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관련 사서 일왕실 도서관에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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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242011
 

일제시대 관련 책자 분류작업 박창화씨
해방후 최기철 서울대 명예교수에 증언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군조선’의 실체를 알릴 자료가 어딘가에 쌓여 있다면
우리 상고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을 것이다.
상고사에 관한 국내의 기록은 수많은 전란(戰亂)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삼국유사 등 일부 서책에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에 관한 책들을 몽땅 약탈해 태워버렸다는 설까지 있다.

해방 후 출간된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나 ‘제헌국회사’ 등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명령에 의해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말까지 1년2개월 동안
고사서 51종20여만권을 약탈 했으며,
‘단군조선’에 관한 서적 대부분이 이때 소실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본 궁내청 쇼료부(書陵部:일명 황실도서관)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 관심을 끈다.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자료에 목말라 하는 상고사 연구자들에겐
‘단비’와 같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 주장을 한 사람은 1962년에 사망한 박창화(朴昌和) 씨,
1933년부터 12년간 쇼료부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던 朴 씨는 해방 후 이 사실을 최기철(崔基哲) 서울대 명예교수(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게 털어놨으며, 최근 崔 교수가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1900년초 한성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충북 영동(永同)소학교와
배재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친 朴 씨는
한국상고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쇼료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게 됐다고 한다.
崔 교수는 “내가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45년에 朴 씨를 역사교사로 채용했으며,
그 후 쇼료부에 단군조선 관련 서적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으나
나와 전공이 무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며
“당시 朴 씨가 쇼료부에서 읽었던 단군조선 관련 서적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으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쇼료부 소장본들은 목록으로 정리된 것들만 접근이 가능해
朴 씨의 말이 사실이라도 확인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혹시 새로운 한ㆍ일 교류의 시대를 맞아 일본측이 쇼료부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면 몰라도.

김국진 기자
중앙일보 1999년 12월 6일자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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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ns and the forgotte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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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The Huns and the forgotten Korean

(훈족과 잊혀진 한국인)

 

(American Cable TV ; The Learning Channel)

 

“Atilla the Hun”

(1997 summer & Autumn)

 

Europeans called them “Huns.” Originating From the main land of Korea, they invaded the Roman Empire during the 4th century.

 

유럽인들은 그들을 “훈족(Huns)”이라고 불렀다. 고려(Korea; 고구려의 준말) 지역에서 일어난 그들은 4세기 중 로마 제국을 침입했다.

 

Ancient Greeks historian recorded them, Scythians, and later European called them Mongols.

 

고대 그리스 역사가는 그들을 스키타이인(Scythians)이라고 기록했으며 후에 유럽인들은 그들을 몽골인이라고 불렀다.

 

Around early 4th century, the temperature fell lower than usual for many years in Far East Asia. It caused grains not to ripen, grazing grass land for animals was scarce.

 

4세기 초 무렵, 극동아시아에서는 수년 동안 기온이 평시보다 떨어지는 이상기온현상이 발생하였는데, 그로 인해 곡식은 여물지 못하고 가축들에게 풀을 뜯어 먹일 수 있는 땅은 부족해졌다.

 

For these reasons a large number of semi-nomadic tribes left from what is known today as the Korean mainland to Eastern Manchuria.

 

이런 이유로 인해 상당수의 반(半)유목 종족은 오늘날 Korea라고 알려져 있는 한반도 지역에서 만주 동부로 떠나게 되었다. (번역자 주: 현재의 한국영토를 기준으로 삼은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실제 도래지 면에서는 사실과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Gathering other tribes along the way they proceeded to the Central Asiatic step. From there, the mass of tribes went westward.

 

이동 중에 만난 다른 이민족들을 규합하면서 그들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초원 지대로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종족 대부분은 그곳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Around AD 370, these nomadic people arrived upon the Horizon of the Roman Empire. They established a kingdom along the Danube, on the prairies that are present day Hungary.

 

서기 370년경 이 유목민들은 로마제국의 국경 지역에 도착하여 다뉴브 강 (독일 남서부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흘러 흑해로 들어감, 독일명 ‘도나우강’)을 따라 오늘날의 헝가리 일대인 대초원 위에 그들의 왕국을 세웠다.

 

About AD 443, Attila, the son of King Ruga assassinated his brother Bleda and united all the Hun tribes. He lead the warriors on-to ruthless and savage conquests; destroying anything in sight, looting and merciless killing of innocent people.

 

서기 443년경, 루가왕의 아들 아틸라는 그의 형제 블레다를 암살하고 전(全) 훈족을 통일하였다. 그는 전사들을 이끌고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정복을 감행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약탈을 하였을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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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완전히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쓴 글이니 이 점을 잘 참작하기 바람)

 

He conquered Germany, Eastern Europe and most of southeastern Europe.

 

그는 독일, 유럽 동부 및 유럽 남서부 일대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였다.

 

The Huns were superior horseman and combined with their archery skills were the bane of the Romans ……,

 

훈족은 기마술에 능한 이들로 궁술 또한 겸비하였는데, 그것은 로마인들을 파멸시킨 큰 원인이었다.

(번역자 주: 로마제국의 흥망사의 한 부분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의 반란으로 멸망했다는 점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죠. 다만 훈족도 게르만 족과 함께 로마 제국의 멸망에 일조한 파멸의 한 원인이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They used a short, inverted bow made from few different materials glued together. An iron arrow head was able to pierce any European armor.

 

그들은 여러 가지 재료들이 접착된 복합 재료로 제작된 짧은 역궁(逆弓; 맥궁!)을 사용하였으며, 쇠로 된 화살촉은 유럽 병사들의 모든 갑옷을 관통시킬 수 있었다.

 

Their horses were short in height, but had speed and endurance, they were also agile and smart.

 

그들의 말은 키는 작았지만 빠른 속도와 강한 지구력이 있었으며, 동작이 민첩하고 영민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우리 민족도 고려 후기에 페르시아에서 수입된 대완구라는 키가 큰 말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조랑말을 기병들이 주로 사용했고 이런 경향은 구한말까지도 계속됩니다. 조랑말 타고 적진을 호령하는 우리 기병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길…)

 

Hun warriors, while twisting their upper body, were able to shoot arrows behind them while their horses were running forward (referring picture).

 

훈족 전사들은 말이 전방으로 달리고 있는 중에도 마상에서 상체를 뒤로 틀어 뒤 쫓아 오고 있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그림 참조요).

 

(번역자 주: 위 ‘그림 참조요’의 그림은 현 중국 집안현 무용총 주실 서벽의 수렵도에 나오는 고구려 기마궁병의 모습과 완전 일치합니다. Orullee Han님의 주; 고구려 기마병 그림은 집안현 그림으로, 다큐에 나오는 인물들의 복장과 거의 같습니다.)

 

When Atilla was young, his father Ruga exchanged his son with a young son of a prominent Roman family, his name was Aetius.

 

아틸라가 어렸을 때 그의 부친 루가는 자신의 아들을 한 유명한 로마 가문의 어린 아들, 즉 그 Aetius라는 이름의 아이와 맞바꾸었다.

 

For ten years Atilla was educated in the Roman court vise versa Aetius from the Hun kingdom. Atilla was probably the first western educated Mongol in its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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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간 아틸라는 로마 왕실에서 교육을 받았고 동시에 Aetius는 훈족의 왕궁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틸라는 아마도 몽골족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서구 교육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번역자 주; 이 문장도 서양인의 입장과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니 각별한 주의를 요함)

 

Later these 2 men would confront each other in Gaul (today’s France), in 451. Atilla would go on to lose this battle and invaded Italy in 452 with Germanic tribes.

 

이들 두 사람은 이후 451년에 Gaul(오늘날의 프랑스)에서 서로 맞부딪히게 되는데, 아틸라는 계속해서 이 전투에 패배하게 되며, 452년에는 게르만족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침략하였다.

 

His army advanced to Venice (today’s) and negotiated with a Roman representative Pope Leo for 10 hours.

 

그의 군대는 오늘날의 베니스로 진격하여 로마 대표 교황 Leo와 장장 10시간 동안 협상을 벌였다.

 

All the while on horse back, Atilla received tribute from Rome, and would thereafter retreat from Italy. Pope Leo received the title “The great” from the church for his successful negotiations with Atilla.

 

마상에서 아틸라는 로마로부터 공물을 받았으며 그 후 이탈리아로부터 철군하게 된다. 교황 레오는 아틸라와의 이 성공적인 협상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를 받았다.

 

Atilla married to a German princess, Ideco in AD 453. After his wedding celebration, he died that wedding night, possibly from alcohol poisoning.

 

아틸라는 453년에 독일공주 Ideco와 결혼을 하였다. 그는 불행히도 결혼식 날 밤에 죽게 되는데 아마도 그의 사인은 주독(酒毒)인 듯 하다.

 

His people dammed the Danube River and buried him in the middle of the river. They opened the dam for no on-e, so that none could ever find his grave.

 

그의 백성들은 다른 이들이 묘지를 찾지 못하도록 다뉴브 강을 둑으로 막은 뒤 그의 시신을 강 중앙부에 매장하였다. 그들은 그 댐을 어떤 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 그 누구도 그의 무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After his death, the Hun kingdom crumbled and his people scattered from the Europe. He would be known as “the scourge of god” by the Roman Empire because of his cruel acts.

 

그가 죽은 후 훈(Hun) 왕국은 멸망하였으며 그의 백성들 또한 유럽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생전의 잔인한 행위로 인해 그의 죽음은 로마제국 사람들로부터 “신의 천벌”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The Huns left a number of legacies in Europe especially the Chateau area of France, all children born there have a blue round mark in their hip as the Mongolians do today. The country of Hungary got its name from the Huns, to commemorate the Hun Kingdom.

 

훈족은 유럽에, 특히 프랑스 Chateau 지역에 많은 유산을 남겼으며, 그곳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아이들은 엉덩이 부위에 오늘날 몽골인들과 동일한 파란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다. 헝가리라는 국명은 훈 왕국을 기념하기 위해 Huns에서 비롯된 것이다.

 

(번역자 주; 여기서 짚고 넘어 가고 싶은 부분은 몽고 반점을 가진 민족은 우리 민족과 몽고족 이외에도 아메리카 인디안, 유대인 등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서로 인종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During the world war ll allied forces refer to Germans as Hun because of their relationship with Huns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Funeral cultures of Europe are also deeply influenced from the Hun.

 

세계 제 2차 대전 기간 중 연합군은 역사적으로 독일인들의 4세기, 5세기에 훈족과의 관련성 때문에 독일인들을 훈족으로 부른다. 유럽의 장례문화 역시 훈족으로부터 깊이 영향 받은 것이다.

 

 

ChunMaChong Gold Crown Kyungju, Korea

 

 

Kyodong Gold Crown Kyungju, Korea Dia 1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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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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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 심백강 –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발췌)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 禹왕)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Posted by at 8:14 AM

부여족과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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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비잔틴시대의 기록화.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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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역사  Comments Off on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Jul 112011
 

(민족사학의 큰 스승 “한암당 이유립 선생”)

(편집부)

지구상에 난무하는 사건 하나 하나가 모두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건의 미치는 파장과 영향력이
역사가들에 의해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어야
비로소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역사가들의 임무는
바로 어떤 사건을 역사적인 것과 그 밖의 것으로 구분짓는 데서 그 위력이 잘 드러난다.

따라서
이 역사가가 어떤 사고방식(여기서는 사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사건의 취사선택과 평가는 전혀 달라지게 되는데
민족사관의 경우 역사발전의 주체를 ‘민족’이란 단위로 인식하고
모든 판단의 기준을 ‘민족’에 두고 있는 사관을 말한다.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을 민족사학자라고 말하는데,
이들의 생각은 개인보다는 ‘민족’이란 단위의 생존, 발전, 영광을 우선한다.

우리 겨레에게 있어 민족사관의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 문화와 민속이 이 민족을 단위로 형성 발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민족사학의 입장에서
우리 민족사의 가교역할을 해온 민족사학자들을 시대를 거슬러 재조명 해본다.

우리 사학,
즉 한국사학의 진로 설정에 참고가 될 것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 )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세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
「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 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24세인 1930년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 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1942년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등
12항을 이유로 강제 폐쇄 당했다.

39세인 1945년
「단학회(檀學會)」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69세인 1975년 5월 8일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東源論)》을
미국의 하버드. 워싱턴. 콜롬비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 갔다.

70세인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제씨와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하신 이듬해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1986년이니 이제 15년을 지나고 있다.

다행히 생존해 계실 때 교류하던 인사들이 상당수 있어
그분들로부터 한암당 선생에 대하여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박정학 한배달 치우학회장이 전하는 내용이다)

박정학씨는 한암당 선생을 만난 기억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일로 3가지를 꼽는다.

그 첫째는 빼어난 기억력이다.

한암당 선생과 교류하던 당시
“10여세 때 들었던 내용을 확인하고 싶으니 이러저러한 책들을 구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필요한가를 되물었더니
“옛날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은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40여종의 도서 80여 곳에 대한 복사를 요청받고 국립도서관을 방문.
상당수 책이 귀중본. 희귀본이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것임을 알게 되고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더니 도서를 찾던 담당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도대체 이런 책을 누가 보느냐?”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지하실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이런 책이 수북히 쌓여있다” 며
요청한 자료를 준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원하는 책의 복사부분을 상자에 담아 전해드렸다
(그러나 이 상자를 뜯어보지도 못하고 선생님은 세상을 뜨셨다).

아마 한번 들었던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대한독립소년단 시절 전령으로 활약할 때는 편지대신 외워서 전달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속독에 의한 뛰어난 독서력이다.

한 번은 조선왕조실록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마찬가지로 과거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책을 구해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배달 창립 멤버인 모 회사 사장에게 부탁하여 사장이 직접 책을 전해드렸다.

