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강국 ‘소프트웨어 몰락’ 불편한 진실
대기업의 착취가 ‘특허 역습’ 불렀다
한때 우리나라는 전 세계 소프트웨어 산업을 이끌 것이라 기대될 만큼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애플이나구글 등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수년 전부터 IT업계 일부 전문가는 이 같은 현실을 질타하며 암울한 미래를 예고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안철수 서울대 융합기술과학대학원 원장이다. 소프트웨어 산업을 홀대하는 대기업의 횡포를 비판한 안 원장의 일침은 지난 15일 구글이 모토로라 모빌리티(휴대폰부문·모토로라)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삼키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소프트웨어 산업 구조가 취약하도록 방치한 우리나라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판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됐을까.
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IT(정보기술) 강국이었다. 물론 지금도 이 표현이 완전히 무색해진 것은 아니다. 삼성과 LG 등 우리나라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IT 분야 점유율을 꾸준히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점유율이 예전 같지 않다. LG가 글로벌 시장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지 오래고 그나마 스마트폰 분야에서 애플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업체로 알려져 있는 삼성도 하드웨어에 집중돼 있다.
지금 글로벌 IT업계는 소프트웨어 싸움이 거세다. 연일 뜨거운 공방을 펼치고 있는 ‘특허전쟁’도 결국 소프트웨어 싸움인 셈이다. 래리 페이지 구글 CEO(최고경영자)는 모토로라 인수 후 “특허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모토로라를 인수했다”고 밝혔다. 모토로라가 가지고 있는 1만 7000여 개의 특허로 응용프로그램 등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페이지의 말이었다.
이에 앞서 구글은 IBM이 가지고 있던 특허권을 무더기로 사들이기도 했다. 세계적인 기업 IBM은 이미 2005년 PC사업을 접었다. 델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휴대폰부문 부동의 1위 노키아는 마이크로소프트(MS)에 인수될 것이라는 얘기가 끊임없이 나돌 정도로 위태로워졌다. 휴렛팩커드(HP)는 최근 PC사업부를 내놓은 대신 영국의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 오토노미를 인수했다. 과거 IT업계 강자들이 몰락하는 자리를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하는 업체들이 채워가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IT의 패권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바뀌고 있는 때 우리나라 IT업계의 현실을 직시한다면 그 미래가 암울할 수밖에 없다. 잘나가던 소프트웨어 산업을 스스로 황폐하게 만들고 하드웨어에만 집착해 기기의 스펙(사양)을 늘리는 데만 힘을 쏟아왔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판이라는 지적이다. ‘IT 강국’이라는 표현을 언제 또 부끄럽지 않게 쓸 수 있게 될지 알 수 없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그동안 하드웨어에 치중하는 우리나라의 IT산업의 허점을 여러 차례 찔러왔다. ‘베스트 팔로어'(Best Follower, 훌륭한 추격자)로서 무척 잘해왔고 손색이 없지만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시장 선도자)가 되지 못한 것을 꼬집었다. 미국의 유명 IT 대기자 월터 모스버그는 “삼성의 가장 큰 약점은 검색 광고에만 관심이 있는 구글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모스버그의 일침은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하면서 현실화할 공산이 짙어졌다.
지난 15일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했다는 소식은 국내 IT업계에 카운터펀치를 날린 격이었다. 이는 단순히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스마트폰 플랫폼으로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쓰고 있는 삼성과 LG 등 국내 업체들의 타격이 불가피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모토로라를 인수한 이상 자사의 스마트폰에 더욱 신경 쓸 것은 뻔하다. 여기에다 지금까지 무료로 쓰게 해주던 것을 하루아침에 철회하고 특허권을 주장하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삼성전자는 부랴부랴 독자 운영체제인 ‘바다’에 주력할 뜻을 내비치고 있다.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무선사업부)은 “바다의 기능 개선과 생태계 구축에 지속적으로 힘써 바다를 스마트폰 플랫폼의 한 축으로 성장시켜 나갈 것”이라고 야심차게 밝혔다. 하지만 현재 바다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1.9%에 불과하다. 1위 구글 안드로이드(43.4%)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치다. 성공 여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인 셈이다. LG전자와 팬택의 경우에는 아예 자체 운영체제가 없다.
안드로이드 개발자가 구글을 찾아가기 전 맨 처음 LG와 삼성을 찾아갔지만 무시당하고 퇴짜를 맞았다는 사실이 최근에 알려졌지만 업계에선 이미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 IT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이 소프트웨어 산업을 등한시한 대가가 앞으로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 예측하기 힘들다”며 위기감을 전했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이 처음부터 허약했던 것은 아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 벤처 붐이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우리나라의 소프트웨어 산업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줄 만큼 막강했다. 소수 인원이 모여 창업 열풍이 불었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몇날 며칠을 밤새워가며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던 그 시절을 업계에서는 황금기로 표현한다. 지금도 그 시절을 회상하며 씁쓸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완전히 딴판이다. 중소업체들이 중심이 돼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고 개발 인력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 당분간 인력 확충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와 KAIST 전산학과는 지난 몇 년간 정원을 줄여왔다. 그나마 줄인 정원조차 채우지 못한 채 늘 미달 상태였다. 둘 다 소프트웨어를 주로 공부하는 학과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최고 인기학과 중 하나였다.
