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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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12014
 

“하늘은 한민족을 위해 『환단고기』를 내어 주셨다! 한민족의 장엄한 9천 년 역사 가운데 잃어버렸던 7천 년이 비로소 되살아났다.” 안경전安耕田 증산도 종도사는 일갈한다. 한민족사의 뿌리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7천 년 역사는 또한 어떤 것인가.

“일본 헌병들이 『환단고기』를 펴낸운초 선생의 사지를 잘라 압록강에…”

– 목숨 걸고 지켜온 한민족 9천 년의 정통 유일 역사서 『환단고기』


●대담 박정하 ■ ■ 본지와 대담하는 안경전 종도사

“독립운동가인 운초 계연수 선생은 우리 역사와 옛 문헌에 관심이 많았던 분입니다. 그가 여러 집안에서 소장되어온 신라, 고려조와 조선조 때 다섯 석학이 쓴 다섯 권의 옛 사서들을 한 권으로 묶어 펴낸 것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된 이듬해, 1911년의 일이지요. 운초 선생은 그로부터 9년 뒤 일제 경찰에 의해 처형, 아니 무자비하게 살해당합니다.”

1920년 만주 관전현, 압록강 부근의 한 후미진 골짜기. 조선인의 사설학교 배달의숙倍達義塾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이 학교는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과 송암 오동진 장군이 출연, 설립한 뒤 일대 독립군 및 그 자녀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혼을 가르쳐오던 터였다. 일본 헌병들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운초를 체포하고 운초와 여러 교사들이 수집하고 연구한 책과 저술, 자료 등 3천여 점을 강탈해 헌병대로 실어갔다. 안경전 종도사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헌병대가 강탈한 온갖 자료들 가운데는 당연히『환단고기』도 포함돼 있었을 것입니다. 일본 헌병들은 운초가 『환단고기』를 펴낸 바로 그 인물인 것을 알고는 온갖 고문을 가하고는 곧 처형해 버렸어요. 그것도 사지를 다 잘라서 압록강에 내다버렸습니다. 너희 조선 놈들 엉뚱한 생각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봐라, 그랬던 것이죠. 일제는 혹시라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인류의 시원역사가 되는 우리의 뿌리역사가 드러날까 겁먹은 나머지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게 토막토막 잘려진 선생의 시신을 우리 동포들이 눈물과 비탄 속에 한 점 한 점 수습을 했습니다. 목숨 걸고 지켜온우리 역사서 ― 『환단고기』압록강 가에서 사람들이 운초 시신을 수습하던 장면을 한 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열네 살, 그의 제자인 재야 역사학자로 활동하신 한암당 이유립 선생입니다.

이유립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인 해학 이기의 제자 이관집의 아들이고 열세 살
부터 배달의숙에서 운초에게 배웠어요. 물론 운초와 이관집 선생은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고요. 운초와 그처럼 깊은 인연을 가졌던 이유립은 스승의 장례 아닌 장례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어렵사리 보존된 『환단고기』 원본 한 부를 품에 안고 1948년에 월남했어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환단고기』의 생생하고 고귀한 내용을 전해 주었습니다. 오로지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다 내놓았던 이러한 분들의 위대한 희생과 노력 덕분에 오늘 우리가 『환단고기』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사를 대입 수능 필수과목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논란을 벌이더니, 지금은 국가 검정檢定교과서 8종의 현대사 부분을 놓고 우편향이다 좌편향이다, 이념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안경전 종도사는 “9천 년 한민족사 가운데 장대한 7천 년 뿌리가 뭉텅 잘려나갔는데도 역사학자나 제도권 인사란 사람들은 그것을 도외시한 채 그저 최근세사를, 그것도 좌우 어느 입맛대로 쓸 거냐 하는 정파 이해를 놓고 티격태격 싸운다.”고 개탄하면서, “그 또한 필요한 일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한민족 정신의 근원 바탕이요 기틀인, 뿌리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지난 100년이 아닌, 통째로 잃어버린 7천 년의 뿌리역사부터 엄정하게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한민족사의 뿌리는 무엇인가. 잃어버린 7천 년 역사의 내용은 또 무엇이고, 그 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안경전 종도사와의 세 번째 역사 이야기―『환단고기』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본다.

◎ ◎『환단고기』는 언제, 어떻게 쓰인 책인가요?
『환단고기』는 시대를 달리하는 다섯 석학의 글을 모은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가장 앞선 것은 신라 때의 승려 안함로安含老가 쓴 『삼성기』입니다. 안함로는 안홍 법사, 안함 법사 등으로도 불렸던 인물인데 고려 때의 『해동고승전』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안함로는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세속의 속박을 벗어나 왕래와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그가 『동도성립기』라는 책을 지었다는 것과 이웃 나라들의 침입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경주의 대궐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문이 고국으로 귀국할 해 등을 모두 정확히 예견하
여 명성이 높았던 승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법만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사상과 역사에도 해박한, 유불선을 초월한 당대 최고의 도승이었습니다. 안함로의 『삼성기』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약간 차이가 있는 책이 원동중의 『삼성기』입니다.

원동중의 『삼성기』에서는 환국이 12개 나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 치우천황과 배달국의 18세 환웅들의 역년 기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귀중한 기록을 남긴 원동중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 이전에 살았던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세조실록』에 실린 금서목록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고려 때 사람이 아닌가 싶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책은 『단군세기』로 이는 47세에 이르는 단군조선의 연대기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혼자서 1,500년을 통치한 전설적 인물처럼 그려져 있지만, 『단군세기』에는 달리 47명의 단군들이 대를 다스린 2,0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들 47명의 단군들이 모두 같은 왕조의 사람들은 아닙니다.

일부는 백성들의 추대를 받거나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들이지요. 『삼국유사』보다는 훨씬 더 사실에 충실한 역사서인 『단군세기』는 공민왕 12년(1363)에 행촌 이암이 썼다고 저자와 저술연도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책입니다. 행촌 이암은 고려 말의 고위 관료이자 학자로서 재상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그는 홍건적의 난이 끝난 후 관직을 물러나 강화도로 들어가 자신이 그토록 남기고 싶어 했던 우리의 상고사를 썼던 것입니다. 네 번째 책은 『북부여기』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역사서입니다.

이 책을 찬술한 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인 복애거사 범장입니다. 그도 이암처럼 고려 조정에서 관직생활을 했는데 벼슬이 간의대부까지 올라갔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두문동에 은거하였습니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 임금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출사하지 않고 고향인 광주로 내려와 학문에 몰두했던 인물입니다. 범장은 벼슬하기 전 젊은 시절에 행촌 이암, 이명과 함께 소전거사라는 인물로부터 우리 역사기록이 담겨 있는 고서를 전수받았는데 아마 이러한 고서들이 그가 「북부여사」를 남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북부여기』는 해모수의 북부여 건국으로부터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형식이 『단군세기』와 유사합니다. 다섯 번째 책은 『태백일사』로 조선 중종 때의 관리였던 일십당 이맥이능력이 있어서 천리 밖에서 싸우는 신라 군사가 전쟁에 패할 일, 삼국통일이 이뤄질 해, 왕자 김인편찬한 책입니다. 이맥은 고성 이씨로서 행촌 이암의 현손이었습니다. 『환단고기』를 우리에게 전수해준 이유립은 이맥의 직계 후손입니다. 『태백일사』를 소장하고 있던 해학 이기 선생도 고성 이씨로서 행촌 이암의 후손이었습니다. 고성 이씨는 이런 면에서 참으로 우리 역사에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이맥은 『태백일사』에 붙인 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간단히 적어놓았습니다. 연산군 때 괴산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곳에서 무료한 귀양살이를 하던 중에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고서들과 또 자신이 찬수관으로서 있을 때 내각에 비장하고 있던 옛 사서들을 읽고 쓴 책이 『태백일사』였습니다. 『태백일사』에는 그가 여러 사서들에서 본 내용들을 그대로 전재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귀중한 상고사의 기록들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환단시대의 옛 경전인 「천부경」, 「삼일신고」 등의 본문이 그 가운데 실려 있고 또 고조선의 일부였던 마한과 번한 통치자들의 명단과 역년이 실려 있습니다. 이맥은 자신이 쓴 책이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용납하지 못할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내놓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 이름을 ‘태백의 숨은 이야기’라는 뜻으로 ‘태백일사’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신라 진평왕 때부터 16세기 전반의 조선 중종 때까지 근 천년에 걸쳐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들이 우리의 주체적 사관에 입각해서 쓴 역사기록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1911년에 독립운동가면서 우리 역사와 고서에 관심이 많았던 운초 계연수 선생이 이 기록들을 한권의 책으로 모아 간행하였습니다.”

◎ ◎대부분 책 제목을 보면 그 뜻이 금방 와 닿습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뜻도 모르겠고 해석도 쉽지 않습니다. 어떤 뜻을 담고 있습니까. 

“먼저 ‘환桓’은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하늘의 광명, 즉 천광명天光明을 뜻합니다. ‘환’은 지금도 자주 쓰는 말로서, “달빛이 환하다”, “대낮같이 환하다”라고 할 때의 ‘환’이 바로 이 천광명의 환입니다. ‘단檀’은 박달나무 단 자인데, 여기서 박달은 ‘밝은 땅’이란 뜻입니다. 달은 양달, 응달에서 알 수 있듯 땅을 가리키고요. 단은 곧 땅의 광명, 지광명地光明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환단은 천지의 광명입니다. 그리고 ‘고기古記’는 오래된 옛 기록이란 뜻인데, 『환단고기』 범례를 보면 고기의 인용이 『삼국유사』로부터 시작됐으나 지금은 고기를 볼 수 없어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단군세기』를 합본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환단고기』라 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기는 한민족사를 우리 손으로 기록한 옛 역사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역사 문화의 핵심이란 광명사관이기에 ‘환단고기’라 한 것입니다.