책을 받아 본 선생님은 매우 기분 좋아하시며 책을 펼쳐 보시더니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겨 읽으면서도
필요한 부분을 정확하게 찾아내 쪽지를 끼워 표시해 놓고 원고를 완성하는데 사용하셨다.

순 한문으로 된 책을 그렇게 빠르게 읽는 것은 처음 보았으며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셋째는 빼어난 건강이다.

79세의 노인이 젊은 제자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데
젊은 제자들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산을 오르셨다.
몸이 아주 가벼워 보였다.

< 운초 계연수 선생과의 만남 >

계연수 선생은 호를 운초라고도 하고 일시당(一始堂)이라고도 하는데.
한암당 선생 아버지와는 광복운동을 함께한 관계로 어릴 때부터 가까이서 자주 접해온 사이였다.

그러던 1943년 어느날.
계연수 선생이 집으로 찾아와서 어린 이유립을 부르더니
“너는 머리가 좋고 하니 네가 우리 역사를 공부해라”고 부탁 겸 타이르셨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정치에 더 관심이 있던 이유립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3일 후 목이 잘린 계연수 선생의 시신이 대동강변에서 발견되었다.

불과 몇일전에 자신에게 일렀던 말들이 선생의 유언처럼 들리고.
마침내 운명처럼 ‘우리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틈틈이 계연수 선생에게 들었던 이야기에다
신채호. 이덕수 선생들과 교류하면서 전해 듣는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하였다.

(한암당 선생의 민족사 체계)

“서로의 원수를 잊고
세나라(고구려. 백제. 신라)가 힘을 함쳐 당나라를 쳐 없애자는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장군의 제의는 무시되고.
한, 단, 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 고려로 이어지는 국통, 국학, 사관이 올바로 풀리지 못하고…”

이 말은 한암당 선생의 사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암당 선생의 민족사에 대한 체계는,
물론 한암당 선생의 수많은 논저를 읽고 난 후에야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다음의 몇 가지 주장에서 그 맥락을 읽을 수가 있다.

(1)
우리 민족의 정통성은
한국에서 이주해온 한웅천왕의 배달 건국으로부터 비롯하여
단군조선-북부여(원시고구려)-고구려(본고구려)-대진(大震-중고구려)-고려(후고구려)-조선-임시정부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2)
세계문명은 서(西)에서 동(東)으로 온 것이 아니라
동(東)에서 서(西)로 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민족사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에 있었던 한웅천왕의 태백산 천강과 함께 이룩된
신시개천에서 찾아야 한다.

(4) 단군조선은 엄연히 실존했던 역사이며,
아사달시대(1048년),
백악산 아사달시대(860년),
장당경시대(188년)를 통해 2096년의 역년을 셈할 수 있고,

통치방법으로 신한(진한), 말한(마한), 불한(변한)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본 뜬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적용되었다.

(5) 고구려 건국 연도는 북부여 원년(신시개천 3659년)으로부터 기산되며
보장제(帝)의 27년까지는 907년이 되지만(신시개천 4565년)
해모수 8년(신시개천 3666년)의 부여 고향 수복으로부터는 정확히 900년이 된다.

(6) 기자조선은 환작(幻作)된 것으로서 민족의 정통 역사로 볼 수 없다.

(7)
위만은 요예(遼濊)의 변경을 침략하여 지금의 창려(昌黎-하북성)를 점거해
조선이라고 잠칭하고 있던 떼도적의 두목에 불과하며,
의문 투성이의 ‘한사군’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8)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성제의 위업으로 이룩된 영락대통일은
따무르자주의(漢寇擊退完我舊彊)를 완전히 성취한 것인 동시에 민족사의 영원한 이상을 제시해 준다.

☞ 한구격퇴완아구강(漢寇擊退完我舊彊) : 한나라 도적들을 퇴거하고 온전한 우리의 옛 강토를 되찾자

(9)
신라 ‘삼국통일’이란 허구에 찬것이며,
‘발해삼인당일호(발해 사람 셋이 모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해낸다)’에서도 나타나는
대진의 웅혼한 기상에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

(10)
한양 조선은 신시개천 5816년(1919년)에 종식된 것으로 보며
동년 4월부터 옛 고구려 송강현(지금의 상해)에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법통을 잇는다.

물론 이러한 주장외에도 광범위한 사론(史論)이 펼쳐져 있지만
더 요약한다면

‘고구려 중심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 천부경,
– 삼일신고,
– 참전계경,
– 신시개천경(단군고기),
– 광개토지경(비문),
– 훈민정음경(반포문)을

우리정신. 역사를 찾은 근본서적으로 중요시 하였다.

한암당 선생과【한단고기】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일생을 통털어 최대의 민족사적인 사건은
【한단고기(桓檀古記)】와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사를 논할 때 불가분『한단고기』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럴 때마다 한암당선생은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되고 만다.

『한단고기』의 탄생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

– ‘삼성기전 상편’. ‘삼성기전 하편’.
– ‘단군세기’.
– ‘북부여기’ 상. 하.
– ‘태백일사’를 한데 묶어
『한단고기』라는 제목으로 30부를 발간한 데서 비롯된다.

그 가운데 1부가 한암당 선생에게 전해져 칠십년 대 초반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의정부에서 셋방을 얻어 있다가
너무나 어려워 군산으로 잠깐 내려가 있었다.

그 사이 주인은.
방세도 못내는 노인이 어디 갔는지 나타나지도 않자 책을 내다 팔아 버렸다.
이때 그『한단고기』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한암당 선생은【한단고기】1권 정도는 이병도씨 집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음)

급기야 기억을 되살려【한단고기】를 다시 써야 했다.

워낙 공부를 많이 하고 어려서 전령으로 활동할 때 문건보다는 외워 전달했던 것이나
속독으로 훈련된 탓에 새로이 한단고기 내용을 기억하여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후 잘못된 부분이 몇 군데 제자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맞을 거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선생의 인품을 의심하는 사람은(식민사학자들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문건은
1970년대 후반〈한단고기 정해〉라는 제목으로
서문까지 완성된 상태에서 출판사 선정을 위한 협의 도중

당시 월간《자유》의 발행인인 박창암으로부터
‘출판에 도움이 될 재일교포가 있으니 원고를 달라’는 요청을 받고 건네졌으며.
불과 3일이 지나지 않아 박창암으로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원고를 돌려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에서『한단고기』초판이 나왔는데,
일부 내용의 해설이 임의로 바꾸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초판은 우리나라에 전해져 제일 먼저 김은수 선생의 번역판이 나왔고.
이유립 선생의 ‘한단고기정해’가 대배달 민족사에 실리게 되었으며
이어서 임승국선생의 한단고기.
강수원 선생의 한단고기.
85년 배달문화원에서 발행한 한단고기,
오정윤 선생의 한단고기(도서출판 창해 刊) 등이 연이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 이 외에도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83년에 발행한 ‘한단고기’ 필사본.
– 1979년 조병윤씨가 오형기씨에게 부탁하여 필사한 ‘한단고기’
(광오이해사 발행. 100부 한정판. 이 내용이 일본인 ‘녹도 승’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일본인 ‘녹도 승’이 쓴 ‘한반도의 우가야왕조사-한단고기’등이
한배달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 한암당 이유립과 (사)한배달 >

(역시 이유립 선생을 직접 만났고 (사)한배달의 설립에 결정적인 산파역할을 맡았던 박정학(치우학회장)씨의 증언이다)

1982년에 한미 연합 사령부 교양강좌 때 만났던, 한암당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985년이다.

8월 9일자 신문에「백운대 쇠말뚝 제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는 순간,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말로 우리 겨레의 얼을 찾는 일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다음날인 10일,
이전부터 알고있던 한암당 선생의 제자 전형배군(당시 고려대 대학원 재학중)을 찾아서
함께 김포읍 산자락에 거처하시는 선생을 찾아갔다.

새로 지은 집이었는데 조그만 별채로 방 하나, 부엌 하나였으며,
혼자서 연탄도 반찬도 없이, 그야말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몇몇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라면을 한꺼번에 3개를 삶아 놓고
소금이나 간장을 반찬 삼아 아침, 점심으로 조금씩 끼니를 들고 있던 때였다.

제자의 안내로 선생을 뵙자마자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나는 이제 안합니다.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재차 물으니,
“상황이 쉽지 않습니다. 국사찾기는 이제는 안합니다.
책도 팔아버리고…왕조실록하나 구하려고 해도 돈이 없어 못구하고…나는 안 합니다”
라며 완강히 거부하셨다.

나는 ‘이제는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선생님은 “이제 끝났다”고 말씀하시니 난감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어렵사리『조선왕조실록』을 구해 드렸다.
그리고 다시 댁을 찾아가 보니 책은 펼쳐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다.

3번째 방문할 때는 ‘두 아들’을 데리고 갔다.
절을 올리면서 “우리 이 아이들을 만주를 찾는 선봉장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아내 전유선(한암당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서 현재 ‘한암당 이유립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의
말을 듣고는 마침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우선 거처를 정하여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살도록 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김포에, 부인은 군산에, 시집 안간 막내 딸은 대전에
각각 흩어진 이산가족이 되어있었다.
이런 선생께 1200만원을 마련하여 화곡동에 전셋집을 마련해드리고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살도록 터전을 구해 드렸다.

이후 선생님은 집필에만 전념하여
도서출판 고려원에서【대배달민족사(전 5권)】을 발간하기에 이르렀고.

집을 마련하는데 재정을 지원했던 사람들이 모여
한암당 선생의 제자(현재 부부인 전형배 고성미)를 초청.
우리 역사에 대하여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4월 17일 저녁 7시 인사동 소재 당시 도서출판 고려원 사장(김낙천) 사무실에서
직접 한암당 선생을 모시고 질의응답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9시 20분이 될 즈음)
“이것은 정말 당신들이 해야 될 일이요”라고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셨다.

재빨리 선생을 의자에 앉혀드리고 청심환을 드렸는데,
15분이 지나서도 깨지 않아 인근 혜정병원으로 옮겼다.

뇌출혈이었다.

중구 필동의 성심병원 응급실로 급히 옮겨 하루를 지낸 다음날
아침 잠깐 의식이 돌아오는 듯 했으나 낮 12시쯤 재차 진행된 뇌출혈로 의식불명에 빠졌다.
그 상태로 자정을 넘기고 다음날 새벽 1시에 운명하셨다.

선생의 장례를 단단학회장으로,
강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재정을 부담하여 정성껏 치렀다.

장례를 마친 후
“이것은 정말 당신들이 해야될 일이요”라는 마지막 말씀을 유언으로 해석하여
‘역사 찾기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재정지원에 참가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단체 설립을 준비하여
7월 1일 종로 인사동에서 사무실을 열었다.

그리고 그해 말 마침내 “사단법인 한배달”이란 이름으로 서울시 교육청에 등록되었다.

오늘날 15년의 역사를 가진 사단법인 한배달의 창립은
바로 민족사학자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뿌린 씨앗이 싹튼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역사가 이유립은
그의 호 ‘한암당(寒闇堂)’이 풍기는
‘춥고 어두운’ 분위기 만큼이나(대부분의 광복군과 그의 후예들이 그렇듯이)
어려운 삶을 살았다.

자생 신앙결사인 ‘태백교’의 부활을 꿈꾸기도 하였고.
또 한 때는 정치에 뜻을 두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사론만이 후세에 남아 ‘국사바로잡기’의 험한 길 위에 비치는 찬연한 등불이 되고 있다

< 참고 자료 >

한암당 선생이 남긴 논저들은『대배달 민족사』에 실려있습니다.
필요한 분은 한배달로 연락하시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대배달 민족사(전5권)』(고려원 刊)
– 구입문의 : 월간 한배달사 편집부 (02) 747-8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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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사학자들의 행보 >

우리 배달Baedal 민족의 장대한 역사를 태풍의 격렬한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그 태풍의 중심이 되고있는 태풍의 눈은
배달Baedal의 정신입니다.

그 배달의 정신은
– 천부경,
– 삼일신고,
– 366사(참전계경),
– 단군팔조 등

십수권의 배달Baedal 민족 고유의 경전에서 설명되는
인류의 보편적 진리가 설명합니다. 

<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전래 >

교과서에 없는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등이 어떻게 지금까지 전래되었는가 ?
라는 의문을 제기해주신 분들의 요청에 의해 그 자료의 전래내용을 첨부합니다.

< 1. 한단고기 >

한단고기는
천부경, 삼일신고의 원문과 366사(참전계경)에 대한 자료등이 실려있는 책으로서
이 책이 전래되는 과정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곧 이 경전들의 전래와 직접관계가 있다.

고려말 좌의정을 지낸 행촌杏村 이암선생은

1313년(충선왕5)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이 그를 아껴 부인符印을 맡겨 비성교감秘省敎勘에 임명했다.
그 후 좌정승을 마지막으로 관직에 물러난 인물로 단군세기의 저자이다.

태백일사를 찬한 이맥李陌선생은

행촌선생의 고손高孫으로
1474년(연산군4)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
중종반정때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성균관사예와 사헌부장령을 겸하고 동지돈영부사에 이르른 인물이다.

행촌선생과 이맥선생은 모두 고성固城이 본관이다.

여기에서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전래와 직접 연관이 있는
또 다른 고성 이씨인 구한말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기李沂선생을 소개할 차례이다.

이기李沂선생을 소개함에는 실로 많은 지면이 필요하나 중요한 내용만 간단히 요약하면

을사5조약이 체결된 후 후일 대종교를 창건하였을 뿐 아니라
혁혁한 독립운동가인 나인영(나철)선생과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함께 을사오적을 주살할 것을 결의하고

자신회自新會을 조직하여 권중현權重顯을 총살하였으나 실패하고,
박제순朴齊純등에 대해서도 살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던 혁혁한 애국독립투사이며 자주를 주장한 유명한 학자이다.