현재 중소기업의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난은 매우 심각하다. 웬만한 인력은 대기업에 뺏기고 그나마 남아 있는 인력도 서로 데려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 IT업체 인사 담당자는 “비록 많은 연봉을 준다 해도 젊은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며 “30대 중에서는 숙련된 개발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라고 토로했다. “능력 좀 있다 싶으면 40이 훌쩍 넘어 있는 것이 예사”라고 덧붙였다.
더욱이 개발 인력들은 어느 한 곳에 매어 있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 즉 프리랜서 신분을 훨씬 선호한다는 것. 더 많은 수입에다 자유롭게 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굳이 한 회사에 취직해 책임질 일을 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보수를 적게 줄 수도 없다. 워낙 개발 인력을 구하기가 힘들다보니 많은 보수를 주고서라도 써야 하는 상황이다. 한 소규모 IT업체 대표는 “할 수 있는 일은 무척 많은데 인력이 없어 못하고 있을 정도”라며 상황의 심각성을 전했다.
대기업들이 뒤늦게 ‘소프트웨어 경쟁력 강화’를 외치며 인력 확보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자 중소업체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안 그래도 수년 전부터 안철수 원장을 비롯해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이 이렇게 망가진 탓이 대기업에 있다고 비판해왔다. 삼성 LG 등 대기업들이 중소업체와 벤처기업을 지원하고 인수·합병(M & A)하기보다 단가를 후려쳐 독점 계약하는 형식으로 울타리에 가두다 보니 소프트웨어 산업의 기가 확 죽었다는 것이다.
안철수 원장은 한 강연에서 “괜찮은 벤처가 있으면 M & A를 해야 벤처투자자가 돈을 회수할 수 있는데, 그냥 그 기업과 독점계약을 맺고 소위 ‘삼성 동물원’ ‘LG 동물원’ 식으로 동물원에 가두니까 벤처투자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또 “삼성이 고전하고 있는 것은 소프트웨어의 파트너가 없기 때문이다. 애플이나 구글 때문에 숱하게 만들어진 인터넷 벤처들이 그들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제는 꽤 유명해진 IT업계의 ‘동물원론’ ‘생태계론’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안 원장은 “(삼성이 동물원에 가두지 않고) 삼성소프트웨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면 지금처럼 고전하는 상황에 직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비록 소프트웨어 분야 우수 인력을 확충할 것을 지시했지만 현재로선 이마저도 간단치 않은 상황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핵심인력들은 이미 구글이나 애플 등 글로벌 업체에 뺏긴 상황”이라며 “지금 와서 얼마나 우수한 인력을 가려 뽑아 시장을 선도할지 의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 임원은 “이 같은 상황에서 길은 오직 하나, M & A뿐”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우리나라 대기업이 글로벌 업체를 인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력을 확충하는 일이 여의치 않고 특허전쟁에서 버티려면 결국 소프트웨어 분야 특허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업체를 인수하는 길뿐이다. 이 길이 가장 빠른 방법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M & A에 적극 나서라”고 지시한 것도 이 맥락에서 해석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는 엄청난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눈치 빠른 업체들이 벌써 몸값을 올리기 위해 영업망을 넓히기도 하고 특허권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애쓰기도 하며 몸값을 더 올려 받기 위해 버티기도 한다. 비록 IT업계는 아니지만 최근 삼성이 도시바메디컬시스템을 인수하기 위해 나섰지만 무산된 것이 좋은 예다. 무산된 이유가 바로 “도시바가 너무 높은 가격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IT업계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오히려 IT업계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IT업계 M & A 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는 인터디지털의 예가 대표적이다. 인터디지털은 무려 8800여 개의 특허를 보유한 기업으로 ‘특허 괴물’로 통한다. 구글, 애플 등도 모두 노리는 기업이다. 삼성도 인터디지털 인수를 검토했으나 최근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인수전에 참여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수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인터디지털이 다른 기업에 인수된다면 소프트웨어 관련 특허전쟁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다.
업계 관계자들은 지금이라도 소프트웨어 산업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를 망가뜨린 책임이 있는 정부와 대기업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대기업과 정부가 함께 안드로이드를 대체할 토종 OS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 개발자들을 관리하고 잘 키워내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한 IT업체 대표는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와 개발자들의 기를 살리는 것이 곧 소트프웨어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자 IT강국으로 다시 올라설 수 있는 토대”라고 강조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