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의 경쟁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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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252011
 

2010 프로야구 ‘SK 와이번스’ 우승

최근 몇 년 한국 프로야구를 평정한 구단은 SK였다. 그야말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07년, 08년 2회 연속 우승에 이어 2010년에도 삼성라이온스를 내리 4연승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그 동안 SK가 거둔 승리는 가공할만하다. 특히 08년 SK가 거둔 83승 43패는 승률 6할5푼9리의 성적으로 이는 27년 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 높은 승률이다. 2위와는 무려 13게임차가 나는 압도적 승차였다. 뿐만 아니다. SK는 09년 시즌 막판 19연승이라는 프로야구 연승신기록을 세우고 이를 2010년까지 이어가면서 22연승의 대기록으로 남겼다. 투수력, 타력, 수비와 주루능력 등등 야구의 모든 분야에서 최근 3~4년 SK의 전력은 나머지 7개 구단을 완전 압도했다. 전문가들은 SK가 한국 프로야구 수준을 뛰어넘어 일본 프로야구 리그에서도 중상위권에 통할만한 실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SK는 처음부터 강팀은 아니었다. SK는 만년 하위팀 쌍방울을 모태로 2000년 재창단한 구단이다. 하지만 불과 3~4년 사이에 팀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2007년부터는 한국야구가 진작 경험해 보지 못한 최강의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역대로 우수한 선수들을 보유했고 과감한 투자와 더불어 빅마켓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가진 LG, 롯데, KIA의 순위와 비교해볼 때 SK의 괄목할만한 성적의 원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SK 와이번스의 경쟁 시스템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입을 맞춘 듯이 ‘김성근 SK 감독의 지도력과 그에 기반한 특유의 경쟁 시스템’ 을 이유로 든다. 김성근 감독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은 워낙 알려진 바가 있으니 그렇다 쳐도, 여기서 주목을 끄는 건 바로 ‘경쟁 시스템’이라는 단어다.

SK 야구를 이른바 ‘벌떼야구’ 라고 한다. 상황별 선수기용의 폭이 넓은 야구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수들의 수준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SK는 투수, 내야수, 외야수 가릴 것 없이 하나의 포지션에 여러 선수들이 치열한 주전경쟁을 벌인다. 이러다 보니 선수들이 항상 긴장하게 되고 컨디션을 최대로 끌어올리려 노력하게 된다. 사실 김성근 감독은 이런 방면에서 도가 튼 사람이다. 절대적으로 많은 훈련량을 요구하고, 이를 경쟁화 시켜 먼저 목표에 달성한 선수들에게 우선 선발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3,4년 이런 SK의 ‘경쟁 시스템’은 장안의 화제였다. 결국 이는 하나의 전형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다른 팀들에게도 확산되었다. 07년, 08년 SK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고 그로인해 라이벌 구도를 만든 두산베어스도 SK처럼 포지션 경쟁이 잘 이루어진 팀 중 하나다. 결국 SK 와이번스의 성공비결은 ‘효율적인 경쟁시스템 도입과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지도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말한대로 SK의 사례가 결과로 입증되자 다른 팀들도 서로 다투어 포지션 경쟁 체제를 만들려고 아우성들이다. 그러나 모두 포지션 경쟁시스템을 만든다고 SK와 같은 성공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한국야구는 선수층이 엷다. 불과 50개 남짓한 고교야구가 선수수급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경기에 나설 선수기반이 부족하다. 우수자원은 한정되고 이로 인해 폭넓은 포지션 경쟁을 시키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선수간에 경험과 기량의 차이가 지나치게 현격하다 보니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경쟁자체가 의미 없어지기도 한다.

