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042011
 

“국회가 한미 FTA를 비준하지 않으면, 수십 년 후에 한국은 쿠바, 북한처럼 세계 경제에서 고립된다.” / “무상 급식을 하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 / “젊은이들은 눈높이를 낮춰서 중소기업이라도 취직하라.” / “감세, 부자만을 위한 것 아니다.”

지난 1년간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인, 관료들이 한국 경제를 놓고 곳곳에서 얘기했던 말이다. 최근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23가지>)을 펴내며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경제학자 케임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의 생각은 어떨까?

연말에 한국에 잠시 들른 장하준 교수는 이미 지난 27일 한나라당 일부 의원이 주최한 국회 강연(‘새로운 자본주의와 한국 경제의 미래’)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부자 감세, 무상 급식, 복지 국가 등의 현안을 놓고 한나라당 의원과 설전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장 교수는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의 접근을 강하게 질타했다.

장하준 교수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현안을 놓고 좀 더 자세하게 자신의 입장을 털어놓았다. 장 교수는 “30년 뒤에도 여러 산업에서 삼성, 현대자동차와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지금 한미 FTA를 추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며 “한미 FTA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하준 교수는 비정규직 문제, ‘학력 인플레이션’으로 상징되는 교육 문제, ‘청년 실업’ ’88만 원 세대’로 상징되는 세대 격차 문제 등 오늘날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복지 국가’를 제안했다. 그는 “‘보편 복지’를 지향하는 유럽 국가처럼 복지 제도가 갖춰진다면 한국 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효율성과 역동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장하준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12월 26일 저녁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호텔에서 약 두 시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장 교수와의 인터뷰를 한국 사회의 현안과 책을 둘러싼 쟁점으로 나눠서 두 차례 싣는다. 이 인터뷰에는 <프레시안>이 <23가지>를 읽은 독자로부터 받은 스물세 가지 질문이 포함돼 있다.

▲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1970년대에 한미 FTA 했으면 삼성, 현대車 없었다”

프레시안 : <23가지>가 인기를 얻는 와중에 한미 FTA 추가 협상이 타결되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2011년 2월 임시국회에서 국회 비준을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일관되게 한미 FTA 반대 입장을 밝혔는데….

장하준 : 그렇다.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따라서, 심지어 더 안 좋은 방향으로 한미 FTA를 추진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 또 일부 언론은 한미 FTA를 거의 맹목적으로 추진한다. 조금만 따져 봐도 그것이 약보다는 독이 될 게 뻔히 보이는데도 그렇다.

프레시안 : 한미 FTA, 무엇이 문제인가?

장하준 : 첫째, 한미 FTA, 한-유럽연합(EU) FTA, 한-칠레 FTA와 같은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은 진정한 자유무역이 아니다. 우리가 미국과 FTA를 맺어서 미국산 쇠고기, 자동차를 싸게 수입하면 그 과정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쇠고기, 일본 자동차를 차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학자들, 예를 들자면 컬럼비아 대학의 인도계 경제학자인 자그디시 바그와티 교수 같은 경우는 내놓고 한미 FTA와 같은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을 진정한 자유무역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사실 다국 간 자유무역을 위해서 이미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는데 왜 또 양국 간 FTA인가?

한국 입장에서 한미 FTA를 반대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미국이 됐건 EU가 됐건 선진국과 FTA를 하면 단기적으로는 시장 확대, 교역 확대 효과를 볼 수도 있다. (물론 이것마저도 불확실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후진국이 100% 손해다. 한국과 같은 뒤떨어진 나라가 차세대 산업을 발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생각해 보자. 1960~70년대에 한국이 미국과 FTA를 했으면 삼성전자, 포항제철, 현대자동차가 있었을까? 아직도 가발, 합판 등을 만들어서 수출하고 있었을 게 뻔하다. 예전에 자국 산업을 보호한 이유가 뭔가. 선진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우리 기업이 성장도 하기 전에 고사될까 봐서 그런 것 아니었나.

프레시안 : 한미 FTA를 찬성하는 이들은 1970년대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산업이 훨씬 더 경쟁력이 있다고 믿는다.

장하준 : 착각이다. 선진국과의 격차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국, 독일, 스웨덴 등과 같은 최고 선진국과 비교하면 국민소득이 반도 안 된다. 가전, 반도체, 조선 등 일부 산업을 제외한 전체 산업의 생산성도 선진국의 50% 정도로 낮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미국, EU 경제와 통합하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프레시안 : 삼성, 현대자동차 이런 기업은 FTA를 찬성한다.

