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이 의심스러워?…일단 믿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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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302011
 
  

▲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 구글은 2011년 8월 15일 모토로라 모빌리티 부문을 125억 달러에 인수하며 “모토로라를 인수하더라도 개방형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는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구글은 인수 전에 삼성과 LG 그리고 대만의 제조사 HTC에 양해를 구했고 이들은 안드로이드를 특허 공격으로부터 지키려는 구글의 헌신에 환영의 뜻을 보냈습니다.

ⓒ google, motorola
 구글

 

 

또 다시 위기가 닥쳐왔다고 합니다.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함으로써 한국은 이제 하청 기업으로 전락했다는 우려가 깊습니다. 여태까지 소프트웨어에 대한 대비가 없었음을 탓하자 기업과 정부가 서둘러 대책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재벌 회장의 한마디에, 천대받던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의 주가가 상한가를 기록하고 정부는 토종 운영체계를 만들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정작 IT 현업에 종사하는 엔지니어들은 이 난리판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위기? 책임자는 어디에?

위기가 닥쳤다면 먼저 원인을 분석하고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잘못된 정책을 이끌어 온 정부는 사과를 하고 대비 없이 단기 성과에만 집착했던 기업들은 개선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인물 교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 대책을 수립하도록 해야 제대로 된 정책이 추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 오히려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낼 구실로 삼고 있습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프로그램 개발자들은 외부에서 위기라고 외칠수록 작업 환경이 오히려 더 가혹해져 왔습니다.
위기이므로 연봉 인상과 같은 한가한 소리할 시간에 열심히 일이나 더 하라고 핀잔 받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해 더 빨리 제품을 만들라고 재촉 받게 됩니다. 어쩌면 위기란 또 다른 야근과 밤샘 작업의 다른 이름으로 엔지니어들을 좀 더 혹사 시키기 위한 좋은 핑계인지도 모릅니다.

소프트웨어는 공장에서 전자제품을 조립하듯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사판처럼 공기 단축이 유행이 되어 외국에서 1년이 걸려도 만들기 힘든 것을 2달 만에 완성시켜야 하는 프로젝트가 일상입니다. 수 년 간의 연구와 노력 끝에 만든 유저인터페이스를 10일 만에 만들어 내도록 했다고 자랑하는 관리자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소프트웨어 품질을 떨어뜨리고 작업 환경을 열악하게 만들어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현장에서 사라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의사나 판사로 전업하고 있는데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소프트웨어 개발보다 훨씬 더 쉽고 편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창의력을 발휘할 시간과 여유가 필요합니다. 뛰어난
아이디어를 높이 사주는 문화도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인재들을 개발실에 몰아 넣고 누가 더 빨리 더 많은 코드를 작성하는지 경쟁시키는 구조에서는 토종 운영체계는커녕 제대로 된 프로그램 하나도 나오기 힘듭니다.
90년 후반 삼성 내에서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전담하는 “소프트웨어 센터” 창설 멤버였던 이유현씨는 “한국은 값싼 산업용 전기를 낭비하듯 인재를 과소비하는 국가다. 기업들은 고급 인재를 연료로 태우며 달리는 연비 나쁜 자동차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소프트웨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엔지니어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기회를 주는 등 인재의 질 향상에 주력해야 합니다. 대기업들이 인재 양성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중소기업에 있는 개발자를 싹쓸이하고 있는 현실은 질 향상보다는 사람 수를 늘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입니다.
이런 행위로 인해 그나마 자생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던 중소기업들이 다시 전멸하게 될 것입니다. 정부와 대기업이 대책을 마련할수록 엔지니어들과 중소기업들은 재앙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위기는 바로 이런 식의 대응이 만들어낸 것임에도 개선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가 정말 위기?

어느 날 갑자기 애플이 아이폰이란 놀라운 스마트폰을 출시함으로써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오바마도 사용하여 화제가 되었던 블랙베리폰은 이동 중에도 이메일을 사용할 수 있는 기능에 특화되어 10년 이상 이 시장을 지배해 왔으나 아이폰 때문에 한 순간에 구닥다리 머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휴대폰 제조 세계 1위였던 노키아는 심비안이란 독자 운영체계를 무료로 공개하면서까지 생존을 도모했으나 경쟁에서 밀려 나고 말았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PC용 윈도우와의 호환성 이외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던 윈도우 모바일 운영체계를 버리고 윈도우폰 운영체계를 다시 만들고 있으나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제품을 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다양한 제품들 블랙베리는 편리한 키보드와 특화된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앱 부족에 시달리자 안드로이드 앱 호환 기능을 추가하여 재기를 노리고 있습니다.(왼쪽) 노키아는 심비안 폰을 계속 만들고 있지만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중간)윈도우폰은 생태계 조성이 여의치 않자 노키아와 연합하여 점유율 확대를 노리고 있습니다.(오른쪽)