결국 SK와 같은 팀 경쟁력을 갖으려면 안정된 선수 수급과 이들을 기초부터 잘 육성하거나 재활용하는 시스템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말해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선 재료를 꾸준히 공급해서 실력을 배양할 토대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SK는 신인 수급도 수급이지만 특히 선수재활용 부분에서 각별한 노력을 기했다. 기회를 재생산 하는 구조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엄청난 훈련량을 요구하는 경쟁시스템을 무리없이 받아들였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경쟁의 승리자들

이렇듯 경쟁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경쟁구도를 인정해야만 이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혁신과 성장이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SK 야구팀의 사례처럼 경쟁이 기업이나 시장의 영역에서 경쟁력을 만들어 내는 사례는 많았다. 90년대 중반 크라운 맥주는 비열처리 맥주인 하이트 맥주를 등장시켜 30년 절대 아성의 OB맥주를 무너뜨렸다. 시장지배력에서 한참을 앞서가던 OB맥주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경쟁제품 극복을 절대사명으로 걸고 신기술 개발과 마케팅에 주력했던 하이트 입장에선 어쩌면 당연한 결론인지도 모른다. 그 뒤 국내 맥주시장은 새로운 브랜드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경쟁구도가 확산되었고 이를 통해 본격적인 시장 확대가 진행 되었다. 이 흐름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이는 경쟁이라는 구도가 가져온 선순환의 흐름(경쟁이 가속화될수록 전체 맥주시장은 거대해졌다)이라고 볼 수 있다.

삼성과 LG가 세계 가전시장에서 일본의 SONY를 제친 것도 비슷한 경쟁신화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미국시장에서 삼성의 제품은 지금의 중국산처럼 싸구려 이미지가 강했다. 미국의 할인매장 월마트의 먼지나는 한구석에서 연중세일 품목처럼 삼성의 전자레인지가 놓여 있었던 것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가전제품은 놀라운 혁신을 달성한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SONY의 제품과 치열한 경쟁구도를 거치더니 이제는 당당히 세계 1위의 브랜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실제 삼성 LCD TV는 북미시장에서 SONY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 마찬가지로 LG전자의 냉장고 에어콘 같은 백색가전제품들도 파나소닉과 필립스 등을 제치고 중국, 러시아 등에서 호평 받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외시장에서 성과) 삼성과 LG의 사례가 반드시 경쟁지상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삼성과 LG는 국내시장에서 볼 때는 되려 경쟁이 없는 독점적 구조를 즐기고 있다. 특히 이들에 기술과 부품을 제공하고 있는 벤처업체, 중소기업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정해진 기득권을 지배하는 독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삼성과 LG같은 대기업들은 시장의 위험요인은 중소 부품업체로 떠넘기고 자신들의 이익률은 고수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전형적인 독점 기업의 모습이다. 솔직히 말해 이건 경쟁이 아니다. 경쟁을 빙자한 일종의 불공정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게 경쟁이라는 구도속에서 미화되고 조작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쟁신화’가 이데올로기처럼 조작 될 수 도 있다는 점이다. 경쟁은 항상 선의로 해석하면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제는 독점을 즐기면서 겉으로 경쟁구도만 만들어 내면 무조건 혁신이 되는 것처럼 상황을 호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경쟁 시스템이 경쟁력이라는 효과를 생산하려면 올바른 경쟁의 기반이 필요하다. 이것이 안 된 상황에서 무조건 경쟁이라는 시스템을 돌리게 되면 경쟁 = 경쟁력의 선순환은 사라지고 독점지배력 강화, 경쟁력 약화라는 악순환이 되어 버린다. 이점을 경계해야 한다.

사실 대한민국에선 경쟁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전적 의미를 보더라도 경쟁이란 생물이 생존을 위해 한정된 자원을 쟁탈하는 본능적 의미를 말한다. 과정을 유추해 보더라도 이건 상당히 공격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결국 경쟁이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르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어쩌면 파괴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사회의 인간이라면 오히려 경쟁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안전장치를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게 옳다.

그러나 희한한건 대한민국의 시류에는 ‘경쟁’ 이라는 단어가 ‘능력’ 과 ‘효율’이라는 개념으로 엄청나게 격상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우리에게 무한경쟁을 기반으로 성장한 성공신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경쟁이라는 단어는 대단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 경쟁이 신화처럼 미화된 것은 입신양명이라는 유교적 관습이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과 결합되었고 이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압축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시스템의 경쟁구도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은 세 가지 독특한 경쟁구도를 가지고 있다.