장하준 : 그 기업은 반도체, 자동차 등과 같은 분야에서 미국, EU 기업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야는 대개 1970~80년대에 기반을 다져놓은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 새롭게 등장할 산업이다. 앞으로 20~30년 뒤에 등장해야 할 새로운 산업이 한미 FTA로 싹도 트지 못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은 미국, EU, 일본 등과 비교했을 때 제약 산업, 첨단 기계, 정밀 부품 등과 같은 산업에서 여전히 경쟁이 안 되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제 미국과 FTA를 하면 이렇게 차세대를 짊어지고 나가야 할 산업은 아예 나오지를 못한다.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삼성, 현대자동차는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이런 차세대 산업은 대변인도 없는 상황이고.

“한국 이제 겨우 10등, FTA 하면 더 떨어질 가능성 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선진국과 FTA를 하면 자극을 받아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장하준 : 희망일 뿐이다. 경쟁을 한다고 능력이 저절로 키워지는 게 아니다. 내가 자주 드는 예인데, 가령 5등을 하는 친구를 1등들만 있는 반에 넣으면 자극을 받아서 1등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10등, 15등 하는 친구를 이 반에 넣으면 자극은커녕 스트레스만 받다가 성적이 더 떨어질 수도 있다. 한국은 5등인가, 10등인가? 내가 보기엔 5등은 절대로 아니다.

프레시안 : 몇 등인가?

장하준 : 한 10등 정도? 한국의 소득이 한 2만 달러 정도 하는데 그 정도면 유럽에서 제일 가난한 포르투갈 내지는 과거 동구권에서 제일 잘 살았다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소속의 슬로베니아 정도다. 지금 최고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와 비교하면 50%, 60% 정도밖에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추진하는 FTA는 한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더구나 한미 FTA는 ‘투자자-국가 소송제’와 같은 독소 조항이 다른 FTA보다 더 많아서 그 중에서도 또 문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점보다 부정적인 점이 많은 FTA를 노무현 정부에 이어서 이명박 정부가 왜 저리 안간힘을 쓰면서 추진하는지…. 정말로 걱정이다.

프레시안 : 정작 시민들에게 FTA 찬성, 반대를 물으면 반반이다. 여전히 많은 시민이 FTA가 대통령의 말처럼 국운융성의 길이라고 믿는다.

장하준 : 정부가 나서서 하도 장밋빛 선전을 하니까. 이런 광고를 봤다 “한미 FTA를 하면 우리나라 성장 6% 증대 효과가 있다.” 사실 10년에 걸쳐서 6%가 성장한다는 얘기니까, 연평균 약 0.6% 정도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설명을 안 해 주니까, 시민들은 ‘우리나라 성장률이 3%인데, FTA를 하면 9%가 되는 거야?’ 이렇게 착각한다.

더구나 이런 연평균 0.6% 추가 성장도 못 믿을 예측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처음에는 연평균 0.2%로 예측했는데, 이 정도 효과를 내세우기는 민망하니까 ‘경쟁 때문에 생산성이 상승해 1년에 소득이 연평균 1% 늘어난다’는 검증도 안 된 가정을 집어넣어서 ‘연평균 0.6%, 10년간 6% 성장’ 결론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엉터리 예측에 의존해 추진되는 게 FTA다.

‘한미 FTA를 안 하면 우리가 나중에 북한, 쿠바처럼 세계 경제에서 고립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데…. 이런 식의 FTA는 시민이 정말로 막아야 한다.

“주식, 펀드? 혼자서 열심히 해봤자…”

프레시안 : 이렇게 시민들이 정부의 FTA 장밋빛 선전에 현혹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외환 위기 이후 10년간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탓도 크다. 2000년대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부동산, 주식, 펀드 투자 열풍은 그 직접적인 증거고. 혹시 장하준 교수는 부동산, 주식, 채권, 외환 등의 투자를 한 적이 있는가?

장하준 :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 할 생각도 없다. 이런 얘기가 있다. 경제학자들이 주식 시장에 나타나면 바로 팔 때라고. (웃음) 경제학 역사 300년을 돌이켜 봤을 때, 주식 시장에 나와서 돈 번 경제학자가 딱 두 명 뿐이다. 한 명이 데이비드 리카도, 다른 한 명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 나한테는 그렇게 투자를 해서 돈 벌 재주가 없다.

개인들이 이렇게 각종 투자에 나서게 된 것도 <23가지>에서 비판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 탓이다. 한국 사회에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면서 모든 게 다 개인의 탓이다 이런 분위기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해’, 이런 생각에 모두가 사로잡힌 것이다.

