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roshima

 재즈  Comments Off on Hiroshima
Apr 282011
 

Hiroshima – Island World

 Posted by at 7:18 PM

TeamViewer란 무엇일까?

 IT  Comments Off on TeamViewer란 무엇일까?
Apr 242011
 

TeamViewer – 인터넷을 통한 원격 접속 및 지원을 위한 올인원 솔루션
http://www.teamviewer.com/ko/index.aspx

 Posted by at 12:47 PM

TEDxDaedeokValley 개최 소식

 TED  Comments Off on TEDxDaedeokValley 개최 소식
Apr 222011
 

http://tedxdv.tistory.com//24?fb_comment_id=fbc_10150157688522212_15608798_10150158983897212#f30bf35eb

 

대한민국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심장이자 미래를 이끌고 있는 대덕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TEDx이벤트가 열립니다.

 

제 1회 TEDxDaedeokValley(TEDxDV)의 주제는 ‘과학과 인간’으로 모두 7명의 연사가 나서 대덕밸리의 성과물과 대덕밸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특히 이번 이벤트는 연사들의 강연을 듣는 컨퍼런스를 넘어 참가자간의 유쾌한 교류의 장을 지향합니다.

외국인을 위한 영문통역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 일시 : 2011년 5월 7일 오후 13:30~18:00 , After party :  18:00~20:00

■ 장소 : 대전시 유성구 가정동 176번지  UST 대강당

■ 오시는길 :

 

 

 

 

 

– 교통안내 : http://www.ust.ac.kr/html/university/intro/come.do

■ 참가비용 : 1만원 (티셔츠, 간식 등 제공)

소셜파티 : 1만원 (연사와 참가자들의 교류의 장, 간단한 다과 및 음료 제공)


TEDxDV의 참가신청 페이지는 25일(월) 오전 오픈되며 선착순으로 마감됩니다. 신청후 참가비가 입금돼야 최종 등록이 확정됩니다.

 

 Posted by at 11:59 AM

이통사, 주파수가 모자란다구?

 IT, 아이폰  Comments Off on 이통사, 주파수가 모자란다구?
Apr 182011
 

이통사, 주파수가 모자란다구? 주파수타령 하기 전에 요금제나 소비자를 위한 요금제로 바꾸시길 바란다.

http://media.daum.net/digital/view.html?cateid=1041&newsid=20110418143104167&p=munhwa

KT의 경우 요금제를 35,000원(150mb), 45,000원(500mb), 55,000(무제한)원 이런 식으로 약정하게 해놓고 무조건 그 요금제를 써야 하게 되어있다. 55,000 요금제 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기왕 요금 다 내는거 데이터를 무제한 쓰는 것에 부담이 없게 생각하고 낭비하게 된다. WIFI가 있어도 WIFI를 끄고 3G로 데이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 스마트폰을 쓰지만 데이터통신을 잘 쓰지 않는 사용자들에게도 요금은 꼬박꼬박 받는다. 35,000원 요금제에 가입한 사람은 혹시 제한보다 데이터를 더 쓰게 되면 높은 데이터요금을 물린다.

통신사는 소비자들의 무제한 데이터 사용에 대처하기 위해 많은 추가 설비투자를 해야 한다. 그래서 주파수타령을 하는데 주파수를 추가 할당하더라도 무제한 데이터 사용의 증가추세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다. 사용자들에게 데이터통신에 적당한 부담을 지우고 무제한 사용자들에게 누진 데이터요금을 받도록 재설계해야 한다. 또한 약정내용보다 데이터를 많이 썼다고 높은 데이터요금을 물리는 처벌도 납득하기 어려운 정책이다.

소비자와 통신사를 모두 위한 요금제라면 사용한만큼 요금을 물리도록 하고 헤비트래픽 사용자에게는 누진요금을 물리면 된다. 예를 들면 약정은 35,000원만 약정할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사용량에 따라 내게 하면 된다. 데이터 500mb를 썼으면 총액 45,000원을 내게 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요금을 줄이기 위해 사용자들은 데이터사용을 가능한만큼 줄이게 될 것이다.

데이터통신 많이 쓰도록 요금제를 설계해놓고 이익은 얻으면서 주파수가 모자란다고 엄살을 떠는 것을 보면 웃음만 나온다.

