 전통을 지금까지 전해준 고마운 글자입니다.

 
(위부터 단군 가림토문자, 한글 훈민정음, 일본 신대문자, 인도 구자라트 문자, 몽고 파스파문자, 중국 갑골문자)

민족사의 르네상스를 위하여

정말 우리 문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안다면 이제부터 한자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합니다. 마치 어떤 탕자의 비유마냥 말이죠. 백만장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돈을 객지에서 다 써 버려서, 남의 돼지우리에 버린 밥껍질로 주린 배를 채우다가 하루는 탄식합니다.

‘나의 아버지집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많이 있었건만, 나는 객지에서 헐벗고 굶어죽게 되었구나’ 하며 깊은 한숨을 쉽니다. 이런 탄식끝에 이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향해 다시 힘차게 뛰어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맞으며, ‘내 아들이 다시 돌아왔노라’하며 양잡고 소잡아 축제를 엽니다. 그래서 탕자는 또다시 백만장자가 됩니다.

이제 상고사를 재확인하고 민족사의 바로 이것이 르네상스입니다. 옛집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과연 그런 용기가 있습니까? 옛집을 기억은 하고 있습니까? 옛집이라는 것은 상고사입니다. 과제인 옛집으로 돌아가는 것, 마치 탕자가 자기 본래의 집을 향해 돌아가는 것처럼, 바로 이것이 한국사의 남아있는 과제입니다.

자기의 옛집으로 돌아가려면 우선 한문(漢文)을 알아서 민족의 전통을 확인하는 것이 첫작업이 될 것입니다. 한국사에는 목표가 뚜렷한 근원을 향해서 돌아가는 ‘민족사의 르네상스’가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없었고 이를 기술한 고전(古典)이 없었더라면, 인류역사상 저 ‘Renaissance’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래 이 말의 어원은 ‘옛 정통(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그리스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되돌아갈 고향의 영광과 위대한 추억이 없는 민족, 향수가 없는 민족에겐 르네상스란 말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 임승국(林承國)교수. 고려대 영문학과 출신으로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내다 백제사를 고리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나서 이른바 강단사학계와는 다른 길을 걸은 대표적인 ‘재야’사학자로 일컬어진다. ‘한단고기’의 역해자.

고 안호상 박사,박시인 전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설립,기존 교과서가 단군 존재를 부정하고 한사군을 한반도에 설정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국회청원활동도 벌였다. 2001년 향년 74세로 작고. 지난 8월 28일은 고인의 3주기였다.

자료 출처: 삼태극 카페

 Posted by at 9:29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