합방을 예견하고 비분을 참지못하고 단식끝에 운명을 맞았다한다.
이기선생은 단학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지냈다.

한단고기를 전한 계연수桂延壽선생은

이기李沂선생이 한단고기를 직접 감수監修했다고 밝히고 있음으로
스스로 고려말부터 구한말에 이르는 배달Baedal 사상을 잇는
중요한 갈래의 한부분을 담당했음을 한단고기에서 밝히고 있다.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묘향산 단군암에서 한단고기를 쓰는 비용을 역시
혁혁한 독립운동가인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선생이 대어주었음을
한단고기는 밝히고 있다.

계연수선생은

이기선생의 단학회를 이어받아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하여 정신적, 사상적 계몽협조를 했다.

1920년 계연수 선생은 일본인 스파이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그 다음 단학회의 한단고기의 전래는
천마대天摩隊대장 최시흥崔始興선생에게 이어졌고
다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 선생에 이어졌으나
이덕수 선생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침체되었다.

해방후 일제에 의해 수감되었던 이용담선생이 출옥하면서 평양에서 그 맥을 이었으나
기관지 태극에서 신탁통치반대론을 주장함으로서
태극의 주간 이유립선생이 구속되면서 단학회의 활동은 다시 중단된다.

그 후 이유립선생이 월남에 성공함으로서
단단학회를 세워 계연수 선생의 한단고기는 다시 세상에 전해질 계기가 생겨났다.
작고하신 이유립선생은 1979년 한단고기를 세상에 펴낸다.

그러나 1982년 이 이유립선생의 한단고기가 한글로 번역이 되기도 전에
천만뜻밖에도 일본의 가지마가 일본어로 번역하여 발행을 해서 세상에 펴내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라는 배달Baedal 민족 최대의 암흑기에도
위대한 인물들이 마치 릴레이를 하듯 서로 이어받고
그 가난했던 시기에도 자금을 대고해서 전해진 한단고기가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소위 단군이래 가장 잘 살게되었다는 1980년대초에 어이없게도 일어로 먼저 번역된 것이다.

자손만대를 위한 소중한 민족적 지적재산이 국내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는 수모를 우리 모두는 당한 것이다.

그 시대의 우리는 진정 중요한 일을 하는 인물들이 단돈 몇푼의 출판자금이 없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초를 살았던 한국인중 한사람으로
당시에 한단고기의 존재를 몰랐다해도 한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한단고기에는 천부경, 삼일신고가 원문 그대로 전해지며
또한 366사는 참전계경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이유립선생에 의해 전해진다.

한편
이 한단고기는 제대로된 증거조차 제시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위서로 매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위서라는 보편타당성을 갖춘 주장을 아직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만일 제 2의 일본인 가지마가 출현하여
한단고기등에서 전하는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참전계경)을 세계의 문화시장에 내놓고
이를 일본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나 지금이나 일본인은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지식정보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정작 우리의 소중한 지적재산이 무언지도 모르는
이 기막힌 현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 시대에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진다.
 

< 2. 묘향산석벽본(妙香山石壁本) >

천부경 81자에 대한 자료로 잘 알려진 묘향산석벽본은
1917년(丁巳年 正月 初十日) 계연수선생이 묘향산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탑본하여
당시 서울의 단군교 앞으로 서신을 보낸것으로 알려져있다.
단군교부흥경략(1937년)에는 이 서신과 함께 천부경 81자가 전해지며 또한 삼일신고의 원문도 전한다.

< 3. 최문창후 전집 >

성균관대학교 소장의 최문창후전집의 고운선생사적孤雲先生事跡에는
천부경 81자의 원문이 기록되어있다.
다만 이 기록에는 한단고기 태백일사와 묘향산 석벽본의 천부경 81자와는 약간 다른 글자가 보인다.
析을 碩, 衍을 演, 動을 同, 昻을 仰, 地를 中으로 하는 등의 것이다.

이 두가지 출처의 내용은 음은 같지만 표기가 틀린것이 대부분이다.

< 4. 삼일신고 >

삼일신고는 발해의 석실본과 천보산 태소암본, 고경각의 신사기본의 세가지 이본異本이 전해진다.

< 5. 366사(참전계경) >

366사(참전계경)은 단군교팔리, 성경팔리상하, 단군예절교훈, 참전계경등이 전해진다.

< 참고문헌 >

–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 한국정신문화원
– 한단고기 : 계연수저 임승국번역, 주해 1986년 정신세계사
– 단군교부흥경략 : 정진홍 1937년 계신당
– 삼일철학역해종경합편 : 대종교 출판사 1992년
– 한민족뿌리사상 : 송호수저 1991년 기린원
– 커발한문화사상사 : 이유립著 1976년 커발한 개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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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팔조교 >

단군팔조교는 단군Tangun의 위대함을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경전에서 전하려는 메세지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그것은『너희들도 단군이 되거라 !』는 말입니다.

이 경전은 누구나 단군Tangun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간단한 문장에 압축하여 제시한 경전입니다.

스스로가 자아를 말살하고 마치 어린아이나 원시인처럼
원하는 것을 갖게 해달라고 비는 일은 진정한 문명인이 취할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첨단적인 물질문명에서 이같이 유치하고 원시적인 정신상태의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단군팔조교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평등한 수평적 관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단군팔조교 뿐 아니라 모든 배달민족의 고유한 경전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이 개념이 곧 천손사상天孫思想입니다.
우리민족 모두는 하나님의 자손이며 인류 모두가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배달경전에서 전하고져 하는 지식정보는
『너희가 곧 단군이고 너희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위한 방법론이 십수권의 한민족 고유의 경전에 압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아를 말살하는 대신 보호를 요청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사소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건 보호가 아니라 억압인 것입니다.
억압받음으로서 외롭지 않다면 이미 문제가 없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없이 억압받는 사람들은 아무리 권력이 크든,
아무리 재물이 많든 항상 권력과 재물등에 굶주려 있습니다.
따라서 정작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경멸함으로서 자신의 불행을 감추고 싶어합니다.
기회가 닿으면 인정사정없이 불행한 사람을 짓밟음으로서
자신이 불행하지 않음을 증명하려 하는 것은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입니다.

배달민족의 경전들은 자아의 중심이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신이나 구세주에게 어린아이나 원시인처럼 매달리는 상태를 극도로 경계합니다.

대신 피와 땀과 눈물로 열심히 일을 하여 재세이화하고,
그래서 쌓인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홍익인간을 함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라고 합니다.

단군팔조교는
단군왕검께서 단군조선을 세우시면서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진리를 압축하여 전하신 경전입니다.

이 경전의 8개 조목중에서 3개의 조목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경전이 우리민족과 완전한 한 덩어리임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은 우리민족이 단군조선이 출발할때의 정신세계가
지금에 와서도 별반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 경전 한권만으로도 유불선을 비롯한 만교가 이미 우리의 정신세계에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을 거듭해서 읽으면
우리 민족의 모두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힘들때면 항상 잔잔하게 들려오던
다정스러운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이며,
무엇을 말해 오던 것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단군팔조교(檀君八條敎) >

제 1 조

하늘의 법法은 오직 하나요,
그 문門이 둘이 아니다.
너희는 오로지 순수한 정성이 하나 같아야 하며,
이로써 너희 안(마음)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

천범유일 불이궐문 이유순성일 이심내조천
天範惟一 弗二厥門 爾惟純誠一 爾心乃朝天

 
제 2 조

하늘의 법은 언제나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스스로를 살펴서 마음을 바로하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하늘의 법에 부합되게 할 수 있다면
나아가 만방에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천범항일 인심유동 추기병심 이급인심 인심유화 즉합천범 내용어우만방
天範恒一 人心惟同 推己秉心 以及人心 人心惟和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제 3 조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님으로부터 연유하였으며,
부모님은 하늘에서 강림하셨도다.
오로지 부모님을 바르게 모시는 것이 하느님을 바르게 모시는 것이며,
이것이 나라에까지 미치니 충성과 효도이다.

이 도道로써 부지런히 힘써 정도正道를 이룬다면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반드시 먼저 벗어 나리라.

이생유친친강자천 유경이친내극경천 이급우방국시내충효
爾生惟親親降自天 惟敬爾親乃克敬天 以及于邦國是乃忠孝

이극체시도 천유붕 필선탈면
爾剋體是道 天有崩 必先脫免

 
제 4 조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을 다니는 짐승도 짝이 있고,
다 떨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들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합하여 원한하는 일이 없게 하고,
질투함이 없게 하고, 음탕함도 없게 하라.

금수유쌍 폐리유대 이남녀 이화 무원무투무음
禽獸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無怨無妬無淫

제 5 조

너희들은 열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손가락이 크던 작던 똑같이 아프지 아니한가 ?
서로 사랑하되 헐뜯음이 없고, 서로 도와주되 서로 다툼이 없다면
가정도 나라도 모두 부흥하리라.

이작십지 통무대소 이상애 무서참 호우 무상잔 가국이흥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 無胥讒 互佑 無相殘 家國以興

 
제 6 조

너희는 소와 말을 보아라.
그들도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아니한가 ?
너희는 서로 양보하고, 서로 빼앗는 일 없이 함께 일하며,
서로 훔치는 일이 없어야 가정과 나라가 충실하여 번성하게 되리라.

이관우마 유분궐추 이호양 무서분 공작 무상도 국가이은
爾觀牛馬 猶分厥芻 爾互讓 無胥奪 共作 無相盜 國家以殷

 
제 7 조

너희는 호랑이를 보아라.
힘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스스로 천박하게 되었도다.
너희는 사납게 날뛰지 말 것이며,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항상 하늘의 법에 따라 만물을 사랑하거라.

너희는 남이 기울어질때 붇들어주되 모욕을 줌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가 만일 이를 어긴다면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네몸과 가정이 함께 망하게 되리라.

이관우호 강포불령 내작얼 이무걸목이장성 무상인 항준천범극애물
爾觀于虎 彊暴不靈 乃作孼 爾無桀鶩以 性 無傷人 恒遵天範克愛物

이부경 무능약 제휼 무모비 이유월궐즉 영부득신우 신가이운
爾扶傾 無陵弱 濟恤 無侮卑 爾有越厥則 永不得神佑 身家以殞

 
제 8 조

너희가 만일 논의 벼에 불을 질러 벼들의 씨가 멸하면
신神과 인간이 함께 노여워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이를 숨기고져 아무리 두껍게 싼다해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올 것이다.

너희는 항상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니되 간사함을 감추거나, 악함을 숨김이 없어야 하며,
화를 일으킬 마음도 두지 말아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내면 너희는 이로서 복록이 무궁하리라.
너희 오가五加와 64민은 이 뜻을 받들어 공경할지어다.

이여유충화우화전 화가장진멸 신인이노 이수후포 궐향필누
爾如有衝火于禾田 禾稼將殄滅 神人以怒 爾雖厚包 厥香必漏

이경지이성 무회특 무은악 무장화심 극경우천 친우민
爾敬持彛性 無懷慝 無隱惡 無藏禍心 克敬于天 親于民

이내복록무궁 이오가중기흠재
爾乃福祿無窮 爾五加衆其欽哉

☞참고사이트 : http://www.tangun.ca

http://magic.ne.kr/zbxe/?mid=m8&document_srl=33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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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실존 알려주는 중국 사고전서 기록 밝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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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012011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 자부에 3개, – 사부에 4개, –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집)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전부(錢溥)가 지은 ‘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
(‘산해경광주’ 18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 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集部) 편에 역대의 부(賦)를 모은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 ‘어정역대부휘’ 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심박사는 이를 두고
“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

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 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 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 ‘조선세기’(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 ‘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 “가화합(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19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

 Posted by at 9:30 PM

한자(漢字)조차 또하나의 ‘한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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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012011
 

“한자(漢字)조차 또하나의 ‘한글’이다”

故 임승국 교수

(블로거의 글) 오늘 조선 닷컴 1면 ‘오늘의 블로그’ 에는 실로 역사적인 글이 하나 떴습니다. 바로 ‘한문과 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하는 글입니다. 밑의 글은 이에 화답하는 의미에서 띄우는 것으로, 영문학을 전공했음에도 백제사등 고대사 연구에 일생을 바친 선비이신 임승국 교수의 육성입니다.

꼿꼿이 목소리를 높이다 가신 님은 다시 뵐 수 없지만, 인터넷의 바다에서는 이 글이 마치 7,80년대 검은 기름종이 등사판에 긁혀진 시국 선언문 유인물처럼 젊은 네티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이전 말로 ‘지하’ 혹은 ‘재야’라는 단어속에 그냥 묻혀버리던 지난날과는 달리 인터넷과 블로그라는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이러한 쟁점들이 공개적인 논의의 장소를 찾은 것 같아 실로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그분의 3주기를 맞아 탈자 파자만 잇고 제목만 감히 ‘한자조차 우리 민족이 만든 또하나의 한민족 글자’라는 뜻에서 후학이 새로 붙입니다. (남산 딸각발이 배)

고쳐야 할 事大主義

시간이 조금 더 남았으니, 그럼 ‘똥되는 놈'(중국인, 뒈놈에 대한 고인 특유의 하대칭-블로거주)얘기를 조금 해 보겠습니다. 오늘 제가 자꾸 똥되는 놈이라고 해서 미안하지만, 국호문제에 있어서 ‘중국(united states of china)’이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똥되는 놈이 우주의 가운데, 즉 태양이라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제후국(諸侯國)’이 됩니다.