첫째, 경쟁의 목표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 교육이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학문체계의 다양함과 창조성을 경쟁화 하는 쪽으로 했다면 이는 대단한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시스템이 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성과보상에 대한 결과도 다양하게 제시되었을 것이고 경쟁 결과가 획일화 되지 않고 개인별로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복잡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다. 경쟁이 목표가 엄청 단순하고 뚜렷했다. 학벌이라는 간판을 획득하면 경쟁의 승리로 간주하는 그 뚜렷하고 단순한 목표설정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은 엄청난 집중력과 동력을 갖게 될 수 있었다.

둘째는 승자독식 구조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은 경쟁에서 이기는 자가 다음단계로 올라 갈 때 패자의 몫을 완전히 다가져간다. 패자는 경쟁의 결과물은 물론 발언권 자체가 없이 역할에서 완전 배제된다. 결국 이런 구조에서 교육시스템 내부의 경쟁은 학문과 지식의 경쟁이 아닌 이른바 신분의 경쟁이 된다. 교육이 콜로세움에서 신분상승을 두고 벌이는 검투사의 경쟁처럼 되어버린 상황이라면 그 집중도와 몰입도가 도대체 어느 정도이겠는가! 따라서 강요하던 강요하지 않던 그 가공할 에너지 모여서 압축성장의 무시무시한 동력원이 되었다

셋째는 교육경쟁력의 세습화라는 점이다. 교육의 경쟁구도가 본인 세대에 머무르지 않고 자식세대로 세습화 된다는 엄청난 “사회적 합의(?)”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버렸다. 사실 이런 구도를 인정했다는 게 어쩌면 말이 안 된다. 이는 부모의 집중적인 노력으로 자식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막연한 욕심에서 기인한 듯하다. 물론 그 욕심이 100%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식을 잘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부모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선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입장으로 볼 때는 선한의지였더라도 이런 의지들이 한 공간에서 무차별적으로 경쟁된다면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들을 낳는다. 그 기형적인 결과물이 바로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사교육 시장의 폭발이다.

“경쟁신화”라는 건 이렇게 성공에 대한 갈망이라는 밑바닥 에너지가 대한민국 특유의 교육시스템과 결합되어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누군가 보다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얻기를 원한다. 이는 경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를 회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 질서 속에서 사는 우리가 경쟁구도를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게다가 우리는 경쟁을 뚫고 신분상승과 물질적 풍요를 달성한 사람들에게 성공의 가치를 두는 역사적 전통이 있다. 과다한 교육열이 그렇고 뭐든지 빨리빨리 조급하게 해치우려는 습성 역시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에서 기인한 바가 있다.

이런 분위기에선 누구도 함부로 경쟁을 회피할 수 없게 된다. 괜히 회피 하려는 자는 무능력한자, 용기 없는 자 라는 낙인을 찍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이른바 경쟁 만능주의가 나오고 경쟁이 없는 곳은 마치 모든 것이 뒤쳐지고 도태되는 듯한 느낌도 준다. 이것이 경쟁 공화국을 사는 오늘 우리의 일반적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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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쟁, 그리고 사회적 책임

 


사회에 경쟁구도가 도입되는 이유는 경쟁구도가 새로운 기술과 혁신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소비에트 방식보다 우월한 결과를 만들었다는 이미 증명된 바 있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월이라는 것이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산량과 생산성에 있어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소비에트 시스템을 능가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쟁이 언제나 효율과 혁신을 이끌어 내는 건 아니다. 알다시피 세상에는 경쟁을 빌미로 오히려 자유와 정의를 억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현재 우리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자리잡은 양극화, 기회의 박탈, 약자의 소외, 물신풍조 등은 모두 잘못된 경쟁 심리로 파생된 개념들이다. 따라서 경쟁구도를 올바르게 바로 잡지 못하면 경쟁이 주는 이득보다 부작용이 사람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든 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다.

경쟁은 이렇듯 양날의 검과 비슷하다. 문명의 발전을 위해 경쟁은 필요하지만 이 경쟁이 되레 인간의 삶을 해치게 만들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우리사회가 경쟁의 조건에 대해 보다 엄격한 잣대를 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경쟁은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든 사회가 경쟁시스템의 합리성을 따질 땐 전제로 하는 기준이 있다.

