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제갈공명의 허상’
제갈은 제 나라가 50년 후에 멸망하는 것도 몰랐다.
장병영 칼럼니스트
제갈공명 (諸葛孔明)은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승상. 양야양도(山東省沂水縣) 출신. 본명이 양(亮)이어서 제갈량이지만 자(字)인 공명(孔明)이다.
“제갈은 제 나라가 50년 후에 망한다.”는 사실도 예언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무학대사’와 ‘도선국사’는 ‘고려의 500년’, ‘조선의 500년’을 정확하게 예언했다.
나관중이 ‘중국 삼국지’에서 ‘제갈’이나 ‘사마의(司馬懿)’의 뛰어난 활약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춘추필법’으로 병들게 했는데, 과연 그 시점의 고구려는 어떠했을까?
제갈이 위나라의 사마의에 의해 처참한 패배 끝에 결국 생을 마감하고, 사마의는 서안평의 전투에서 고구려의 국상 ‘명림어수’의 치밀한 전략에 참담한 패배를 당한다.
‘삼국지연의’의 위 ․ 촉 ․ 오는 창업에서 패망에 이르기까지 60년이 채 안 되는, 중국에서도 가장 치욕적인 역사이다.
‘진수의 삼국지’를, 나관중이 그럴듯하게 윤색하여「삼국지」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를 현혹시키며, 중화사상을 퍼뜨리는데 일등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이다. ‘삼고초려’도 나관중의 머리에서 나온 허구다.
제갈이 사마의와의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하면서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 후의 일이다.
위나라에 반기를 든 공손연을 토벌하기 위해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했고, 동천왕은 흔쾌히 군을 출동시킨다.
그렇지만 ‘동천왕의 속내’는 다른 곳에 있었다. 위나라를 도와주는 척 하면서, 그 혼란을 틈타 ‘대무신왕’ 때 이미 정복했던 ‘화북'(북경을 포함한 인근지역)을 되찾으면서, ‘요서로의 진출’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위나라 군에 쫓기는 반란군을 가볍게 물리친 고구려 군은 쉽게 서안평을 점령했다.
서안평에 주둔한 고구려군은 토벌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물리지 않았다. 이에 사마의는 환도성으로 사신을 보내 군사를 물릴 것을 요구했지만, 동천왕은 차일피일 미룬다.
그러는 사이, 위나라의 명제가 세상을 뜨고 변경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는 틈을 타서, ‘동천왕’은 드디어 서안평을 고구려 영토로 선포하기 이른다.
이에 놀란 ‘사마의’는 조카 ‘사마강’으로 하여금 고구려 정벌군을 출동시키며, 세세하면서도 치밀한 전략을 하달하지만, 사마의 전술과 전략을 간파한 ‘고구려의 국상 명림어수’에 처참한 참패를 당하고야 만다.
그에 대한 복수로 유주자사 관구검으로 하여금 재공략에 나서게 했고, 동천왕의 과욕으로 생긴 허점을 찌른 관구검은 환도성을 짓밟지만,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결국은 퇴각하고야 만다.
삼국지는 중국의 역사는 알아도 우리 역사를 모르게 만들었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뿌리깊이 심어주었다.
위 ․ 촉 ․ 오는 창업에서 패망에 이르기까지 60년도 안 되는 역사의 나라다. 세 나라 간에 온통 속이고 속이는 추악한 권모술수로 점철된 역사를 어떻게 당당하게 정도를 걸어온 천년에 가까운 고구려 역사와 비교를 하는가?
어떻게 그런 추악한 권모술수로 점철된 내용을, 우리에게 처세의 명저로 행세하며, 내일의 주역들인 아이들에게 논술 필독서로 권하는가?
일본이 무력으로 독도를 침공한다는 가상적 설정으로 쓴 소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작가 김 진명은, “전설적 작가’들은 앞을 다투어『삼국지』를 편역하여 내고, 사회에서도『삼국지』를 읽지 않으면 이단아나 저능아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이러고서야 어떻게 저들의 동북공정을 격파하겠는가?” 라고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는 “16년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遼東 : 郡)의 서안평현(西安平縣: 지금의 安平洞 유역)을 습격하여 깨뜨렸다”라고만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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