오죽하면 한때 인사말이 이런 거였다. “부자 되세요!” 전 세계 어디에도 이런 인사말은 없는데…. 그러나 아무리 개인이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의 시민도 그런 현실을 점점 깨닫는 중이다. <23가지>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그런 사정 때문이 아니겠나?

“‘돈’은 위에서 아래로 ‘똑똑’ 떨어지지 않는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한국 사회가 드디어 ‘내(개인)’가 아닌 ‘우리(공동체)’가 함께 살 수 있는 대안을 갈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장하준 교수는 이미 2005년 정승일 박사와 함께 펴낸 <쾌도난마 한국 경제>(부키 펴냄)부터 최근의 <23가지>까지 한국 사회의 대안으로서 스웨덴, 핀란드 등과 같은 복지 국가를 제안했다. 왜 복지 국가인가?

장하준 : 그렇다. 최근의 무상 급식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도 느낀 것인데, 한국 사람들은 복지가 돈이 남아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하나씩 살펴보자.

좋은 사회가 뭔가?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사회인가? 아니다. 어떤 사회에서 한 명이 모든 걸 가지고 나머지가 거지처럼 살아도, 그 한 명이 엄청난 부를 소유한다면 1인당 국민소득을 기준으로는 부자 나라일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그런 사회에서 사는 걸 바라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부를 나눠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복지 국가가 필요하다. <23가지>에서도 설명했듯이(‘Thing 13 :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자유 시장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은 부자들이 돈을 벌게 놔두면 꼭대기에서 늘어난 부가 결국에는 아래로 ‘똑똑 떨어져(trickle down)’ 가난한 사람도 혜택을 입는다고 믿는다.

이런 논리다. ‘부자들한테 돈을 모아주면 처음에는 사회가 더 불평등해지고 밑에 있는 사람들이 고생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부자들이 투자도 하고, 일자리도 만들어 경제가 성장하면 (설사 소득 분배는 악화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사회 전체로 부가 퍼진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장 좋은 예가 미국이다. 1979년 소득 상위 1%가 미국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한 10% 정도 되었다. 2006년 중반이 되면 그게 22.9%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이렇게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 줬음에도, 미국 경제의 투자율은 1960~70년대와 비교해서 더 떨어지고, 성장도 둔화가 되었다.

프레시안 : 복지 국가에서는 부가 어떻게 분배되는가?

장하준 : 한 사회에서 부가 골고루 퍼지게 하려면 위에서 아래로 똑똑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상당한 양의 부가 밑으로 내려오게 하는 펌프가 필요하다. 그 펌프가 바로 복지 국가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가난한 사람에게 소득을 이전하는 강력한 펌프, 즉 복지 국가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복지 국가 펌프의 제일 좋은 예가 스웨덴이다. 세금을 징수해 복지 제도를 통해서 소득 이전을 하기 전의 스웨덴은 소득 분배가 미국만큼 불평등하다. 그러나 복지 국가를 통해서 소득을 재분배한 스웨덴은 잘 알려져 있듯이 세계에서 제일 평등한 나라다. 이처럼 복지 국가야말로 부를 사회 전체로 확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복지 국가, 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높인다”

프레시안 : <23가지>를 보면 복지 국가의 경제 성장 효과를 설명하는 데도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장하준 : 그렇다. 복지 국가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시민들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에 오히려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미국보다 복지 국가인 유럽에서 보호 무역에 대한 요구가 덜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유럽 사람들은 자기가 종사하는 산업이 외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문을 닫는다 해도 실업 수당을 받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또 유럽 사람들은 정부 보조금을 받으며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도 받을 수 있다.

이에 반해 미국 사람들은 한 번 일자리를 잃으면 생활이 심하게 어려워질 뿐 아니라 다시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적절한 재교육을 받으면 생명공학과 같은 ‘유망 산업’에서 일할 수 있는 미국 노동자들이 자동차 산업 같은 ‘사양 산업’에서 악착같이 일자리를 고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되면 대성할지 모를 유망한 청년들이 의사, 변호사와 같은 안정된 직종을 선호하는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것도 복지 제도가 잘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개인의 선택은 사회 전체로 볼 때는 재능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떨어뜨린다.

만약 유럽 국가처럼 한국이 복지 제도가 잘 갖춰졌다면 이들이 첫 번째 직업을 선택할 때나, 혹은 현재의 직업을 떠나야 할 때 제2의 혹은 제3의 기회가 생기리라는 것을 알고 좀 더 개방적인 자세로 변화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자세는 경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높인다.

프레시안 : 그런 맥락에서 <23가지>에서는 복지 국가를 두고 ‘노동자의 파산법’이라고 표현했다.