이것은 아주 원초적인 사대주의 발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중국이라 하지 말고 ‘지나'(支那)라고 하면 됩니다. 이웃 일본인도 지나라고 하고 서양사람들도 차이나라고 하는데, 유독 우리만 중국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잘생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 나와있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라는 구절도 사대주의적 발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글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글만 우리 글자입니까? 아니 우리 역사가 몇년인데 한글만 우리 글자입니까? 우리 문화사가 500년밖에 안됩니까? 서양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니까 한자를 중국글자(Chinese character)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서양 중심의 가치관에서 하는 말이고, 이제부터의 세계는 우리 중심의 문화세계, 우리 중심의 가치관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저는 과거에 알파벳을 가르칠 때 영문학 교수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백인종이 모여 세운 나라가 USA인데, 앵글로 색슨족이 주류족입니다. USC라고 하면 차이나를 말합나다. 똥되는 놈들 민족 가운데 주류족은 USA의 앵글로 색슨족에 해당되는 한족(漢族)입니다. 이 한(漢)은 민족의 이름도 나라의 이름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한테서 표절을 해 갔습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할 때의 ‘한'(桓, 원음은 ‘환’)에서 한이라는 발음을 따 갔던 것입니다. 이 한(桓)은 원래 한족(漢族)이 아닙니다. 동이족(東夷族)입니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이 동이족입니다.

여기서 이(夷)자를 흔히 오랑캐라고들 합니다. 중국 25사 가운데 우리나라 역사를 기록한 제목이 동이열전(東夷列傳)인데,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전부 다 나옵니다. 그러면 그 후손인 우리는 전부 오랑캐가 되어 버립니다. ‘나는 오랑캐 올시다’라는, 성은 오씨요 이름은 랑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북경 근처 만리장성의 설경. 진시황이 소위 기마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하지만, 실제 는 고조선(가깝게는 백제)의 고토를 그들의 영토로 뺏어놓고 지은 방어진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인 성은 쌓을수 있었지만 그들이 막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말 곧 글자로 대표되는 문화(文化)였다. 이 ‘글자’와 ‘말’속에 한민족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고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들어있다.

고쳐야 할 사대주의 사상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의 중국이라는 용어도 문제이지만, 이(夷)자를 오랑캐라고 훈을 붙인 옥편의 저자는 더 문제가 많습니다. 한문옥편의 원조가 되는 것은 허신(許愼)이 쓴 설문해자(說文解字)인데, 이 옥편의 역사가 약 200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夷)자를 찾아보면, ‘동방지인야(東方之人也)’ 그 다음에 ‘고문인동(古文仁同)’이라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랑캐란 말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누가 이(夷)를 오랑캐로 말하면,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古文仁同'(옛부터 인이라는 말과 같이 쓰였다)이라는 한마디로써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동양오행철학에 의하면 木은 東, 火는 南, 金은 西, 水는 北, 土는 中央에 해당됩니다. 오행을 색깔로 말하면 東은 靑, 西는 白, 南은 赤, 北은 玄이고 中央은 黃입니다. 오상(五象)을 방위에 배치하면 仁은 東, 禮는 南, 義는 西, 智는 北, 信은 中央입니다. 동양철학 속에서 그 근거를 지니고 있는 글자인 仁을 오랑캐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동이족이야말로 중국대륙 가운데 가장 비옥한 땅에서 사는 민족이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지역을 백제가 경영했습니다. 따라서 중국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민족이 동이족이고, 동이족은 즉 우리 선조들은 지나라는 연합민족국가를 형성한 원류(原流)입니다.

우리의 5000년 역사가 중국문화의 지류를 따라 흘러서 겨우 마시고 살아 연명해 온 역사라고 붓놀리는 사람들이 그따위 수작을 해 왔지만, 우리 민족이 과연 끊어질듯 끊어질듯 하면서도 목숨을 겨우 연명해 온 민족입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동양의 역사문화 속에서 질풍노도와 같이 군림한 역사문화민족이 우리입니다. 우리가 알맹이요, 핵심입니다. 이제부터는 반대로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백제의 최대영토(중국 25사 삼국사기 최치원조 등 종합)
[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강병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吳), 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등지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으며 수 황제의 멸망도 요동의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최치원’조

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자는 지나의 글자가 아니라 우리 글자입니다. 약 4만 3천여 자가 옥편 속에 있는데, 글자 하나 하나마다 대개 발음기호가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學’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우리는 ‘學’이라는 발음기호를 적었을테고, 지나인은 한글을 모르니까 자기네 발음기호를 적었습니다. 즉 ‘轄覺切’으로 표시되어있습니다. 여기서 ‘切’은 ‘轄覺切’이 발음기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읽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첫글자에서는 자음(하)만 취하고 두번째 글자에서는 모음(가)과 받침(가)을 취해 읽으라는 뜻입니다.

[ha ( 轄 )+ ak (覺)= 학 (hak) 블로거주 ]

이렇게 ‘轄覺切’로 중국옥편에는 2000년동안 적혀 내려오고 있는데, 지나인(북경 사투리)은 ‘學’발음을 못하고 ‘쉬에'(xue)라고 합니다. 가,띵,밑으로 끝나는 글자를 사성 중 입성이라고 하는데, 지나인은 입성을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문자(漢文字)는 지나인들이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것이고, 한민족의 발음으로서만이 완벽히 소리낼 수 있는 것입니다. 100% 우리말로 적혀있는 것이 지나인의 옥편이고, 따라서 우리가 표준어를 쓰고 있는 한문자의 주인공입니다. 한글만이 우리문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문자야말로 우리 문화와 전통을 지금까지 전해준 고마운 글자입니다.

 
(위부터 단군 가림토문자, 한글 훈민정음, 일본 신대문자, 인도 구자라트 문자, 몽고 파스파문자, 중국 갑골문자)

민족사의 르네상스를 위하여

정말 우리 문화의 본질을 정확하게 안다면 이제부터 한자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합니다. 마치 어떤 탕자의 비유마냥 말이죠. 백만장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돈을 객지에서 다 써 버려서, 남의 돼지우리에 버린 밥껍질로 주린 배를 채우다가 하루는 탄식합니다.

‘나의 아버지집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많이 있었건만, 나는 객지에서 헐벗고 굶어죽게 되었구나’ 하며 깊은 한숨을 쉽니다. 이런 탄식끝에 이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향해 다시 힘차게 뛰어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맞으며, ‘내 아들이 다시 돌아왔노라’하며 양잡고 소잡아 축제를 엽니다. 그래서 탕자는 또다시 백만장자가 됩니다.

이제 상고사를 재확인하고 민족사의 바로 이것이 르네상스입니다. 옛집으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과연 그런 용기가 있습니까? 옛집을 기억은 하고 있습니까? 옛집이라는 것은 상고사입니다. 과제인 옛집으로 돌아가는 것, 마치 탕자가 자기 본래의 집을 향해 돌아가는 것처럼, 바로 이것이 한국사의 남아있는 과제입니다.

자기의 옛집으로 돌아가려면 우선 한문(漢文)을 알아서 민족의 전통을 확인하는 것이 첫작업이 될 것입니다. 한국사에는 목표가 뚜렷한 근원을 향해서 돌아가는 ‘민족사의 르네상스’가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와 로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없었고 이를 기술한 고전(古典)이 없었더라면, 인류역사상 저 ‘Renaissance’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래 이 말의 어원은 ‘옛 정통(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그리스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되돌아갈 고향의 영광과 위대한 추억이 없는 민족, 향수가 없는 민족에겐 르네상스란 말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 임승국(林承國)교수. 고려대 영문학과 출신으로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를 지내다 백제사를 고리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나서 이른바 강단사학계와는 다른 길을 걸은 대표적인 ‘재야’사학자로 일컬어진다. ‘한단고기’의 역해자.

고 안호상 박사,박시인 전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설립,기존 교과서가 단군 존재를 부정하고 한사군을 한반도에 설정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국회청원활동도 벌였다. 2001년 향년 74세로 작고. 지난 8월 28일은 고인의 3주기였다.

자료 출처: 삼태극 카페

 Posted by at 9:29 PM

[펌]”조선은 대단한 나라” 강연 녹취록

 역사  Comments Off on [펌]”조선은 대단한 나라” 강연 녹취록
May 262011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년 6월 17일 (목) 오전 7시 30분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저는 지난 6월 10일 오후 5시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대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at 12:08 PM

부도지 符都 誌

 역사  Comments Off on 부도지 符都 誌
Nov 072010
 

부도지를 읽어보니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홍익인간의 큰 뜻을 세상에 펴기 위해 노력해 온, 이 세상에서 흔치 않은 민족인 것 같습니다. 현대의 복잡한 세상에서도 이러한 원대한 뜻을 이루어 세상을 이끌어 가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http://bluecabin.com.ne.kr/history/budoji.htm

부도지 符都 誌

부도지는 징심록 상교 제1지라고 하며, 우리의 상고사를 기술한 사서중에 가장 오래전의 역사를 비교적 자세히 기술한 문헌으로 서기 1953 년( 단기 4286 년 ) 박 금선생의 프린트본으로 세상에 알려진 책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서의 저자는 영해 박씨의 시조인, 신라 눌지왕때, 치술령 망부석의 주인공인 관설당 박 제상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부도지의 내용을 율과 려, 음과 성, 음상과 향상, 5 음 7 조의 율려등으로 이치를 설명한 것으로 보아, 부도지는 박 제상의 아들이며 방아타령의 대악으로 유명한 백결선생이 지어서, 사회적으로 이름있는 아버지 박 제상의 이름으로 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영해 박씨의 시조인 관설당 박 제상은 또한, 천부경을 아들인 백결선생 박 문량에게 전하였고, 백결선생 박 문량은 신선사 마애불상들이 있는 단석산 깊은 곳에서 이를 해독하여, 다시 아들 박 마령간에 전하였으며, 아들 박 마령간은 이 천부의 이치를 김 유신에게 가르쳐서 김 춘추와 삼국을 통일하는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을 전했다고 합니다. 또한, 귀주대첩의 박 서장군도 영해 박씨의 후손이며, 근세조선의 태조, 이 성계의 왕사인 자초 무학대사도 영해 박씨의 후손이며, 세종대왕을 도와서 아악을 정리한 박 연도 영해 박씨의 후손으로, 근세조선 초기에 영해 박씨를 중하게 등용한 이면에는 풀리지 않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천부경의 내용이 적힌 징심록은 세조 반정때 숨어 버리며, 후에 금오신화의 저자인 매월당 김 시습이 이를 풀이한 금척지를 영해 박씨 문중에 전하였다고 합니다. 이 부도지가 박 금선생에 의하여 전해진 것을 보면 그것 또한 우연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고성 푸른들님의글>

*아래 부도지는 김은수님의 해설을 겸한 역서인데 제가 처음 읽을 때 좀 혼란스러운 면이있어서 해설 부분을 제외하고 본문 부분만을 발췌한 것입니다. 김태형님의 부도지 해설서 <마고 복본을 꿈꾸며>가 비교적 정리가 잘되어 있어 함께 싣습니다. <운영자>

*女神 마고’ 21세기에 환생

제 1장 : 마고(麻故)의 시대 – 김은수역-

第一章

마고성(麻姑城)은 지상(地上)에서 가장 높은 성(城)이다. 천부(天符)를 봉수(奉守)하여, 선천(先天)을 계승(繼承)하였다. 성중(成中)의 사방(四方)에 네 명의 천인(天人)이 있어, 관(管)을 쌓아 놓고, 음(音)을 만드니, 첫째는 황궁(黃穹)씨요, 둘째는 백소(白巢)씨요, 셋째는 청궁(靑穹)씨요, 넷째는 흑소(黑巢)씨였다. 두 궁씨의 어머니는 궁희(穹姬)씨요, 두 소씨의 어머니는 소희(巢姬)씨였다. 궁희와 소희는 모두 마고(麻姑)의 딸이었다. 마고는 짐세(朕世)에서 태여나 희노(喜怒)의 감정이 없으므로,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가 없이, 궁희와 소희를 낳았다. 궁희와 소희도 역시 선천의 정을 받아, 결혼을 하지 아니하고, 두 천인(天人)과 두 천녀(天女)를 낳았다. 합하여 네 천인과 네 천녀였다.

麻姑城은 地上最高大城이니 奉守天符하야 繼承先天이라, 成中四方에 有四位天人이 堤管調音하니 長曰 黃穹氏오 次曰 白巢氏오 三曰 靑穹氏오 四曰 黑巢氏也라. 兩穹氏之母曰穹姬오 兩巢氏之母曰巢姬니 二姬는 皆麻姑之女也라. 麻姑ㅣ生於朕世하야 無喜怒之情하니 先天爲男하고 後天爲女하야 無配而生二姬하고 二姬ㅣ赤受其精하야 無配而生二天人二天女하니 合四天人四天女야라.

第二章

선천(先天)의 시대에 마고대성(麻姑大城)은, 실달성(實達城)의 위에, 허달성(虛達城)과 나란히 있었다. 처음에는 햇볕만이 따뜻하게 내려 쪼일 뿐, 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없었다. 오직 8 여(呂)의 음(音)만이 하늘에서 들려 오니, 실달성과 허달성이, 모두 이 음에서 나왔으며, 마고대성과 마고도, 또한 이 음(音)에서 나왔다. 이것이 짐세(朕世)다. 짐세 이전에, 율려(律呂)가 몇 번 부활하여, 별들(星辰)이 출현하였다. 짐세가 몇 번 종말을 맞이 할 때, 마고가 궁희(穹姬)와 소희(巢姬)를 낳아, 두 딸로 하여금, 오음칠조(五音七調)와 음절(音節)을 맡아보게 하였다. 성중(城中)에 지유(地乳)가 처음으로 나오니, 궁희와 소희가, 또 네 천인(天人)과 네 천녀(天女)를 낳아, 지유를 먹여, 그들을 기르고, 네 천녀에게는 여(呂)를, 네 천인에게는 율(律)을 맡아보게 하였다.

