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042011
 

‘장하준 열풍’이 계속 진행 중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경제학)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23가지>)는 두 달 만에 26만 부가 팔렸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상반기 안에 50만 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될 전망이다.

장하준 열풍은 한국뿐만이 아니다. 지난 8월 영국에서 처음 책이 나오고 나서 4개월 동안 독일, 한국, 네덜란드에서 출간된 데 이어서 2010년 연말에는 일본에서 책이 나왔다. 1월 초에는 미국에서 책이 나올 예정이고 중국, 타이, 타이완, 러시아, 루마니아, 터키 등에서 번역·출간이 준비 중이다.

장하준 교수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책을 통해서 제기된 몇 가지 쟁점을 놓고 자신의 견해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특히 장 교수는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쟁점 중 하나인 삼성과 같은 재벌을 통제하는 방안을 놓고 ‘주주 자본주의’를 내세우는 일부 시민단체의 대응을 강하게 비판하며 다른 관점의 대응을 주문했다.

장하준 교수는 삼성 문제를 놓고서 “아이디어 차원”이라고 전제한 뒤 “이 씨 일가가 그렇게 경영권 세습을 원한다면 그것을 들어주는 대신에 노동조합 허용, 정부·노동조합·시민단체 등의 이사회 참여, 일정 기간(10년)이 지난 후 경영 성과 평가 등을 요구하는 것 등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장하준 교수는 “삼성이 마음에 안 들면 차라리 ‘국유화’를 하자고 요구해야지 왜 그 뒤에 마약 밀매 조직이 있는지, 아프리카 독재자가 있는지 모를 외국 투기 자본에게 넘길 위험을 감수하느냐”며 “삼성을 사회가 통제하면서 장기적으로 국민 경제에 득이 되는 기업으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하준 교수는 이밖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개발 독재는 경제 성장을 위해서 불가피했나’ ‘중앙은행 독립이 맞는가’ ‘관치 금융은 악인가’ ‘주주 자본주의는 왜 문제인가’ ‘경제 성장은 지속 가능한가’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나’ 등의 쟁점을 놓고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장하준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12월 26일 저녁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호텔에서 약 두 시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장 교수와의 인터뷰를 한국 사회의 현안과 책을 둘러싼 쟁점으로 나눠서 두 차례 싣는다. 이 인터뷰에는 <프레시안>이 <23가지>를 읽은 독자로부터 받은 스물세 가지 질문이 포함돼 있다.

(☞관련 기사 : [장하준 인터뷰·상] “주가 2000? 갈 곳 없는 ‘투기 자본’의 작품이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장하준 열풍’, 그 이유는 무엇인가?

프레시안 : <23가지> 얘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 <23가지>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나?

장하준 :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2007년에 펴낸 <나쁜 사마리아인들>도 2008년에 국방부가 불온서적으로 지정해서 많이 팔렸다. 그런데 <23가지>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한창 팔릴 때와 비교하면 7~8배 정도 빨리 팔린다고 한다. 출판사도 당황한 상태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프레시안 : <23가지>가 2010년 연초에 나왔더라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제치고 2010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기를 얻는 이유를 따져본다면?

장하준 : 2007년에 펴낸 <나쁜 사마리아인들>도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둔 것이기는 하지만, <23가지>는 기획 단계부터 그 책보다 더 많은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신경을 썼었다. 예를 들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주로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 문제를 염두에 둔 책이지만, 이 책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독자들 모두가 관심이 있는 훨씬 더 많은 주제를 다뤘다.

또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한 장이 몇 십 쪽인데 <23가지>는 스무 쪽이 넘지 않도록 했다. 글쓰기 스타일도 훨씬 더 대중을 염두에 두고 쉽게 쓰려고 노력했었고.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런 폭발적인 반응이 설명이 안 된다. 내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큰 인기를 끌었던 것까지 염두에 두면 대강 이유가 짐작이 된다.

한국의 독자들이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한국 사회가 가는 방향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는 듯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이어서 이명박 정부까지 적극적으로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 나타난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 이런 생각이 확산된 것이다. 그걸 대신할 새로운 것에 대한 갈구가 이런 반응의 이유가 아닐까?

프레시안 : <23가지>는 2008년 금융 위기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장하준 : 그렇다. 이 책이 나오게 된 사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2008년 금융 위기가 진행되자 영국에 있는 에이전트(아이반 멀케히)가 새로운 책의 집필을 제안했다. ‘그간 당신이 언급했던 금융 중심의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모순이 폭발한 게 바로 금융 위기니까, 이것을 주제로 책을 한 권 쓰자’ 이런 제안이었다.

그러나 금융 위기만을 놓고 책을 쓰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금융 자본주의의 폐해를 많이 얘기하기는 했지만 금융을 전공한 것도 아닐뿐더러, 내가 책을 쓴다 한들 이미 2009년, 2010년이 되면 금융 위기를 소재로 한 책이 수백 권은 나올 것 같았다. 고민을 하다가 아예 이런 금융 위기를 낳은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게 필요할 듯했다.

프레시안 : 그래서 등장한 책이 <23가지>다. 책 제목을 둘러싼 사연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많다. ’23가지’ 자체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장하준 교수와 편집자 사이의 대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고 들었다.

장하준 : 의미 없는 숫자다. (웃음) 일단 신자유주의 즉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구체적인 상이 잡히지 않았다. 그 때 미국 블룸즈버리 출판사의 편집자(피터 기네이)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이라는 제목을 제시했다. 이거다 싶었다.

처음에는 ’20가지’가 나왔는데 식상하고 밋밋했다. ’25가지’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제목을 놓고 계속 얘기를 하다가 식상하지 않고 눈에 띄는 숫자인 ’23가지’로 결정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결과적으로 제목의 ’23가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면 이런 의도가 성공한 듯하다.

프레시안 : 애초에 책에서 다뤄보려고 쭉 나열했던 주제들이 많을 텐데, 23가지를 선택하면서 누락한 게 있나? 마지막까지 망설인 항목이 있다면?