장하준 : 그렇다. 제2의 기회를 보장해 주지 않으면 기업가들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파산법을 도입했다. 설사 기업이 파산을 하더라도 법원이 기업가를 채권자로부터 보호해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노동자에게 제2의 기회를 주는 복지 국가는 노동자를 위한 파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파산법이 기업가들로 하여금 위험을 더 적극적으로 감수하게 해 주는 것처럼 복지 정책은 노동자들이 변화에 더 개방적이도록, 그에 따른 위험을 더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를 갖도록 해준다. 이런 식이라면 도리어 복지 국가야말로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무상 급식, 가난한 애들한테 평생 갈 상처 안 주는 방법”

프레시안 : 오세훈 서울시장 등을 필두로 무상 급식에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장하준 : 나는 무상 급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낙인 효과’가 있다. 가난한 아이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그 아이가 입을 상처가 얼마나 클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런 평생 갈 상처를 아이한테 주는 게 그 아이 또 이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도움이 될까? 강에다 카페 짓는다며 몇 백억 원씩 쓰는 나라에서 무상 급식 1년 하는 데 얼마나 든다고….

프레시안 : 오세훈 시장을 비롯해서 많은 이들은 이렇게 따진다. “중산층 이상의 돈을 내고도 급식을 먹을 수 있는 집의 아이한테 왜 세금을 낭비하나?”

장하준 : 참 답답한 일이다. 돈 없는 애들한테 평생 갈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돈 있는 애들도 그냥 무상 급식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왜 못 알아듣나. 왜 돈은 돈대로 내고 상처는 상처대로 주는 일을 계속 고집하는가? 그렇게 돈 있는 애들이 먹는 밥값에 들어갈 세금이 아까우면 그 (돈 있는 애들의) 부모가 세금을 더 내면 되는 것 아닌가?

아까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복지’ 하면 미국의 선별 복지만 떠올린다.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하듯이, 정말 굶어죽을 것 같은 몇 사람에게 몇 푼 쥐어주는 식으로. 무상 급식에 반대하는 이들한테도 바로 복지에 대한 이런 천박한 인식이 깔려있는 듯하다.

“하향평준화 아닌 상향평준화가 맞다”

프레시안 : 복지 국가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반대하는 이들 중 몇몇은 이런 주장을 편다. 한국 사회는 복지 국가보다 ‘투명 사회’로의 전환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축적된 기득권층의 온갖 특권 구조를 철폐하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인데….

장하준 : 복지 국가와 투명 사회, 이 둘의 선후를 따지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만든 다음에 복지 국가를 하자는 얘기인데…. 예를 들자면,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해서 여러 가지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 대안으로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상향평준화를 할 생각을 해야지 왜 하향평준화를 하려고 하는가? 정규직 노동자의 특권이 문제가 되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그만큼의 특권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 더 맞는 방향 아닌가? 좀 있다 다시 얘기하겠지만, 나는 바로 복지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더구나 <23가지>에서도 언급했지만(‘Thing 20 :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다가 아니다. 두 선수가 같은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시작한다고 해서 공정한 것이 아니다. 한 선수는 배가 고파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상태라면 어떤가? 그게 과연 공평한가?

‘같은 출발선’이라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두 선수가 모두 다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불리 먹어야 할 것이다. 물론 두 선수 중 한 사람이 더 근력이 좋겠지만…. 바로 이런 최소한의 조건을 갖출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복지 국가라고 생각한다.

“세금은 늘이고, 복지는 확대하자”

프레시안 : 복지 국가로의 전환을 얘기하면 항상 재원 문제가 걸린다.

장하준 : 결국은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다 같이 부담해서 마련할 수밖에 없다. 물론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은 더 내야 하고, 덜 버는 사람은 덜 내야겠지만….

사실 한국은 세금이 높다, 높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조세 부담률이 거의 최저 수준이다. 한국의 조세 부담률이 22~23% 정도인데,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나라들도 30% 정도는 된다. 소득 수준을 생각할 때 세금이 굉장히 낮은 것이다.

또 한국 같은 경우는 복지 지출이 GDP 대비해서 6~7% 되는데, 유럽은 복지 지출이 많은 나라는 GDP의 25% 수준에 이른다. 그 정도까지는 안 되더라도 최소한 지금의 두 배 정도는 복지 지출이 늘어야 복지 국가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조세 부담을 높이고 그 재원으로 복지 지출을 늘려야 한다.

