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 자부에 3개, – 사부에 4개, –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집)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전부(錢溥)가 지은 ‘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
(‘산해경광주’ 18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 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集部) 편에 역대의 부(賦)를 모은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 ‘어정역대부휘’ 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심박사는 이를 두고
“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
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 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 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 ‘조선세기’(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 ‘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 “가화합(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19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