ⓒ rim,nokia,microsoft
 블랙베리
애플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완벽한 결합을 이룬 아이폰 하드웨어로 모든 스마트폰을 시장에서 퇴출시켰습니다. 애플은 또 개발자와 창작자가 소비자와 직접 만날 수 있는 콘텐츠 유통 마켓을 만들어 여태까지 휴대폰 시장에서 군림했던 통신사를 배제시켜 버렸습니다. 휴대폰 제조 강국이었던 한국도 아이폰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이를 일거에 만회할 수 있게 해준 업체가 나타났습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등장한 것입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란 오픈소스 운영체제를 제조사들에게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안드로이드 덕택에 삼성과 LG는 노키아를 누르고 휴대폰 세계1위의 꿈을 달성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단기간에 시장점유율 50% 이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견제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오라클 등 수 많은 업체들이 특허 공세를 취해왔습니다. 안드로이드 제조사들은 이들 업체에게 기기당 수십 달러 이상을 지불해야 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방어용 특허를 구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캐나다 노텔의 특허를 구입하려 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연합군이 45억 달러에 먼저 사들이자 결국 구글은 모토로라 모바일 부분 전체를 125억 달러에 사들이는 초강수를 두게 됩니다. 125억 달러는 구글 현금자산의 1/3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이런 거액을 안드로이드 특허 방어용으로 배팅했다는 구글의 발표를 아무도 믿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분석가들이 구글이 하드웨어 제조에까지 욕심을 내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점유율이 기대치 이상으로 오르자 구글이 본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하는 해석도 많습니다. 국내 전문가들도 소프트웨어를 등한시 해왔던 한국 기업들은 결국 구글의 하청 기업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는 것도 크게 틀린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토종운영체계? 촌스러운 한국식 해결 방식

구글이 제조업까지 넘본다는 판단으로 인해 한국은 현재 다른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마땅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독점 운영체제를 무기로 제조사들 위에 군림하며 사용 가능한 하드웨어 종류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합니다. 제품마다 비싸게 받아가는 라이선스비용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뒤지자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대안도 없이 모바일 윈도우를 포기해버릴 정도로 무책임한 마이크로소프트를 믿고 사업을 계속하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만 바라 보았더라면 삼성과 LG는 4년이상 스마트폰 경쟁에서 뒤쳐져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폰 점유율을 인위적으로 높이기 위해 노키아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제조사들은 찬밥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토종 운영체제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재 주류가 된 운영체제들을 개발하는데 수십억 달러와 수천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20년 이상 다듬어져 온 것들입니다. 애플의 IOS는 애플에서 쫓겨 난 스티브 잡스가 전 재산을 투입하여 개발한 넥스트스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운영체제입니다. 잡스가 애플에 재 입성한 후 이것을 다시 가다듬는데 또 오랜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도 20년간 수 많은 해커들의 ‘헌신’으로 성장해 온 리눅스란 오픈소스 운영체제 위에서 동작하고 있습니다. 
운영체제는 성능과 안정성 같은 기술적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용자와 개발자를 확보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소위 플랫폼 생태계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업체들의 협력과 자발적인 개발자들의 참여로 가능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타 업체들과 공생하고 참여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상생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경쟁 업체를 도태시킴으로써 PC를 지배할 수 있었던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바일 부문에서는 고전하고 있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혼자서만 만들던 HP는 사업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노키아도 높은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자체 운영체제 심비안을 오픈소스화 시켰지만 개발자들의 동참을 끌어내지 못해 결국 심비안 운영체제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독자 운영체제를 만들겠다는 것은 스스로 국가경쟁력을 말살시키는 선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토종이란 개념자체가 개방과 협력을 통해 업체들과 연계해야 하는 현 상황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관료와 재벌들은 여태껏 외국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국산화를 칭찬하고 국산품 애용을 애국이라 믿던 시대의 사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기업들이 서로 협력하여 운영체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상생 정신은 애초에 우리나라 기업엔 없는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 삼성 바다폰 삼성은 독자 운영체제인 바다를 발표하고 이를 이용한 제품을 만들고 있으나 아직 생태계를 조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운영체제의 핵심인 커널은 자체 개발이 아닌 외국의 상용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때문에 삼성은 바다를 운영체제에 독립적인 프로그램 동작 환경이라고 애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삼성만의 독자 운영체제라 모든 판단이 삼성의 의지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협력 업체를 끌어 모으지 못하고 있으며 소스가 공개되어 있지 않아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점, 개발자들의 참여가 부족해 앱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등 앞길이 험난하기만 합니다.