先天之時에 大成이 在於實達之上하야 與虛達之城으로 ?列하니 火日暖照하고 無有具象하야 唯有八呂之音이 自天聞來하니 實達與虛達이 皆出於此音之中하고 大城與麻姑ㅣ赤生於斯하니 是爲朕世라. 朕世以前則律呂幾復하야 星辰巳現이러라. 朕世幾終에 麻姑ㅣ生二姬하야 使執五音七調之節하다. 城中에 地乳始出하니 二姬又生四天人四天女하야 以資其養하고 四天女로 執呂하고 四天人으로 執律이러라.

第三章

후천(後天)의 운(運)이 열렸다. 율려(律呂)가 다시 부활하여, 곧 음상(音象)을 이루니, 성(聲)과 음(音)이 섞인 것이었다. 마고가 실달대성(實達大城)을 끌어당겨, 천수(天水)의 지역에 떨어드리니, 실달대성의 기운이 상승하여, 수운(水雲)의 위로 덮고, 실달의 몸체가 평평하게 열려, 물 가운데에 땅이 생겼다. 육해(陸海)가 병렬(?列)하고, 산천(山川)이 넓게 뻗었다. 이에 천수의 지역이 변하여, 육지가 되고, 또 여러 차례 변하여, 수역(水域)과 지계(地界)가 다 함께 상하가 바뀌며 돌므로, 비로서 역수(曆數)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5]기(氣) 화(火) 수(水) 토(土)가 서로 섞여 빛이 낮과 밤, 그리고 사계절을 구분하고, 초목(草木)과 금수(禽獸)을 살찌게 길러내니, 모든 땅에 일이 많아 졌다. 이에 네 천인이 만물(萬物)의 본음(本音)을 나눠서 관장(管掌)하니, 토(土)를 맡은 자는 [6]황(黃)이 되고, [7]수(水)를 맡은 자는 [8]청(靑)이 되어, 각각 궁(穹)을 만들어, 직책을 수호 하였으며, [9]기(氣)를 맡은 자는 백(白)이 되고, 화(火)를 맡은 자는 흑(黑)이 되어, 각각 소(巢)를 만들어, 직책을 지키니, 이것으로 인하여 성(姓氏)이 되었다. 이로부터 [10]기(氣)와 화(火)가 서로 밀어, 하늘에는 찬 기운이 없고, 수(水)와 토(土)가 감응(感應)하여, 땅에는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음상(音象)이 위에 있어, 언제나 비춰주고, 향상(響象)이 아래에 있어, 듣기를 고르게 해 주는 까닭이었다.

後天運開에 律呂再復하야 乃成響象하니 聲與音錯이라. 麻姑ㅣ引實達大城하야 大城之氣ㅣ上昇하야 布幕於 水雲之上하고 實達之?ㅣ平開하야 闢地於凝水之中하니 陸海?列하고 山川이 廣圻이라. 於是에 水域이 變成地界而雙重하야 替動上下而斡旋하니 曆數始焉이라.以故로 氣火水土ㅣ相得混和하야 光分書夜四時하고 潤生草木禽하니 全地多事라.於是에 四天人이 分管萬物之本音하니 管土者爲黃하고 管水者爲靑하야 各作穹而守職하고 管氣者爲白하고 管火者爲黑하야 各作巢而守職하니 因稱其氏라. 自此로 氣火共推하야 天無音冷하고 水土感應하야 지무흉戾하니 此는 音象이 在上하야 常時反照하고 響象이 在下하야 均布聽聞姑也라.

第四章

이 때에, 본음(本音)을 관섭(管攝)하는 자가 비록 여덟 사람이었으나, 향상을 수증(修證)하는 자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물이 잠깐 사이에 태여 났다가, 잠깐 사이에 없어지며, 조절이 되지 못하였다. 마고(麻姑)가 곧, 네 천인과 네 천녀에게 명하여, 겨드랑이를 열어 출산(出産)을 하게 하니, 이에 [11]네 천인이 네 천녀와 결혼하여, 각각 [12]삼남(三男) 삼녀(三女)를 낳았다. 이가 지계(地界)에 처음 나타난 인간의 조상(人祖) 였다. 그 남녀가 서로 결혼을 하여, 몇 대(代)를 지내는 사이에, 족속(族屬)이 불어나, 각각 3000명의 사람이 되었다. 이로부터 [13]12사람의 시조는 각각 성문(城門)을 지키고, 그 나머지 자손은 향상(響象)을 나눠서 관리하고, 수증(修證)하니, 비로서 역수(曆數)가 조절되었다. 성중(城中)의 모든 사람은, 품성(稟性)이 순정(純精)하여, 능히 조화(造化)를 알고, 지유(地乳)를 마시므로, 혈기(血氣)가 맑았다. 귀에는 오금(烏金)이 있어, 천음(天音)을 모두 듣고, 길을 갈 때는, 능히 뛰고, 걷고 할 수 있으므로, 내왕(來往)이 자재(自在)하였다. 임무를 마치자, 금(金)은 변하여 먼지가 되었으나, 그 성체(性體)를 보전하여, 혼식(魂識)이 일어남을 따라, 소리를 내지 않고도 능히 말을 하고, 백체(魄體)가 때에 따라 움직여, 형상을 감추고도 능히 행동하여, 땅 기운(地氣) 중에 퍼져 살면서, 그 수명(壽命)이 한이 없었다.

是時에 管攝本音者ㅣ雖有八人이나 未有修證響象者故로 萬物이 閃生閃滅하야 不得調節이라. 麻姑ㅣ乃命四天人四天女하야 ?脇生産하니 於是에 四天人이 交娶四天女하야 各生三男三女하니 是爲地界初生之人祖也라. 其男女ㅣ又復交娶하야 數代之間에 族屬이 各增三天人이라. 自此로 十二人祖는 各守城門하고 其餘子孫은 分管響象而修證하니 曆數始得調節이라. 城中諸人이 稟性純精하야 能知造化하고 飮?地乳하야 血氣淸明이라. 耳有烏金하야 具聞天音하고 行能跳步하야 來往自在라. 任務己終則遷化金塵而保己性體하야 隨發魂識而潛能言하고 時動魂體而潛能行하야 在住於地氣之中하야 其壽無量이러라

제 2장 : 부도(不渡)의 시대

第五章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支巢)씨가, 여러 사람과 함께 젖을 마시려고 유천(乳泉)에 갔는데, 사람은 많고 샘은 작으므로, 여러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마시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다섯 차례나 되었다. 곧 돌아와 소(巢)에 오르니, 배가 고파 어지러워 쓰러졌다. 귀에는 희미한 소리가 울렸다. 오미(五味)를 맛보니, 바로 소(巢)의 난간의 넝쿨에 달린 [31]포도열매였다. 일어나 펄쩍 뛰었다. 그 독력(毒力)의 피해 때문이었다. 곧 소(巢)의 난간에서 내려와 걸으면서 노래하기를.

[넓고도 크구나 천지여!

내 기운이 능가한다.

이 어찌 도(道)인가!

포도의 힘이로다.] 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지소씨의 말을 의심하였다. 지소씨가 참으로 좋다고 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포도를 많이 먹었다,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에 제족이 포도를 많이 먹었다.

白巢氏之族 支巢氏ㅣ與者人으로 往飮乳泉할새 人多泉少어늘 讓於諸人하고 自不得飮而如是者五次라. 乃歸而登巢하야 遂發飢惑而眩倒하니 耳嗚迷聲하야 呑嘗五味하니 卽巢欄之蔓籬萄實이라. 起而偸躍하니 此被其毒力故也라. 乃降巢闊步而歌曰浩蕩兮天地여 我氣兮凌駕로다. 是何道兮요 萄實之力이로다. 衆皆疑之하니 支巢氏曰眞佳라하거늘 諸人이 奇而食之하니果若其言이라.於是에 諸族之食萄實者多러라.

第六章

백소씨(白巢氏)의 사람들이 듣고 크게 놀라, 곧 수찰(守察)을 금지하니 이는 또 금지하지 아니하되, 스스로 금지하는, 자재율(自在律)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열매를 먹는 습관과 수찰을 금지하는 법이 시작되니, 마고가 성문을 닫고 수운(水雲)의 위에 덮혀 있는 실달대성의 기운을 거두어버렸다.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齒)가 생겼으며, 그 침(唾)은 [32]뱀의 독(毒)과 같이 되어 버렸다. 이는 강제로 다른 생명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수찰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눈이 밝아져서, 보기를 [33]올빼미 같이 하니, 이는 사사로이 공률(公律)을 훔쳐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의 혈육이 탁(濁)하게 되고, 심기(心氣)가 혹독하여져서, 마침내 천성을 잃게 되었다. 귀에 있던 오금(烏金)이 변하여 토사(兎沙)가 되므로, 끝내는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발은 무겁고, 땅은 단단하여, 걷되 뛸 수가 없었으며, 태정(胎精)이 불순하여, 짐승처럼 생긴 사람을 많이 낳게 하였다. 명기(命期)가 조숙(早熟)하여, 그 죽음이 천화(遷化)하지 못하고 썩게 되었으니, 이는 생명의 수(數)가 얽혀 미혹(迷惑)하게 되고,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白巢氏之諸人이 聞而大驚하야 乃禁止守祭하니 此又破不禁自禁之自在律者也라. 此時에 食實之習과 禁祭之法이 始하니 麻姑閉門撤冪이러라. 已矣오 食實成慣者ㅣ皆生齒하야 唾如蛇毒하니 此는 强呑他生故也오 設禁守祭者ㅣ皆眼明하야 視似치目하니 此는 私 公律故也라. 以故로 諸人之血肉이 化하고 心氣ㅣ酷變하야 遂失凡天之性이라. 耳之烏金이 化作兎沙하야 終爲天聲하고 足重地固하야 步不能跳하며 胎精不純하야 多生獸相이라. 命期早熟하야 其終이 不能遷化而 하니 此는 生命之數ㅣ 惑 縮故也라.

第七章

이에 사람(人世)들이 원망하고 타박하니, 지소씨가 크게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져서, 권속(眷屬)을 이끌고 성을 나가, 멀리 가서 숨어 버렸다. 또 포도의 열매를 먹은 자와, 수찰을 하지 아니한 자도, 역시 모두 성을 나가,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가니, 황궁(黃穹)씨가 그들의 정상을 불쌍하게 여겨 고별(告別)하여 말하기를, [여러분의 미혹(迷惑)함이 심대(甚大)하여 성상(性相)이 변이(變異)한 고로 어찌할 수 없이 성중(城中)에서 같이 살 수가 없게 되었오. 그러나, 스스로 수증(修證)하기를 열심히 하여, 미혹함을 깨끗이 씻어, 남김이 없으면, 자연히 복본(復本) 할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시오.]하였다. 이 때에 기(氣)와 토(土)가 서로 마주치어, 시절(時節)을 만드는 광선(光線)이, 한 쪽에만 생기므로, 차고 어두웠으며, 수(水)와 화(火)가 조화를 잃으므로, 핏기 있는 모든 것들이 시기하는 마음을 품으니, 이는, 빛을 거둬들여서 비추어 주지 아니하고, 성문이 닫혀 있어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於時에 人世ㅣ怨咎하니 支巢氏ㅣ大恥顔赤하야 率眷出城하야 遠出而隱이라. 且氣慣食萄實者와 設禁守祭者ㅣ亦皆出城하야 去各地하니 黃弓氏ㅣ哀憫彼等之情狀하야 乃告別曰 諸人之惑量이 甚大하야 性相變異故로 不得同居於城中이라. 然이나 自勉修證하야 淸濟惑量而無餘則自然復本하리니 勉之勉之하라. 是時에 氣土相値하야 時節之光이 偏生冷暗하고 水火失調하야 血氣之類ㅣ皆懷猜忌하니 此는 冪光이 卷撤하야 不爲反照하고 城門이 閉隔하야 不得聽聞故也라.

第八章

더구나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이르러, 직접 복본(復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복본에 때가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해치니, 성터(城址)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성 안에 마침내 젖이 마르니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풀과 과일을 다투어 취하므로, 혼탁(混濁)이 지극하여, 청정(淸淨)을 보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황궁(黃穹)씨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곧 백모(白茅)를 묶어 마고(麻姑)의 앞에 사죄하여,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복본할 것을 서약하였다. 물러나와 [34]제족(諸族)에게 고하기를 [오미의 재앙이 꺼꾸로 밀려오니, 이는 성을 나간 사람들이 이도(理道)를 알지 못하고, 다만 혹량(惑量)이 불어 났기 때문이다. 청정(淸淨)은 이미 없어지고, 대성(大城)이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를 어찌할 것인가.]하였다. 이 때에 [35]천인(天人)들이 분거(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대성을 완전하게 본전하고자 하므로, 황궁씨가 곧 천부(天符)를 신표(信標)로 나누어 주고, [36]칡을 캐서 식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사방에 분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청궁(靑穹)씨는 권속(眷屬)을 이끌고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37]권속을 이끌고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復本)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已矣오. 出城諸人中悔悟前非者ㅣ還到城外하야 直求復本하니 此未知有復本之時所故也라. 乃欲得乳泉하야 掘鑿城廓하니 城址破損하야 泉源이 流出四方이라. 然이나 卽化固土하야 不能飮철이라. 以故로 城內에 遂乳渴하니 諸人이 動搖하야 爭取草果하니 混濁至極하야 難保淸淨이라. 黃穹氏ㅣ爲諸人之長故로 乃束身白茅하고 謝於麻故之前하야 自負五味之責하여 立誓復本之約이러라. 退而告諸族曰五味之禍ㅣ反潮逆來하니 此出城諸人이 不知理道하고 徒增惑量故也라. 淸淨已破하고 大城將危하니 此將奈何오. 是時에 諸天人이 意決分居하야 欲保大城於完全하니 黃穹氏ㅣ乃分給天符爲信하고 敎授採葛爲量하야 命分居四方이라. 於時에 靑穹氏ㅣ率眷出東間之門하야 去雲海洲하고 白巢氏ㅣ率眷出西間之門하야 去月息洲하고 黑巢氏ㅣ率眷出南間之門하야 去星生洲하고 黃穹氏ㅣ率眷出北間之門하야 去天山洲하니 天山洲는 大寒大險之地라. 此는 黃穹氏ㅣ自進 難하야 忍苦復本之 盟誓러라.