장하준 : 글쎄…. 넣을까 하다가 뺀 것은 없다. 개별 주제를 다루지 못한 것도 관련 주제가 있으면 내용으로라도 다 집어넣었다. 다만 다른 책에서 자세히 다뤘기 때문에 굳이 안 다룬 것도 있다. 가량 문화와 경제 발전의 관계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다뤘지만 다른 각도에서 한 번 더 다뤄볼까 했는데, 아주 핵심적인 얘기는 아니니까 최종적으로는 뺐다.

이런 얘기다. 서양 사람들은 “아시아적 가치는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말을 종종 하는데…. 자기네는 언제 민주주의를 했었나? 미국은 1960년대까지 흑인들이 투표를 할 수 없는 주가 많았다. 오늘날 선진국 중의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스위스도 1971년이 되어서야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했으니까. 결국 이런 내용은 책에서 빠졌다.

‘정치’와 분리된 ‘경제’는 없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23가지> 전체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얘기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장하준 :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것처럼, 23가지 다 하고 싶은 얘기였다. (웃음) 굳이 하나만 고르자면 맨 앞에 나오는 Thing 1(‘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이다. 많은 이들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얘기를 하는데,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바로 시장이 정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정치 논리, 경제 논리를 분리해서 얘기하려는 사람들은 경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막으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사람이다. 정치가 곧 경제고, 경제가 곧 정치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아는 게 중요하다. <23가지> 전체를 꿰뚫는 핵심 주장을 한 번 더 강조하자. 정치와 분리된 ‘자유’ 시장은 없다!

프레시안 : 그런 주장은 일반적인 경제학의 상식과 어긋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장하준 교수가 경제에 도덕과 같은 가치를 들이민다고 비판한다.

장하준 : 그런 상식을 깨는 게 이 책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많은 주류 경제학자는 ‘경제학은 가치중립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경제학의 뿌리가 바로 도덕철학이다.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평생 두 권의 책을 썼는데, 그 중 하나가 <국부론>(1776년)이고 그보다 앞서 펴낸 책이 <도덕감정론>(1959년)이다.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만으로는 한 사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았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어떤가? 그 역시 경제를 분석할 때 행위자를 ‘개인’이 아닌 ‘집단’ 즉 계급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지주’ ‘자본가’ ‘노동자’ 등의 단어가 많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도 경제가 곧 정치의 산물이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이처럼 경제학은 처음부터 도덕, 정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경제학의 초기 이름도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 아니었나? 이랬던 경제학에서 가치를 배제해야 한다면서 등장한 것이 오늘의 주류 경제학이다. 그러나 정작 가치 판단을 배제한다는 그 주류 경제학이야말로 특정한 가치로 무장했다.

‘개인은 사회와 관계가 없는 원자로 존재한다’, ‘개인은 이기심만으로 움직인다’ 등 오늘날 주류 경제학의 전제가 되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가치 판단 아닌가? 세상이 개인의 이기심만으로 움직인다면 왜 우리말에 ‘사랑’ ‘믿음’ ‘연대’와 같은 단어가 있겠나. ‘이기심’과 같은 단어로만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의도가 주류 경제학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자신의 가치를 감추면서 ‘주류 경제학은 가치중립적’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게 더 위험하다. 주류 경제학이 전제하고 있는 여러 가지 가치들을 은폐하니까. 나는 <23가지>를 통해서 바로 이런 주류 경제학이 은폐한 진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프레시안 : 주류 경제학과 다르게 장하준 교수가 옹호하는 경제학이 전제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장하준 :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일부 시장주의 비판자와는 다르게 ‘성장’이나 ‘물질적 부’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그런데 그 뿐만은 아니다.

가령 ‘사회 통합’도 경제학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다. 남아메리카 국가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사이의 소득 불평등이 상상을 초월한다. 사회 통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한 나라의 부가 늘어나는 데만 초점을 맞출 뿐, 이런 소득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 갈등 같은 것은 도외시한다.

또 ‘노동 시간’도 중요하다.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노동 시간은 세계 최장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많이 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할 때다. 이렇게 경제학이 경제 현상을 설명하면서 고려해야 할 여러 가지 가치가 있다. 특별히 한 가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것을 다 염두에 두고 경제 현상을 설명하고 경제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정부 개입=개발 독재? 아니다!

프레시안 : 이제 본격적으로 <23가지>를 비롯한 장하준 교수의 주장을 둘러싼 쟁점을 살펴보자. 장하준 교수는 경제에 있어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런 주장을 놓고 어떤 이들은 ‘과거 한국의 개발 독재는 불가피했다’ 이렇게 읽는 이들이 있다. 한국의 개발 독재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장하준 : 한국의 개발 독재 과정을 보면, 정부가 강압적 수단을 써서 노동과 자본을 동시에 탄압하면서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 과정에서 비민주적인 일도 많이 했다. 특히 힘없는 농민, 노동자들이 겪었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다. 그런 점에서 개발 독재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제대로 평가를 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첫째, 우선 한국 개발 독재의 특이한 점은 그 기간 동안에 자본가도 적지 않은 통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투자를 하는지조차 일일이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니까. 이것은 남아메리카 나라들과 같은 다른 개발도상국과 비교하면 확실히 다른 부분이다.

남아메리카 부자들은 외국에 집을 몇 채씩 가지고 있으며 외국에서 돈을 물 쓰듯 썼었다. 그런데 한국의 부자들은 외국 여행도 마음 놓고 못하지 않았나? 심지어 양담배를 피워도 잡아갔다. (물론 숨어서 호의호식하는 이들도 많았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부자, 자본가까지 다잡아서 모은 돈을 경제 발전에 집중 투입했으니까.

둘째, 이런 개발 독재를 통해서 이룬 경제 성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1980년대 말에 노동자의 힘이 사회 전체적으로 강화되는데, 그 조건 중 하나가 바로 경제 성장이었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일어나자 노동자의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

경제 성장을 해서 소득이 늘어나는 게 단순히 집에 TV, 세탁기 들여 놓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덜 힘든 일을 하고, 노동 시간이 줄고, 더 따뜻한 집에서 잘 먹고, 병원을 더 자주 가는 등 삶의 질이 과거와 비교했을 때 획기적으로 향상된 것이다. 제일 좋은 예가 평균수명이다.