이게 가능할까 생각하지만…. 스웨덴은 지금 세계에서 소득세율이 가능 높은 나라지만, 처음 소득세가 도입된 게 1932년이다. 세금을 그렇게 싫어하는 미국도 1913년에 소득세를 도입했는데, 스웨덴은 우파가 반대해서 1932년에 사회당이 집권할 때까지 도입하지 못했다. 그런데 일단 도입하고 나니, 세율이 20~30년 만에 상당히 높아졌다.

프랑스의 경우는 미테랑 대통령이 1981년 집권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우파의 목소리가 커서 복지 예산이 유럽 평균 이하였는데, 미테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 사회당 정부가 물러날 때 보니까 상위권으로 올라갔다. 이렇게 사람들이 한 번 그 정당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금방 바뀔 수 있다.

“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을 품어야 산다”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복지 국가로 성공적으로 이행한 유럽 여러 나라를 보면 공통적으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 노동의 힘이 셌다.

장하준 : 복지 국가로 성공적으로 이행하려면 각종 복지 제도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 이른바 복지 세력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의 힘이 세져야 한다. 이렇게 복지 제도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복지 국가가 될 수 있다. 물론 미국에서는 워런 버핏처럼 부자가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자들도 있지만….

프레시안 :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비관적이다. 한국에서는 구체적인 노동자의 삶도 열악할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의 힘도 약하다.

장하준 : 한국의 기업이 외국으로 진출하면서 상대적으로 국내 노동자의 교섭력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교섭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대다. 한국의 상황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외면하는 모습이다. 서로 적대시하고….

프랑스도 노동조합 조직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목소리가 크고, 결정적으로 파업과 같은 행동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크다. 그것은 프랑스 노동조합이 자기 이익도 챙기지만, 실업자라든가 조직화되지 않는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은 노동조합의 목소리를 공익을 위한 것으로 여긴다.

프레시안 : 방금 정규직 노동자의 역할을 강조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일도 시급하다.

장하준 : 그렇다. 기본적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이 OECD 중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제일 높은 수치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현실은 크게 잘못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럽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다른 접근도 필요하다.

유럽도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옛날보다 많이 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한국처럼 비정규직 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복지 제도로 삶의 상당 부분이 뒷받침되어있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일자리를 잃는다고 기본적인 생존권 자체가 위협을 받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은 복지 제도가 워낙에 미비할 뿐만 아니라, 그나마 있는 복지 제도도 기업 복지 중심으로 짜여 있다. 즉 정규직 노동자는 복지 혜택을 입는 반면에, 비정규직 노동자는 기업 복지 혜택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잃게 되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막막한 신세로 전락한다.

이러다 보니, 정규직 노동자는 그들대로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밀어내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들대로 열악한 일자리에도 목을 매고, 그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가 어렵고 병원도 못가는 생존을 위협받는 신세가 된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갈등도 더 심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복지 국가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대를 위한 조건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공고 출신의 1억~2억 원 연봉 노동자 나와야”

프레시안 : 다른 주제로 넘어가자. 혹시 장하준 교수도 ‘소녀시대’, ‘카라’ 등과 같은 이른바 걸그룹을 좋아하나?

장하준 : 하도 여기 저기 많이 나오니까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런 걸그룹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가수는 노래를 잘해야 한다’, 이게 내 지론이기 때문에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좋다 싫다 대답할 처지가 못 된다. 이참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들어봐야 하나? (웃음)

프레시안 : 음악 듣기를 즐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제일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인가?

장하준 : 사실 나는 구닥다리라 요즘 유행하는 가수의 노래는 거의 안 듣는다. 옛날에 고등학교 때는 헤비메탈과 같은 록 음악을 많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등과 같은…. 그나마 요즘까지 제일 많이 듣는 게 프레디 머큐리가 이끈 영국의 록 그룹 ‘퀸’이다.

한국 가수 중에는 김현식을 제일 좋아했는데 1990년 서른두 살에 요절해서 안타깝다. 그 때 좋은 가수가 많았는데 신촌블루스, 봄여름가을겨울 등….

프레시안 : 걸그룹 얘기를 물어본 것은 한국의 10대들이 현재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 아이돌 스타와 같은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서 소원을 이루는 이들은 극소수다. 이렇게 10대들이 연예인을 꿈꾸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들이 꿈을 잃어버린 세대라는 역설적인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기성세대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는가?

ⓒ프레시안(손문상)
장하준 : 꿈을 잃어버린 세대…. 전 세계 10대를 대상으로 학업 성취도 평가를 하면 항상 핀란드가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와 수위를 다툰다. 그런데 한 기사를 보니까, 핀란드 10대의 평균 학습 시간이 한국의 반이더라. 핀란드를 염두에 두면 한국은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하는 시간은 두 배인데 나오는 결과는 비슷하니까.