第九章

[38]분거제족(分居諸族)이 각 주(洲)에 이르니, 어느덧 [39]천년이 지났다. 옛날에 먼저 성을 나간 사람들의 자손이 각지(各地)에 잡거(雜居)하여,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거의가 그 근본을 잃고, 성질이 사나와져서, 새로 온 분거족을 보면, [40]무리를 지어 추격하여 그들을 해하였다. 분거족이 이미 정주(定注)하니, 바다와 산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내왕이 거의 없었다. 이에 마고가 궁희와 소희와 더불어 대성을 보수하여, 천수(天水)를 부어 성내(城內)를 청소하고, 대성(大城)을 [41]허달성(虛達城)의 위로 옮겨버렸다. 이 때에 청소를 한 물이 동과 서에 크게 넘쳐 [42]운해주의 땅을 크게 부수고, 월식주의 사람을 많이 죽게 하였다. 이로부터 지계(地界)의 중심(重心)이 변하여, 역수(曆數)가 차이가 생기니, 처음으로 삭(朔)과 판(?)의 현상이 있었다.

分居諸族이 繞倒各洲하니 於焉千年이라. 昔世出城諸人之裔ㅣ難居各地하야 其勢甚盛이라. 然이나 殆忘根本하고 性化猛獰하야 見新來分居之族則作群追跡而害之러라. 諸族이 已定住하니 海阻山隔하야 來往이 殆絶이라. 於時에 麻故與二姬로 修補大城하고 注入天水하야 淸掃城內하고 移大城於虛達之上이러라. 是時에 淸掃之水ㅣ大漲於東西하야 大破雲海之地하고 多滅月息之人이라. 自此로 世界之重이 變化하야 曆數生差하니 始有朔?之象이라.

第十章

황궁씨가 [43]천산주에 도착하여, 해혹(解惑)하여 복본(復本)할 것을 서약하고, 무리에게 수증(修證)하는 일에 근면하도록 고하였다. 곧 장자(長子) 유인(有因)씨에게 명하여, 인세(人世)의 일을 밝히게 하고, 차자(此子) 와 삼자로 하여금 모든 주(洲)를 순행(巡行)하게 하였다. 황궁씨가 곧 천산(天山)에 들어가 돌이 되어, 길게 [44]조음(調音)을 울려, 인세의 혹량을 남김 없이 없앨 것을 도모하고, 기어이 대성 회복의 서약을 성취하였다. 이에 유인씨가 [45]천부삼인(天符三印)을 이어 받으니, 이것은 곧 천지본음(天地本音)의 상(象)으로, 그것은 진실로 근본이 하나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유인씨가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밤에는 어둠에 시달리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나무를 뚫어서 마찰을 시켜 불을 일으켜서 밝게 비춰주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또 음식물을 익혀서 먹는 법을 가르치니, 모든 사람들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유인씨가 천년을 지내고 나서, 아들 [46]한인(桓因)씨에게 천부를 전하고 곧 산으로 들어가 [47]계불을 전수(專修)하며 나오지 아니하였다.

환인씨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인세를 증리(證理)하는 일을 크게 밝히니, 이에 햇빛이 고르게 비추고, 기후가 순조로와 생물들이 거의 안도함을 얻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48]괴상한 모습이 점점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는 3세(황궁, 유인, 환인)가 수증하기 [49]삼천년에 그 공력이 거의 없어질만큼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黃穹氏ㅣ到天山洲하야 誓解惑復本之約하고 告衆勸勉修證之業이라. 乃命長子有因氏하야 使明人世之事하고 使次子三子로 巡行諸洲러라. 黃穹氏乃入天山而化石하야 長嗚調音하야 以圖人世惑量之除盡無餘하고 期必大城恢復之誓約成就러라. 於是에 有因氏ㅣ繼受天符三印하니 此卽天地本音之象而使知其眞一根本者也라. 有因氏ㅣ哀憫諸人之寒冷夜暗하야 鑽燧發火하야 照明溫軀하고 又敎火食하니 諸人이 大悅이라. 有因氏千年에 傳天符於子桓因氏하고 乃入山하야 專修契불不出이라. 桓因氏ㅣ繼受天符三印하야 大明人世證理之事하니 於是에 日光均照하고 氣侯順常하야 血氣之類ㅣ庶得安堵하고 人相之怪ㅣ稍得本能하니 此는 三世修證三千年에 其功力이 庶幾資於不 者也라.

제 3 장 : 배달국 시대

第十一章

환인씨의 아들 환웅씨는 태여날 때부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천부 삼인을 계승하여, 수계제불 (修계除불) 하였다. 천웅(天熊)의 도를 수립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래한 바를 알게 하였다. 어느덧 인세(人世)가 의식(衣食)의 일(業)에만 편중하므로, 환웅씨는 무여율법(無餘律法) 조(條)를 제정하여, 환부(鰥夫)로 하여금 조절하게 하였다. 1조는, 사람의 행적(行蹟)은, 때때로 깨끗하게 하여, 모르는 사이에 생귀(生鬼)가 되지 않게 하고 번거롭게 막혀, 마귀(魔鬼)가 되지 않도록 하여, 인세로 하여금, 통명무여일장(通明無餘一障)하게 하라. 2조는, 사람의 취적(聚積)은, 죽은 뒤에 공을 제시하여, 생귀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게 하고, 함부로 허비하여, 마귀가 되지 않도록 하여, 인세로 하여금, 보흡무여일감(普洽無餘一憾)하게 하라. 3조는, 고집이 세고 사혹(邪惑)한 자는 광야(曠野)에 귀향을 보내, 때때로 그 사옥함을 씻게 하여, 사기(邪氣)로 하여금, 무여어세상(無餘於世上)하게 하라. 4조는, 죄를 크게 범한 자는 섬도(暹島)에 유배시켜 죽은 뒤에 그 시체를 태워서, 죄집(罪集)으로 하여금, 무여어지상(無餘於地上)하게 하라 였다. 또 궁실(宮室)을 짓고, 배와 차(車)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거주(居住)하고, 여행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에 환웅씨가 바다에 배를 띄워 시승(始承)하여 [64]사해(四海)를 순방하니, 천부를 조증(照證)하여 수신(修信)하고, 제족의 소식을 소통하여 근본을 잊지 않을 것을 호소하고, 궁실을 짓고, 배와 차를 만들고, 화식(火食)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었다. 환웅씨가 돌아와 8음2문(八音二文)을 수학하고, 역법(曆法)을 정하고 의약술(醫藥術)을 수업하며, 천문(天文)과 지리(地理)를 저술하니, 홍익인세(弘益人世)였다. 이는, 세대는 멀어지고, 법은 해이하여져서, 모든 사람들이 몰래 사단(詐端)을 모색하는 일이 늘어나기 때문에, 일용(日用)하는 사물 사이에서, 근본의 도를 보전하여 분명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비로소 학문을 하는 풍조가 일어나니, 인성(人性)이 혼매(昏昧)하여, 배우지 않고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桓因氏之子桓雄氏ㅣ生而有大志하야 繼承天符三印하고 修계除불하고 立天雄之道하야 使人知其所由러라. 於焉人世ㅣ偏重於衣食之業하니 桓雄氏ㅣ制無餘律法四條하야 使鰥夫로 調節하니 一曰人之行蹟은 時時淸濟하야 勿使暗結生鬼하며 煩濟化魔하야 使人世로 通明無餘一障하라. 二曰人之聚積은 死後堤功하야 勿使陳垢生鬼하며 濫費化魔하야 使人世로 普洽無餘一憾하라. 三曰頑 邪惑者는 謫居於曠野하야 時時被其行하야 使邪氣로 無餘於世上하라. 四曰大犯罪過者는 流居於暹島하야 死後焚其尸하야 使罪集으로 無餘於地上하라. 又作宮室舟車하야 敎人居旅러라. 於是에 桓雄氏ㅣ始乘舟浮海할새 照證天符修信하고 疏通諸族之消息하며 訴言根本之不忘하고 敎宮室舟車火食之法이너라. 桓雄氏ㅣ歸而修八音二文하고 定曆修醫藥하며 述天文地理하니 弘益人世라. 此는 世遠法弛하야 諸人之暗취摸 이 增詐端故로 欲保根本之道於日 用事物之間而使昭然也라. 自是로 始興修學之風하니 人性昏昧하야 不學則不知故也라.

제 4 장 : 임검(壬儉)씨 시대(조선시대)

第十二章

환웅씨가 [75]임검(壬儉)씨를 낳았다. 때에 사해의 제족(諸族)이 천부의 이치를 강(講)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미혹(迷惑)속에 빠져, 세상이 고통스러웠다. 임검씨가 천하에 깊은 우려를 품고, 천웅의 도(天雄之道)를 닦아, 계불의 의식을 행하여, 천부삼인을 이어받았다. 갈고, 심고, 누에치고, 칡을 먹고, 그릇을 굽는 법을 가르치고, 교역(交易)하고, 결혼하고, 족보를 만드는 제도를 공포하였다. 임검씨가 뿌리를 먹고, 이슬을 마시므로, 몸에는 털이 길게 나가지고, 사해를 널리 돌아다니며, 제족을 차례로 방문 하였다. 백년사이에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천부를 조증(照證)하여 수신(修信)하고, 해혹복본(解惑復本) 할 것을 맹서하며, 부도(符都)를 건설할 것을 약속하니, 이는 지역은 멀고 소식은 끊어져, 제족의 언어와 풍속이 점차로 변하여 서로 다르게 되었기 때문에, 함께 모여 협화(協和)하는 자리에서, 천부의 이치를 강(講)하여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후일에 회강(會講)의 실마리가 되니, 인사가 번거롭고 바빠, 강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桓雄氏生壬儉氏하니 時에 四海諸族이 不講天符之理하고 自沒於迷惑之中하야 人世因苦라. 壬儉氏懷憂於天下하고 修天雄之道하며 行계불之儀하야 繼受天符三印이라. 敎耕稼蠶葛陶 之法하고 布交易稼 錄之制러라. 壬儉氏ㅣ啖根吸露하고 身生毛 하야 遍踏四海하야 歷訪諸族하니 百年之間에 無所不往이라. 照證天符修信하고 盟解惑復本之誓하며 定符都建設之約하니 此는 地遠信絶하야 諸族之言語風俗이 漸變相異故로 俗講天符地理於會同協和之
而使明之也라. 是爲後日會講之緖하니 人事煩忙하야 不講則忘失故也라.

第十三章

임검(壬儉)씨가 돌아와 부도(符都)를 건설할 땅을 택하였다. 즉 동북의 자방(磁方)이었다. 이는 2와 6이 교감(交感)하는 핵심지역이요, 4와 8이 상생(相生)하는 결과의 땅이었다. 밝은 산과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고, 바다와 육지가 서로 통하여 십방으로 갈리어 나가니, 즉 9와 1의 끝과 시작이 다하지 않는 터전이었다. 삼근영초(三根靈草)와 오엽서실(五葉瑞實)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이 금강(金剛)의 심장부에 뿌리를 내려, 전 지역에 두루 가득하니, 이는 1과 3과 5와 7의 자삭(磁朔)의 정(精)이 모여, 바야흐로 물체를 만드는 복된 땅이었다. 곧 태백산 밝은 땅의 정상에 천부단(天符壇)을 짓고 사방에 보단(堡壇)을 설치 하였다. 보단의 사이에는 각각 세 겹의 도량길로 통하게 하였다. 도랑길의 사이는 천 리였으며, 도랑길의 좌우에 각각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는 마고본성(麻故本城)에서 그 법을 취한 것이었다. 부도의 하부를 나눠 마을을 만들었다. 삼해(三海)의 주위에 둥그렇게 못에 잠기었다. 사진(四津)과 사포(四浦)가 천 리 간격으로 연결되어, 동서로 줄을 지어 둘러쌌다. 진(津)과 포(浦)사이에 다시 6부를 설치 하였다. 6부에는 제족(諸族)이 살았다. 부도가 이미 이루어지니, 웅려(雄麗)하고 광명하여 사해를 총화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제족의 생맥(生脈)이었다.

壬儉氏ㅣ歸而擇符都建設之하니 卽東北之磁方也라. 此는 二六交感懷核之域이오 四八相生潔果之地라. 明山麗水ㅣ連선萬里하고 海陸通涉이 派達十方하니 卽九一終始不 之其也라. 三根靈草와 五葉瑞實과 七色寶玉이 托根於金剛之臟하야 遍滿於全域하니 此一三五七磁朔之精이 會方成物而順吉者也라. 乃築天符壇於太白明地之頭하고 設保壇於四方이라. 保壇之間에 各通三 道溝하니 其間이 千里也오 道溝左右에 各設守關하니 此取法於麻故之本城이라. 劃都坊於下部之休하고 圖涵澤於三海之周하니 四律四浦ㅣ連隔千里하야 環列於東西라. 律浦之間에 又設六部하니 此爲諸族之率居也라. 符都 成하니 雄麗光明하여 足爲四海之總和요 諸族之生脈

第十四章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이 이주하여 지키고, 곧 나무를 베어 뗏목 8만을 만들어서,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흘려 보내, 사해의 제족을 초청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얻어서 보고, 차례로 모여들어, 박달나무 숲에 신시를 크게 열고, 수계정심(修?淨心)하여, 천상(天象)을 살핀 후, 마고의 계보(系譜)를 닦아 그 족속(族屬)을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어문(語文)을 정리 하였다. 또 북진(北辰)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정하여 반석의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전(奠)을 올리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天雄)의 악(樂)을 연주하였다. 제족이 방장산(方丈山) 방호의 굴(方壺之堀)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를 새기고 그것을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하여 칠난(七難)을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 10년마다 반듯이 신시를 여니, 이에 어문(語文)이 같아지고, 천하가 하나로 되어, 인세가 태화(太和)하였다. 인하여 바닷가에 성황(城隍)을 지어 천부에게 전을 올리고, 제족으로 하여금 머물러, 집을 지어 살게 하니, 그 뒤에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졌다.