ⓒ 삼성
 삼성

 

 

굳이 독자 운영체제를 만들고 싶다면 제가 1억만 받고 6개월 내에 만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무료로 소스까지 공개되어 있는 오픈소스 운영체제 중에 하나를 골라 화면만 그럴듯하게 꾸미면 됩니다. 여태까지 한국형 운영체제 개발 프로젝트가 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아니 아시아 국가들은 거의 비슷한 행위를 해왔습니다. 중국의 홍기리눅스, 북한의 붉은 별 OS, 아시아국가들이 합쳐서 만들었다는 아시아눅스 그외 수 많은 한국형 운영체제들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최근에 정부가 3년 간 90억을 들여 토종 운영체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는데 이것도 결국 공개 운영체제 화면 다듬기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정말로 진행된다면 정부 과제 수행 전문 조직과 기업이 거의 대부분의 자금을 챙겨간 후 하청에 재 하청을 거쳐 실제 개발을 하는 업체는 사실상 1억도 되지 않는 돈을 받고 작업하게 될 것입니다. 거창한 국가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프로그래밍 학원의 과제물 수준에 불과한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오픈소스가 지배하는 세상

현재 운영체제 세계는 오픈소스와 독점 소스의 싸움입니다. 독점 소스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프로그램으로 프로그래밍 저작권을 특정 업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바일 분야에서의 독점 운영체제는 스티브 잡스란 천재가 주도하는 애플이 장악한 상태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노키아 같은 업체들은 애플로 인해 시장에서 퇴출된 상태입니다. 뛰어난 애플 운영체제로 인해 이런 상태는 앞으로 오랫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IOS의 커널 부분은 논외로 함)
독점 소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오픈소스입니다. 오픈소스는 소스를 공개하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합니다. 일단 오픈소스가 되면 독점 소스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픈소스는 제작자가 소유권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아이디어는 공유되어야 인류에게 이롭다는 신념으로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대가 없이 공개하는 것이 오픈 소스 철학입니다. 오픈소스 철학은 유구한 해커 문화의 산물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얼마나 우아하게 해결했는지 여부를 가려서 가장 뛰어난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을 해커로 칭송하며 존경합니다. 공유 정신을 가진 해커들은 소스를 독점하고 특허로 경쟁 업체를 도태시키려는 독점 소스 기업들과 경쟁해 왔습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구글은 오픈소스 운영체제인 리눅스 위에서 동작합니다. 탄생한 지 20년이 된 리눅스는 전세계 개발자들의 헌신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들여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 왔습니다. 해커들은 사용자들의 감사 표시와 존경이라는 명예만으로도 상용 제품에 못지 않은 운영체제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재단하고 서로 의심하며,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 먼저 배신하는 극심한 경쟁 속에 사는 한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들의 철학은 현실 속에서도 승리해왔습니다.
  

▲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들 운영체제 리눅스, 웹 서버 프로그램 아파치, 웹브라우저 파이어폭스 등은 대표적인 오프소스 성공 사례입니다. 국내에서는 오픈소스에 기여하기 보다는 이를 가져와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인 것처럼 속여서 팔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끄럽게도 이런 기업들은 소스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소송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 linux,apache,firefox
 리눅스

 

 

오픈소스 리눅스는 해커들의 노력 덕택에 세상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중앙제어장치(CPU)를 지원합니다. 새로운 CPU가 나오면 가장 먼저 리눅스가 동작하게 만드는 것이 업계 관행으로 자리잡았습니다. IBM은 이미 위기 타개책으로 십 년 이상 전략적으로 리눅스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대형 컴퓨터인 메인프레임, 초고속 계산용인 슈퍼컴퓨터 그리고 인터넷 서버는 리눅스가 지배적인 운영체제입니다. 스마트폰, 타블렛, 스마트TV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사용하는 공유기, 네비게이션 등 임베디드 머신이라고 불리는 소형기기는 이미 리눅스로 천하 통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늘 접하는 PC를 제외한 전세계 컴퓨터는 오픈소스 운영체계가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픈소스는 누구나 실력만 있으면 가져다가 마음대로 고쳐 쓸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운영체제가 필요한 곳에서는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 리눅스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리눅스는 출시된 이후로 점유율 상승이 멈춘 적이 없습니다. 프로그램 호환성을 무기로 삼고 자사 제품 끼워 팔기로 독점을 유지해 온 마이크로소프트는 PC 다음 시대인 모바일 환경까지 지배하려고 하고 있지만 리눅스에 기반한 구글의 안드로이드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리눅스의 승리로 인해 운영체제는 이제 공기와 같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전세계 해커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오픈소스 운영체제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상 그 누구도 운영체제를 독점하여 돈을 벌 수 없으며 새로운 운영체제가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나더라도 이런 생태계를 다시 만들지 못하는 한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운영체제 독점은 불가능해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토종 운영체제 제작과 같은 생각은 포기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양면 시장에서의 한국의 위치

