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속국일본사 머릿말
역사는 실증 과학이고 특히 시간의 과학이다.
백제사와 일본사는 그래서 고대 기록과 실증에 의해서 다시 쓰여져야만 한다. 현대에 왜곡된 백제의 잘못된 지리를 당대의 기록인 일본 책들과 당대 일본의 각 곳 <신사 기록>들과 천황들의 <고분 묘비 연대>의 실증, 그리고 일본의 고대 비서秘書인 [수진전秀眞傳] 등의 보완으로 바로잡는다.
[수진전]은 신대문자神代文字 10여만자로 적힌 책이다. 경행천황 때에 기록되어 대물주신의 가문에 전해져왔다고 한다.
그림 23) 수진전 겉장
천황 고분 묘비 연대 해석문은 일본학자 이케다池田仁三씨의 [대화고분릉주大和古墳陵主たち]과 [컴퓨터화상해석畵像解析]에 의존하였다.
1990년대에 이루어진 천황 등의 고분 능비에 대한 연대 발견은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엄청난 역사 조작들을 극명하게 밝혀준다.
현재 일본 천황 역사는 거의 공식적으로 기원전 660년의 신무천황神武天皇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그 신무천황의 고조할머니로서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神인 아마테라스의 기록에 신라와 고구려가 등장하고 고주몽의 주몽검이 등장한다. 따라서 신라, 고구려 역사가 무려 1000년이나 상향 조정될 수 없다면, 기원전의 일본 공식 역사는 세계적인 허구 역사다.
서기 157년, 신라에서 연오랑延烏郞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일본에 건너가서 연오랑은 태양신을 모시는 아마테라스로, 즉 천조대신天照大神이 되고, 세오녀는 열두 신녀神女의 우두머리인 천조대어(미)신天照大御(=美)神이 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연오랑이 일본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면서 일본의 어느 왕인지를 몰랐으니, 이는 조작된 일본사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연오랑의 연오延烏는 천황과 신관들의 관인 오모자烏帽子를 의미하고, 세오녀가 천조대어신의 일본 이름인 세오리츠히메瀨織津比賣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또한 서기 160년에 백제 6대 초고대왕肖古大王(재위 166~214)이 일본을 정벌하니 아마테라스오미를 비롯한 12신녀 중에서 8신녀가 초고대왕의 포로가 되어 8명의 자식을 낳아준다. 초고대왕을 일본에서는 건국신 스사노오須佐之男라고 했는데, 일본 최초 천황인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증조부다.
세오녀細烏女는 큐슈九州로 탈출하여 여인왕국을 세워서 왜여왕 히미코卑彌呼(~247)가 되었고, 초고대왕은 시조검인 주몽검都牟劍(=쿠사나기쯔루기草那藝之劍)을 내려주어서 세오녀에게 제사지내도록 하였고 지금까지 주몽검이 전해온다.
247년 왜여왕 히미코卑彌呼가 100여세로 죽자 그녀의 증손자인 칠삭동이 난승미難升美가 대화大和에서 일본 팔도의 왕권을 놓고 구수대왕仇須大王(~234)의 아들들과 쟁패하였다.
초고대왕은 일본에서 스사노오須佐之男 신인데,[일본서기]에서 신라에서 왔다고 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구수대왕은 대국주신이라고 하는데 대국주신사大國主神社 기록에는 그가 고구려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기원전 660년이라고 조작된 칠뜨기 난승미難升美가 247년에 신무천황神武天皇(194~256)이 되었으나, 군웅들의 도전이 지속되고 257년에는 13살의 왜여왕 일여壹與(244~283)를 세워서 다시 평화를 찾는다. 이때 할거한 군웅들은 신무천황의 아들 수정천황綏靖天皇(243~292)과 초고대왕의 손자 안녕천황安寧天皇(222~270), 구수대왕의 아들 의덕천황懿德天皇(180~244)과 사반대왕沙伴大王, 즉 효소천황孝昭天皇(202~268), 그리고 사반대왕의 아들 효안천황孝安天皇(222~298)과 효원천황孝元天皇(228~273) 등이었다.