『환단고기』란 곧 천지의 광명을 체험하며 살았던 태곳적 한민족과 인류의 삶을 기록한 옛 역사이야기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또 이 하늘, 땅과 더불어 우주를 구성하는 인간의 광명, 인광명人光明을 따로 일러 ‘한’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한’ 속에는 환단, 즉 천지 광명이 함께 내재돼 있습니다. 인간은 천지가 낳은 자식이므로 그 안에 천지부모의 광명이 그대로 다 들어있는 것이죠. 한은 그 뜻이 수십 가지에 이르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천지광명의 주인공으로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하늘, 땅, 인간의 밝음은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 “대시大始에…언제나 오직 한 광명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하나의 광명입니다. 그 빛이 3수 원리에 따라 셋으로 나뉘어 우주를 열었던 것이며, 『환단고기』는 우리 옛 조상들이 그 빛을 신의 모습으로 이해했다고 전합니다. ‘한’으로 산다는 것, ‘한’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내 안의 밝은 본성을 틔워 천지의 뜻에 따라 이 땅을 광명한 세상으로 이룩하며 사는 삶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는데, 『환단고기』를 『한단고기』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릇된 명칭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한은 인간의 내면에 깃든 무궁한 천지광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질은 동일하다 하더라도 환과 한은 분명 서로 구별돼야 합니다. 이 책의 제호가 반드시 ‘환단고기’여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요. 환·단·한의 광명 정신은 동방 한민족 9천년 역사에 그대로 실현됐습니다. 환국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나라 이름들이 한결같이 광명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환국은 ‘환’ 그 자체고요,

배달은 ‘밝다’를 뜻하는 ‘배’와 땅을 뜻하는 ‘달’이 모여 ‘동방의 밝은 땅’을 뜻합니다. 고조선의 조선도 ‘아침 햇살을 먼저 받는 곳[朝光先受地]’을 가리킵니다. 고조선의 국통을 이은 북부여의 부여도 ‘불’이란 말로서 광명을 나타내고, 고구려 유민이 세운 대진국, 그리고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또 다른 이름 발해 역시 각각 ‘동방의 광명의 큰 나라’, ‘밝은 바다’를 의미합니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의 ‘대한’이란 말에도 ‘한’의 광명 정신이 어김없이 담겨 있으며, 오늘의 국호인 대한민국은 이 대한제국에서 나왔습니다.

더불어 각 시대 창업자의 호칭에서도 한·단·한의 광명 정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환’과 ‘단’이 들어 있는 환인, 환웅, 단군의 세 호칭은 모두 ‘광명문화의 지도자’를 가리키고,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성씨인 ‘해’ 또한 우리말로 광명의 태양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밝다’는 뜻의 박朴 자로 성을 삼았고, 이름에 ‘빛날 혁赫’ 자를 써서 광명 사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양조선의 이성계는 즉위 후 이름을 땅 위에 해가 떠오르는 모양의 ‘새벽 단旦’ 자로 바꿨는데, 이 또한 광명을 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성계는 고조선의 영토와 문화를 회복하여 과거 한민족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웅지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것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새벽 단’ 자로 개명한 것이죠. 환국 이래 동북아 한민족의 모든 역사 과정은 실로 환단, 천지광명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기록한 책이 『환단고기』입니다.”

◎ ◎일제의 탄압과 한국전쟁 등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를 감안하면 『환단고기』가 그런 고비들을 넘어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과정이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환단고기』가 편찬, 간행된 것은 조선이 일본에 망한 후 1년(1911)이 지난 때 였습니다. 『환단고기』의 앞에 붙어 있는 서문에 해당하는 범례에 따르면 계연수 선생은 자신의 동지이자 벗인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지원으로 30부를 간행했다고 합니다. 범례에 ‘기궐剞劂’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목판에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유감스럽게도 원본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천우신조로서 『환단고기』가 이유립이라는 인물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유립 선생은 1907년생으로서 해학 이기의 제자이자 계연수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13세 때 삭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계연수를 위시하여 최시흥, 오동진 등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특히 교육운동에 뜻이 있어 33세 때에는 신풍학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1948년 남한으로 월남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남북한 간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아 북한을 두어 차례 더 왕래하였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내려올 때 『환단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때 사용했던 교재가 『환단고기』였던 것입니다. 이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종현梁宗鉉 씨가 필자에게 직접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양씨는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유립 선생에게 사사했던 분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은 1976년경에 분실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유립은 월간 『자유』지를 운영하고 있던박창암 장군(1923-2003)의 도움을 받아 의정부에 살고 있었는데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이 집주인이 야반도주한 걸로 착각하고 집세 대신에 이유립 선생의 책들을 모조리 팔아버린 겁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환단고기』 원본이 사라지는 바람에 『환단고기』 위서론이 나오게 된 것이죠.”
◎ ◎그렇게 원본이 분실되기까지 했던 『환단고기』가 어떻게 그 내용이 보존되고, 또 대중에 알려지게 되었나요? “『환단고기』가 분실되기 전의 일입니다만 이유립 선생의 제자 가운데 오형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형기는 이유립 선생보다 10년 정도 연배가 젊은 사람이었는데 이유립 선생이 오형기의 형과 친한 터라 그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양종현 씨가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오형기가 이유립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를 빌려가 필사를 하게 됩니다. 오형기 말로는 이유립 선생이 자신에게 『환단고기』 정서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양종현 씨 증언으로는 오형기가 그 책을 필사하기를 원하자 이유립 선생이 허락하여 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형기도 그 책이 대단한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권 소장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요.

좌우간 이 오형기 덕에 『환단고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어요. 1979년에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환단고기』는 바로 오형기가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을 간행한 것입니다. 출판을 했던 사람은 이유립 선생의 문하에 있던 조병윤으로 스승의 허락도 없이 간행한 터라 이유립 선생이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가 필사본에 쓴 발문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이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아 1983년에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한 『환단고기』를 다시 간행했습니다. 배달의숙본이 나오기 바로 전해에는 가지마 노보루(鹿島昇)라는 일본인 변호사가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는데 이 일본어본이 역으로 국내에 수입되어 한국사학계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조병윤이 간행한 광오이해사본과 이유립 선생이 간행한 배달의숙본 모두 한문 원문만 실려 있는데 이후 여러 출판사들에 의해 『환단고기』 번역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 ◎아무리 이래저래 소실되고 분실됐다 해도 『환단고기』 말고도 지금도 전해지는 우리 고유한 사서들이 있기는 있을 텐데요. 이번 기회에 그런 사서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십시오.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지금 그 자취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환단고기』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렇게 한민족사의 참 모습을 확인시켜 줄 사서들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지금, 『환단고기』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등 몇 종의 책들이 겨우 전해지고 있습니다. 『단기고사』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발해문자로 쓴(729년) 책입니다. 전수 과정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1959년 국한문으로 번역되었지만, 6·25 사변 때 소실되었습니다. 현존하는 『단기고사』는 구전되어온 자료를 토대로 복원된 것입니다. 『규원사화』는 그 서문에 의하면, 북애노인北崖老人이란 인물이 숙종 2년(1675년)에 지었습니다.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를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환단고기』와 상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왕연대력』은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은(890년경)대표적 저술 중의 하나로 신라 역대 왕력입니다. 원본은 일제 때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홍종국洪種國이 필사한(1929년) 필사본만 전합니다. 고조선의 1세, 2세 단군에 대한 서술이 나옵니다. 이들 고유 사서 가운데서도 삼성조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만 아니라 상고시대 동북아 문화권의 정치, 경제, 풍속, 언어, 음악, 국제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전하는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최고봉이라 하겠습니다.”

◎ ◎말씀해주신 사서들과 비교해 『환단고기』가 갖는독보적인 특징 같은 것들이 있겠지요?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지요.첫째, 『환단고기』는 동방 한민족 뿌리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한민족사의 유일한 사서입니다. 『삼성기 상』의 첫 문장은 ‘吾桓建國이 最高라(우리 환족의 나라세움이 가장 오래되었다)’하여, 한민족이 환국을 세웠으며 그 환국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삼성조三聖祖 시대로 묶어 전합니다. 이 7천년 삼성조 동안 역대 임금의 이름, 재위연수, 치적 등을 기록하여 한민족 시원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책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둘째, 『환단고기』는 한민족사의 국통國統 맥을 명확하게 잡아줍니다. 『환단고기』의 5대 사서 가운데 『북부여기』는 특히 삼성조로부터 고려·조선에 이르는 우리 국통 맥을 바로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역사서입니다. 국통 맥의 잃어버린 고리인 부여사(북부여, 동부여를 비롯한 여러 부여의 역사)의 전모를 밝혀, 고조선 이후의 단절된 역사를 이어주기 때문입니다.

셋째,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고대 종교와 사상인 신교 삼신문화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배달과 고조선 시대에 신교의 삼신 원리에 따라 전도佺道, 선도仙道, 종도倧道라는 유불선 삼교의 모태가 되는 원형 삼도가 출현하였습니다. 유불선과 신교문화를 회통한 안함로安含老를 위시한 『환단고기』 집필자들에 의해 동북아의 원형 문화이자 인류의 시원 문화인 신교문화는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신교는 삼신상제님을 모시는 신앙입니다. 환국, 배달, 고조선 시대 이래로 우리 조상들은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려 그 은혜와 덕을 칭송하고 상제님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넷째, 『환단고기』는 하늘, 땅, 인간 즉 천지인 삼재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밝혀 줍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을 『환단고기』는 신교의 신관, 인간관, 우주관, 역사관에 바탕하여 종합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신과 기, 신과 천지인, 천지와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의 탄생 원리 등의 심오한 진리 주제를 총망라하여 싣고 있는 철학 경전이요 문화 경전이라 하겠습니다.