하드웨어 생산 세계 1위를 달성하고 동시에 소프트웨어도 토종 제품으로 세계를 석권하겠다는 것은 매우 한국적인 발상일지도 모릅니다. 전세계 기업들은 각자 독특한 수익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운영체제를 팔아서 수익을 얻습니다. 애플은 음악과 콘텐츠를 유통하는 마켓의 지배력과 뛰어난 운영체제를 앞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드웨어 완제품을 팔아서 수익을 얻습니다. 구글은 운영체제, 소프트웨어, 콘텐츠 등 모든 것을 무료로 나누어주고 검색 광고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업들은 LCD와 모바일 CPU, 메모리 반도체 강국입니다. 거기에 더해 TV와 스마트폰 완제품으로 매출을 올리는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 가장 많은 이익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전세계 모든 기업들에게 부품을 공급하고 스마트폰 완제품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데 여기에 더해 소프트웨어까지 지배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소프트웨어 분야에 대한 투자와 발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지금과 같이 독점을 원하는 태도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운영체제는 오픈소스가 대세가 되어 이것으로는 아무도 수익을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운영체제는 공기와 같아졌는데도 위기를 조장하며 독자 운영체제를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욕심일 수 있습니다. 재벌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한국식 수직 계열화에 길들여진 국민도 이를 바라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고, 모든 업체와 적이 되는 길을 선택하게 되면 국가 전체가 위기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구글의 오픈 정책

구글은 오픈소스의 이념인 개방 정신을 따르는 매우 독특한 기업입니다. 구글은 검색 경쟁력을 위해서 전세계 모든 데이터에 대한 접근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인터넷 업체와 공생을 추구하는 것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검색 결과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애드센스란 광고 기법을 개발해 인터넷 사이트들도 구글 검색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구글은 또한 지도 서비스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위치 정보를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대용량 메일 뿐만 아니라 온라인 오피스 프로그램도 무료로 제공하며 이런 소프트웨어를 모아 크롬OS를 만들고 다시 이것들을 하드웨어에 담은 크롬북까지 출시했습니다. 구글은 크롬북 하드웨어에서 일체의 수익을 얻지 않으며 크롬OS 또한 오픈소스로 만들어 누구나 쓸 수 있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확산을 위해서도 같은 정책을 취했습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와 달빅이란 프로그램 운영 환경도 오픈소스화 했습니다. 각종 앱의 소스까지 무료로 제공합니다. 제조사를 위해 안드로이드 업그레이드도 무료로 해주고 있습니다. 통신사들에는 앱 마켓 운영권을 넘겨 주고 거기서 아무런 수익도 취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구글의 검색 창을 내장할 경우 이를 통해 얻은 검색 수익도 통신사에 나누어 줍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그리고 오라클이 집요하게 안드로이드 제조사들에게 특허 공격을 하는 것은 안드로이드 확산을 막기 위한 전략입니다. 구글이 원하는 것은 스마트폰 검색에서 수익을 얻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안드로이드 생태계가 넓어질수록 이익이 됩니다.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는 안드로이드를 지키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큰 것이라고 판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글이 하드웨어 제조에까지 나서게 된다면 안드로이드 생태계는 일거에 파괴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한해 90억달러 이상의 이익을 내고 있는 인터넷 광고 시장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되는 모바일 광고 시장을 포기하고 적자 상태인 모토로라의 휴대폰 제조에 뛰어들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힘듭니다.
구글이 다른 제조 업체들을 차별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음에도 이를 의심하는 것은 앞에서는 공정성을 내세우지만 뒤에서는 불공정을 일삼는 한국적 현실에 우리가 길들여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구글에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소위 반복 죄수의 딜레마가 좋은 기준이 됩니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