내가 1963년생인데,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의 평균수명이 53세였다. 2010년에 대지진이 있었던 아이티의 평균수명이 54세였다. 50년 전에 아이티보다 더 못했던 나라가 지금처럼 성장한 것을 가지고, ‘한국의 경제 성장 별 것 없었어!’ 이런 식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개발 독재 과정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그래 ‘위대한 박정희의 독재가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성공했어?’ 이건 아니다. 그 경험을 이런 영웅사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런 발전을 위해서 ‘박정희’가 꼭 필요했었던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18년 동안 권력을 쥐어서 그런 경제 성장이 된 게 아니다. 그건 명백히 잘못된 일이었다.

다만 그 때 한국의 상황에서 자본과 노동을 동시에 통제하는 방식이 빠른 경제 성장의 조건이었다. 바로 이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경제적 독재/정치적 독재의 효과를 나눠서 살피면 유용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경제적 통제가 정치적 자유의 조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에 한국의 군부가 개발 독재를 하고 있을 때, 그와 유사한 산업 정책을 하는 나라들이 많았다.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프랑스, 핀란드 등. 이런 나라들이 독재 국가인가? 모두 발달한 민주주의 국가들인데도 한국의 개발 독재와 유사한 정부 개입을 하면서 경제 성장을 꾀했다. ‘정부 개입=개발 독재=反민주주의’ 이런 인식을 버리는 게 중요하다.

관치 금융이 왜 문제인가?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군부 독재의 경험 탓인지, 요즘에도 경제적 통제에 대해서 반감이 크다. 한국에서는 우파보다도 넓게 보면 좌파로 묶일 법한 이들이 중앙은행 독립, 관치 금융 청산, 주주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장하준 : 방금 얘기했듯이 군부 독재가 경제 성장을 추동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많았다. 그런 부작용을 염두에 두고, 정부 개입에 무조건 알레르기를 일으키다 보니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경제 정책을 놓고 오히려 좌파가 나서서 비판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제는 ‘정부 개입=개발 독재=反민주주의’ 이런 인식을 버릴 때가 되었다.

이제는 한국도 국민이 민주주의에 의해서 정부를 통제하지 않는가? 이런 상황에서 국민이 선출한 민주 정부가 경제를 통제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 소수의 경제 관료, 경제학자 등이 중앙은행을 좌지우지하는 게 민주주의 원칙에 맞는가? 아니면 국민이 선출한 정부가 통제하는 게 맞는가?

관치 금융 논란도 그렇다. 나는 자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니까. (웃음) 민주적으로 통제만 된다면 관치 금융이 맞다. 군부 독재 때야 민주적으로 통제를 받지 않는 몇몇 관리들이 제멋대로 은행을 좌지우지해서 문제였지만, 민주 정부가 은행을 통제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 그게 바로 민주주의 아닌가?

자꾸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런 말을 되뇐다. “정치 논리를 배제하자!” 그 속내는 바로 이거다. “우리 마음대로 할 테니, 너희들은 입 닥치고 있어!” 사실상 그들이 국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시장 독재’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제 이런 진실을 명확히 봐야 할 때다.

주주 자본주의는 사회운동의 무덤

프레시안 : <쾌도난마 한국 경제>부터 <23가지>까지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매섭다. 한국에서는 시민단체가 소액 주주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주주 자본주의를 추동했다. 주주 자본주의를 이용해 오너-경영자의 전횡을 견제하자는 발상이다.

장하준 :재벌들이 지금 수세에 몰린 것은 자업자득의 측면이 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어떻게 국가의 굴레에서 벗어나 볼까 고민하다가 당시 전국경제인연합 회장이었던 고(故) SK(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이 미국에서 신자유주의 논리를 들여와서 강연 등을 통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주주 자본주의다.

회사라는 게 주주의 것인데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논리다. 그 때 일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너희 말 그대로 따라서 그 논리에 충실해 보자. 재벌 총수가 지배 주주냐? 겨우 5% 정도 가지고 황제 경영을 하는데 이게 맞느냐” 이렇게 반박하면서 소액 주주 운동을 전개했다. 처음에 호되게 당한 게 아이러니하게도 최종현 회장의 아들 최태원 씨다.

그렇다면, 이런 주주 자본주의의 발상은 맞는가? 기업이 법적으로는 주주의 것이라고 회사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사실은 주주만의 것이 아니라 노동자, 납품 업체, 지역 공동체 등 모두의 것이다. 바로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이익을 다 무시하고 주주만 보호하겠다는 발상을 사회운동이 옹호하는 게 맞는가?

주주는 주식을 쉽게 팔고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참을성이 없다. 노동자, 납품 업체, 지역 공동체 등과 같은 다른 이해 당사자(stakeholder)는 그에 비해 유동성이 낮다. 주주가 자신의 이익만 내세우면 노동자를 해고하고, 납품 단가를 후려치고, 지역 공동체에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게 낫다.

주주 자본주의 하에서는 주주와 재벌들이 짝짜꿍을 해서 노동자, 소비자 또 다른 이해 당사자를 착취한다. 재벌들과 주주들 간의 싸움은 누가 많이 먹느냐는 것인데, 그 둘 사이에 보통 노동자, 소비자 등을 벗겨 먹어야 한다는 합의가 있다. 지금 노동자, 소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들이 몇몇 재벌을 망신 준 것으로 뿌듯해 하지만 결국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다.

삼성을 외국 자본에 넘길 것인가?

프레시안 : 몇몇 시민단체가 소액 주주의 권리를 내세우며 주주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나선 게 시민들의 호응을 받은 것은 한국 사회에서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의 전횡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재벌에 그나마 망신이라도 줄 수 있었던 게 바로 주주 자본주의 운동(?)이었다.

개발 독재 과정에서 등장한 재벌의 폐해를 어떻게 생각하나?

