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의 있고 없는 것은 이처럼 민족사의 사활과 관련되는 것이다. 고성 이씨 가문이 환단고기와 만나는 것은 고려가 몽고침략을 받는 시기부터 시작된다. 이존비李尊庇(1233-1287)는 어느 날 왕자를 가르치는 서연書筵에서 고려의 자주부강론을 역설한다. “우리나라는 환단 이후 북부여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부강하고 자주독립을 지켜온 나라인데 최근 원(몽고)의 내정 간섭으로 나라에 사대주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자주오사自主五事를 상주하였다. (태백일사 고려국 본기)
이존비의 자주독립론을 이어받은 사람이 행촌 이암(1297-1364)이었다. 이암은 이존비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와 똑같은 자주책을 임금에게 상주하고 1) 태백진훈 2) 도학심법 3) 농상집요農桑集要 등 행촌삼서杏村三書를 남겼다. 지금까지 이암에게 삼서만 있다는 사실만 전해지고 그가 남긴 『단군세기』는 숨겨져 있었다. 이암이 『단군세기』를 비롯한 여러 비서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일처럼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천보산天寶山에 올라갔을 때 소전이란 사람이 태소암에 진서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말을 하여 가서 읽어 보니 모두가 환단 시대의 신서神書와 진결眞訣이었다는 것이다. (고려국 본기 제8)
또 한 분, 고성 이씨 문중에 이맥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 연산군과 중종 때 사람으로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아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하도 무료하여 집에 고이 간직했던 고서와 이웃 고노들에게서 들은 구전口傳 그리고 자신이 관직에 있을 때 발견한 내각의 비밀문서들을 참고하여 『태백일사』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이맥이 후손들에게 이 책을 비장(숨겨 보관함)하라 일렀다.
그러니 『태백일사』는 500년간이나 고성 이씨 문중에 비장된 것이다.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의 핵심부분을 이룬다. 만일 이 책이 보존되지 않고 사라졌더라면 민족사는 회복할 길이 없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맥은 물론 그 후손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모르는 일이다.
이암과 이맥이 남긴 비서는 한말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 1909)에 의해 공개되어『환단고기』(1911년)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원본은 지금 없다. 그러나 원본은 분명 이기와 그 제자 계연수가 읽었다. 대종교와 단군교를 중광한 나철(弘巖 羅喆 1863- 1916)과 정훈모도 읽었다. 이기 나철 그리고 정훈모는 각기 다른 이름의 종교단체를 조직하였으니 이기는 단학회, 나철은 대종교, 그리고 정훈모는 단군교를 창설하였고 단학회를 계승한 이기의 책은 이유립에게 전수되었다.
이유립은 광복 후 『커발한』이란 신문에 『환단고기』원고 일부를 발표하던 중 일본의 재야사가 녹도승(鹿島昇)에게 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건네주었는데 녹도승이 원고를 넘겨받아 신의 없이 약속을 깨고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내고 말았다.
이존비, 이암, 이맥, 이기 그리고 이유립 등 고성 이씨 문중에 전해 내려 온 경위는 위와 같았으나 출판되어 나온 것이 너무 늦어 세상 사람들이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역사에 불만이 많았던 분들은 크게 환영하여 국론이 딱 둘로 갈라졌다.
북한학자들이 『환단고기』를 인용하고 대한민국에서도 단군학회가 조직되어 활발히 상고사를 연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불안하다. 대학의 강단을 점령하고 있는 한국사 교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멈칫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고 『환단고기』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였기에 그렇게도 말이 많았는가 하는 이야기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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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의 저자, 이암李嵒
[고려사] <열전>에 올랐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그가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행촌 이암(1297~1364)
그는 뛰어난 학자와 관리가 배출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으며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
에 급제하여 文翰학사 및 進賢館 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의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할아버지 이존비의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후손이 바로 행촌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강화도 마리산의 보제사에 들어가 3년 동안 유가의 경전과 우리 고
대사에 대한 기록을 탐독하였다.
부모님이 그리울 때면 마리산 꼭대기의 참성단에 올라, 수천 년 전 그곳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단군왕검의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겼다. 그 때 지은 시①를 보면, 십대의 어린 나이에 나라의 평안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염
원을 세우고 있다.