第十五章

또 예와 양(陽)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팔택(八澤)에 해시(海市)를 열어, 매년 10월에 조제(朝祭)를 행하니, 사해의 제족이 모두 지방 토산물을 바쳤다. 산악의 제족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제족은 물고기와 조개를 바쳐 송축하기를

[[76]고기와 양을 희생으로

조제에 공진하니,

오미의 피를 신선하게 하여,

창생의 재앙을 그치게 하네]하였다.

이를 가개르켜 조선제(朝鮮祭)라 하였다. 이 때에 산악과 해양의 제족이 물고기와 육(肉)고기를 많이 먹으니, 교역하는 물건이 거개가 저린 어물과 조와 가죽류이기 때문에 곧 희생제(犧牲祭)를 행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 하고, 공에 보답하게 하였다. [77]피에 손가락을 꽂아 생명을 성찰하고, 땅에 피를 부어 기른 공을 보답하니, 이는 물체가 대신 오미의 잘못을 보상하여, 재앙을 먿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즉 육친고충의 고백이었다. 언제나 세제(歲祭) 때에는 물화(物貨)가 폭주 하므로 사 진과 사 포에 해시를 크게 열고, 몸을 깨끝하게 하여, 지리(地理)를 거울 삼아, 교역의 법을 시행하여, 그 값과 분량을 정하며, 물성(物性)의 근본을 분별하여 이용하는 법을 밝혔다. 또 부도 팔택의 모양을 본떠서 뭇을 파고, 곡수(曲水)의 사이에서 보새(報塞)를 지내고, 회연(會燕)하여 제물(濟物)하는 의식(儀式)을 행하였다. 제족이 봉래산 원교봉(圓嶠峯)에서 오서(五瑞)의 열매를 얻으니, 즉 잣나무 열매였다. 봉래 해송(海松)이라 하여, 은혜롭게 오행(五幸)을 얻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사해가 산업이 일어나서 교역이 왕성하게 되므로, 천하가 유족하였다.

第十六章

시(市)에 온 사람들은 영주(瀛州) 대여산(岱與山) 계곡에서 삼영근(三靈根)을 얻으니, 곧 인삼이었다. 그것을 영주 해삼이라 하였으며, 능히 삼덕(三德)을 보전하고 돌아갔다. 대개 인삼이 그 수격(數格)을 갖추어, 자삭방(磁朔方)에서 난 것은 반드시 장생하니 40세(歲)를 1기로 휴먼하고, 13기를 1삭(朔)으로 축정(蓄精)하고, 4삭을 경과하여 씨(子)를 맺어 화(化)하니, 이러한 것은 부도의 지역이 아니고는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방삭초(方朔草)라 하니, 세상에서 불사약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 혹 작은 뿌리라도 부도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은 모두 영효(靈?)가 있으므로, 시(市)에 온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구하였다. 대저 삼근영초(三根靈草)의 인삼과, 오엽서실(五葉瑞實)의 잣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의 부인은 진실로 불암삼역(不咸三域)의 특산이요, 사해제족(四海諸族)의 천혜(天惠)였다.

제 5 장 : 오행(五行)의 화(禍)

第十七章

이 때에 도요(陶堯)가 천산(天山)의 남쪽에서 일어났다. 일차로 출성(出城)한 사람들의 후예였다. 일찍이 제시(祭市)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보(堡)의 간(干)에게서 도(道)를 배웠다. 그러나 원래 수(數)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9수5중(九數五中)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중5(中五) 이외의 8은, 1이 즉 8이라고 생각하고, 내(內)로써 외(外)를 제어하는 이치라 하여, 오행(五行)의 법을 만들어 제왕의 도를 주창하므로, 소부(巢夫)와 허유(許由) 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요가 곧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냈다.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有因)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임검(壬儉)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나갔기 때문에, 비어 있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습격하니, 묘예가 마침내 동·서·북의 삼방(三方)으로 흩어졌다. 요가 곧 9주(九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중에 사는 제왕이라 칭하여,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와 대립하였다. 때에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명협(蓂莢)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역(曆)을 만들고, 천부(天符)의 이치를 폐하여 부도(符都)의 역을 버리니, 이는 인세 두번째의 큰 변이었다.

第十八章

이에 임검씨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후손 유호씨(有戶氏)의 부자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을 하고, 공순하게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유호씨가 묵묵히 그 상황을 관찰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겼다. 이보다 먼저 유호씨가 부도에 있을 때에 칡을 먹고 오미를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키는 열 자요,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보다 나이를 100여살이나 더 먹었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직업(業)을 이어, 임검씨를 도와, 도를 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에 이르러 사자(使者)가 되어, 완미(頑迷)한 세상을 구제하니, 그가 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에 요가 유호씨의 아들 유순(有舜)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 가운데 딴 뜻이 있어, 일을 맡기고, 도와 주며, 두 딸로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이 일찍이 부도의 법을 행하는 환부가 되어, 마침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第十九章

이 때 유호씨가 수시로 경계를 하였으나, 순은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는 고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요의 촉탁을 받아들여 현자를 찾아 죽이며, 묘족(苗族)을 정벌하였다. 유호씨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꾸짖고, 그를 토벌하니, 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요는 몸을 둘 땅이 없으므로, 순에게 양위하고, 자폐(自閉)하였다. 유호씨가 이르기를, 오미의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오행(五行)의 화를 만들었으므로, 죄는 땅에 가득하고, 북두성은 하늘을 가리어, 수사(數事)가 많이 어그러져, 인세(人世)가 곤고(困苦)하여 졌다. 이는 불가불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혹 용서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알고 범하는 자는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하고 곧 차자(次子) 유상(有象)에게 명하여 권사(勸士)를 이끌고 무리를 모아 죄를 알리고, 그를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당도(唐都)를 혁파(革罷)하였다. 요는 유폐(幽閉) 중에서 죽고, 순은 창오(蒼梧)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의 무리 우(禹)가 순에게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버렸다. 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우가 곧 정명(正命)으로 입공(立功)한다고 말하고, 상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서 우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에게 항거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였다.

第二十章

우가 마침내 부도를 배반하고 도산(塗山)에 단(壇)을 설치하였다. 서남 제족을 정벌하여, 제후(諸候)라 하고, 도산에 모이게 하여, 조공을 받았다. 이는 부도 제시(符都際市)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으나, 폭돌(暴突)한 것이었다. 이에 천하가 시끄러워, 부도로 도망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우가 곧 수륙(水陸)의 길을 차단하여, 부도와 연락을 끊고, 내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감히 부도를 공격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에 유호씨가 서벙에 살면서, 묘예(苗裔)를 수습하여, 소부와 허유가 사는 곳과 통하고, 서남 제족과 연락하니, 그 세력이 심히 왕성하여, 스스로 읍(邑)을 이루웠다. 유호가 곧 권사(權士)를 보내, 우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요는 천수(天數)를 몰랐다. 땅을 쪼개서 천지를 제 멋대로 하였다. 기회를 틈타 독단(獨壇)을 만들고, 사사로이 개나 양을 기르기 위하여, 사람을 몰아낸 후, 자칭 제왕이 되어, 혼자서 처리 하였다. 세상은 토석(土石)이나 초목처럼 말이 없고, 천리(天理)는 거꾸러 흘러, 허망에 빠져버렸다. 이것은 거짓으로 천권(天權)을 훔쳐, 사욕의 횡포를 자행한 것이다. 제왕이 만약 천권을 대행하는 것이라면, 능히 일월(日月)을 개폐(開閉)하여, 만물을 조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제왕이란 수의 요체(數諦)요, 사람이 거짓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으로 칭하면, 다만 사기와 허망의 나쁜 장난이 될 뿐이다. 사람의 일이란 증리(證理)요, 세상의 일이란 그 증리한 사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니, 이 이외에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도의 법은 천수의 이치를 명확하게 증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무(本務)를 수행하게 하고, 그 본복(本福)을 받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비록 선후는 있으나, 높고 낮음이 없으며,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비록 친숙하고 생소한 것은 있으나, 끌어들이고 몰아내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해가 평등하며, 제족(諸族)이 자행(自行)하는 것이다. 오직 그 오미(五味)의 죄책을 보속(報贖)하는 것과, 대성의 일(大成之業)을 회복하는 것은, 언제나 일인 희생의 주관아래 있는 것이요, 여러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이 일은 예로부터 세상 일(人世之事)에 섞이지 아니하였다. 황궁(黃窮)씨와 유인(有因)씨의 예가 바로 이것이다.

第二十一章

또 그 소위 오행(五行)이라는 것은, 천수(天數)의 이치에 이러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방위(方位)의 중앙 5는 교차(交叉)의 뜻이요, 변행(變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하는 것은 1로부터 9까지 이므로, 5는 언제나 중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9가 윤회하여, 율(律)과 여(呂)가 서로 조화를 이룬 후에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는 기수(基數)를 이르는 것이요, 그 5,7이 크게 번지는 고리(大衍之環)에 이르면, 그 자리가 5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4,7이 있는 것이다. 또 그 순역(順逆) 생멸(生滅)의 윤멱(輪冪)은 4요, 5가 아니니, 즉 원수(原數)의 9는 불변수이기 때문이다. 또 윤멱이 한 번 끝나는 구간은 2X4=8 사이의 7이요, 5가아니다. 또 그 배성지물(配性之物)은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다섯 중에서 금(金)과 토(土)를 왜 따로 구별하는가. 그 약간의 차이 때문에 구별을 하고자 한다면, 기(氣)풍(風)초(草)석(石)따위는 어찌 같이 들지 않는가. 그러므로, 다 들자면, 수가 없는 것이요, 엄별해서 들자면, 금,목,수,화 혹은 토,목,수,화의 넷이요, 다섯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 물성(物性)을 어떤 이유로 수성(數性)에 짝지우는가, 수성지물(數性之物)은 그 원수가 9요, 5가 아니다. 그러므로 5행의 설은, 참으로 황당무괘한 말인 것이다. 이로써 인세를 증리(證理)하는 일을 무혹(誣惑)하여, 곧 천화(天禍)를 만드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第二十二章

또 그 역제(曆制)는, 천수(天數)의 근본을 살피지 못하고, 거북이나 명협의 미물(微物)에서 근본을 취하였으니, 요는 또 무슨 속셈인가. 천지의 만물이 다 수에서 나와, 각각 수를 상징하고 있는데, 하필 거북과 명협 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물사(物事)에, 각각 그 역(曆)이 있으니, 역이라는 것은 역사(歷史)다. 그러므로, 요의 역제는, 즉 거북과 명협의 역이요, 인간의 역이 아니니, 그것이, 인세(人世)와 불합(不合)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삼정(三正)을 번복하여, 구차스럽게 맞추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마침내 하늘의 죄를 끌여들였다. 역(曆)이라는 것은, 인생증리(人生證理)의 기본이므로, 그 수는 몸소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면,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증합(證合)하여 복이 되고, 역이 바르지 못하면, 천수에 어긋나 화가 되니, 이는 복은 이(理)가 존립(存立)하는데 있고, 이는 정증(正證)에 존립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은, 인세 화복(禍福)의 발단이니, 감히 삼가 하지 않을 것인가. 옛날, 오미(五味)의 화(禍)가, 한사람의 미혹에서 나와서, 만대의 산사람(生靈)에게 미치고 있는데, 지금 또 다시 역의 화가, 장차 천세(天世)의 진리에 미치고자 하니, 두렵기만 하구나.

第二十三章

천도(天道)가 돌고 돌아, 종시(終始)가 있고, 종시가 또 돌아, 4단씩 겹쳐 나가, 다시 종시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를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니, 사에는 13기(期)가 있고, 1기에는 28일이 있으며, 다시 4요(曜)로 나뉜다. 1요에는 7일이 있고, 요가 끝나는 것을 복(服)이라 한다. 그러므로, 1사에 52요복이 있으니, 즉 364일이다. 이는 1,4,7성수(性數)요, 매 사의 시작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으니, 단과 1은 같기 때문에 합하여 365일이 되고, 3사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이 있으니, 판은 사의 2분절이다. 이는 2,5,8법수(法數)요, 달이 긴 것이 1일과 같기 때문에, 제 4의 사는 366일이 된다. 10사의 반(半)에 대회(大晦)에 구가 있으니, 구는 시(時)의 근원이다. 300구가 1묘(?)가 되니, 묘는 구가 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묘를 지내서 각(刻), 분(分), 시(時)가 1일이 되니, 이는 3,6,9의 체수(體數)다. 이와 같이, 끝나고 또 시작하여, 차차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쳐서, 이수(理數)가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저 요의 이 세가지 잘못은, 허위(虛僞)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가히 부도 실위(實爲)의 도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허위는, 안에서 이(理)가 불실하여, 마침내 멸망에 이르고, 실위는, 이(理)가, 나를 언제나 만족하게 하여, 스스로 함께 존립한다.