 Posted by at 4:12 PM

[퍼온글] Plan B가 없는 사회

 스크랩  Comments Off on [퍼온글] Plan B가 없는 사회
Apr 172011
 

http://edta450.blogspot.com/2011/04/plan-b.html

Plan B가 없는 사회

교수님,
저는 생화학자입니다. 학자는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설명한다고 하지요. 기계공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의 취향에 맞으실지는 모르지만, 요새 일어나는 일들을 제가 잘 알고 있는 언어로,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을 빌어서 해 볼까 합니다.
대장균이 들어있는 플라스크를 두 개 떠올려 주세요. 이 안에는 균들이 증식할 수 있는 영양소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이 플라스크를 따뜻한 곳에 두고, 적당히 흔들어주면서 하루정도가 지나면 플라스크가 대장균으로 우글우글하게 될겁니다.
자, 여기다가 작은 변화를 주겠습니다. 플라스크 하나에 페니실린*(사실 페니실린은 대장균에게는 잘 안 듣기때문에, 대신 동생뻘인 앰피실린같은 항생제를 씁니다. 뭐 편의상 페니실린이라고 하죠), 을 넣는 겁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네, 인류를 살린 기적의 물질이, 아마도 99%, 많으면 99.9%의 대장균을 죽여버릴겁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1%, 0.1%의 균들은 내성이라는 걸 획득합니다. 페니실린이라는 독한 항생제가 있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우수한’ 균이 되는 거지요. 일단 이런 내성균들만이 살아남게 되면, 그 균들은 페니실린을 비웃듯이 플라스크를 가득 채울 정도로 번식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중등교육은 벌써 저 페니실린 플라스크의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KAIST 입학생들은 이미 내성을 많이 획득한 상태지요. 그리고, ‘징벌적 등록금(저는 이 단어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작금의 상황을 잘 축약해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으로 대표되는 현재의 ‘개선된’ KAIST 체계는, 또 다른 거대한, 페니실린이 잔뜩 들어간 ‘독한 플라스크’입니다. 이런 시스템에서, 입학사정관제의 비극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내성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플라스크에, 다른 방면으로의 뛰어난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페니실린 내성은 별로 없을 것 같은 몇몇 인재들을, 이미 내성을 가지고 있는 99%와 함께 집어넣고 잘 살아보라고 한 격이니까요.
대학은 페니실린 플라스크가 아닙니다
자, 원래의 플라스크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진짜 재미있는 실험은 이제부터거든요. 두 플라스크-정상균과 내성균-의 대장균들을 적당한 방법으로 표시를 한 뒤, 자연적으로 대장균이 우글우글하는 장소에다 풀어놓습니다. 하수처리장쯤이 좋겠네요. 그리고 일정한 시간들을 기다린 뒤, 얼마나 이 플라스크의 균들이 하수처리장을 장악하고 있는지 보는 겁니다. 과연 어떻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페니실린 없는 배지에서 자란 균들이 자연상태에서 훨씬 더 잘 경쟁하고 살아남습니다. 제가 이 실험을 직접 해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내성균과 비내성균간의 경쟁에서, 선택압이 없다면 비내성균이 승리하는 경우는 상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획득된 내성이 ‘훌륭할수록’, 내성균들은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경쟁력을 더 크게 상실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내성균은, 내성이라는 생존에 유리한 강력한 무기를 획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결함균이기 때문입니다.
페니실린 내성균은 균 내부로 들어오는 페니실린-세포벽이 형성되는 걸 막아서 세포가 분열될 때 터져버리게 만듭니다-을 무력화시키는 효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력한 무기지요? 하지만, 페니실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환경이라면, 이 무기는 짐이 될 뿐입니다. 왜냐구요? 개개의 생물체에게 주어진 자원과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페니실린이 가득한 플라스크 안에서는 다른 생존에 덜 필수적인 요소들을 다 버리더라도, 페니실린 내성 유전자에만 매달린 균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KAIST의 졸업생들이 지금의 시스템과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지금 KAIST가 펴고 있는 다양한 정책들을 어느 정도 정당화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불행히도(혹은 다행히도), 학생들이 학부를 졸업한 뒤 맞딱드리게 되는 환경은, 페니실린 잔뜩 들어간 또다른 플라스크가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하수처리장에 좀 많이 가깝다는 데에 지금의 문제가 있습니다. 공부 잘 하고 학점만 잘 받아서 인생 편히 잘 살 수 있으면, 그것도 뭐 좀 심심할지도 모르겠지만 훌륭한 선택이겠죠. 근데 KAIST의 구성원 모두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생존영역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플라스크 밖에서, 페니실린 내성은 별 쓸모가 없는 장식정도가 아니라, 생존성을 좀먹는 입니다.
대학의 학부과정은 완성된 인재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졸업생이 사회에 진출을 하건, 더 심화된 연구를 위해 대학원으로 진학하건 그들의 여정은 거기에서 비로소 시작입니다. 그들에게,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주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필수적인 교양을 심어주는 것이 학부과정이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더욱이 창의적인 과학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국민의 세금을 쓰고 있는 KAIST는, 특정한 방향으로 선택압을 조절(또는 조작)함으로써 그들이 학점뿐만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생존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됩니다.
Plan B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
제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만 저도 학부때는 꽤 공부 잘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전공수업을 당겨서 듣고, 2학년이 끝날때쯤에는 졸업에 필요한 수업들은 얼추 다 채울만큼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겨우겨우 진도나 따라가면서 들었던 수업들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도대체 뭘 배우는 지도 모르겠고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방황했을 때, 학점 신경쓰지 않고 들었던 다양한 수업들이나, 대학생이기때문에 할 수 있었던 다양한 일들이 없었다면, 학점은 조금 더 잘 받았을지언정 아직도 계속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메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만약 당장 학점이 빵꾸나면 수십만원씩 ‘징벌적 등록금’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졸업을 앞둔 화학과 학부생이 약대 전공수업을 기웃거리다가 C를 받는 시도따위는 해 볼 수 없었겠죠. 지금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도, 전공 공부와는 하등 관계없을 것 같은 ‘인간생명의 과학적 이해’ 같은 수업을 들으면서, 인간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를 어떻게 하면 생물학의 수준으로 설명하고,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쉬운 말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배웠기 때문입니다. 요새 통섭이다 학제간 연구다 또 새로운 바람이 부는데, 어느 누구도 모든 분야에 처음부터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리고, 페니실린 플라스크는 generalist를(그리고 많은 경우에는 specialist도) 키울 수 없습니다.
어느새부턴가 우리 사회가 plan B를 허용하지 않게 바뀌어 왔습니다. 단순히 재도전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으로 최고의 답인 plan A가 존재하고, 그 plan A를 따라가지 못한 사람을 낙오자 취급하는 사회에서, 그것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해야하는 것이 대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적 다양성이야말로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니까요. KAIST를, 오랫동안 몸담고 계셨던 MIT와 같은 수준으로 만들고 싶다는 교수님의 열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MIT가 학생들에 대해 높은 수준을 기대하고 있고, 학생들이 받는 부담감도 높으며, 자살과 같은 불행한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KAIST 학부를 MIT 학부처럼 만들고 싶다면, 우선 MIT에 jazz 전공과 연극 전공이 있고, 학생 동아리인 MIT orchestra는 해마다 수준급의 연주를 들려주며, MIT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교수가 전자공학이나 화학이 아닌 언어학의 거두로, 동시에 정부와 기득권세력에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치 않는 노엄 촘스키라는 사실부터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랫만에 바위에 쓴 글.