 

첫째가 공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경쟁하자고 해놓고 불공정한 기준으로 사기 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누구는 100m 앞에서 뛰고 누구는 100m 뒤에서 뛰는 상황을 만들어선 안 된다. 화투 뒷면에 표시를 해놓고 누구는 이것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고스톱을 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행위는 모두 경쟁을 빙자한 사기다.

결국 경쟁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런 반칙과 특권 그리고 기만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선 이런 식의 무늬만 경쟁인 사기 상황이 태반이다. 이렇게 반칙과 특권 그리고 몰상식이 강하게 존재하는 한 그 바닥에서 경쟁은 비합리를 부추길 뿐 혁신과 효율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둘째, 경쟁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패자부활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패자 부활전이란 다시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재도전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패배를 극단으로 몰고가지 않는 일종의 관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합리적 경쟁구도를 통해 결과물을 쟁탈하지만 그것이 All or nothing 이 되어선 곤란하다. 이런식으로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결과가 반복된다면 경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앞서 말한 특권과 반칙, 그리고 승리지상주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반칙을 저질러서라도 무조건 승리하고픈 유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이 가진 권리와 기회를 침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득권이다.

뿐만 아니다. 경쟁시스템에 관용과 패자부활전이 없다면 패자가 승자에게 쉽게 승복하는 문화도 만들기 어렵다. 이는 패배의 절망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패자가 패배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반드시 후유증을 동반하고 사회전체의 비효율을 만들어 낼 것이다.

째, 비슷한 수준 내에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보면 경쟁할 수준에 있지 않은 사람들끼리 경쟁하는 경우도 있다. 이건 경쟁 자체의 공정성이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이미 불공정한 경쟁 구도다. 어차피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은 생물학적 능력과 사회적 자산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무더기로 이들을 경쟁시킨다면 이건 경쟁을 빙자한 일종의 고문이나 다름이 아니다. 경쟁할 수준과 능력이 안되는 사람들은 (사회가) 보호하고 배려해야 한다. 특히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그들이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보고 훈련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이런 조치 없이 경쟁이 무조건 효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찌 보면 우리 대학입시 현실이 이런 형편과 비슷하다. 지금 보면 대학을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아이들까지 입시전쟁을 치르게 하는 일종의 시험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학문연구와 전문기술을 배우기 위해 대학을 갈 아이들과 대신 사회교육, 직업교육을 받을 아이들이 동시에 경쟁한다는 것, 이것 자체가 심각한 모순이다.

예를 들어 체육대회가 벌어지고 있다 치자. 어차피 트로피를 받을 아이들은 1, 2, 3등이다. 나머지는 어차피 트로피 못받는다. 그런데 왜 나머지 아이들까지 1000등, 1001등 이렇게 가슴팍에 등수를 박아줘야 하는것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공정한 기준, 패자부활전, 수준끼리 경쟁 등 경쟁의 올바른 기준이 담겨있는 경쟁만이 혁신과 효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 말은 쉽지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향한 각개약진을 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어렵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올바른 정치집단과 올바른 언론등이 등장하여 사회구성원을 설득해야 하는데 이런 사회적 합의를 구축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공동체가 경쟁에 대한 합리성을 보유하려면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이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가진 자, 배운 자, 그리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자 나서는 전통이 있다.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통해 경쟁의 공정성을 사회적으로 담보했다.

영국의 사례를 보자. 80년대,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을 할 당시 영국왕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류 왕자를 전선으로 보낸다. 왕자를 전선에 보낸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바로 앤드류 왕자의 임무였다. 헬기 조종사로 종군한 앤드류 왕자에게 맡겨진 임무는 적의 미사일이 날아올 때 구축함을 보호하고자 미사일 궤도에서 레이더 교란 장치를 발사하는 것이 이었다. 영국왕실은 이를 왕실의 전통이라며 수용했다.