두 용의자가 따로 갇혀 자백을 강요당합니다. 둘 다 서로를 배신하고 자백하면 5년을 살게 되지만 둘 다 자백을 거부하고 용의자끼리 협력하면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한 명만 자백하면 그는 석방될 수 있지만 다른 용의자는 10년을 살아야 합니다. 용의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둘 다 협력을 하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배신이 가져올 위험을 피하려면 결국 배신을 택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신뢰 없는 상대와의 1회성 게임은 끝내 파국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을 반복해야 할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전에 상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여부에 따른 평판 시스템이 작동함으로써 선택에 있어 참고할 근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의 최선의 전략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실제 게임이론가들이 다양한 전략으로 실험한 결과 소위 팃포탯(Tit for Tat: 눈에는 눈) 전략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팃포탯은 3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먼저 협력하라, 2. 배신에는 즉각 보복하라, 3. 배신자를 용서하라. 이 전략은 복잡하지 않아 상대가 오판할 위험이 없고 보복후의 용서로 인해 상대의 협력을 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연구 결과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도 같은 전략을 쓰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 생태계에 헌신해 왔습니다. 오픈소스 정책에 위배된 일을 한 바도 없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업체들의 특허 공격으로 구글폰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 마이크로소프트와 오라클을 위해 폰을 생산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상황이었으나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로 인해 안드로이드 제조사들의 특허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었습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대한 헌신은 이렇게 국내 휴대폰 제조사에 직접적인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모토로라가 구글 프리미엄을 누리지 않을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은 여태까지 안드로이드 제조사들이 받았던 특허 압박에 비해서는 아주 미미한 수준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구글을 의심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안드로이드 개발 초기 구글은 휴대폰 제작업체들에게 안드로이드폰의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제조업체들에게 레퍼런스 폰을 제작 의뢰하였으나 국내 업체들은 구글이 제조에까지 나선다고 의심하여 하나같이 거부했습니다. 구글은 어쩔 수 없이 대만의 HTC란 제조사에게 의뢰했고 전략적으로 넥서스원이란 구글폰을 지원한 HTC는 지금 안드로이드폰 시장에서 맹주로 자리잡았습니다. 국내기업들은 뒤늦게 안드로이드 레퍼런스 폰을 제작하겠다고 나섰으나 삼성만 참여할 수 있었고 LG는 아직도 선택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 구글의 레퍼런스 폰 구글은 안드로이드 버전별로 제조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 위해 구글폰을 제조 의뢰 해 왔습니다. 최초의 구글폰은 넥서스원으로 대만의 HTC에서 제조했고 다음 버전은 갤럭시-S의 명명법을 활용한 넥서스-S로 삼성에서 제조했습니다.

ⓒ google,htc,samsung
 구글

 

 

구글이 제조사들을 위해 레퍼런스로 폰을 제작하는 것일 뿐이라고 누누이 설명했지만 이를 믿지 못한 국내 기업들은 결국 안드로이드 시장에서 고전을 해야 했습니다. 이후 국내 엔지니어를 싹쓸이해간 삼성만 겨우 기술적 간극을 따라잡은 상태지만 LG는 아직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레퍼런스 폰을 만든 업체가 안드로이드폰 경쟁에서 특별히 우위에 선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구글은 개발력을 갖춘 업체들에 레퍼런스 폰 제작 기회를 골고루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구글이 모토로라에 레퍼런스 폰 제작을 의뢰할 경우 언론들과 마케터들은 구글이 드디어 모토로라에 특혜를 주기 시작했다고 떠들게 되겠지만 그것을 판단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구글과 모토로라가 불공정 행위를 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안드로이드에 소극적으로 임한다면 안드로이드 생태계에서 퇴출 당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안드로이드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면 개발 주도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구글이 가장 헌신적으로 개발에 임하고 기술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안드로이드를 이끌고 있을 뿐입니다. 안드로이드를 구글 마음대로 독점 소스로 전환하거나 라이선스를 받게 계약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만약 구글이 안드로이드 신 버전의 라이선스 정책을 바꾸어 독점하겠다고 하거나 모토로라에 부당한 특혜를 베푼다면 안드로이드에 참여한 업체들이 독자적으로 안드로이드를 개발하고 구글을 퇴출시킬 수 있습니다. 오픈소스 생태계는 먼저 배신하는 자가 응징 당하는 신뢰성 게임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선택