285년 만주 요서遼西 대릉하大凌河(고대 이름 백랑수白浪水)에서 부여국왕 의려依慮가 선비족 모용외에게 패퇴하여 일본으로 가서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이 되었다. 300년에는 의려의 뒤를 이어서, 요동遼東에서 새로이 부여국왕이 되었던 의려의 아들 의라왕依羅王마저도 부여 유민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가 숭신천황崇神天皇(277~318)이 되었다.
그러자 백제 걸대왕契大王(273~359)과 근초고왕자近肖古王子(295~375)가 도일하여 일본을 재평정하고 각각 경행천황景行天皇과 일본무존日本武尊이 되었다.
백제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320~394)을 모시는 구도신사久度神社가 남아있고, 일본무존 등 백제 4왕을 모시는 평야신사平野神社에서는 일본무존이 근구수대왕의 부왕이라 전하니, 바로 근초고대왕인 것이다. 근구수대왕은 일본의 저 유명한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되었다.
광개토호태왕이 대마도에 임나연방을 세워 대마도와 큐슈九州 등 10국을 통치하니 그의 아들 고진高珍이 큐슈고구려九州高句麗의 왕이 되어, 구루메시久留未市 고우라신사高良神社에 기록을 남겼고, 그는 결국 인덕천황仁德天皇(337~419)을 죽이고 대화大和에 들어가서 윤공천황允恭天皇(393~453)이 되었다.
그후 개로대왕蓋鹵大王(429~475)이 도래하여 458년에 고구려계 웅략천황雄略天皇(417~479)을 몰아내고 일본을 다시 백제에 복속시켰다. 무령대왕武寧大王(462~523)은 일본 큐슈九州를 떼어다가 백제 영토로 병합하였다. 이후 6세기부터 7세기말까지 큐슈는 백제 땅이었다.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백제왕 선광百濟王善光이 일본의 30대 민달천황敏達天皇(538~585)의 후손이라고 하고, 동시에 같은 책에서 백제왕선광을 백제 의자대왕義慈大王(593~660)의 아들이라 하였다. 결국 민달천황을 비롯한 일본 천황은 모두가 백제 왕손인 것이다. 기실로 민달천황은 백제 성명대왕聖明大王(~554)의 아들이었다.
백제 의자대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일컬었다. 8세 때인 서기 600년에 구주백제의 왕에 올라 스스로 왜왕이라고 국서를 수나라에 보내서 “해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지는 나라의 천자에게”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고, 큐슈에서 처음 12관위제를 만들어 시행하였다.
이때 오사카 대화大和의 성덕태자聖德太子가 큐슈를 빼앗으려하니 의자대왕은 거꾸로 대화를 점령하여 603년에 일본에도 12관위제官位制를 시행했다. 그리고 629년에는 의자왕 스스로 대화의 34대 서명천황舒明天皇이 되고, 641년에는 백제대왕에 오르니, 이때 대화조정에는 그의 왕비인 황극천황皇極天皇(594~661)과 제명천황齊明天皇(603~663)이 차례로 즉위하여 의자대왕 부부가 함께 백제와 일본을 통치하였다.
백제가 망한 뒤에 백제 부흥을 시도하던 부여풍장扶餘豊璋(622~686)은 백촌강에서 패전하고 일본에 돌아가서 40대 천무천황天武天皇이 된 것이 그의 황극천황 추도시追悼詩에 나타난다.
그런데 천무천황의 아들인 사인친왕舍人親王(676~735)은 [일본서기]를 지어서 역사를 왜곡 조작하니, 부모국인 백제의 통치를 역사에서 삭제하고 호적을 파내며 환부역조換父易祖하였고 오늘까지 1300년간 일본 국민을 속여오고 있다. 그 결과, 일본의 후세들을 대대로 자폐적, 망상적 민족으로 길러내고 있으니, 오늘날 세계 속에 화합할 길이 없어 안타깝다.
진실이 때로는 아프지만 무엇보다 소중하고 때로는 더 재미있기도 한 것이다.
이 책에서 새로 발굴되는 일본 역사는 그래서 일본인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민족의 진정한 자존심은 진실의 토대에서 자라나서 서로 존중받게 되는 것이다. 거짓된 역사 위에서, 세계와 고립되는 헛된 자만심을 키워서는 스스로의 미래를 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니 오늘 겸허하게 배우고 깨우침의 길을 따라서 동아시아 제국의 번영에 함께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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