장하준 : 경제 성장을 대기업 중심으로 할 필요가 있었느냐 이런 비판이 많다. 또 그 근거로 중소기업 중심으로 경제 성장을 발전시켰다는 타이완이 거론된다. 그런데 사실 타이완도 대기업이 많았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국영 기업이다. 민간 기업만 통계에 넣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많은 것 같지만 공기업까지 포함하면 대만도 중소기업만 있는 나라는 아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 성장에서 대기업이 갖는 장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지금의 재벌 체제가 장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점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그 단점을 어떻게 규제하느냐가 아닐까? 대기업 중심의 경제 체질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위권 재벌의 주력 기업이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따라서 국민 경제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미국처럼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나라에서도 (망하더라도 정부 개입은 없다고 하더니) 결국은 GM을 국유화해버리지 않았나? 그러니 우리도 이제는 재벌을 사회적으로 통제할 방법을 찾아야 할 때다.

프레시안 : 듣고 보면, 장하준 교수의 주장은 재벌을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 납품 업체, 지역 공동체 등 많은 이해 당사자의 의사가 관철되는 일종의 ‘사회 기업’으로 재탄생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한국의 시장 권력을 상징하는 삼성을 어떻게 할까? 최근에는 불법적인 3세 세습이 문제가 되었다.

장하준 : (단호하게) 삼성은 일단 노동조합부터 인정해야 한다. 그런 기본적인 것부터 안 하면서 몇 천억 원 사회에 헌납한다고 자신에 대한 여론이 바뀌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 인정과 같은 가장 하기 쉬운 일을 해서, 일단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다. 그것조차 안 하면서….

방금, 삼성과 같은 재벌을 사회적으로 통제할 방법을 찾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현실에서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이디어 차원에서 한 가지 제안을 했었다. 세습 물론 나쁘다. 그런데 그렇게 기어이 아들딸한테 물려주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주고 대신 받을 걸 받자, 이런 아이디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요구가 가능할 것이다. 경영권 세습을 용인할 테니 노동조합을 인정하라. 또 비리 사학 재단 임시이사를 정부가 임명하는 것처럼 이사회의 40% 정도를 정부,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에 할당해 사회의 감시를 받아라. 그리고 이런 체제 속에서 10년 후에 그 경영권 세습의 결과를 평가하자.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삼성이라는 기업을 어떻게 하면 사회가 통제하면서 장기적으로 국민 경제에 득이 되는 기업으로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삼성의 경영권 세습이 못마땅하다고 주주 자본주의 식으로 접근하면, 결국 삼성은 국제 금융 자본의 소유물이 된다. 그 금융 자본 뒤에 무슨 자본이 숨어 있을까?

지금이야 우리는 이 씨家, 정 씨家의 이름도 알고, 얼굴도 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압력을 넣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 펀드’ 뒤에 마약 밀매 조직이 숨어 있는지, 아프리카의 독재자가 숨어 있는지 알게 뭔가? 그러면 삼성을 통제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이게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인가?

수십 년간 온 국민이 나쁜 물건 써가며, 아버지 삼촌 형 오빠가 노동조합도 못 만들고 피땀 흘려서 일군 기업을 왜 외국 금융 자본한테 내주냐는 말이다. 사실 그 금융 자본도 거슬러 올라가면 삼성과 비교할 수 없이 온갖 악행을 저질렀는데…. 예를 들어, HSBC는 아편 무역으로 성장했다.

차라리 그렇게 삼성이 못 마땅하면 주주 자본주의 이런 얘기를 할 게 아니라 국유화를 주장하자. 그게 차라리 일관성이 있다.

ⓒ프레시안(손문상)

아프리카에서 용 날 수 있다

프레시안 : <23가지>에서도 강조했듯이, 장하준 교수는 개발도상국의 성공적인 경제 성장 전략으로 ①정부가 주도해서 ②특정 산업을 잘 선택하고 ③금융을 적절히 통제하고 ④보호 무역을 통하는 방법을 권한다. 그런데 지금처럼 WTO(세계무역기구)가 상징하듯이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쓰는 상황에서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저개발국에서 이런 방법이 가능할까?

다시 말하자면, 한국, 싱가포르, 타이완, 홍콩과 같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등에서 또 등장할 수 있을까?

장하준 : 1955년쯤에 누가 ‘한국이 앞으로 50년쯤 후에는 세계 전자 산업을 주도할 거야’ 이렇게 예측했다면 모두 다 웃었을 것이다. (웃음) 이처럼 장기적으로 어떤 나라가 세계 경제를 주도할지 전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실 방금 지적한 게 다 맞다. WTO 체제에서 후진국이 산업 정책, 보호 무역을 하는 게 훨씬 어렵다.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구조 조정 프로그램을 통해서 각국의 경제 정책을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에 맞춰 뜯어고치기도 했고. 그래서 전 세계의 많은 개발도상국이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고 개발도상국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 성장을 꾀하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상황이 좋았던 게 사실이지만 사실 한국은 미국, 세계은행 등의 말을 안 들었다. 1950년대 말 미국이 은행을 다 민영화하라고 했었는데, 박정희 정부는 반대로 국유화했다. 박정희 정부가 포항제철 짓는 걸 세계은행부터 나서서 말렸는데 결국 그것도 지었다. 그 때 그걸 주저했으면 지금의 철강 산업이 있었을까?

냉전, 보호 무역 등 경제 성장에 유리한 조건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 필요했는데, 한국은 그걸 해낸 것이다. 내가 여러 개발도상국을 돌아다녀 보면, 항상 잘 안 되는 나라가 남의 탓을 많이 한다. (웃음) 세계 조건이 어렵긴 하지만, 머리를 짜내면 쓸 수 있는 정책이 아직도 많다.

제3세계 공무원들이 이런 농담을 한다. 일 하기 싫으면 WTO 핑계를 댄다고. 장관이 뭘 시키면 공무원이 이렇게 대답한다. “이건 WTO에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럼, 장관이 WTO 서류를 찾아보겠나. “안 되겠네” 하고 포기한다. 이렇게 많은 개발도상국이 할 수 있어도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케인스주의는 과연 실패했는가?