문제는 우리가 안드로이드에 대해 배신전략을 취하더라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독점 운영체제는 이제 불가능한 모델이고 오픈소스는 안드로이드란 훌륭한 제품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독자 운영체제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독자 운영체제를 오픈소스화 시키겠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안드로이드를 새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어차피 독점할 수 없는 오픈소스라면 그냥 안드로이드를 쓰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비용만 낭비하며 바퀴를 재 발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안드로이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학계에서 모든 아이디어를 안드로이드 위에서 구현하도록 정부가 연구 자금을 지원하고 중소 기업들은 안드로이드를 활용하여 제품을 만듦으로써 기술력을 확보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개발자들이 장기 프로젝트를 통해서 응용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안드로이드 개발까지 주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 안드로이드 개발을 가장 활발하게 진행하는 나라, 안드로이드의 개발 방향을 결정하는 나라 바로 안드로이드 종주국이 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만약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소유하려고 욕심을 부리거나 모토로라를 특별 대우하는 경우 우리나라가 안드로이드 주도권을 가질 수도 있게 됩니다. 구글을 제외한 전세계 나머지 업체들을 이끌고 갈 능력을 길러 놓아야 구글의 배신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사실 쉽고 간단하며 비용이 절약되고 세계 조류에 맞는 가장 상식적인 해결책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들이 이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오픈소스에 대한 이해가 없는 관료,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는 기업, 여태까지의 헌신도 무시한 채 먼저 배신하여 눈 앞의 이익을 챙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조언자들로 인해 이것이 가장 위태로운 선택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드로이드를 선택하라는 주장이 근거 없이 상대를 믿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느껴진다면 혹시 내가 오픈소스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상호 신뢰 없는 한국적 상황에 매몰된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 자신을 뒤돌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세상은 헌신, 기여, 개방, 공유란 단어를 그 의미대로 지켜온 오픈소스 커뮤니티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에 동참하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에겐 안드로이드 이외의 대안은 없다는 점입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엔지니어들이 필요하다

이 모든 제안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올 대책이 결국 공기 단축을 위해 엔지니어들의 숫자를 늘리고, 월급을 삭감하며 더 많은 밤샘 작업을 요구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습니다. 구박받는 며느리도 가문을 구할 자임을 알게 되면 힘든 밭일을 멈추게 하고 목욕을 시킨 후 안방에서 밥상을 받도록 해주는 법입니다. 한국의 소프트웨어 위기를 해결할 사람들이 결국 엔지니어들이라면 그 해결책은 이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진정성이 없는 방안은 결코 진정한 해결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정말 소프트웨어의 위기라고 절감한다면 엔지니어들의 월급부터 올려 줘야 할 것입니다. 밤샘 작업을 중단시키고 정시 퇴근도 보장해야 합니다. 어쩌면 아이디어를 만들어 올 수 있게 휴가를 보내줘야 할지도 모릅니다. 뛰어난 발상은 연구실에서 밤을 새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휴가지 해변에 누워 있을 때 떠오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오픈소스는 개발자들이 자기 시간을 갖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만들 수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자율성을 가질 수 있게 하자 한류가 꽃핀 것처럼 엔지니어들을 닦달하지 않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한국의 소프트웨어 기술력이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엔지니어들도 자기의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일생에 단 한 번 좋은 대접을 받을 기회를 맞은 며느리가 예전처럼 부엌바닥에서 남은 밥을 마저 먹겠다고 주저 앉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한편 겸손해 보일지는 몰라도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가장 바보 같은 짓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국을 구하기 위해 엔지니어들의 능력이 필요하다면 어떤 조건이 만족되어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고민하여 당당히 필요한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좀 더 자신의 주장을 명확하게 밝히는 엔지니어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현장의 문제점을 알리고 개선책을 요구하는 엔지니어들이 많아져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대기업의 인재 싹쓸이를 막고 공정한 심판관 역할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대기업들은 인재의 질 향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현장의 요구를 묵살하고 또 다시 엔지니어들을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창의력을 말살시키는 정책을 추진한다면 그나마 남아 있던 능력 있는 엔지니어들도 다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격심한 기술 전쟁을 아무런 대책 없이 맞이하게 된다면 그 피해는 사회 전체가 감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김인성 기자는 시스템 엔지니어이자 IT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일반인을 위해 한국 IT의 문제점을 지적한 <한국 IT 산업의 멸망>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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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Prybyl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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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92011
 

Jack Prybylski – Ice C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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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ns and the forgotte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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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The Huns and the forgotten Korean

(훈족과 잊혀진 한국인)

 

(American Cable TV ; The Learning Channel)

 

“Atilla the Hun”

(1997 summer & Autumn)

 

Europeans called them “Huns.” Originating From the main land of Korea, they invaded the Roman Empire during the 4th century.