다섯째, 『환단고기』는 천지와 인간의 광명정신인 환桓, 단檀, 한韓의 원뜻을 밝혀줍니다. ‘환’은 ‘하늘의 광명’이요, ‘단’은 ‘땅의 광명’이므로, ‘환단’은 ‘천지의 광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천지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천지 부모의 광명을 그대로 다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광명人光明인 ‘한’입니다. 이 ‘한’ 속에는 ‘환단’, 즉 ‘천지의 광명’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환단’은 천지 광명의 역사를 드러냈던 시원역사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환단고기』는 삼성조 시대의 국가 경영 제도를 전하는 사서로서 만고불변의 나라 다스림의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신교의 삼신문화가 국가 경영 원리로 정착된 가장 결정적인 제도는 다름 아닌 고조선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입니다. 대단군이 중앙의 진한을 다스리면서 두 명의 부단군을 두어 번한과 마한을 다스리게 한 이 제도는 고조선 국정 운영의 핵심 제도였습니다. 고조선은 삼한관경제의 성쇠와 운명을 같이 하였습니다. 『환단고기』는 우리 상고시대의 정치를 드러내주는 정치학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일곱째, 『환단고기』는 배달과 고조선의 문자 창제를 기록하여 한국이 문자 문명의 발원처임을 밝혀줍니다.문자는 문명 발상의 필수 요소로서, 한민족은 배달시대부터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초대 환웅천황(BCE 3897~3784)이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을 창제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문자로 평가받는 BCE 3,000년경의 쐐기문자(수메르)와 상형문자(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세계 최초의 문자입니다. 고조선 3세 가륵단군은 이 문자를 수정 보완하여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가림토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창제된 한글과 매우 흡사합니다. 여덟째, 『환단고기』에는 상고시대 한민족의 대외 교섭사와 함께 중국과 일본의 왕조 개척사가 밝혀져 있습니다.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적지 않은 기록들이 나옵니다. 중국의 고대 왕조 요·순 시대뿐 아니라 하·상(은)·주 3대 왕조와의 대외교섭사가 나옵니다. 고조선은 하·상(은)·주 왕조들의 개국 과정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 예가 단군왕검이 치수治水법을 우禹에게 가르쳐주어 당시 중국을 괴롭히던 9년 홍수를 성공적으로 다스리게 하여 그 공으로 하나라를 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백일사』에는 아직도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 일본의 개국 과정을 밝힐 수 있는 단서들이 실려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환단고기』는 왜곡된 한·중·일의 고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나침반입니다.”

◎ ◎『환단고기』가 그처럼 가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선뜻 받아들였을 텐데, 어떤 까닭인지 당장 우리 역사 교과서에 언급조차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서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습니다. 이 두 사서가 중요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편 사서 집필에 있어 사대주의적 관점이나 신라중심의 서술 등의 문제점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환단고기』는 기존의 사서와는 다른 파격적인 내용과 상세한 기술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내용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고조선의 성립 기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라든가 47대에 이른 단군의 명칭과 재위년도 등은 고조선을 지금으로부터 겨우 2,700년 전에 건국된 청동기 시대 부족국가로 보는 식민사학의 논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역사학계에서 볼 때 『환단고기』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박병섭 박사가 지적하듯이 그들은 이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축소 지향적으로 접근하여 그 가치를 폄하하고, 『환단고기』의 허점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고 침소봉대하여 『환단고기』 전체를 근세에 지어낸 책이거나 조작된 책으로 낙인찍으려 했습니다.

강단사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환단고기』 위서론’이라고 부릅니다. 위서론이라고 하면 무언가 학술적인 이론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논리적 관점이나 학술적 논증이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해 온 『환단고기』 역주본 작업을 마무리 지으면서 지금까지 학계에서 발표한『환단고기』 진위 논쟁에 대한 세미나 자료와 논문, 서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체계적으로 점검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위서라는 주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환단고기』의 소중한 가치가 정말 부당하게 흠집이 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주류 강단사학계가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위서론자들은 책 제목인 『환단고기』의 뜻조차 모르고 있으며, 『환단고기』를 단 한 번도 깊이 있게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불선 경전을 비롯한 동북아의 고전과 인류의 시원 종교인 신교의 우주론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위서론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환단고기』는 조작된 책이라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범례에서도 나오듯이 이 책은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입니다. 『환단고기』를 이유립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 발문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유립의 제자 양종현은 원본 책을 직접 본 사람인데, 책의 제목이 ‘『환단고기』’라고 분명히 증언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 방대한 역사적 내용들을 시기적으로 정합할 수 있도록 창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둘째,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환단고기』에 근대 술어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국가·문화·평등·자유·헌법·인류·세계만방·산업 같은 근대용어가 쓰였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는 최근세에 쓰인 책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서에 현대에서만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면 당연히 그 저술 연대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근대술어라는 것이 고대에도 사용된 전거들이 무수히 발견됩니다. ‘문화’나 ‘인류’는 최소한 1,600년 전부터 고전에서 사용되었으며, 구마라습鳩摩羅什의『금강경』에는 ‘평등’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주역』에서는 ‘국가’, 전국시대 역사서인 『국어』에서는 ‘헌법’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을 돌이켜보면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와 다소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시원 역사,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韓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계연수가 처음 펴낸 후 70년이 지나 이유립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환단고기』를 다시 펴낼 때 가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도적인 조작과 첨삭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꼭 이뤄져야 할 보정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보정도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아주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넷째, 후대의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사서들을 표절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는 자명한 것입니다.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還至 17세손世孫’에 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 특히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구려 900년 설’의 진실은 오직 『환단고기』와 대조,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섯째,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라는 『세조실록』의 기록은 보지 않고 그보다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합니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만 지적하더라도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양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태도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꼬투리를 잡다보니 ‘잠청배’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잠청배는 원래 이암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인데 원나라 간섭기 때 고려 인물로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과 류청신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위서론자들은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하여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 지식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낸 주장입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입니다.”

◎ ◎제도권 사학자들이 위서론을 들면서 『환단고기』와 그 내용을 외면하려 한다면 거꾸로 그 내용이 진실임을 보여주는, 가령 ‘진서론’ 같은 주장도 충분히 있지 않겠습니까.“진서론이란 말이 어폐가 있는데 왜냐하면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정통 역사서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체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 뿐입니다.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굳이 증명하라고 한다면 중국, 일본, 중동 등지의 고대사 역사 현장을 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곳을 답사해 보면 『환단고기』는 진실이 가득 찬 역사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과 인류의 잃어버린 태고 역사를 되찾아 줄 유일한 역사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최근 중국 정부에서도 인정한,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문명이자 동북아 창세시대의 문명인 홍산문화(일명 ‘발해연안문명’) 유적지에 가본다면 『환단고기』의 내용이 유물과 유적으로 증명됨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위서론자들이 그곳에 가봤는지 물어보고 싶네요.

물론 위서론이 하도 판을 치니까 여러 학자들이 그에 맞서 『환단고기』의 내용을 검토하여 진서임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를 진서론으로 부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몇 가지 주장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먼저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을 지금의 과학을 통해 증명한 것입니다. 천문학자인 박창범, 나대일 두 교수는 천문현상기록을 근거로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입증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시대에 일어난 천문현상에 관련된 기록만도 12회나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기록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BCE 2333년까지 역추적하여 실제 일어난 자연현상과 사서에 나타난 기록을 과학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사서의 기록이 진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한 예가 BCE 1733년 흘달屹達단제 50년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기록입니다. 오성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5개 행성들이고, 루는 24수 중의 하나로 그 주성主星은 양자리의 베타별(β Aries)입니다. 그 두 과학자들이 검증한 결과 BCE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태양으로부터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 등이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 장관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고, 또 한 번은 1953년 2월 25일 새벽에 한 번 있었다고 합니다. 행성결집현상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인데 이를 감안해 볼 때 단군조선 때의 기록은 1년 차이지만 주목할 만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 29세 단군 마휴 9년(BCE 935)에 “남해의 조수가 석자나 물러났다[南海潮水退三尺].”이라는 기록이나 일식기록에 대한 기록도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검토는 『환단고기』가 최근에 저술된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명백한 반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그 내용이 유물로 입증된 사례도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장수왕의 연호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이 1915년에 발견된 불상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서 입증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건흥 연호가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역사기록의 진실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를 과학적 용어로 검증이라고 합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밝혀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됩니다.

천남생묘지 비문도 그러한 예가 될 것입니다. 천남생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의 큰 아들입니다. 그의 묘비명이 1923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 할아버지 태조, 증조부 자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태백일사』가 『조대기』를 인용하여 밝힌 기록과 일치합니다. 이 책은 여기에 남생의 고조부, 즉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 17세손’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환단고기』를 보면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됩니다. 『환단고기』에는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제1세 해모수(BCE 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추모(고주몽, 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몽의 선조는 해모수이며 그로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7세가 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도 광개토대왕비도 모두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환단고기』가 해명해준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환단고기』가 후대의 창작이 아닌 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알려주는 여러 증거들이 『환단고기』 자체 내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그 증거들을 일일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왜 자세히 연구하고 검토하지 않고 굳이 위서라고 낙인찍는가 하는 것입니다. 『환단고기』 연구는 완전히 새로 출발해야 합니다. 민족사학자이건, 역사학계의 주류 사학자이건 누구라도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우선 『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열린 태도와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 ◎화제를 좀 돌려서, 종도사님과 『환단고기』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어떻게 처음 책을 접하셨습니까. 또, 직접 역주본을 내신 계기나 이유는 어떤 것입니까.

“이유립 선생과 나의 선친인 안운산 증산도 태상종도사님은 같은 대전에서 살았고 또 우리 역사되찾기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이유립 선생이 펴냈던 『커발한』이라는 잡지도 굴러다니고 했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10대 소년시절부터 우리 시원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환단, 삼한관경, 삼신일체 등 국사책에서는 볼 수 없던 말들이 어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죠. 그래서 박창암 장군이 간행했던 『자유』지를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이유립 선생의 역사논문들이 많이 실렸어요. 그러다 내가 『환단고기』 원본을 처음 접한 것은 20대 후반이었던 1980년대 초예요. 내가 이 책을 처음 손에 넣은 날, 그 감동을 잊을 수 없어요. 밥상에 흰 종이를 깔고 경건한 마음으로 정신없이 책을 읽다보니 어느덧 동이 터왔습니다. 우리의 뿌리 역사와 원형문화가 이 책에 담겨 있음을 확인하고 그야말로 전율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또 내가 몸담은 증산도에서 이 책을 교재로 삼아 원문강독을 했지요. 내가 1983년에 낸 『이것이 개벽이다』라는 책은 상당한 수의 독자들에게 읽혔는데 이 책에도 『환단고기』의 내용의 핵심 몇 가지를 소개하였습니다. 그 후에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원문 번역을 하고 동서양의 연관서적들을 수집하며 틈틈이 역사현장 답사를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환단고기』에 입각하여 우리 역사를 한번 정리해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한의 뿌리와 미래』라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어요. 이 책은 근 천 쪽에 달하는데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언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이제까지 많은 출판사들이 『환단고기』를 번역, 간행했지만 나는 무엇보다 이 책에 대한 상세한 해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의 번역만으로는 미흡하고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상세한 주석과 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해제를 작성하다보니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말할 것도 없고 환국과 연관된 수메르문명과 히브리문명, 배달시대의 동이족 문화인 홍산문화, 고대 동북아시아의 주역이었던 동이족, 고조선 시대부터 한민족과 밀접한 연관을 가져온 북방유목민족, 고조선문화와 연관성이 높은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 우리 옛 신교와 연관된 서양의 신관 등 여러 문제들을 파고들다보니 해제의 분량만 약 600쪽이 되었어요. 글쎄 이렇게까지 방대한 해제가 필요할까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환단고기』와 연관된 역사문제를 누군가는 폭넓게 다루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작용한 것이죠. 이 책을 간행하고 나서는 인생의 큰 짐을 하나 벗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제 이 책을 우리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번역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원본의 영어번역은 상당히 진행되어 끝난 상태지만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환단고기』는 그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 안에 우리 옛 문화의 원형, 신교사상이 들어 있는데 번역하기가 만만치 않아요.”