하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6세도 해군장교로 1차 대전에 참전한바 있고 여왕도 역시 2차 대전에 수송병으로 트럭운전을 손수 한바 있다. 전통은 이어져 내려와 여왕의 손자인 (찰스황태자와 다이애나 사이의 둘째 아들) 해리왕자도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전투에 참가한바 있다. 이렇듯 선진국은 가장 높은 계급인 왕족이 전쟁이 나면 목숨을 걸고 참전하여 가장 어려운 일을 수행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통합력을 발휘하고 경쟁시스템에 대해서 신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미국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몇 년 전 조지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정부가 상속세를 폐지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빌게이츠와 조지 소로스 같은 억만장자들이 나서서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피력했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빌게이츠는 이때 이렇게 말했다. “내 가족들은 직접 회사를 만들고 키우는데 기여한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상속시 이득을 받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게임의 룰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경쟁의 최일선에서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는 글로벌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부와 자선, 사회활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이런 활동들이 공정한 경쟁시스템을 만들고 경쟁 참여자들의 신뢰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아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언론기사다.

기업의 선량한 사회적 책임이 궁극적으로 일류기업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된 사례는 적잖게 찾아볼 수 있다. 커피 한 잔 값이 직장인들의 하루 점심 값에 맞먹는 스타벅스의 경우 커피를 공급하는 농장이 고용한 노동자를 제대로 대우해주는지를 구매조건으로 삼아 프리미엄을 얹어줘 커피의 품질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기업의 이미지도 좋게 한 사례로 꼽힌다. 이와는 반대로 얼마 전 블룸버그가 제기했던 미국 포드사의 경우 하청업체가 아마존강가의 노예에게 부품을 생산하게 했다는 것이 사회적 비난거리가 됐다.

이 두 사례는 현대사회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는지를 극명하게 입증해준다. 특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 범위가 하청업체에까지 미친다는 점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 기업들 가운데는 제품의 하자나 고객과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참으로 대조적인 상황이다.

13년 전 지역 매체로 출범한 케이블TV의 경우 그동안 일궈온 성장의 과실을 지역주민과 나누려는 다양한 활동이 최근 몇 년간 부쩍 늘고 있다. 수익의 1%를 불우아동과 청소년을 위해 사용하는가 하면 아예 복지재단을 만들어 의료비 지원 사업에 한해 4억 원 이상 후원하는 케이블방송국도 있다. 지역의 장애인을 후원하고 지역채널을 통해 공익 캠페인을 전개하는 일 등은 전국 케이블TV 사업자들의 평상시 일과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변화가 거대통신사와 맞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효과적인 방책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소비자에 대한 인식의 대 전환은 시청자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케이블TV사업자에도 긍정적인 변화의 조짐이라고 보인다. 기업이 성장 과실의 상당 부분을 소비자에게 되돌려주겠다는 자세의 변화는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한국일보 기사참조)

한국의 기업들도 이제는 단순히 경쟁이 효율을 낳고 그 효율이 만든 생산성이 고객만족을 창출한다는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 기업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모두가 신뢰하는 공정한 경쟁의 룰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목표가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만족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향후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비즈니스와 별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러한 활동들이 성과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앞으로 고객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겠다”.

(* 한겨레 신문 참조)

위 말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 통신회사 CEO의 선언인데, 현실에서 진짜 저런 마인드로 경영을 한다면 정말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이 올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그 정도 신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런 사고가 유지되는 곳이어야 비로소 경쟁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대한민국은 이런 점이 아직 대단히 부족하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라는 천민의식이 지도층은 물론 사회구성원 전반의 의식에 남아 있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아직 갈 길이 참 멀다고 느껴진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경쟁이라는 단어는 겉으로는 효율이나 능력으로 여겨지지만 본질적으로는 진짜 원시적인 의미 그대로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경쟁구도에 반칙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해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본질적 문제해결을 위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고민하려 하기 보다는 “부자 되기” 같은 희망고문으로 개인이 각자 알아서 해결하려고 한다. (한국사회에) 사회적 책임이 갖추어진 경쟁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아직은 요원한 것 같아 답답한 노릇이다.

출처:(2) 경쟁, 그리고 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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