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uns and the forgotte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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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The Huns and the forgotten Korean

(훈족과 잊혀진 한국인)

 

(American Cable TV ; The Learning Channel)

 

“Atilla the Hun”

(1997 summer & Autumn)

 

Europeans called them “Huns.” Originating From the main land of Korea, they invaded the Roman Empire during the 4th century.

 

유럽인들은 그들을 “훈족(Huns)”이라고 불렀다. 고려(Korea; 고구려의 준말) 지역에서 일어난 그들은 4세기 중 로마 제국을 침입했다.

 

Ancient Greeks historian recorded them, Scythians, and later European called them Mongols.

 

고대 그리스 역사가는 그들을 스키타이인(Scythians)이라고 기록했으며 후에 유럽인들은 그들을 몽골인이라고 불렀다.

 

Around early 4th century, the temperature fell lower than usual for many years in Far East Asia. It caused grains not to ripen, grazing grass land for animals was scarce.

 

4세기 초 무렵, 극동아시아에서는 수년 동안 기온이 평시보다 떨어지는 이상기온현상이 발생하였는데, 그로 인해 곡식은 여물지 못하고 가축들에게 풀을 뜯어 먹일 수 있는 땅은 부족해졌다.

 

For these reasons a large number of semi-nomadic tribes left from what is known today as the Korean mainland to Eastern Manchuria.

 

이런 이유로 인해 상당수의 반(半)유목 종족은 오늘날 Korea라고 알려져 있는 한반도 지역에서 만주 동부로 떠나게 되었다. (번역자 주: 현재의 한국영토를 기준으로 삼은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실제 도래지 면에서는 사실과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Gathering other tribes along the way they proceeded to the Central Asiatic step. From there, the mass of tribes went westward.

 

이동 중에 만난 다른 이민족들을 규합하면서 그들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초원 지대로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종족 대부분은 그곳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Around AD 370, these nomadic people arrived upon the Horizon of the Roman Empire. They established a kingdom along the Danube, on the prairies that are present day Hungary.

 

서기 370년경 이 유목민들은 로마제국의 국경 지역에 도착하여 다뉴브 강 (독일 남서부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흘러 흑해로 들어감, 독일명 ‘도나우강’)을 따라 오늘날의 헝가리 일대인 대초원 위에 그들의 왕국을 세웠다.

 

About AD 443, Attila, the son of King Ruga assassinated his brother Bleda and united all the Hun tribes. He lead the warriors on-to ruthless and savage conquests; destroying anything in sight, looting and merciless killing of innocent people.

 

서기 443년경, 루가왕의 아들 아틸라는 그의 형제 블레다를 암살하고 전(全) 훈족을 통일하였다. 그는 전사들을 이끌고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정복을 감행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약탈을 하였을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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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완전히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쓴 글이니 이 점을 잘 참작하기 바람)

 

He conquered Germany, Eastern Europe and most of southeastern Europe.

 

그는 독일, 유럽 동부 및 유럽 남서부 일대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였다.

 

The Huns were superior horseman and combined with their archery skills were the bane of the Romans ……,

 

훈족은 기마술에 능한 이들로 궁술 또한 겸비하였는데, 그것은 로마인들을 파멸시킨 큰 원인이었다.

(번역자 주: 로마제국의 흥망사의 한 부분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의 반란으로 멸망했다는 점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죠. 다만 훈족도 게르만 족과 함께 로마 제국의 멸망에 일조한 파멸의 한 원인이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They used a short, inverted bow made from few different materials glued together. An iron arrow head was able to pierce any European armor.

 

그들은 여러 가지 재료들이 접착된 복합 재료로 제작된 짧은 역궁(逆弓; 맥궁!)을 사용하였으며, 쇠로 된 화살촉은 유럽 병사들의 모든 갑옷을 관통시킬 수 있었다.

 

Their horses were short in height, but had speed and endurance, they were also agile and smart.

 

그들의 말은 키는 작았지만 빠른 속도와 강한 지구력이 있었으며, 동작이 민첩하고 영민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우리 민족도 고려 후기에 페르시아에서 수입된 대완구라는 키가 큰 말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조랑말을 기병들이 주로 사용했고 이런 경향은 구한말까지도 계속됩니다. 조랑말 타고 적진을 호령하는 우리 기병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길…)

 

Hun warriors, while twisting their upper body, were able to shoot arrows behind them while their horses were running forward (referring picture).

 

훈족 전사들은 말이 전방으로 달리고 있는 중에도 마상에서 상체를 뒤로 틀어 뒤 쫓아 오고 있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그림 참조요).