◎ ◎종도사님께서 상고시대 이래 우리 한민족의 종교이자 생활문화인 이른바 ‘신교神敎’ 사상을 바탕으로 『환단고기』 역주본을 풀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신교’ 혹은 신교사상이란 어떤 내용인가요.
“우리 민족에게 유교, 불교 등이 들어오기 전 고유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림과 가르침의 근본이었으며 일상적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을 신교라 부릅니다. 신교는 문자 그대로 ‘신의 가르침’을 뜻하고, 구체적으로는 ‘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교라는 말은 『환단고기』에 실린 『단군세기』의 ‘이신시교以神施敎’, 조선 숙종 때 북애자가 저술한 『규원사화』의 ‘이신설교以神設敎’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교는 달리 풍류風流라고도 불렸는데, 신라의 지성 최치원 선생은 난랑鸞郞이란 화랑을 기리는 비문에서 우리민족 고유의 신앙인 풍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나라에는 지극히 신령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 하며, 유불선의 기본 사상을 이미 가지고 있다.’

신교는 환국 시대 이래 환족의 이동과 함께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 나가 수메르 문명, 인디언 문화 등 인류 정신문화의 뿌리를 이루게 됩니다. 인류 고대 문명에 대한 연구가 깊어질수록 태곳적 인류의 공통된 기층문화인 신교의 실체가 뚜렷이 드러나고, 인류 역사란 곧 신교 확장의 역사임이 밝혀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신교는 요컨대 인류의 시원종교며 원형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교에서 받드는 신은 누구일까요? 그 분은 인간과 천지만물을 모두 다스리는 통치자 하나님인 삼신상제님입니다. 창세 이래 우리 한민족의 신교문화권에서는 천상의 하느님을 ‘상제님’ 또는 ‘삼신상제님’이라 불러왔습니다. 『환단고기』에서는 ‘삼신일체상제三神一體上帝(삼신과 한 몸이신 상제님)’ 또는 ‘삼신즉일상제三神卽一上帝(삼신은 곧 한 분이신 상제님)’라 하여 우주 통치자 하나님의 존재와 본래 호칭을 더욱 더 명확히 알려줍니다.

여기서 삼신이란 우주의 근원인 신성을 말합니다. 대자연의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주된 근거를 이르는 것이죠. 삼신은 우주 만물은 낳아 기르고(造化) 깨달음을 열어 주고(敎化) 질서 있게 다스려 나가는(治化) 방식으로 작용하기에 석 삼三자를 붙여 삼신이라 이릅니다. 이 신의 본질은 광명으로서 앞서 ‘환단’의 설명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천광명, 지광명, 인광명으로 나뉘어 하늘, 땅, 인간과 만물의 생명으로 그 안에 깃듭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 땅, 인간은 각기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삼신에게서 부여된 신성과 광명을 가진 삼위일체적 존재가 됩니다. 나아가 천, 지, 인이 살아있는 삼신입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은 단순히 피조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물주인 그 신의 자기 현현인 것입니다.

우주 통치자 하나님은 이 삼신의 조화권능을 써서 현실 세계를 맡아 다스리시기에 삼신상제님, 삼신일체상제님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신교문화의 우주 사상은 한민족의 3대 경전에 전하고 있는데, 신교 우주관의 정수를 기록한 「천부경天符經」, 신교의 신관이 집약된 「삼일신고三一神誥」, 신교의 인간론을 담은 「참전계경參佺戒經」이 그것입니다. 일찍이 우리 민족은 천제天祭를 올려 상제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천제는 고조선 22세 색불루 단군 때의 제문祭文에서 알 수 있듯, 상제님께 폐백을 바쳐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번영을 기원하며 상제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국가 행사였습니다. 천제를 올린 뒤에는 모든 백성이 음주와 놀이를 즐기며 대동과 소통을 도모하는 제전祭典의 장을 열기도 했습니다. 9천년 역사의 첫머리인 환국을 연 환인천제를 시작으로 역대 통치자들은 천제 봉행을 국가 경영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환인과 환웅의 제천문화 전통을 계승한 고조선의 역대 단군은 매년 봄 대영절大迎節(음력 3월 16일)에 강화도 마리산에서, 가을(음력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서 천제를 거행하였습니다. 천제문화는 그 후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고려 때 국가 최고의 의례인 팔관회 역시 불교 행사가 아니라 신라 때부터 이어져 온 제천행사였습니다. 한민족의 제천행사는 비록 일시적인 단절을 겪기도 하지만, 마지막 왕조 조선과 대한제국(1897~1910)에 까지 이어집니다. 한민족은 환국 이래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그 은혜와 덕을 칭송하는 한편 상제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해온 것입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제천단인 강화도 참성단, 태백산 천황단, 지리산 노고단 등은 천제문화의 흔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상고 시대 우리 조상들은 천제를 소도蘇塗라 불리는 신성한 곳에서 올렸는데 아직도 드물게 마을 어귀에서 볼 수 있는 솟대는 소도의 풍습이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천제문화의 유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민족의 천제문화는 일찍이 중국 땅으로 전파돼 중국의 역대 왕들도 천제를 봉행하였습니다. 중국의 대표적 역사책인 『사기』의 「봉선서封禪書」는 춘추 시대까지 72명의 왕들이 현 산동성의 태산에 올라 천제를 지냈다고 전합니다. 산동성은 원래 배달 시대 때 동이족들의 주된 근거지 중 하나였던 곳입니다. 지금도 태산 꼭대기에는 옥황대제玉皇大帝라는 위패를 써 붙인 황금빛 상제님 상像을 모신 옥황전玉皇殿이 보존돼 있습니다. 대진국 이후 만주 땅에 세워진 요나라, 금나라 등 북방민족도 한민족의 제천풍속을 받아들여 국가행사로 거행하였습니다. 또한 천제문화는 일본으로 전해져 신사神社 문화를 탄생시켰습니다. 이밖에도 신교가 퍼져나간 세계 각처의 문화권에서 모두 제천을 행한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수메르 문명과 이집트 문명, 중남미 마야, 아즈텍 문명의 지구라트와 피라미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교의 핵심은 신의 뜻을 지상에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의 뜻은 하늘을 대신하여 다스림을 폈던 통치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홍익인간으로 요약됩니다. 홍익인간은 환인천제로부터 환웅에게로 이어진 국가 통치이념으로서 이를 고조선의 국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홍익인간의 뜻은 무엇보다도 고조선 11세 도해道奚 단군이 선포한 염표문念標文에 들어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의 풀이를 통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신[일신]께서 참마음을 내려주셔서 사람의 성품은 삼신의 대광명에 통해 있으니 삼신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 인간은 누구나 우주 광명과 통해 있는 신령한 존재이니 삼신의 가르침으로 일깨워서 천지의 뜻과 대이상을 펼치는 존재가 되게 하여 이 세상을 광명한 세계로 만들어라. 이것이 홍익인간의 궁극입니다. 홍익인간의 도를 실천할 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위격이 마침내 바로 서게 됩니다.

요컨대 한민족의 나라 다스림과 가르침, 또 생활문화의 중심이었으며, 나아가 인류의 정신문화의 기층을 이뤘던 신교의 대강령은 삼신상제님을 받들고 그 뜻에 따라 나와 이웃이 홍익인간으로 열매 맺는데 있습니다. 신교의 우주 사상, 인간론 등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환단고기』에 대해,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이제 『환단고기』와 관련하여, 군軍과일반 독자들에게 강조하시고 싶은 말씀으로 오늘자리를 마무리해 주십시오. “먼저 국민 각 개개인이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고유 역사서들을 찾아서 많이 읽고 주위에 소개하고 해야 합니다. 역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뿌리를 사랑하는 것이고, 우리 조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과 중국은 우리 역사를 도둑질하고 뿌리를 잘라내고 있습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이에 대응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 우리 민족과 문화의 시원을 부정하고 국가의 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역사에 무관심할수록 이러한 일은 더 자주 더 심각하게 발생할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고, 참 역사를 찾고 가르치는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두 번째로는 『환단고기』가 가진 가치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환단고기』가 우리 상고사를 정확히 전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환단고기』는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환단고기』는 우리의 종교와 문화와 철학을 온전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우리 시원종교와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환단고기』가 없었다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9천년 민족혼의 참모습이 들었기 때문에 『환단고기』의 가치는 더 높이 평가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환단고기』를 단지 한민족의 역사서로 한정해서 볼 것이 아니라 인류 창세문화의 원전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즉 『환단고기』는 인류의 기원과 문화의 뿌리를 전하는 창세기록이며 신교문화의 성전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때 『환단고기』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삼성기』는 “오환건국吾桓建國이 최고最古라(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 문장은 동서양 4대 문명권의 발원처가 되는 인류 창세문명의 주체를 밝힌 짧지만 매우 강력한 문장입니다. 그 주체는 바로 ‘오환건국’이라는 말에 나오는 환桓으로, 한민족의 시원 조상인 환족을 가리킵니다. 오늘의 인류 문명은 바로 우리 환족이 세운 환국에서 비롯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을 반도사관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사서와는 달리 대륙의 지배자이자 세계문화의 창시자로 기록하고 있는 『환단고기』에서 누구나 가슴 떨리는 감동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역사서라는 울타리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뿌리 역사와 원형문화의 교과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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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대의 넋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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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092014
 

우리는……

우리는 ‘흑백 티비’에 다리가 달려 있었고, 미닫이 문도 달렸던 걸 기억합니다.
우리는 어린시절 ‘김일 선수’와 ‘여로’의 열풍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부엌에 나가 ‘연탄 아궁이’에 밥하시던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동네로 뛰어나가 친구들과 ‘찜뽕, 고무줄 놀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우리는 해가 져 어두울 때까지 형 누나들과 ‘팽이, 딱지와 구슬치기, 다방구, 막대’ 등을 하며 놀았습니다.