 

 Posted by at 12:28 PM

스티브 잡스,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

 TED, 강연, 유튜브  Comments Off on 스티브 잡스,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
Apr 142011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그 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 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번역자 : 미상

 Posted by at 7:32 PM

Lee Ritenour

 재즈  Comments Off on Lee Ritenour
Apr 142011
 

Lee Ritenour – Night Rhythms

Lee Ritenour – Papa was a Rolling Stone

lee ritenour- is it you

Lee Ritenour & Bob James – Westchester Lady

 Posted by at 6:16 AM

Larry Carlton

 재즈  Comments Off on Larry Carlton
Apr 142011
 

Larry Carlton – Bubble Shuffle (Live)

Larry Carlton & Lee Ritenour – Room 335 (Live)

Larry Carlton – I’ll Be Around

 Posted by at 6:10 AM

Dave Grusin

 재즈  Comments Off on Dave Grusin
Apr 142011
 

David Sanborn,Dave Grusin – Jo Ann’s Song

Dave Grusin – Mountain Dance (Live)

Dave Grusin – Bossa Baroque

Lee Ritenour & Dave Grusin – Smoke ‘n’ mirrors

 Posted by at 5:59 AM

Danny Lerman

 재즈  Comments Off on Danny Lerman
Apr 142011
 

Danny Lerman – Gotcha

Danny Lerman – Meow Baby (Live)

Danny Lerman – Too Hot (Live)

 Posted by at 5:55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