프레시안 : <23가지>의 영국 언론 서평 중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전기(<존 메이너드 케인스>(고세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를 쓴 로버트 스키델스키 워릭 대학 명예교수의 <뉴스테이츠먼> 기고가 눈에 띄었다. 그 서평에서 스키델스키 교수는 국가가 주도해서 경제가 성장한 국민 경제의 지속 가능성을 묻고 있다.

장하준 : 스키델스키 교수는 그 서평에서 1960~70년대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으로 성장에 성공한 유럽의 경제가 결국은 난관에 봉착하지 않았나, 이런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가령 1979년 영국에서 대처 정부가 집권했을 때, 당시 실업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 그걸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의 실패라고 비판하며 보수당 대처 정부가 등장했다. 그런데 대처 정부 집권 3년 만에 실업자가 300만 명이 되었다. 진짜 실패한 경제 정책은 어느 쪽인가?

<23가지>에서 누누이 얘기했지만, 1960~70년대와 그 이후의 경제 성과-경제 성장, 금융 안정, 소득 분배 등-를 비교해보면 어느 것 하나 나아진 게 없다. 1970년대 들어서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이 어느 정도 위기에 맞은 게 사실이지만, 그게 파산했다는 것은 1980년대의 대처, 레이건 정부와 같은 우파 정부의 부당한 공격일 뿐이다.

1960~70년대의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이 과연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면, 어떤 점에서 그랬는지 설명해야 한다. 일단 그걸 공격하면서 들어선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성과만 놓고 보면 그런 비판은 부당해 보인다. 뭔가 나아진 게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그 서평을 읽으면서 스키델스키 교수마저 그런 부당한 공격을 너무 쉽게 인정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만약 대처 정부가 집권을 하지 못해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이 좀 더 유지가 되었더라면 30년이 지난 지금 유럽 경제의 성적표가 훨씬 더 나았을 수도 있다. 물론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또 그 나름대로 위기를 극복할 해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을 테니까.

프레시안 :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의 한국 경제를 놓고도 비슷한 설명이 가능할까?

장하준 : 그렇다. 예전에는 1년에 6~7% 성장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4% 성장에도 굉장히 기뻐한다. 그러면서 경제가 성숙했으니 성장률이 떨어진 건 당연하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경제가 성숙해서 성장률이 떨어지는 것이라면, 서서히 떨어져야지 어떻게 그렇게 급격히 떨어지는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꾸 세계화 등의 개방 경제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계화에 동참한 덕분에 우리가 예전보다 잘 살게 되었다.” 외환 위기 이후 개방해서 소득이 몇 만 달러로 늘었다고 하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는 비교다. 왜냐하면, 천천히 조심스럽게 개방을 했더라면 외환 위기도 없었을 테고 지금까지 훨씬 더 많이 또 빨리 성장을 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미국, 유럽 등에서 이른바 자본주의 ‘황금시대’가 약 30년간 지속되었다.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등의 산업이 이 당시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이었다. 그런데 그런 식의 산업이 성장 동력으로 앞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는 게 가능할까?

장하준 : 지금까지 자본주의를 지탱하던 그런 성장 동력 산업이 무한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큰 역할을 할 것이다.

1980년대 초에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그런 얘기가 나올 때,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후진국에서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산업의 제품을 수출하는 것은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고 전망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네 마리 용보다 몇 십 배 큰 중국이 지금 그런 걸 하고 있다.

더구나 그런 산업의 제품에 대한 잠재 시장은 여전히 넓다. 지금까지 전 세계의 약 10억 명 정도가 그런 산업의 혜택을 보았다. 그런 혜택을 보지 못한 수십억 명이 전 세계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다. 특히 가난한 나라에서 앞으로도 그런 산업의 제품에 대한 수요가 엄청날 것이다.

또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변수는 과학기술이다. 1980년대까지 컴퓨터 산업을 주도하던 IBM의 사장이 1950년대 말에 이런 얘기를 했었다. “내가 예상할 때, 연간 컴퓨터 수요는 한 다섯 대 정도야!” 그 때만 하더라도 미국의 해군, 공군, 육군, 국방부가 사면 끝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컴퓨터 대수가 몇 대인가?

마이크로 칩이 발명되기 전까지 모래는 건축 외에는 중요한 자원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규소(실리콘)는 마이크로 칩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료다. 콜탄(Coltan)은 어떤가? 아프리카 중서부 콩고에서 생산하는 콜탄은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칩을 만드는 핵심 원료다. 예전에는 자원도 아닌 게 자원이 된 것이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산업의 지평을 바꾼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자동차 등의 산업도 이제 포화 상태다’ 이런 생각을 하겠지만 앞으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지 아무도 모른다.

프레시안 :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지구의 한계라는 게 분명히 있지 않은가? 이런 지구의 한계를 염두에 둔다면 과연 경제 성장이 가능한지, 또 설사 가능하더라도 바람직한지 등의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장하준 교수는 성장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성장을 하지 않고도 공동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장하준 : 어느 정도 소득 수준이 된다면…. 그 경계선이 1인당 소득 1만 달러인지, 2만 달러인지 이런 걸 놓고 싸우기는 하지만, 사실 그 이상이 되면 소득 수준과 국민 행복이 상관관계가 없다. 그 수준부터는 그 사회의 구성원이 어떤 좋은 사회를 만드는가, 이런 게 더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최소한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가 될 때까지의 경제 성장 없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다. 물론 경제 성장의 과실이 편중되게 배분되면 효과가 없지만, 기본적으로 소득이 늘어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이런 걸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인도의 케랄라 주가 있다.