우리는 동사무소에서 대통령은 영원히 박정희,
구국의 영도자인 줄 알았는데
어느날 전두환씨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밤 12시 넘어서 바깥에 돌아다녀도 된다고 좋아하던 어른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를 다녔습니다.
우리는 ‘오후반’이 있던 날은 늦잠을 잘 수 있다고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하교길에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가던 길을 멈춰섰습니다.

우리는 랩(lap)으로 눈을 감싸고 마스크를 쓴 채 화염병을 던지는 대학생들도 보았습니다.
우리는 ‘아시안게임’을 통해서 잠실이라는 동네를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는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임춘애’에게 열광하던 찌라시 기자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쇼 비디오쟈키’에 나오는 뮤직비디오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우리는 고교시절 군인들처럼 ‘교련복’을 입고 군인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야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빨갱이가 쳐들어 오는줄만 알았거든요.

우리는 올림픽을 보면서 ‘손에 손잡고’를 따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영웅본색’의 주윤발이 한국에 와서 ‘싸랑해요 밀키스~’라고 하는걸 봤습니다.
우리는’천녀유혼’의 왕조현이 한국에 와서 ‘반했어요 크리미’라고 하는걸 봤습니다.
우리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했습니다.
우리는 2000원짜리 음료권을 사서 디스코텍도 가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랜드, 브렌따노, 헌트, ‘가 국가기업인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성문기본영어”수학의정석’를 마스터하기 위해서 단과학원을 다녔습니다.
우리는 매점에서 ‘승차권’을 다발로 구입하고 그걸 아끼려고 직접 그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테이블에서 술 마시며 그 자리에서 춤을 춘다는 ‘락카페’가 참 신기했습니다.

우리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가 무척 놀라웠습니다.
우리는 한국이 죽었다 깨어나도 ‘아이와’같은 카세트를 못 만들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되는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엄정화의 ‘눈동자’가 수술한 눈인줄 몰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이러브 스쿨을 졸업하고
다시 밴드로 모여 서서히 중독되어가며
이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매 해  찾아오는 추위에도 싫증 안내고
늘 해 마다 오는 한살의 나이에도 이제는
별 감흥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덧 오십대입니다.
그래도 넥타이 부대고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는데  비겁한 한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식에겐 공부를 강요하고 일주일내내
얼굴한번 못봐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얄팍한 선택이 이처럼 부끄러운 결과를 가져 올지는 몰랐습니다.

머리엔 염색약을 발라야 조금 젊게 보일까 걱정하면서 배우자의 눈치를 봅니다.
조금 부끄럽지 않고 싶습니다.
자식에겐 미안함이 없고 싶었는데
세상은 그렇게 되지 않은채 아웅다웅 흘러갑니다.
부끄럽지 않은 오십대이고 싶은데 말입니다.
봄이 오는 가슴은 아직도  뜨겁고 싶은데. . .

 Posted by at 12:03 PM

비트코인

 IT, 정보보호  Comments Off on 비트코인
Apr 052014
 

비트코인, 우리가 은행이다 (We are a Bank in Bitcoin) February 22, 2014
<이전 포스트: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 화폐의 필연적 진화>
http://organicmedialab.com/2014/02/22/we-are-a-bank-in-bitcoin/ 

지난 포스트에서는 오가닉 미디어 세상에서 왜 새로운 화폐 시스템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지 논의했다. 이번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대안으로 비트코인을 다룰 것이다. 비트코인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에서 비트코인은 답이 아니라 ‘현상’이니 안심하기 바란다.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화폐(거래시스템)가 진화하는 방향을 짚고 그 흐름을 해석하는 것이 목적이다.

처음에는 네트워크 현상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비트코인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어떻게 이렇게 오가닉 미디어 현상을 한몸에 설명하는 시스템이 있는지 놀라웠고 한번은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내용을 파면 팔수록 미궁에 빠졌고 모든 이슈는 서로 네트워크로 얽혀 있었으며 구조는 상상을 초월하게 정교했다. 이런 과정에서 도출한 하나의 사실은, 비트코인은 이전 화폐 시스템과의 완전한 결별이며, 그 자체가 ‘유기체’라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지금부터 3가지 관점에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째, 비트코인에서 화폐가 노드가 아닌 ‘링크’가 되는 현상(여기서 문제의 핵심이 시작된다) 을 알아본다. 둘째, 거래가 단발적인 1:1 관계가 아니라 왜 ‘연결’의 연속인지(여기서 네트워크 기반이 정립된다) 살펴볼 것이다. 세째, 이런 네트워크에서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협력하여 은행이 될 수 있는지(여기서 자생적 네트워크가 발전한다) 설명하고 시사점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1. 비트코인은 노드가 아닌 링크다(Bitcoin as a Link)
백원, 천원 하는 돈이 링크라니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말인가? 돈은 받아서 손에 쥐고 주머니에 넣고 하는 것인데, 그게 네트워크의 링크라니 말이 되는가? 납득이 어렵겠지만 그렇다. 비트코인에서는 코인이 (노드가 아닌) 링크가 됨에 따라 기존의 화폐 시스템과 근본적인 차이가 생긴다. 이것은 조개에서 금으로, 금에서 종이, 종이에서 데이터로 화폐를 상징하는 컨테이너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화폐의 개념 자체가 바뀌는 근본적인 문제의 시작이다.

비트코인은 항상 송신자와 수신자 관계를 내포하며, 비트코인을 보낸다(지불한다)는 것은 신규의 비트코인을 2번 발행(To 수신자, To 나)하는 것과 같다. 비트코인은 From과 To를 내포하는 ‘링크’인 것이다.
비트코인은 항상 송신자와 수신자 관계를 내포하며, 비트코인을 보낸다(지불한다)는 것은 신규의 비트코인을 2번 발행(To 수신자, To 나)하는 것과 같다. 비트코인은 From과 To를 내포하는 ‘링크’인 것이다.

비트코인 거래에서는 코인과 거래가 1:1로 매핑이 된다. 즉 거래횟수만큼 비트코인이 새로 생성되는데, 비트코인 거래를 할 때마다 여러분이 코인을 발행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위의 스키마를 보면서 하나씩 살펴보자.

내가 1비트코인을 가지고 있는데 판매자에게 0.7비트코인을 지불하는 경우이다. 보통은 내가 가진 만원에서 7천원 내고 3천원을 거스름돈으로 받는 것을 떠올릴 것이고 왜 새로운 비트코인의 발행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갈 것이다. 그런데 비트코인에서는 이 거래를 완료하기 위해 두개의 코인이 새로 만들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하나는 내가 판매자에게 보내는 액면 0.7 비트코인(BTC) 코인이다. 다른 하나는 내가 나에게 보내는 액면 0.3BTC 코인이다. (이 거래가 이뤄지면 내가 가지고 있던 1 비트코인(BTC) 코인은 폐기된다.)

이때 0.7비트코인은 누가 보냈고 어디로 갔는지 즉 수신자와 송신자 관계를 반드시 내포하게 되어 있다(편지나 부동산 등기를 떠올리면 된다). 그러므로 비트코인에서는 금액이 같다고 해도 같은 코인이 아니다. 설령 내가 친구에게서 0.7비트코인을 받아 판매자에게 0.7비트코인을 보낸다고 해도 이 둘은 다른 코인이 되는 것이다(From 친구 To 나 ≠ From 나 To 판매자). 송수신 관계 없이는 코인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코인은 ”(보내는) 비트코인 주소와 (받는) 비트코인 주소를 연결하는 (가중치를 가진) 링크”라고 정의될 수 있다. 코인이 링크가 되는 순간 화폐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지금부터 설명하는 거래의 투명성, 거래 중재의 분권화, 시스템의 유기적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2. 비트코인은 비트코인의 연결이다(Bitcoin as a Network)
비트코인이 링크라는 것도 충격적인데 비트코인이 비트코인의 연결이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비트코인의 정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비트코인의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비트코인은 코인 소유주의 디지털 서명의 연결(chain of digital signature)”이라고 정의하였다[Sathoshi Nakamoto,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2008]. 디지털 서명이란 공개키 암호화를 기반으로 문서의 송신자(그리고 문서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자세한 내용은 비트코인의 주소, 거래, 그리고 지갑을 참조), 비트코인 맥락에서는 비트코인을 보낸 사람(from)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비트코인 거래란, 보내는 사람(from)이 자신의 코인에 받는 사람의 주소(to)와 발행금액을 더하고, 여기에 보내는 사람이 디지털 서명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단순화를 위해 해시 과정은 생략한다). 받은 사람은 디지털 서명을 확인하여 코인의 진위 여부를 판단한다.

다음 그림은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는 상황을 보여준다(이해를 돕기위해 1개의 코인으로 1개의 새로운 코인을 생성하는 경우를 나타냈다. 실제로는 2개 이상의 코인으로 2개의 새로운 코인을 생성하는 경우도 많다).