 

(번역자 주: 위 ‘그림 참조요’의 그림은 현 중국 집안현 무용총 주실 서벽의 수렵도에 나오는 고구려 기마궁병의 모습과 완전 일치합니다. Orullee Han님의 주; 고구려 기마병 그림은 집안현 그림으로, 다큐에 나오는 인물들의 복장과 거의 같습니다.)

 

When Atilla was young, his father Ruga exchanged his son with a young son of a prominent Roman family, his name was Aetius.

 

아틸라가 어렸을 때 그의 부친 루가는 자신의 아들을 한 유명한 로마 가문의 어린 아들, 즉 그 Aetius라는 이름의 아이와 맞바꾸었다.

 

For ten years Atilla was educated in the Roman court vise versa Aetius from the Hun kingdom. Atilla was probably the first western educated Mongol in its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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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간 아틸라는 로마 왕실에서 교육을 받았고 동시에 Aetius는 훈족의 왕궁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틸라는 아마도 몽골족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서구 교육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번역자 주; 이 문장도 서양인의 입장과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니 각별한 주의를 요함)

 

Later these 2 men would confront each other in Gaul (today’s France), in 451. Atilla would go on to lose this battle and invaded Italy in 452 with Germanic tribes.

 

이들 두 사람은 이후 451년에 Gaul(오늘날의 프랑스)에서 서로 맞부딪히게 되는데, 아틸라는 계속해서 이 전투에 패배하게 되며, 452년에는 게르만족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침략하였다.

 

His army advanced to Venice (today’s) and negotiated with a Roman representative Pope Leo for 10 hours.

 

그의 군대는 오늘날의 베니스로 진격하여 로마 대표 교황 Leo와 장장 10시간 동안 협상을 벌였다.

 

All the while on horse back, Atilla received tribute from Rome, and would thereafter retreat from Italy. Pope Leo received the title “The great” from the church for his successful negotiations with Atilla.

 

마상에서 아틸라는 로마로부터 공물을 받았으며 그 후 이탈리아로부터 철군하게 된다. 교황 레오는 아틸라와의 이 성공적인 협상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를 받았다.

 

Atilla married to a German princess, Ideco in AD 453. After his wedding celebration, he died that wedding night, possibly from alcohol poisoning.

 

아틸라는 453년에 독일공주 Ideco와 결혼을 하였다. 그는 불행히도 결혼식 날 밤에 죽게 되는데 아마도 그의 사인은 주독(酒毒)인 듯 하다.

 

His people dammed the Danube River and buried him in the middle of the river. They opened the dam for no on-e, so that none could ever find his grave.

 

그의 백성들은 다른 이들이 묘지를 찾지 못하도록 다뉴브 강을 둑으로 막은 뒤 그의 시신을 강 중앙부에 매장하였다. 그들은 그 댐을 어떤 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 그 누구도 그의 무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After his death, the Hun kingdom crumbled and his people scattered from the Europe. He would be known as “the scourge of god” by the Roman Empire because of his cruel acts.

 

그가 죽은 후 훈(Hun) 왕국은 멸망하였으며 그의 백성들 또한 유럽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생전의 잔인한 행위로 인해 그의 죽음은 로마제국 사람들로부터 “신의 천벌”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The Huns left a number of legacies in Europe especially the Chateau area of France, all children born there have a blue round mark in their hip as the Mongolians do today. The country of Hungary got its name from the Huns, to commemorate the Hun Kingdom.

 

훈족은 유럽에, 특히 프랑스 Chateau 지역에 많은 유산을 남겼으며, 그곳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아이들은 엉덩이 부위에 오늘날 몽골인들과 동일한 파란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다. 헝가리라는 국명은 훈 왕국을 기념하기 위해 Huns에서 비롯된 것이다.

 

(번역자 주; 여기서 짚고 넘어 가고 싶은 부분은 몽고 반점을 가진 민족은 우리 민족과 몽고족 이외에도 아메리카 인디안, 유대인 등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서로 인종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During the world war ll allied forces refer to Germans as Hun because of their relationship with Huns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Funeral cultures of Europe are also deeply influenced from the Hun.

 

세계 제 2차 대전 기간 중 연합군은 역사적으로 독일인들의 4세기, 5세기에 훈족과의 관련성 때문에 독일인들을 훈족으로 부른다. 유럽의 장례문화 역시 훈족으로부터 깊이 영향 받은 것이다.

 

 

ChunMaChong Gold Crown Kyungju, Korea

 

 

Kyodong Gold Crown Kyungju, Korea Dia 14cm

 

 

 

 Posted by at 8:22 AM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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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 심백강 –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발췌)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 禹왕)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Posted by at 8:14 AM

부여족과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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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비잔틴시대의 기록화.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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