케랄라 주는 성장 없이도 사람들이 잘 사는 곳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곳 인구의 15% 정도가 서남아시아의 두바이 같은 곳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송금한다. 바로 이 송금하는 돈으로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이처럼 어느 정도의 부는 기본 조건이다. 물론 소득 수준이 높은 나라는 그만큼 성장이 필요 없으니, 성장을 재고하는 게 맞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구의 한계를 염두에 뒀을 때 인류가 신경을 써야 할 부분 중 하나가 친환경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조악한 비교지만, 국민소득 1달러를 생산하는데 중국이 일본에 비해서 온실 기체를 10배 더 배출한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만약 일본이 중국에 기술을 다 이전해 주면 중국의 온실 기체 배출량을 90% 줄일 수 있다.

이렇게 과학기술을 통해서 가능한 한 지구에 주는 부하를 줄이려고 노력하면서, 성장을 재고하는 것처럼 인식을 바꾸고, 생활습관 같은 환경에 대한 태도도 바꾸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지구에 부하를 주는 인류가 다 자살하는 방법이지만, 그럴 수야 없지 않은가? (웃음)

프레시안 : 최근에 세계화의 폐해가 커지면서 지역에 기반을 둔 공동체 경제, 공동체 운동, 이런 실천이 제1세계, 제3세계를 막론하고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이런 흐름을 어떻게 보는가?

장하준 :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을 하는 것은 좋다. 다만 나는 제3세계가 전공이라서 그런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선진국에서는 어느 정도 자본, 기술이 뒷받침이 되기 때문에 지역에 맞는 뭔가를 할 수 있을 텐데, 가난한 지역은 열악한 생활수준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또 그런 지역은 경제도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구매력이 없으니까 기껏해야 선진국에 팔 수 있는 커피, 카카오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똑같이 커피를 팔아서 살아가는 지역 중에도 협동이 잘 된 곳과 그렇지 않은 곳 사이에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의 자본, 기술이 축적되지 않은 지역의 실험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프레시안(장하준)
프레시안 : <23가지>에서 많은 이들이 흥미롭게 읽은 부분 중 하나가 Thing 4(‘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이다.

사실 이 주장을 하면서 언급한 <오래된 것의 충격 : 1900년 이후의 기술과 세계 역사(The Shock of the Old : Technology and Global History Since 1900)>의 저자인 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에저턴 임피리얼 대학 교수는 11월 중순에 한국을 방문했었다. 그런데 정작 에저턴 교수의 주장은 <23가지> 덕분에 유명해졌다.

장하준 :(웃음) 에저턴 교수가 한국에 왔었나? 몰랐다.

프레시안 : <23가지>에서 언급한 책도 조만간 번역·출간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접한 독자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한 독자는 세탁기와 같은 가사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은 저임금의 질 낮은 노동을 전담하는 ‘세계화의 하인들’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장하준 교수가 가사 기술의 영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은 아닌지를 물었다. 사실 가사 기술의 발전은 여성에게 집안일도 하면서 바깥일도 하는 이중의 부담을 지운 게 아닌가?

장하준 :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부장제가 여전히 강고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가부장제가 여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세탁기와 같은 가사 기술의 발전이 삶에 준 충격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23가지>가 네덜란드에서도 번역돼 나온 터라, 그곳 케이블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상대방 토론자가 “<23가지>에 전반적으로 동감하는데 Thing 4에서 하는 주장에는 수긍할 수 없다” 이런 지적을 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혹시 당신이 겨울에 하천에서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 그 말을 듣고서야 웃으면서 “그런 것 같다”라고 수긍을 하더라.

우리는 예전에 할머니, 어머니가 또 지금의 후진국 여성이 가사 노동에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알지 못한다. 나도 통계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지금도 여성이 하루에 물 긷는 데만 두 시간을 허비한다. 부자 나라에서는 수도꼭지만 틀면 바로 물이 나오는데. 그런 가사 노동이 여성에게 얼마나 큰 족쇄인가?

물론 가사 기술로 그런 힘든 가사 노동에서 벗어났음에도, 가부장제가 지속되는 탓에 여전히 여성이 남성과 비교했을 때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가사 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핀란드, 스웨덴과 같은 나라에서 국회의원, 정부 관리의 절반이 여성으로 채워지는 일이 가능했을까?

프레시안 : 또 다른 독자는 이런 지적도 했다. ‘세탁기가 여성들의 노동 시장 진출을 촉진하고 가사 노동자 같은 직업을 거의 사라지게 만든 충격을 준 사실은 인정하지만, 지금의 인터넷도 세탁기 못지않게 사회에 큰 충격을 준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지적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하준 : 세탁기와 같은 가사 기술이 나온 게 한 100년쯤 되지 않았나? 그러면서 방금 언급한 그런 많은 변화를 야기했다. 인터넷이 1990년에 보편화되었다고 치고 한 2090년에 평가를 해보면 어떨까? 그 때는 인터넷이 100년간 가져온 변화가 세탁기가 100년간 이룩한 것보다 훨씬 클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이 한 20년간 이룩한 걸 본다면 세탁기가 100년간 가져온 변화와 비교할 게 못 된다. 물론 자신이 어떤 사회, 어떤 직업을 가지는지에 따라서 영향은 다를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인터넷의 덕을 훨씬 더 많이 보는 경우다. 언론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터넷이 언론에서 일하는 이들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으니까.

다만 자기 사회, 자기 직업이 그렇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회, 모든 계층, 모든 사람도 그렇게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경제학자는 르네상스형 인간이 되어야

프레시안 : 이제 경제학 얘기를 해보자. 스스로 주류 경제학과는 선을 긋고 있다. 장하준 교수가 지향하는 경제학 또 경제학자는 어떤 모습인가?

장하준 : 생산, 유통, 소비와 같은 경제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류 경제학 교과서가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역사, 제도, 심리학도 알아야 한다. 또 철학, 도덕도 공부를 해서 아까 얘기했듯이 어떤 가치를 지향할 것인지를 놓고 나름의 세계관도 가져야 한다. 이렇게 최대한 광범위한 공부를 했을 때, 비로소 경제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프레시안 : 장하준 교수가 비판하는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가 득세한 탓인지 몰라도, 한국의 대학은 그런 흐름과는 정반대로 가는 중이다. 예를 들자면, 서울의 한 대학은 2009년부터 회계학을 전공을 불문하고 전교생이 듣는 교양 필수 과목으로 선정했다. 또 여러 대학에서 역사, 철학 등의 과목이 축소·폐지되는 상황이다.