17세(1313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암은, 고려가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던 시기의 여덟 국왕 가운데 여섯 분을 모시
면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충선왕 때 나라의 관인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시작하여 두 차례 유배를 당하고, 왕의 책봉
을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62세(1358년) 때 공민왕의 부
름에 환도하여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개혁군주이다. 그러한 공민왕의 곁에 이암이 있
었다. 문하시중이 된 그 다음 해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적군 4만 명
을 격퇴시켰고, 1년 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경북 안동으로 피난가는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임금 앞에서 자신을 ‘臣’ 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친원파의 간신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암은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권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홍건적을 격퇴하고 왕을
호종한 공로로 좌정승에 제수되기까지(1361년) 했지만, 공민왕의 부름에 응한 지 5년 만에(1363년) 사퇴하고 야인
이 되었다.
행촌에게는 고려와 조선의 여느 정치가, 학자와는 남다른 면모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 서적만이 아니라 동서
문화의 원류인 신교 사서를 탐독하여 신교의 삼신문화에 정통하였다. 첫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3년을 보낼 때도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 등을 연구하는 독서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나(1335년) 천보산 태소암
에서 1년간 머물 때, 소전素佺거사②로부터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환국-배달-조선)시대를 lrfhr한 고서
적들을 전수받았다. 신교문화에 통한 이암을 소전거사가 알아보고서 석굴 속에 감춰져 전해오던 사서를 전해준 것이
다.
이암은 나중에 그것을 근거로 <단군세기>를 쓰고, 당시 소전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 <태
백진훈太白眞訓>을 지었다. 이때 복애거사 범장과 청평거사 이명도 소전거사에게 비기秘記를 전수받아, 범장은 <북
부여기>를, 이명은 <진역유기>를 저술하였다. <단군세기>와 함께 이 사서들은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문화의 본래 면
목을 드러낸 소중한 문헌들이다.
이암이 언제부터 <단군세기>를 집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그는 67세(1363년)에
사직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건너가 선행리 홍행촌에 海雲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단군세기>의 마지막 손질에 혼신
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③
민족의 현실을 통탄하며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웅변하는 <단군세기> 서문에서 그는 ‘인간은 어떻
게, 왜, 무엇을 위해 생겨나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멋진 삶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명쾌한 필치로 밝
히고 있다. 인성론을 중심으로 신교의 역사관을 정리한 이 서문은 대학자로서의 지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만고의 명문장이다. 행촌 이암, 그는 동방 한민족의 역사를 유교사관도 불교사관도 아닌 한민족 고
유의 신교사관으로 저술한, 신교사관의 정립자이다.
<태백일사>의 저사, 이맥李陌
이맥(1455~1528)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며 행촌 이암의 고손자다. 1474년(서종 5) 진사시에 합
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
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이때 장숙용(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내세워 분에 넘치는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결국 괴산에 유배되었다(1504). 귀양살이 시절에, 집안 대대로 내려
오던 책들과 노인들에게서 채록한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높은 관직을 제수받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 때문
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에 머물렀다. 이는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 내에 적이 많았던 때문으로, 1517년(중종
12)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에 그가 취한 입장에서도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그는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
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 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66세 때인 1520년,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인 찬수관撰修官이 디어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
여 궁궐 깊이 감춰 둔 상고 역사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금서들의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시절에 정리해둔 글들
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태백일사>, 즉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④의 역사’ 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서 벗어나는 학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로 인해 그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태백일사>는 한민족의 7천 년 상고 역사를 환국, 배달, 고조선 각 시대별로 세밀하게 다루면서 당시 신교 문화의 신
관, 우주관, 인간관, 역사관, 윤리관을 조목조목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교 문화 역사서의 완결본인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가히 한민족 신교문화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 )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세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
「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 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24세인 1930년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 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1942년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등
12항을 이유로 강제 폐쇄 당했다.
39세인 1945년
「단학회(檀學會)」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69세인 1975년 5월 8일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東源論)》을
미국의 하버드. 워싱턴. 콜롬비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 갔다.
70세인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제씨와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하신 이듬해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 자택에서 운명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