비트코인은 디지털서명의 연결이다. ‘From과 To’의 관계를 반드시 포함하고 있는 (그 자체로) 링크이며 ‘과거의 거래’ 또한 포함하고 있는 네트워크이다.
비트코인은 디지털서명의 연결이다. 내가 받은 비트코인은 이전 사람(그림에서는 내 친구)이 받은 비트코인에 이전 사람의 디지털서명이 더해진 덩어리이다. 내가 제3자(그림에서는 판매자)에게 코인을 지불할 때도 내 서명이 더해지는데, 이 디지털 서명들의 기록이 모두 누적된 상태로 거래가 계속 이뤄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트코인은 이전 비트코인(거래)을 포함하고, 이전 비트코인은 그 이전 비트코인(거래)을 포함한다. 결국 비트코인은 과거의 거래기록을 온전히 포함하는 거래의 네트워크인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가 준(즉 from 친구 to 나) 액면 1 비트코인(BTC) 코인을 10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면 이 10개의 비트코인은 전부 각자의 히스토리를 기록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비트코인이 과거의 거래를 포함한 네트워크가 됨에 따라 거래는 투명해지고 끝까지 추적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얼마전 비트코인 거래소 ‘비트인스턴트(BitInstant)’의 CEO 찰리 슈렘(Charlie Shrem)이 비트코인 불법 거래로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실크로드라는 불법 마약거래 사이트 사용자들에게 백만 달러 이상의 비트코인을 판매했을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마약 거래에 참여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충격적인 사실은 비트코인이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밝혀진 것이기도 하다. FBI는 실크로드 사이트 관련 모든 자료를 압수수색했는데 그 안에는 비트코인의 모든 거래 관계가 낱낱이 남아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슈렘을 체포하는 것까지 가능했던 것이다(물론 은행장이 자금 세탁을 주도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기존 화폐 시스템에서는 돈을 주고 받으면 거래가 끝난다. 그러나 비트코인에서는 1:1 관계로 끝나는 거래가 없다. 네트워크에서 분리된 단 하나의 코인도, 거래도 존재할 수 없으며 코인이 발행되고 거래가 지속될수록 연결은 늘어나고 네트워크는 성장한다. 여기서 각자는 목적에 따라 1:1로 거래를 하겠지만 그 결과는 전체를 움직이는 요소가 된다. 이러한 속성이 화폐의 중앙집권적 구조를 통째로 해체시키게 되는 것이다.

3. 우리가 은행이다(We are a Bank)
코인이 모두 연결된 링크가 되고 거래가 (히스토리를 포함한) 네트워크가 됨에 따라 우리의 역할은 매개자, 즉 이 시스템 전체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주체가 된다. 개념적으로, 은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리적 노드로서 네트워크를 직접 움직인다. 여러분이 직접 화폐를 발행하고 거래를 승인하고 화폐의 가치를 결정하며 서로의 보안을 책임지는 것이다. 여기서 부자, 정부, 은행이라는 노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이 네트워크를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대신 참여자 전체가 은행이 된다.

참여자(매개자)의 역할
(1)화폐의 발행: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여기서는 거래(네트워크의 소비)가 곧 화폐의 발행이다. 비트코인의 공급량은 2천백만개로 한정되어 있지만 거래를 할 때마다 기존의 화폐를 폐기하고 새로운 화폐가 발행된다. 화폐를 주조하는 기존의 중앙은행 시스템의 역할을 모든 거래자가 나눠서 수행한다.

(2)거래의 기록 및 승인: 비트코인 채굴자가 되어 직접 거래를 기록하고 승인한다. 거래가 이뤄지면 네트워크의 모든 노드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는데, 채굴은 실제로 일어난 거래행위를 공식화하고 네트워크에 기록을 남기는 과정을 뜻한다(채굴의 목적과 쓰임에 대해서는 ‘비트코인 채굴과 선순환 구조‘ 참고). ’Proof-of-work’으로 알려진 협업 기반 거래 승인 과정이며 채굴자는 단순히 코인을 캐는 사람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강화, 지속, 확장시키는 매개자가 된다.

(3)시스템의 보안: 거래 메커니즘이 참여자 전체를 통해 분산되어 작동함에 따라 시스템 보안의 주체도 달라진다. 기존 방식은 보안을 위임받은 소수가 전체 네트워크를 책임지게 되어 있다. 은행의 보안 시스템이 선과 악(해킹)을 가려내고 악의 침입을 각종 기술을 동원해서 막는 방법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연결되는 세상에서 이렇게 소수가 전체 네트워크를 책임지는 방식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반면 비트코인의 시스템은 완전히 분산된 신뢰 네트워크를 형성한다[A. Antonopoulos, “Bitcoin Security Model: Trust by Computation,” Forbes, Feb 20, 2014].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블록체인을 만들어 거래 승인에 참여하는 채굴자, 디지털 서명을 기반으로 화폐를 생성하는 거래자 등) 중에서 악이 과반수를 넘지않으면 보안이 유지된다. 누군가를 믿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아니다. 비트코인 시스템에서는 참여자 전체가 서로의 보안을 책임진다. 협업 보안이다.

매개자가 만드는 유기적 네트워크
물론 이 3가지는 개별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으로 작동한다. 화폐의 공급과 거래, 보안에 이르기까지 선순환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기에 시스템의 주체가 은행에서 참여자(매개자)로 뒤바뀌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비트코인 거래만이 아니다. 오가닉 미디어 세상에서는 사용자, 소비자, 거래자, 유권자가 모두 매개자가 된다. 이에 따라 사업자, 공급자, 은행, 정당 등에 집중되었던 권력이 해체되고 분산(Decentralization)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다수의 매개자가 만드는 네트워크는 유기적이다. 여기서는 화폐가 컨테이너(달러, 원화, 동전, 지폐 등)가 아니라 어디든 흘러다니고 어디서든 연결되는 링크가 될 것이다. 국경을 기반으로 화폐 단위를 나누지 않고 낱낱이 흩어진 우리가 매개자가 되어 네트워크의 전체를 움직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소수가 시스템을 통제하고 보안하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매개자 전체가 상호의존적 관계로 묶여 서로의 보안을 책임질 수 있는 구조만이 답이다. 새로운 방식의 협업 모델이다.

누가 이 모든 현상의 주인공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런 협업 네트워크는 (통제 대신) 사용자의 행위에 따라 발달, 성장, 쇠태, 소멸을 경험할 것이라는 점이다. 비트코인이 그 주인공이 된다면 그것은 국가가, 기관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비트코인을(화폐를) ‘진화하는 유기체’라고 한 이유도 이와 같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시대의 상징으로서의 화폐가 이미 ‘형태변이’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오가닉 미디어 세상이 어디로 진화해 가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시그널이다.

<관련 포스트>

연결이 지배하는 세상, 화폐의 필연적 진화
비트코인 채굴과 선순환 구조
비트코인 주소, 거래, 그리고 지갑
매개의 4가지 유형: 창조, 재창조, 복제 그리고 소비

 Posted by at 11:23 AM

행복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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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042014
 

어떤 사람이 영험하다는 스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 저는 사는게 너무 힘듭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스트레스로 인해
너무나도 불행 합니다. 제발 저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을 가르켜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제가 지금 정원을 가꿔야 하거든요. 그동안에 저가방 좀 가지고 계세요.” 라고 부탁을 합니다.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지요. 그는 행복의 비결을 말해주지 않고 가방을 들고 있으라는 부탁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정원 가꾸는 일이 급해서 일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30분쯤 지나자 어깨가 쑤쒀 옵니다. 하지만 스님은 도대체 일을 마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지요.

참다못한 이 사람이 스님께 물었습니다. “스님, 이 가방을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합니까? ”

이말에 스님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무거우면 내려놓지 뭐하러 지금까지 들고 계십니까? ”

바로 이순간 이 사람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신이 들고있는 것을 내려 놓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려 놓으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 지는데, 그 무거운 것들을 꼭 움켜잡고 가지고 있으려고 해서 힘들고 어려웠던 거지요.

우리는?
혹여 내가 내려 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요?
모두 내려 놓으세요. 그래야 행복이 바로 내옆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려놓고, 더 내려놓고 사는 여유롭고 행복한 나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Posted by at 12:32 PM

가장 신기한 일, 가장 이상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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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042014
 

“어린시절을 지루해하는 것,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어른이 되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위해서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그동안 번 돈을 다 써버리는 것”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Posted by at 12:31 PM

외국여성들이 보고 느낀 한국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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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042014
 

외국여성들이 보고 느낀 한국여자

●독일여자가 비난한 한국여자

*독일여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 골고루 관심을 넓혀 가는데 *한국여자들은 오로지 결혼, 명품, 성형, 연예인, 사생활, 화장 등 경제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
개인주의,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별로 없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만 사는 건 너무나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여자들은 도대체 왜 사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한국여자들은 내면은 빈 깡통인데, 외모만 가꾸고, 남자가 다 챙겨주길 바란다.
외모가 예쁠수록 자기는 높은 사람이라 여기고, 능력 있는 배우자와 결혼하기만을 바란다. 못생긴 여자도 성형하고 자신감 쩔어서 골빈 마냥 설치는 것들이 많다.독일여자들은 자립심이 강해서 남자한테 의존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한국여자들은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는 게 전무하다. 20~30대 한국여자들은 할 줄 아는 게 무엇인가?

●미국여자가 비난한 한국여자

한국여성은 성형에 눈이 멀어있다. 세계 유일하게 대출까지 하면서 성형하는 여자는 한국여자밖에 없을 것이다. 대출까지 하면서 성형을 고집하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서울거리의 한국여자들 얼굴을 볼 때면, 공장에서 찍어놓은 듯? 전부 다 똑같아 보인다.
한국여성은 돈이면 사죽을 못 쓴다. 돈에 굴복하며 Loser(루저) 인생을 살고 있다.미국 남자들한테는 한국여자가 Easy Girl로 소문나서 아주 쉽게 본다. 왜냐면, 돈만 주면 잘 굴러오고 잠자리도 손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모르고 한국여자는 외국남자 환상에 빠진다.)
세계 성형 1위에 매춘부까지 1위 한국여자 때문에 한국이 또 욕먹는 이유 중 하나…. 대출, 매춘까지 하면서 그런 돈으로 성형에 투자하는 한국여성의 인생은 너무 비참하다.