 

유럽인들은 그들을 “훈족(Huns)”이라고 불렀다. 고려(Korea; 고구려의 준말) 지역에서 일어난 그들은 4세기 중 로마 제국을 침입했다.

 

Ancient Greeks historian recorded them, Scythians, and later European called them Mongols.

 

고대 그리스 역사가는 그들을 스키타이인(Scythians)이라고 기록했으며 후에 유럽인들은 그들을 몽골인이라고 불렀다.

 

Around early 4th century, the temperature fell lower than usual for many years in Far East Asia. It caused grains not to ripen, grazing grass land for animals was scarce.

 

4세기 초 무렵, 극동아시아에서는 수년 동안 기온이 평시보다 떨어지는 이상기온현상이 발생하였는데, 그로 인해 곡식은 여물지 못하고 가축들에게 풀을 뜯어 먹일 수 있는 땅은 부족해졌다.

 

For these reasons a large number of semi-nomadic tribes left from what is known today as the Korean mainland to Eastern Manchuria.

 

이런 이유로 인해 상당수의 반(半)유목 종족은 오늘날 Korea라고 알려져 있는 한반도 지역에서 만주 동부로 떠나게 되었다. (번역자 주: 현재의 한국영토를 기준으로 삼은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실제 도래지 면에서는 사실과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Gathering other tribes along the way they proceeded to the Central Asiatic step. From there, the mass of tribes went westward.

 

이동 중에 만난 다른 이민족들을 규합하면서 그들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초원 지대로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종족 대부분은 그곳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Around AD 370, these nomadic people arrived upon the Horizon of the Roman Empire. They established a kingdom along the Danube, on the prairies that are present day Hungary.

 

서기 370년경 이 유목민들은 로마제국의 국경 지역에 도착하여 다뉴브 강 (독일 남서부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흘러 흑해로 들어감, 독일명 ‘도나우강’)을 따라 오늘날의 헝가리 일대인 대초원 위에 그들의 왕국을 세웠다.

 

About AD 443, Attila, the son of King Ruga assassinated his brother Bleda and united all the Hun tribes. He lead the warriors on-to ruthless and savage conquests; destroying anything in sight, looting and merciless killing of innocent people.

 

서기 443년경, 루가왕의 아들 아틸라는 그의 형제 블레다를 암살하고 전(全) 훈족을 통일하였다. 그는 전사들을 이끌고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정복을 감행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약탈을 하였을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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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완전히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쓴 글이니 이 점을 잘 참작하기 바람)

 

He conquered Germany, Eastern Europe and most of southeastern Europe.

 

그는 독일, 유럽 동부 및 유럽 남서부 일대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였다.

 

The Huns were superior horseman and combined with their archery skills were the bane of the Romans ……,

 

훈족은 기마술에 능한 이들로 궁술 또한 겸비하였는데, 그것은 로마인들을 파멸시킨 큰 원인이었다.

(번역자 주: 로마제국의 흥망사의 한 부분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의 반란으로 멸망했다는 점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죠. 다만 훈족도 게르만 족과 함께 로마 제국의 멸망에 일조한 파멸의 한 원인이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They used a short, inverted bow made from few different materials glued together. An iron arrow head was able to pierce any European armor.

 

그들은 여러 가지 재료들이 접착된 복합 재료로 제작된 짧은 역궁(逆弓; 맥궁!)을 사용하였으며, 쇠로 된 화살촉은 유럽 병사들의 모든 갑옷을 관통시킬 수 있었다.

 

Their horses were short in height, but had speed and endurance, they were also agile and smart.

 

그들의 말은 키는 작았지만 빠른 속도와 강한 지구력이 있었으며, 동작이 민첩하고 영민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우리 민족도 고려 후기에 페르시아에서 수입된 대완구라는 키가 큰 말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조랑말을 기병들이 주로 사용했고 이런 경향은 구한말까지도 계속됩니다. 조랑말 타고 적진을 호령하는 우리 기병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길…)

 

Hun warriors, while twisting their upper body, were able to shoot arrows behind them while their horses were running forward (referring picture).

 

훈족 전사들은 말이 전방으로 달리고 있는 중에도 마상에서 상체를 뒤로 틀어 뒤 쫓아 오고 있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그림 참조요).