장하준 : 회계학을 교양 필수 과목으로? 그런 일이 있었나? 사실 회계학을 배우는 게 꼭 나쁘지는 않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요즘에는 안 하지만) 예전에는 경제학과 학생은 모두 다 아주 기초 수준의 회계학을 배웠다. 사실 제일 좋은 건 회계학도 배우고 역사, 철학과 같은 여러 가지를 배우는 것인데….

생명과학자가 생명 현상을 연구할 때, 그것이 워낙에 복잡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접근이 필요하다. DNA 분석도 필요하고, 실험실에서 온갖 실험도 하고, 생물을 해부도 하고, 고릴라 침팬지 옆에서 몇 달을 앉아 있기도 한다. 또 동물 행태를 가지고 수학 모델을 만들어서 시뮬레이션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 방법이 모아져야 생명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경제 현상이 워낙에 복잡하지 않나? 인간의 심리를 이해해야 갑자기 주식 시장이 거품이 확 일었다 꺼지는 것도 알 수 있고, 또 하드웨어를 이해해야 자동차 산업이 어떻게 발전할지 예측할 수 있고, 수요-공급의 원리도 알아야 하고, 어떤 경제 체제를 지향하느냐를 놓고 무엇이 정의인지 판단하는 기준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경제학은 종합 학문이 되어야 하고 또 경제학자는 그런 여러 분야의 공부를 통해서 경제 현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한 가지 특화된 분야를 깊이 파기는 해야겠지만…. 항상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프레시안(손문상)

좌로는 마르크스부터 우로는 하이에크까지

프레시안 : 언젠가 한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정성진 경상대학교 교수는 “장하준은 한국의 폴 크루그먼이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잘 알다시피,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는 노벨 경제학상(2008년)을 받은 대표적인 케인스주의자이다. 정 교수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대중을 상대한 글쓰기에 능한 그가 장 교수와 겹쳤던 모양이다.

장하준 교수와 케인스주의자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장하준 : 사실 폴 크루그먼 교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웃음) 아무튼 비록 의견은 다르지만 존경하는 선배 경제학자인 정성진 교수가 그런 칭찬을 했다니 기쁘다. 나는 대중과의 소통에 신경을 쓰는 경제학자가 그렇지 않은 경제학자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그걸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그런 칭찬은 고마운 일이다.

케인스가 나온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지만, 나는 케인스주의자는 아니다. 케인스주의자의 거시 경제 분석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케인스주의자들은 주로 단기적인 거시 경제 분석을 하기 때문에 생산성 향상, 기술 발전, 제도 발전 이런 변수에 대한 분석이 없다. 나는 반대로 그런 변수에 관심이 많다.

물론 케인스주의자들 자체가 단기적인 거시 경제 분석에 치중하는 사람들이지만…. 단기적인 거시 경제를 분석하는 틀은 케인스주의자의 것이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경제 현상을 이해하는데 부족하다. 그들이 강조하지 않는 역사, 제도 등에 초점을 맞춰서 볼 때 경제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프레시안 : <23가지>에서 주류 경제학자들이 떠받드는 경제학자가 아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리스트, 조지프 슘페터, 니컬러스 칼도, 앨버트 허시먼, 하이먼 민스키, 찰스 킨들버거 등과 같은 경제학자를 주목할 것을 권했다. 마침 최근에는 앨버트 허시먼의 책(<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이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도 번역이 되었다.

방금 경제학자의 바람직한 상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장하준 교수가 특별히 모델로 삼는 경제학자가 있는가?

장하준 : <23가지>에서도 얘기했듯이 나는 좌로는 마르크스부터 우로는 하이에크까지 그 사이의 많은 경제학자의 책을 읽고 배울 게 있으면 다 배우는 사람이다. 어떤 학파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기본적으로 이 책에서 언급한 경제학자는 한 명, 한 명 다 배울 게 있는 이들이다.

다만 <23가지>에서 여러 차례 1978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을 언급했다. 그는 우리 시대 최후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정치학자로 출발했으나 행정학, 물리학,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 등에 큰 공헌을 하고 마지막에는 인공지능 연구로 관심을 돌렸다.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스스로를 조직하는지에 정통한 단 한 사람을 들라면 그것은 단연 허버트 사이먼이다. 사이먼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경제학은 현대적 기업, 더 나아가 현대 경제에 관한 우리의 이해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런 훌륭한 업적에 비하면 한국에 소개가 안 된 것 같아서 이 기회에 특별히 그를 언급한다.

“질문을 던지고 논쟁을 제기한 경제학자”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이다. 장하준 교수는 100년 후에 어떤 경제학자로 기억되고 싶은가?

장하준 : 글쎄….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경제학자. 그의 얘기가 꼭 맞지는 않았지만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경제학자. 그런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프레시안(손문상)

그리고 남은 얘기들

약 2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나고 <23가지>의 내용과 장하준 교수 개인에 대해서 몇 가지 추가 질문을 던졌다. 추가 질문의 일부는 <프레시안>이 이 책을 읽은 독자 스물세 명에게서 미리 받은 질문이다. 장 교수는 질문이 선정된 독자에게 본인의 서명이 든 자신의 책과 추천 책 한 권을 선물로 보냈다.

프레시안 : 소득이 결정되는 변수를 한 국가의 생산성, 국가의 이민 제한 정책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변수는 노동자의 힘 아닌가?

장하준 : 노동자와 자본가의 권력 관계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 변수는 <23가지>에서 지적한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한 국가의 생산성, 국가의 이민 정책은 소득의 큰 범위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렇게 큰 범위가 결정되고 나면, 그 안에서 노동자가 어떤 삶의 조건을 누릴지는 그들의 힘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다.