●스페인여자가 비난한 한국여자

한국 여대생들은 명품 가방에 환장한 여자들이다.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가?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 밤에는 술집 다니고, 낮에는 대학생인 척하는 한국여자들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정신 차려라. 현실은 시궁창인데, 겉치장에만 들어가는 돈은 그에 맞지 않게 지나치다.
명품 가방을 들고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 정도 되는 레벨인 줄 크게 착각한다. 명품 가방이라도 들고 다니지 않으면 무슨 패배감 같은 기분이라도 드는 걸까? 물론스페인여자들도 명품 가방을 좋아하지만, 한국여자처럼 심하지는 않다. 유행에 무조건 따라야 하고 남의 열등의식에 의존하며 사는 한국여자가 불쌍하다.

●우크라이나여자가 비난한 한국여자

한국여자 평균 키는 160 정도밖에 안 되면서 남자들 키는 180 이상이어야 한다고 우겨댄다. 세계 유일의 남자 키 따지는한심한 종족이 바로 한국여자들이다.
키 작은 한국여자는 발 아파하면서 높은 힐 신고 다니고 가슴 작으면 뽕까지 착용하면서 그러면서 한국 남자 깔창? 그거 하나 신으면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독 한국 여자만 자신의 키 + 하이힐 높이 = 자신의 키로 착각한다. 화장하는데 오만 걸 다 바르고선 그걸 자기 얼굴이라고 말한다. 가면을 쓴 꼴인데 말이다.진짜 한국여자 얼굴을 보고 있으면 화장을 덮어 놓았다. 우크라이나여자는 높은 힐, 화장에 대한 신경을 별로 쓰질 않는다.

●영국여자가 비난한 한국여자

한국여자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는 이유가 맛을 즐기기 위함이 아닌 내가 이런 곳에 다니면서 이런 커피를 즐기며 사는 여자임을 증명하고 자랑하기 위해서 비싼 돈을 주고 허세를 부리며, 한국말로 일명 된장 짓거리를 하며 커피를 마신다.
한국 여대생들은 왜 명품 가방만 들고 다니는가? (젊은 교수로 착각할 때도 종종 있음.) 책도 안 들어가는 명품 가방을 왜 굳이 선호하는 것인가? (멍청한데다 허영심만 가득함.) 한국여자는 더치페이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남녀 사이 더치페이를 최악이라 여김;;; 영국과 다른 나라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남자가 비용을 전부 지불 한다는 건 여성을 무시한다는 것으로 간주함.) 이건 한국여자가 비정상인거지다른 나라가 좋은 게 아니다. 더치페이 가지고 따지고 논의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일본여자가 비난한 한국여자

일본여자는 평소 애인이 어디 가자고 할 때, 대부분 따르거나 장소를 추천하는 편인데 한국여자는 다 싫다 하며 떼를 쓰고 짜증을 부린다. 남자가 사준 음식이 맛이 없더라도 오이시~ 오이시~ 하면서 맛있게 먹는 게 예의인데, 한국여자들은 계산도 안 하고 얻어 먹기만 해놓고 맛없으면 투정만 부린다.
일본여자들은 애인 사이에서도 더치페이가 일반화되어있다. 남자가 돈을 내는 것은 여자로서 자존심을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여자들은 너무 남자들한테만 뜯어 먹을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자들끼리 모이면 더치페이하고;;; 일본여자들은 내조 정신이 있어서남자한테 깍듯이 잘하려고 애를 쓰는 편인데, 한국여자들은 마치 자기가 신데렐라라도 되는 듯 떠받들려고만 하고 있다.
한국남자를 만나보면 세심한 배려와 매너가 무척 좋아서 감동을 많이 받았었는데, 그런 매너를 한국여자들은 고맙게 생각은 안 하고 당연한 듯 여긴다. 일본남자들은 대체로 무뚝뚝하고, 자기 위주다.한국남자만큼 친절하지는 않다.
한국여자는 한국남자가 정말 좋은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한국여자들이 부럽다.일본에서는 소형차에 대한 편견이 별로 없으며, 많이 애용하는 편이다. 그런데한국에서는 남자가 소형차를 타고 다니면 바보 취급을 하던데 이해 안 된다. 일본여자는 가방을 명품보단 패션을 더 선호하는데 한국여자 가방은 그냥 전부 명품들이다. 한국사람 전부 스마트폰이다.폴더폰을 쓰면 이상하게 본다.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국여자들은 키가 크고 성격이 급하다. 기가 너무 쎄다. 그래서 때론 무섭기도 하다.

●이스라엘여자가 비난한 한국여자

이스라엘여자들은 남자와 똑같이 군대 입대를 한다. 한국남자와 대화 중에 알게 되었는데, 한국 헌법에는 대한민국 사람은국방 의무가 있다 라고 명시되었다는데 한국 여성은 전혀 하는 것이 없음. 심지어독일 등의 타 국가의 여성들은 세금을 더 내고 있으나 한국여성들은 이마저 하고 있지 않음.
그러면서 그나마 있던 쥐꼬리만한 혜택인 군 가산점 폐지하자고 나선다는데 자기들이 군대 안 가니까 군대 가면 얼마나 고생하는 줄 전혀 모르는 듯하다. 화장 떡칠에, 향수 냄새 때문에 같이 밥 먹을 때 매우 불쾌하다. 대학생 답게 다니질 않고 가방을 보면 전부 명품이다. 그 가방엔 책도 안 들어간다. 그래서 아예 따로 들고 다닌다. 가방의 실용성은 무시하고 비싼 돈으로 산 명품 가방은 그저 허세에 불과했다. 지나친 다이어트에 삐쩍 마른 몸, 자기들은 날씬한 줄 안다.
한 대 때리면 부서질 것 같다. 돈 씀씀이가 완전 최악이다. 오로지 남자가 돈을 다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에 대한 관념이 개판이라서 어딜 가서 당당하지도 못하다. 경제력 없다고 티를 내는 줄도 모르고 쪽팔린 줄도 모른다.

●한국여자가 보는 한국여자

여자들에게 불리한 차별과 폐습이 횡행한 대한민국 땅에서 견디고버티고 싸우며 본인들의 입지를 다졌다. 세계 어느 나라 여자들보다 따뜻하고 인정 많다.
길거리에서 예쁘거나 스타일 좋은 여자는 자주 보지만 멋진 남자는 보기 드물다.중고등학교 다닐 때 전교 상위권 늘 여자가 더 많았다. 각종 고시와 시험에서 여자들의 합격률이 50%를 넘어가는 것은 물론 수석, 차석도 여자가 휩쓴다.
학교 선생님들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 “지금이야 정 재계 힘쓰시는 분들 다 남자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여자들이 치고 올라갈 거 불 보듯 뻔하다. 남학생들 지금 옆자리 앉아있는 여학생들한테 잘해라.”
안 들어본 사람 없잖아? 대출? 가끔 외모라는 능력에 과하게 투자하는 여자들 얘긴 들었으나 나는 살면서 그렇게까지 하려는 애들 못 봤다. 명품 가방? 우리 대학엔 백팩(뒤로 매는 가방) 맨 여자애들밖에 안 보이던데. 한국여자 깔려면 미국 일본은 좀 빼지 그랬냐!! (사진 8장)

 Posted by at 12:30 PM

남편 빨리 죽이는 방법 10가지!

 유머  Comments Off on 남편 빨리 죽이는 방법 10가지!
Apr 042014
 

남편 빨리 죽이는 방법 10가지!

첫번째
술먹고 들어온 남편 밉지만,
아침에 출근하기전 출근할옷 다려놓고 사랑의 도시락과 정성들여 해장국과 밥상을 차려 놓는 거예요
일어나면 깜짝놀라서 심장마비로 죽을수도 있어요

두번째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오면
오늘 수고했다고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목욕을 시켜주는거예요
뜨거운 물 때문에 열받아 죽을수도 있어요

세번째
평소에 안하던짓을 계속하는 거예요
잔소리 대신 칭찬과 사랑의 말로요
왜 이렇게 변했냐? 고 물어보면 답을 안하고 웃음으로 대답해 주는 거예요
아마 궁금해서 죽을지도 몰라요

네번째
현모양처가 되는거예요
아이들 한테 친절하고
상냥한 엄마로,
남편에게 이해심 많은 사랑스런 아내로,
남편은 비위가 약해서 죽을지도 몰라요

다섯번째
맛있는 요리를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같이 맛있는 요리를 해 주는 거예요
언젠가는 맛있다며 너무 많이 먹어서
배터져 죽을지도 몰라요

여섯번째
호칭을 자기야로 바꾸고
자기야 밥 먹었어, 자기야 술조금만 먹고 일찍 들어와 , 자기야 수고했어,
자기야 고마워, 자기야 사랑해 하며
애교섞인 목소리로 말하는거예요
그럼 닭살 돋아서 낯 간지러워
죽을지도 몰라요

일곱번째
퇴근하고 들어오면 이쁘게 단장하고
야시시한 옷입고 기다리는 거예요
밤에~ 황홀해서 죽을지도 몰라요

여덟번째
왕처럼 떠받들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존경해 주는 거예요
역대 왕들은 오래 못 살았으니
일찍 죽을지도 몰라요

아홉번째
남편 몰래 생활비 아껴서
적금들어 놨다가 자금때문에
힘들어 할때 보탬이 되는거예요
아마 감동받아 죽을지도 몰라요

열번째
이렇게 남편에게 정성들이고,
사랑하고, 비위 다 맞혀주고,
행복하게 해주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줄 알고
불안해서 죽을지도 몰라요
.
.
.
.
.
.
.
아내들이여
이런방법으로 남편들을
죽여보세요~ ~ ~

걸핏하면 “~해서 죽겠다”는 소리를 달고 사는 우리들을 비꼰 말입니다.

 Posted by at 12:28 PM

나는 어떤 사람인가?

 교육, 스크랩  Comments Off on 나는 어떤 사람인가?
Apr 042014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언어가 거친 사람은
분노를 안고 있는 사람입니다.

부정적인 언어습관을 가진 사람은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과장되게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궁핍하기 때문입니다.

자랑을 늘어놓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안정감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비판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비통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헐뜯는 사람은
그 마음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않고
자기말만 하려는 사람은
그 마음이 조급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항상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부드럽게 말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담대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많은 사람이
위로의 말을 내어줍니다.