교육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특정한 지식 전수’와 ‘일반적인 교양.’ 한국은 이중 후자의 기능을 쌓는데 너무 많은 국력을 낭비하고 있다. 그 와중에 10대는 힘든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고. 이런 10대들이 잠시 자신을 위로하는 TV 속 스타를 선망하는 것 외에 다른 꿈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까? 개인적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하다. 남들이 다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하고 있는데, 나 혼자서 다른 것을 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결국에는 사회가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절대로 하루아침에 해법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무 오래된 문제니까.

프레시안 : <23가지>에서도 교육과 관련된 잘못된 인식을 언급했다(‘Thing 17 :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장하준 : 그렇다. 현재의 교육 문제를 바라볼 때,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인식하는 걸 바로잡고 싶었다. 자기 계발을 위해서 한국 국민 전체가 대학을 가도 상관없다. 다만 ‘교육을 더 시키면 경제가 성장한다’ 이런 환상은 가지지 말아야 한다. 대학 진학률이 다른 나라의 3분의 1밖에 안 되지만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스위스의 예를 보라.

스위스에서는 고등학교 정도만 마치고도 특정한 기술을 습득해서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1억~2억 원대의 연봉을 받으면서 다닐 수 있는 직업이 있으니까 굳이 대학을 갈 필요가 없다.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니까 너도나도 기를 쓰고 대학에 가려고 그 난리를 치면서 아이도, 부모도 불행한 삶을 산다.

그렇다면, 이런 불행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새로운 체제를 고민해야 하는데….

프레시안 : 마침 한 10대 학생이 질문을 해왔다. 입시 과제로 <23가지>를 읽었다는 이 학생은 특히 방금 언급한 ‘학력 인플레이션’을 비판한 대목을 인상 깊게 읽은 모양이다. 모두가 다 불행한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왔는데….

장하준 : 입시 과제라니…. (한숨) 한 가지 아이디어를 말하자면, 정부 개입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직업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런 일이 없었던 게 아니다. 한국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통 때문에 (의사 빼놓고) 엔지니어와 같은 이과 직업을 천시했다.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국 대학의 정원을 보면 문과 1명당 이과가 0.6명이었다.

이게 1970년대 말에는 1:1로 바뀌었다. 정부가 이과의 정원을 늘리고, 지원을 많이 한 것이다. 또 경제 발전을 하면서 엔지니어들이 취직할 수 있는 좋은 직장도 많이 생겼고. 이렇게 한국은 정부 개입을 통해서 직업 구조를 바꾼 경험이 있다. 예전에 했다면 지금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과학자, 엔지니어로 성공할 수 있는 우수한 인력이 의과대학으로 몰리는 게 문제라면 복지 제도의 강화를 통해서 자격증을 평생 끼고 살지 않아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런 체제에서는 젊은이들이 여러 가지 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을 막으려면 스위스처럼 학력에 관계없이, 능력만 있으면 높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임금 보상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직업 교육을 대폭 강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실 한국은 옛날에 공업고등학교에서 얼마나 우수한 인력을 많이 배출했나? 지금은 이런 인력 배출 체계가 다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이다.

정부가 공업고등학교에 파격적인 지원을 하고, 그런 공업고등학교 출신을 중용하는 기업에 혜택을 준다면 분위기가 바뀌지 않을까? 정부가 바꿀 마음이 없으니까 안 바꾸는 거지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바꿀 수야 없겠지만…. 한국에서 공대를 잘 안 가려고 하는 경향도 20년간의 노력을 통해서 바꾸지 않았나?

“’88만 원 세대’, 복지 국가로 숨통 터주자”

프레시안 : 20대의 청년 실업자는 윗세대의 고용 안정을 보장해주고, 10~20대의 이른바 ‘알바’는 저임금 노동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지탱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염두에 두고 한국의 20대는 ’88만 원 세대’라고 불리는데….

장하준 : 나는 1963년생이다. 나를 포함한 40대 이상의 세대가 (그럴 의도야 없었겠지만) 그 밑의 세대한테 큰 죄를 짓고 있다. (한숨) 사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을 입학한 이들은 좋은 대학을 나오면 학점이 엉망이라도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잘 먹고 잘 살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요즘 20대들은 기성세대와 비교해서 몇 배나 더 노력하고, 스펙(specification)을 쌓아도 대기업은커녕 중소기업 취직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구조를 만드는 데 역할을 했고, 또 바꾸기는커녕 방치한 기성세대가 철저하게 반성을 해야 할 대목이다. 더 늦기 전에 역시 대안을 강구해야 한다.