 

(번역자 주: 위 ‘그림 참조요’의 그림은 현 중국 집안현 무용총 주실 서벽의 수렵도에 나오는 고구려 기마궁병의 모습과 완전 일치합니다. Orullee Han님의 주; 고구려 기마병 그림은 집안현 그림으로, 다큐에 나오는 인물들의 복장과 거의 같습니다.)

 

When Atilla was young, his father Ruga exchanged his son with a young son of a prominent Roman family, his name was Aetius.

 

아틸라가 어렸을 때 그의 부친 루가는 자신의 아들을 한 유명한 로마 가문의 어린 아들, 즉 그 Aetius라는 이름의 아이와 맞바꾸었다.

 

For ten years Atilla was educated in the Roman court vise versa Aetius from the Hun kingdom. Atilla was probably the first western educated Mongol in its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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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간 아틸라는 로마 왕실에서 교육을 받았고 동시에 Aetius는 훈족의 왕궁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틸라는 아마도 몽골족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서구 교육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번역자 주; 이 문장도 서양인의 입장과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니 각별한 주의를 요함)

 

Later these 2 men would confront each other in Gaul (today’s France), in 451. Atilla would go on to lose this battle and invaded Italy in 452 with Germanic tribes.

 

이들 두 사람은 이후 451년에 Gaul(오늘날의 프랑스)에서 서로 맞부딪히게 되는데, 아틸라는 계속해서 이 전투에 패배하게 되며, 452년에는 게르만족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침략하였다.

 

His army advanced to Venice (today’s) and negotiated with a Roman representative Pope Leo for 10 hours.

 

그의 군대는 오늘날의 베니스로 진격하여 로마 대표 교황 Leo와 장장 10시간 동안 협상을 벌였다.

 

All the while on horse back, Atilla received tribute from Rome, and would thereafter retreat from Italy. Pope Leo received the title “The great” from the church for his successful negotiations with Atilla.

 

마상에서 아틸라는 로마로부터 공물을 받았으며 그 후 이탈리아로부터 철군하게 된다. 교황 레오는 아틸라와의 이 성공적인 협상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를 받았다.

 

Atilla married to a German princess, Ideco in AD 453. After his wedding celebration, he died that wedding night, possibly from alcohol poisoning.

 

아틸라는 453년에 독일공주 Ideco와 결혼을 하였다. 그는 불행히도 결혼식 날 밤에 죽게 되는데 아마도 그의 사인은 주독(酒毒)인 듯 하다.

 

His people dammed the Danube River and buried him in the middle of the river. They opened the dam for no on-e, so that none could ever find his grave.

 

그의 백성들은 다른 이들이 묘지를 찾지 못하도록 다뉴브 강을 둑으로 막은 뒤 그의 시신을 강 중앙부에 매장하였다. 그들은 그 댐을 어떤 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 그 누구도 그의 무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After his death, the Hun kingdom crumbled and his people scattered from the Europe. He would be known as “the scourge of god” by the Roman Empire because of his cruel acts.

 

그가 죽은 후 훈(Hun) 왕국은 멸망하였으며 그의 백성들 또한 유럽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생전의 잔인한 행위로 인해 그의 죽음은 로마제국 사람들로부터 “신의 천벌”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The Huns left a number of legacies in Europe especially the Chateau area of France, all children born there have a blue round mark in their hip as the Mongolians do today. The country of Hungary got its name from the Huns, to commemorate the Hun Kingdom.

 

훈족은 유럽에, 특히 프랑스 Chateau 지역에 많은 유산을 남겼으며, 그곳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아이들은 엉덩이 부위에 오늘날 몽골인들과 동일한 파란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다. 헝가리라는 국명은 훈 왕국을 기념하기 위해 Huns에서 비롯된 것이다.

 

(번역자 주; 여기서 짚고 넘어 가고 싶은 부분은 몽고 반점을 가진 민족은 우리 민족과 몽고족 이외에도 아메리카 인디안, 유대인 등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서로 인종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During the world war ll allied forces refer to Germans as Hun because of their relationship with Huns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Funeral cultures of Europe are also deeply influenced from the Hun.

 

세계 제 2차 대전 기간 중 연합군은 역사적으로 독일인들의 4세기, 5세기에 훈족과의 관련성 때문에 독일인들을 훈족으로 부른다. 유럽의 장례문화 역시 훈족으로부터 깊이 영향 받은 것이다.

 

 

ChunMaChong Gold Crown Kyungju,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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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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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 심백강 –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발췌)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 禹왕)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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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과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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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비잔틴시대의 기록화.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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