아이티 노동자의 힘이 아무리 세다고 해서 미국, 스웨덴 수준으로 임금을 받을 수는 없다. 반면에 미국, 스웨덴은 같은 선진국이지만 미국 노동자와 스웨덴 노동자가 누리는 삶이 얼마나 다른가? 나는 <23가지>에서 선진국(미국, 스웨덴)과 후진국(아이티)의 소득 수준 차이가 기술적, 제도적 조건에 따른 생산성, 이민 제한 정책에 따라서 규정을 받는다는 걸 설명하고 싶었다.

프레시안 : <23가지>에서 신뢰에 기반을 둔 생산 방식의 한 형태로 ‘도요타 방식’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도요타 자동차의 리콜 사태나, <토요타의 어둠>(창해 펴냄)과 같은 일본 저널리스트의 책을 보면 과연 도요타 방식이 최선인지 회의가 든다.

장하준 : 사실 도요타 자동차의 리콜 사태는 과장된 것이다. 미국 측에서도 이제는 ‘그런 결정적인 결함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꼬리를 내리는 상황이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면서 일부에서 도요타 자동차의 결함을 과장하고, 그것이 리콜 사태로 이어진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도요타가 천사 기업은 아니다. 원래 도요타의 구호가 이것 아닌가. ‘마른 수건도 다시 짜라.’ 도요타 공장을 둘러보고 온 현대자동차 관계자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 “도요타 공장에 가봤더니 노동자가 뛰어다니면서 일하더라.” 도요타 공장의 노동 강도가 얼마나 센지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23가지>에서 강조했듯이 노동자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각 개인을 도덕적 주체로 신뢰함으로써 결정권, 주도권을 준다는 점에서는 도요타 방식이 과거의 전형적인 대량 생산 방식과는 달라서 의미가 있다. 이 책에서는 그런 대안 생산 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도요타 방식을 예로 든 것뿐이다.

프레시안 : 사실 1990년대 이후에 도요타 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알려진 몇 가지 사례가 있지 않나? 자동차 공장의 경우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스웨덴의 우데발라 공장과 같은 예가 있다.

장하준 : 우데발라 공장 사례 말고도 실험적인 생산 방식을 자랑하는 곳이 많다. 그런데 그런 예를 부각하면 당장 이런 반응이 나온다. “그거야 저쪽 한 구석에서 특이하게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도요타 방식이 최고라서가 아니라 노동자를 부품으로만 여기지 않고서도 도요타처럼 세계적인 대기업이 되는 곳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프레시안 : 유독 신화가 많다. “학창 시절 천재 소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시간에 250쪽을 독파할 수 있는 독해력을 갖췄다” “중학교 2학년 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영어 원서로 11독하고 번역판으로 12독을 했다.” “박사 학위를 받기 전인 1990년 27세 나이로 한국인 최초로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가 되었다” 등….

장하준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얘기는 역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철학을 공부하는 동생(장하석)의 얘기인데 누군가 잘못 옮겨서 계속 내 얘기처럼 알려져 있는데…. 무협지 같은 얘기는 믿을 필요가 없다. 사실 나는 ‘천재과’라기보다는 ‘노력파’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고 공부하는 건 좋아해서 교수까지 되었지만.

프레시안 : 옆에 두는 책 중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는가?

장하준 : 한 포털사이트에서 내 서재를 소개하고 싶다고 해서 5권을 꼽아서 소개했다. 일단 목록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새 the Galaxy)>(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권진아 옮김, 책세상 펴냄, 원서 : 1979년).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Imagined Communities)>(윤형숙 옮김, 나남 펴냄, 원서 : 1983년)

<광기, 패닉, 붕괴 : 금융 위기의 역사(Manias, Panics and Crashes : A History of Financial Crisis)>(찰스 킨들버거·로버트 알리버 지음, 김홍식 옮김, 굿모닝북스 펴냄, 원서 : 1978년)

<장자>(장자 지음, 오강남 엮고 옮김, 현암사 펴냄)

<백년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민음사 펴냄) / <백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목록을 봐도 알겠지만, 나는 직업 자체가 책을 읽는 것이다 보니 일을 안 할 때는 흥미 위주의 책을 즐긴다. 보통 때는 추리소설, 과학소설(SF) 등을 즐기지 심각한 책은 읽지 않는다. (추천한 5권 중에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세계적으로 열광적인 팬을 거느린 유명한 SF 소설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추리소설, SF 작가 중에서 좋아하는 사람은?

장하준 : 추리소설은 당연히 애거서 크리스티가 여왕이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로 잘 알려진 존 르 카레의 작품도 즐겨 읽는다. 그밖에도 요즘 유럽은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할 것 없이 추리소설 르네상스다. 새로운 작품들이 나올 때마다 챙겨서 읽는 편이다.

SF는 사실 고전적인 의미의 작품보다는 최근 작가의 작품을 즐겨 읽는다. 닐 게이먼, 닐 스티븐슨과 같은 작가의 SF 또 (어린이들이 읽는 책으로 홍보되고 있지만) <황금 나침반>의 필립 풀먼, <견인 도시 연대기 : 모털 엔진> 등을 쓴 필립 리브 의 소설도 즐기는 편이다. 러시아 작가 빅토르 플레빈(Victor Pelevin)의 작품도 즐겨서 읽는다.

(닐 게이먼, 닐 스티븐슨, 필립 풀먼, 필립 리브의 책은 국내에 몇 권이 소개가 되었다. 빅토르 플레빈의 작품은 1998년 <벌레처럼(The Life of Insects)>(책세상 펴냄), 2006년 <공포의 헬멧(The Helmet of Horror)>(문학동네 펴냄)이 국내에서 나왔다. 장하준 교수와 책 읽는 재미를 공유하고 싶은 이들은 지금 당장 검색창에 작가 이름을 쳐볼 것! <편집자>)

프레시안 : 혹시 다음 책을 계획 중인가?

장하준 : 그렇게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웃음) <23가지>가 앞으로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출판될 예정이라서 당분간은 그에 대응하느라 바쁠 듯하다. 당장 1월 초에 미국에서 책이 나오는데, 그 쪽 언론의 반응에도 대응을 해야 할 것 같고. 3월에는 미국 방문도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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