프레시안 : 어떤 대안이 있을까?

장하준 : 나는 이런 문제도 복지 국가의 강화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만약 복지 제도가 뒷받침이 된다면, 설사 20대에 소득이 낮거나 고용의 질이 떨어지는 비정규직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생존에 큰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 도약을 꿈꿔볼 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복지 제도가 없으니까 한 번 질이 낮은 노동 시장에 빨려 들어가면 빠져나올 길이 없다. 그러니 많은 20대들이 중소기업이든, 비정규직이든 일단 취직부터 하고 보라는 기성세대의 다그침에도 꿈쩍도 않고 공무원과 같은 안정된 직장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나마 안착에 성공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아메리카드림’이라는 말이 있다. 신분 사회의 전통이 강한 유럽에서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신분 상승이 힘들지만, 단 돈 몇 달러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 중에는 신분 상승에 성공한 사람이 나왔다는 걸 상징하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정반대다. 각 나라의 계층 이동성을 비교 조사한 연구를 보면, 미국이 더 어렵다.

계층 이동성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와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영국에 비해 더 높고, 영국은 미국에 비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288쪽). 복지 정책이 잘 된 나라일수록 계층 이동이 더 활발한 것이다. 한국에서 복지 국가를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세대인 20대의 숨통을 터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프레시안(손문상)

“주가 2000? 갈 곳 없는 투기 자본의 작품”

프레시안 : 현재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외환 시장의 불안이다. 일관되게 외환 시장에 대한 통제를 주장해 왔다.

장하준 : 오가는 자본을 통제해야 한다. 주가 2000이 넘었다고 좋아하는데 한국 경제의 상황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다. 선진국이 경제 위기 때문에 이자율을 낮춘 탓에 모든 후진국에 돈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다. 한국의 주가가 2000을 넘은 데도 바로 이런 유동 자금의 영향이 크다.

이렇게 자본이 집중되면 인플레이션 압력을 받아서 물가가 불안정해지고, 환율이 평가 절상돼 수출이 어려워지며, 자산 시장에 거품이 생겨서 한 나라의 경제가 병든다. 오죽하면, 요즘에 세계통화기금(IMF)이 전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자본 시장을 통제하라고 권고하겠는가?

이런 잘못된 상황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정부가 자본 시장을 통제하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각국이 자본의 유출입을 어렵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내놓고 있다. 예를 들자면, 예치금 제도가 있다. 국내에 투자한 외화의 일정 액수를 예치해 뒀다가 1년 내에 돈을 빼려고 하면 예치금을 몰수하는 제도다. 또 자본 이득세를 원천 징수하는 방법도 있다.

한국 정부도 은행세와 같은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시행되거나 논의되는 제도와 비교하면 아주 미약한 수준이다. 기축통화를 가진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외환 시장에 대한 통제가 불가피한데도 이렇게 손을 놓고 있으니…. 이 정도의 개입으로는 외환 시장을 통제할 수 없다.

외환 보유고가 약 3000억 달러나 되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그 정도면 하루 전 세계 외환 시장 거래량의 약 15% 정도다. 이론상으로는 하루 8시간 중 1시간 30분이면 한국의 외환 보유고가 다 동날 수도 있다. 중국의 외환 보유고는 약 2조5000억 달러 정도다. 많아 보이지만, 하루 외환 시장 거래량을 조금 넘는다.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온 세계의 외환 투기꾼이 마음먹고 이틀만 공격하면 중국의 외환 보유고도 거덜 난다. 이런 상황에서 외환 시장을 그냥 열어놓고 세계의 투기꾼이 마음대로 오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금융 허브? 한국이 따르려던 두바이, 아일랜드 다 망했다”

프레시안 : 2008년 통계를 보면 국제 금융 시장의 거래 규모가 3조2000억 달러다. 반면에 실물 거래는 300억 달러를 약간 넘는다. 장하준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도 금융보다는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실물 경제를 강조해 왔다.

장하준 : 내가 반(反)금융주의자라고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사실 금융이 없었더라면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발전 못했다. 은행, 주식회사 등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금융 제도가 도입되는 것을 놓고서 정작 자유 시장주의자들은 반대했지만, 그런 제도가 있어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가능해진 것이다.

내가 비판하는 것은 ‘금융을 위한 금융’이다. 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규제 완화를 통해서 팽창한 금융 경제를 비판하는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역임하고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미국 금융계의 대부 폴 볼커가 이런 얘기를 했었다. “지난 몇 십 년간 이뤄진 금융 혁신 중에서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은 현금 자동 인출기뿐이다.”