겸손한 사람이
과장하지 않고 사실을 말합니다.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이 말하기에 앞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습니다.

소통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입니다.

나는 어떤사람인가?

 Posted by at 12:26 PM

왜 미국은 인터넷 관리를 포기했을까

 IT  Comments Off on 왜 미국은 인터넷 관리를 포기했을까
Apr 042014
 

그 동안 인터넷은 미국의 소유였다. 미국 국방부에서 시작된 인터넷은 전 세계인이 사용하고 누구나 개발 가능한 만인의 인터넷이 되었지만, 인터넷 주소(IP주소와 도메인)를 관리하는 핵심 기능은 아직까지 막후에서 미국 정부가 조종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갑자기 이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인터넷 주소를 독점적으로 관리하던 권한은 미국이 인터넷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 포기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번 결정의 표면적 이유는 인터넷의 자유와 개방을 촉진하기 위해서라고 미 상원의원인 록펠러 (Rockefeller)는 말한다.

인터넷주소기구인 ICANN 의장은 인터넷 주소를 관리하는 기능을 국제 기구에 넘기기 위해 미국 정부는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들이 인터넷의 자유를 위해 그들의 권한을 포기했다고 보기에는 그 동안 미국 정부가 이 권한을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ICANN은 미국이 만든 편법 단체

미국 상무부 산하 국가통신정보청(NTIA)은 내년 9월 30일로 계약이 만료되는 ICANN과 계약 연장하지 않고 IP주소와 도메인에 대한 정책을 관리하는 권한을 국제 단체에 넘기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미 상무부는 과거 인터넷 도메인과 주소 정책을 직접 관리하고 있었는데 국제 사회에서 그 권한을 국제 단체로 넘길 것을 요구하자 1998년 6월 ‘인터넷 주소 운영에 관한 백서’를 통해 ICANN을 만들었다.

국제 단체로 명목상 국제적 합의를 통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 상무부와 계약을 해 위임 받은 권한을 행사하며, 미 상무부에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미 정부 아래서 운영되고 있다. 미국이 이런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IP 주소와 도메인 등의 관한 정책을 주도하고 싶었던 것은 그 만큼 이 기능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인터넷 전반에 대한 정책을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인터넷을 영향력 아래 두고 싶어했다

역사적으로 미국 정부가 인터넷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IP주소와 도메인 정책 관리 권한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존 포스텔’ 사건이 있다. 존 포스텔은 초기 인터넷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과학자로 도메인 기술을 개발했다.

미국 정부가 지원하는 IANA에 근무하며 도메인과 IP 정책을 그가 대부분 설계하고 관리했다. 하지만, 인터넷의 중요성이 커지자 미국 정부는 자신들의 비용으로 인터넷이 연구 개발 되었다는 명분으로 도메인과 IP 정책에 대한 권한을 그에게서 빼앗아 가져가 버렸다.

이에 존 포스텔은 TCP/IP를 개발해 인터넷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있는 빈트서프 (Vinton Gray Cerf) 등 초기 인터넷 과학자들을 모아 1992년에 ‘인터넷 소사이어티’라는 인터넷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범세계적인 민간 단체를 만들려고 했다.

지금 미 정부가 결정한 것처럼 존 포스텔은 IP주소와 DNS 같은 중요 정책 결정은 미 정부와 독립된 국제적 단체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터넷 소사이어티는 IP주소와 도메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전세계 주요 상표권자들과 협력하기로 하였으며 미국 대형 통신사인 MCI와 대형 IT 기업인 디지털이큅먼트 등과도 협력을 해 미국 정부로부터 인터넷을 독립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인터넷 소사이어티의 활동과 그들의 협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항의해 존 포스텔은 자신의 컴퓨터를 전 세계 인터넷의 루트 서버로 바꾸는 도발을 감행했다. 미국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존 포스텔을 압박했고, 이에 위기를 느낀 그는 루트 서버를 다시 미국 정부로 돌려 놓았다.

하지만 이때 미 정부로 받은 협박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시달리다 9 개월 후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존 포스텔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주요 인터넷 정책은 자신들이 결정할 것을 공식 선언하며 법으로 명문화했다.

■ICANN을 통해 비판을 피해 가려고 했다

하지만, 세계는 더 이상 미국만의 인터넷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제사회가 IP주소와 도메인 관리 권한을 국제 단체에 넘기라고 요구하자 ICANN을 만들어서 이 요구를 피해 가려고 했다. 국제사회는 미 상무부와 계약을 통해 생긴 ICANN을 진정한 국제 기구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는 ICANN은 미국 상무부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비비안레딩’ EC 정보기술집행위원장은 ICANN와 미국 상무부 간 운영 협력 계약이 만료되면 양측이 더 이상 접촉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중국은 한발 더 나아가 도발을 감행하며 미국을 압박했다. 중국은 이미 인터넷 세상에서 무시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세계 1위 검색 사이트는 구글이지만 2위 자리를 높고 야후와 중국 검색 사이트인 ‘바이두’가 경쟁을 할 정도로 중국은 성장했다.

이미 인터넷 이용자수는 중국이 미국을 앞질렀다. 2006년 3월 중국은 com, net 등을 자신들의 언어로 호환 연결시키는 도발을 감행하며 미 정부와 ICANN에 정면 도전했다.

■미국은 자유를 핑계로 거부했다
미국은 ‘인터넷 자유’라는 명분을 통해 이런 요구사항을 그 동안 교묘하게 벗어 나려고 했다. 각 국가들이 이 문제를 이슈화 하며 미 정부와 논의하자고 하면 인터넷 자유를 내세워 정부와 논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인터넷 자유와 검열 등을 교묘하게 인터넷 주소 문제와 연결 시켰다. 하지만, 불평등한 세상에서 자유를 이야기 하는 것은 불평등한 세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기득권을 가진 쪽에서 흔히 내세우는 고도의 전략이다. 자유는 사회적 약자인 개인이 강자로부터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을 자유이지 강국이 다른 국제 단체의 간섭을 받지 않을 자유는 아니다.

미국이 절대 내려 놓지 않을 거 같던 기득권을 갑자기 내려 놓겠다고 결정을 한 이유는 스노든 폭로 이후 국제사회에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 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하지만, 아무리 국제 사회에 압력이 강했다고 해도 그들이 인터넷 주도권을 유지 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경우 절대 포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IP주소와 도메인 정책에 대한 권한을 포기해도 인터넷에 대한 주도권을 잃지 않으며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번 결정을 가능하게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미국 인터넷 기업이 ICANN 포기를 가능케 했다

국제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복잡한 정책들을 독점적으로 행사하기는 어려워지고 있지만 미국 기업들의 경쟁력은 ICANN을 만들던 1998년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졌으며 이들의 영향력은 우리 삶 깊은 곳까지 침투해 있다.

스마트폰 운영체제와 검색은 구글, PC 운영체제와 업무용 프로그램은 마이크로소프트, 데이터베이스는 오라클, PC와 서버 제조는 HP와 델, 정보기술 컨설팅은 IBM, 네트워크는 시스코, 저장 기술은 EMC와 웨스턴디지털, 모바일은 애플 등 IT에 핵심 기술은 모두 미국 기업들이 독식하고 있다.

민간 기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인터넷 주도권을 유지 할 수 있기에 상대적으로 정책 부분이 유연해진 것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전 세계 주요 정부, 기업, 개인들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으며 이 정보를 구글을 통해 분석을 하고 있어 겉으로는 미국이 인터넷 패권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실로는 인터넷과 인터넷 이용자들의 대한 지배력을 넓혀 나가고 있다.

필요할 경우 미 정부는 은밀하게 자국 기업에게 협조를 요청하면 된다. 스노든이 폭로하고 비즈니스인사이더가 기사화 한 것처럼 페이스북, 구글, 야후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인터넷 기업은 미국 정보 기관이 쓸 수 있는 별도의 방법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 정부는 아이디, 이메일 주소, 계정을 만든 날짜와 시간, 최근 2~3일간 로그인 내용, 이용자 휴대폰번호, 이용자 연락처 정보, 미니피드, 글을 업데이트한 이력, 공유 또는 공지한 글, 게재한 글, 친구목록, 그룹목록, 과거 또는 앞으로 개최할 이벤트, 동영상과 사진,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메시지, 접속한 컴퓨터 위치정보 등을 제공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이미 미국은 인터넷을 통한 도감청 수준이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는 것도 이번 결정을 한 큰 원인으로 뽑을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흐르는 정보를 모니터링 할 수 있는 것도 미국이 ICANN 없이도 주도권을 유지 할 수 있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유타주 북동부의 블러프데일은 인구 만명 미만의 산골이다. 여기에 미국은 20억원 (2조 2000 억원)을 들여 유타 데이터 센터 (UDC)라는 이름의 데이터센터를 건설했다. 각종 위성과 해저 케이블 등을 통해 미국에 들어오는 인터넷 정보와 통신 기록 등 모든 디지털 정보를 저장한다. 전문학적인 데이터 저장 능력을 가지고 있어 전 세계 모든 데이터를 100년 동안 저장 할 수 있다.

가디언 기사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은 환대서양 통신 케이블을 해킹해 전세계 이메일, 인터넷 사용기록, 전화통화 등을 도청하고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MVR(Massive Volume Reduction)이라는 고성능 필터를 이용해 일반적인 내용은 버리고 특정 주제, 특정 인물에 관련 된 내용만 집중 분석하는 기술도 가지고 있다.

오래 시간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이 미국 정부로부터 독립 해 진정으로 자유로운 공간이 될 수 있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미국이 인터넷을 자유롭게 해 준 것은 역설적으로 인터넷이 더 이상 자유 공간일 수 없다는 것을 확인 시켜 주는 일이 되었다.

 Posted by at 12:25 PM

당신의 진로는?

 유머  Comments Off on 당신의 진로는?
Apr 042014
 

아버지와 고3 아들이 마주 앉아 학교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들아 너는 앞으로 진로를 어떻게 생각하니? ”

그러자 아들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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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거 ‘참이슬’로 바뀐지 오래 됐어요!! “

 Posted by at 12:23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