지금의 금융 혁신이 다 규제 완화, 파생 상품 등을 통한 사상누각이었다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위험 평가, 신용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을 개발하는 것과 같은 제대로 된 금융 혁신은 없었다. 심지어 아이슬란드는 은행 규제를 다 없앴는데, 그런 식으로 팽창한 금융 경제의 끝이 2008년 금융 위기로 나타난 것 아닌가?

이제 이런 금융을 위한 금융, 기반이 없는 금융은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지금 과잉 팽창된 금융 경제의 고삐를 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한국이 ‘금융 허브’ 어쩌고 하면서 아일랜드, 두바이 등을 모범으로 칭송했었지 않았나? 그 나라들이 어떻게 되었나? 다 망했다.

“불가능한 것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개혁’이다”

프레시안 : <23가지>를 비롯한 오늘 얘기의 핵심 결론은 시장 권력을 정치 권력이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초국적기업이든 금융 자본이든 간에 국경을 넘나드는 시장 권력을 국민국가 틀 안에 있는 정치 권력이 통제하는 게 가능할까?

장하준 : <23가지>의 독자뿐만 아니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만나는 학생들도 강의 시간에 그런 질문을 많이 한다. ‘세계 체제가 후진국에 불리하게 돼 있는 상황에서 도대체 뭐가 바뀌겠는가?’ ‘선생님이 얘기하는 게 좋은 것 같기는 한데 비현실적이다’ 등…. 이런 질문과 논평이 매번 나온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다 보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자, 과거로 눈을 돌려보자. 200년 전에 노예 해방을 얘기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100년 전만 해도 여성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가뒀다. 50년 전에 지금 제3세계 해방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의 대부분은 유럽, 미국에서 테러리스트로 지명 수배를 받았었다.

불과 20년 넘은 시점인 1980년대 후반에 영국의 대처 수상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이 다수로서 민주주의를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몽상가다.” (그 때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넬슨 만델라는 당시 25년 넘게 감옥에 있었다!)

현실은 어떤가? 200년 전, 100년 전, 50년 전, 20년 전에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들이 다 벌어졌다. 사회 개혁이라는 게 원래 이렇다. 간단히 될 것 같은 일만 떠올리면 개혁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아무리 불가능하고 어려워보여도 장기적으로 그것을 해나가려고 노력을 해야 개혁이 이뤄진다. 그래야 바뀌지 않을 것도 바뀐다.

2005년에 정승일 박사와 <쾌도난마 한국 경제>를 펴낼 때 복지 국가 스웨덴, 핀란드 얘기를 했었다. 그 책을 읽은 대다수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웬 복지 국가?’ 이런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와 보니까 다음 대통령 선거의 화두가 ‘복지’라고 하더라. 진보·개혁 진영의 사람뿐만 아니라 복지 국가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경제 신문 기자까지 그러더라.

사람들은 항상 묻는다. “대안이 뭐냐?” 물론 주어진 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대안이 없다. 힘 있는 이들이 규칙을 만들어 놓고 다른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대안을 말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력을 하면서 자꾸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대안이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바로 그런 식으로 바뀐다. 나는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낙관적으로 사려고 노력한다. 2005년에 제기했던 복지 국가가 불과 5년 만에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는 걸 보면서 다시 한 번 이런 삶의 자세가 맞다고 확신했다.

ⓒ프레시안(손문상)

“이 세 가지는 지금 당장 실천하자!”

프레시안 :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딱 세 가지만 말한다면?

장하준 : 지금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일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지 국가를 발전시켜야 한다. 오늘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이것은 지금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종의 열쇠다. 둘째, 산업 정책과 같은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정부 개입은 나쁘고(독재?) 시장 방임은 좋다(민주주의?)’ 이런 식의 편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셋째, 자본을 통제해서 거시 경제의 안정을 꾀해야 한다. 아까 얘기했듯이 외환 시장 또 국내 자본 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서 국민경제를 안정시켜야 한다. 이것 말고도 할 일이 많지만, 이 세 가지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이런 일을 잘 해나갈 좋은 정치인을 뽑는 일이 또 시민의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장하준 : 그렇다.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 되는 게 참 힘든 일이다. 한국에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얼마나 많은가? 남북 관계부터 시작해서 고령화 문제, 이민 문제, 자본 시장 문제 등 고려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해서 시민의 의견을 가장 잘 대변할 정치인을 뽑아야 하니까.

<23가지>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더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경제 정책이라는 게 소수의 전문가만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어렵기만 한 게 아니라, 일반 시민이 충분히 상식선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게 대부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이 책을 읽고서 시민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경제 정책에 목소리를 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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