第二十四章

유호(有戶)씨가 이와 같이 단단히 타일러서, 제법(諸法)을 폐지하고, 부도로 돌아 올 것을 권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위협이고, 모욕이라 하여, 곧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수차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모산(茅山) 진지(陣地)에서 죽었다. 이에 하중(夏衆)들이 비분하여, 죽기를 원하는 자가 수 만이였다. 이는 거의가 우와 함께 치수(治水)를 한 무리들이었다. 우의 아들 계(啓)가 이 대군을 이끌고, 유호씨의 읍(邑)으로 진격하여 오니, 유호씨의 군은 불과 수 천이었다. 그러나, 하군(夏軍)이 싸우면 반드시 패하여, 한번도 전적을 거양하지 못하였다. 계가 마침내 두려워서 퇴진하고, 다시 공격하지 못하자, 그 무리가 격양되었다. 이에 유호씨가 하중(夏衆)이 눈이 먼 것을 보고, 고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장차 서남제족(西南諸族)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읍(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제 6 장 : 잃어버린 부도의 법

第二十五章

이로부터, 천산(天山) 남쪽 태원(太原)의 지역이, 뒤숭숭하고 떠들썩하며, 주인이 없는 것과 같아서, 소위 왕이란 자는 눈이 멀고, 소위 장님은 백성이 되어, 암흑이 중첩하였다. 강자는 위에 있고, 약자는 아래에 있어, 왕과 제후를 나라에 봉하고, 생민(生民)을 제압하는 풍폐(風幣)가 만연하여 고질이 되고 마침내 서로 침탈하기에 이르니, 헛되게 생령(生靈)을 죽이고, 한가지도 세상에 이로운 것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하은(夏殷)이, 다 그 법으로 망하고서도, 끝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는 스스로 부도에서 떨어져 나가, 진리의 도를 들을 수 없게 된 까닭이었다. 어느덧 유호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성생(月息星生)의 땅에 들어가니, 즉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의 후예가, 오히려 소(巢)를 만드는 풍속을 잊지 아니하고, 고탑(高塔)과 층대(層臺)를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천부(天符)의 본음(本音)을 잊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여, 도를 와전하여,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싸우고 정벌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마고(麻姑)의 일은 거의가 기괴하게 되어, 허망하게도, 형적이 아주 없어지니, 유호씨가 두루 제족의 지역을 돌고, 마고와 천부의 이(理)를 설(說) 하였으나, 모두가 의아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 전고자(典古者)가 송구스럽게 일어나서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유호씨가 본리(本理)를 술회하여, 그것을 전하였다.

第二十六章

임검씨가 유호씨의 행상(行狀)을 듣고, 그 길을 장하게 여겨, 유호씨의 족(族)에게 교부(敎部)에 취업하게 하여 살도록 하였다. 이때에, 임검씨가 하토(夏土)의 형세를 심히 걱정을 하고, 마침내 입산(入山)하여, 해혹복본(解惑復本)의 도를 전수(專修)하였다. 임검씨의 아들 부루씨(夫婁氏)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천지가 하나의 이치가 되는 것을 증명하여, 인생이 일족(一族)이 되어, 크게 부조(父祖)의 도를 일으키고, 널리 <천웅(天雄)의 법을 행하여, 인세 증리(證理)의 일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운해족(雲海族)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하토(夏土)가 하나로 돌아오기를 시도하더니, 이도(異道)가 점차 성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루씨(夫婁氏)가 천부를 아들 읍루씨(?婁氏)에게 전하고 입산하였다. 읍루씨가 날 때부터, 대비(大悲)의 원(願)이 있어, 천부삼인을 이어받고, 하족(夏族)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진리가 사단(詐端)의 지역에 떨어진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마침내, 명지(明地)의 단에 천부를 봉쇄하고, 곧 입산하여, 복본의 대원(大願)을 전수(專修)하며, 백년 동안 나오지 아니하니, 유중(遺衆)이 통곡하였다. 임검씨가 후천(後天)의 말세의 초에 태여나, 사해의 장래를 미리 살피고, 부도 건설을 시범하니, 천년 사이에 그 공업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에 이르러 천부의 전해짐이 끊어져, 마고 분거(分居) 이래로, 황궁(黃穹), 유인(有因), 환인(桓因), 환웅(桓雄), 임검(壬儉), 부루(夫婁), 읍루(?婁)의 7세에 천부가 전해진 것이 7천년이었다. 제 7 장 : 삼한에서 삼국으로 第二十七章 (小 符都 誌) 은(殷)의 망명자 기자(箕子)가, 패군과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에 도망하여 왔다. 명예를 위하여 당우의 법을 행하고, 오행 삼정(五行三正)을 써서, 홍범 무함(洪範巫咸)을 시행하였다. 천웅의 도와는 절대로 서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은의 군민(軍民)이 무력으로 부도의 유중(遺衆)을 억압하므로, 유중이 마침내 명지(明地)의 단(壇)을 봉해버리고, 동해의 물가로 피하여 살았다. 즉 옛날의 사례벌(斯禮筏)의 공지(空地)였다. 사해벌은 긴 기(長旗)니, 광야(曠野)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내걸고, 저녁에 거둬들여, 먼곳에서 살면서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곧 육촌(六村)을 설치하고, 입접의 제족과 분담하여, 함께 지키되, 각각 한(韓)이라 하고, 보위(保衛)하였다. 한은 보위의 뜻이다. 북의 마한(馬韓)과, 남의 변한(卞韓)과, 동의 진한(辰韓)의 삼한이 부족의 자치를 행하고, 선세(先世)의 도를 굳게 지켜, 이후 천년 사이에 기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보위 방비하는 일에 전념하여, 거의 여력이 없었다. 이 때 하토(夏土)의 쟁탈의 바람이 점차 격심하여, 동요와 혼란이 삼한에 파급되므로, 육촌의 사람들이 서로 모의하고, 서쪽의 화가 점차 임박하여, 보수(保守)하기가 장차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이 통합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마침내 경계를 정하고, 요새(要塞)를 세워, 혁거세를 추대하여, 통어(統御)하는 일을 위임하였다. 남은 백제(百濟)요, 북은 고구려(高句麗)였다. 고구려가 곧 북보(北堡)의 땅을 회복하여, 서침(西侵)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그 지역을 완전하게 보위하였다. 제 8 장 : 어둠속으로 第二十八章 이보다 먼저, 육부(六部)의 촌장(村長)들이 약(藥)을 캐는 날에 모여서, 선도산 단묘(仙桃山壇廟)의 성모(聖母)가 알을 낳다는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가서 보았다. 동쪽의 우물을 보로 덮어 가리고, 껍질을 벗겨서, 남아를 얻었다. 몸에서는 빛이 나고, 귀가 부채만큼 컸다. 곧 박(朴)으로써 성을 삼고,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박은 단의 어음이 박달이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여 성을 삼았으며, 혁(赫)은 빛이니, 즉 광명으로써 암흑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육촌의 사람들이 함께 양육하니, 점차 자라면서, 신기(神氣)가 수명(秀明)하고, 대인(大人)의 도가 있었다. 13살에 여러 사람이 추거(推擧)하여, 거서간(居西干)이 되니, 거(居)는 거(据)요, 간(干)은 방(防)이요, 장(長)이다. 즉 서방에 의거하여, 경계하는 방어장(防禦長)의 뜻이다. 서방은 즉 저들 서침하여 사도(詐道)를 행하는 자들이다. 第二十九章 혁거세씨는, 천성(天性)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도 같았다. 또 현비(賢妃) 알영(閼英)을 맞이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들을 가르켜 이성(二聖)이라 하였다. 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사 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의 의식(儀式)을 행하고, 대인(大人)으로 하여금, 금척(金尺)의 이치에 따라, 천지시원의 근본을 증리(證理)하여, 옥관(玉管)의 음을 내서, 율여화생법(律呂化生法)을 수증(修證)하였다. 해마다 10월에 백의제(白衣祭)를 행하였으니, 이는 황궁(黃穹)씨의 속신백모지의(束身白茅之義)를 따르는 것이었다. 달구(達丘)에 조시(朝市)를 배풀고, 율포(栗浦)에 해시(海市)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하였다. 항상 순행(巡行)하여, 농상(農桑)과 방적(紡績)을 권장하니, 들에는 노적(露積)이 쌓이고, 집에는 베(布)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착한 일을 크게 일으켜, 여러 사람과 함께 그 고락(苦樂)을 같이 하고, 밖으로 방패와 창을 쓰지 아니하며, 이웃과 더불어 평화를 보존하였다. 한 마음으로 복고(復古)하고, 중건(重建)하는 일에 전념하니, 경내가 도가 있어, 옛날과 흡하사였다. 이 때에 변진(弁辰) 제족이 합동하여 협력하니, 비록 경계를 두고 방비하나, 나라를 칭하지 아니하고, 또 왕을 칭하지 아니하였다. 경내를 다스리는 일은 선세(先世)의 법을 준수하여, 제회(祭會)에서 의결되지 아니하면, 일찍이 한가지의 일도 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영수계위법(領首繼位法)이, 역시 혈계(血系)를 한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현명한 사람을 택하여 영수를 삼았다. 第三十章 남아 나이 20살이 된, 아름답고 말을 잘하는 사람을 택하여 마랑(馬郞)이라는 직을 주고, 명령을 받들어 원행(遠行)하게 하였다. 혹 성생월식의 옛 땅에 나아가며, 혹 운해천산의 여러 지역에 가니, 이 원행은 부도 수신(修身)의 유제(遺制) 였다. 동해에 피하여 산 지 천여년사이에 제시의 회(祭市之會)를 열지 못하여, 서로 내왕이 오래 끊어지고, 또 봉국쟁탈(封國爭奪)의 풍조가 사해에 만연하여, 제족이 각자 나라를 칭하고, 오랜 세월에 전란이 반복하니, 겨레(族)가 종횡으로 나뉘고, 말이 잡다하게 변하였다. 천부는 거의 망각하기에 이르고, 혹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도, 다 변형(變形)하여, 음이 다르니, 마랑들의 원행이 심히 어려워, 순절(殉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랑들이 만리 원행에서도 절조를 지켜, 능히 굳은 뜻을 가지고, 백난을 극복하여 사명을 완수하니, 그 거룩한 인격이 진실로 호매(豪邁)하였다. 장하게도 귀환하면, 반드시 직사(職事)에 임명하여,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와 역수(曆數)와 박물(博物)을 공부하게 하니, 이는 즉 선세에 사해를 통화하여, 인세(人世)를 하나의 법에 맞추는 유업이었다. 第三十一章 서례벌(西禮筏)을 창도(創都) 한 후로, 어느덧 삼세(三世)를 지나니, 백여년이 되었다. 세상의 풍조가 크게 변하여 보수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국왕(國王)을 세워, 대권을 행사 하게 하자는 여론이 대두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고 시끄러웠다. 그 반대자들은 선세의 유법이 밝고 밝게 천부를 비추니, 지금 비록 시대가 어려우나, 보수하고 튼튼히 방비하여,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어찌 사단(詐端)에 굴종하여 스스로 소자(小子)가 되어, 패리지중(悖理之中)에서, 모독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이와 같이 된다면, 의롭게 목숨을 바쳐, 진도(眞道)를 뚜렷하게 나타내어, 후세에 남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 찬성하는 사람들은, 외세가 긴박하여 파동이 격심하니, 어떻게 방비를 하겠는가. 담장 안에서도 이반하여 시끄러움이 그치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보수한단 말인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같이 경쟁하는 마당에 뛰어들어, 부강하게 된 후에, 유업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지금 사해 제족이 사도에 미쳐 날뛰어, 봉사가 된 지 오래 되었다. 우리가 지금 자멸하여 버리면 누가 진도를 현창하며, 후세에 누가 있어, 이를 알 것인가. 만약 능히 방비하여, 보수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고립되면, 새 백마리 가운데 백로 한 마리가 되어, 오히려 이도(異道)가 되고 세상에 존립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장차 또 그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 같은 것은 다 옳지 못하여, 오직 택할 바는, 나라를 세우고 왕을 높여, 대권(大權)을 집행하며, 군마를 호령하여, 파죽지세로 전진하고, 부도 전역을 회복하는 것 뿐이다. 부도를 다시 세워, 그 근본을 명시하면, 제족이 비록 완강하더라도, 반드시 각성하여, 근본으로 돌아올 것이다. 第三十二章 이에, 마침내 중론(衆論)이 결정되었으므로 인망(人望)이 왕국 수립을 주장하는 석(昔)씨에로 돌아 왔다. 석씨는 동보(東堡) 유배인의 후예로, 옛날부터, 해빈(海濱)에서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체격이 장대하고 지략이 있었으므로, 남해씨(南海氏)가 딸을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중의 여망에 따라, 자리를 이어 탈해왕(脫解王)이라 칭하니, 즉 보수(保守)의 질고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었다. 또 서라국(徐羅國)이라 칭하고, 비로소 방패와 창을 사용하여 경내(境內)를 평정하였다. 용병(用兵)을 과도하게 하여, 필경은 배척당하였다. 중론이 다시 박씨의 보수계로 돌아오니, 이에 박씨가 다시 계승하고, 왕국의 칭호를 폐지하였다. 4세를 지나, 중론이 또 석씨에게로 돌아 갔으나, 단 정벌하는 일을 원하지 않으니, 이가 벌휴씨(伐休氏)였다. 석씨 4세 사이에 정벌을 다시 시작하니, 중론이 김씨의 중화(中和)로 돌아왔다. 김씨는 원래 부도에서 동쪽으로 옮겨와 살던 비족으로, 온양덕후(溫讓德厚)하여, 지마씨(祗摩氏)가 손녀를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자리를 이으니, 이가 미추씨(味雛氏) 였다. 이 때를 당하여 서북의 환(患)이 계속해서 일어나되, 하나도 조치된 바가 없으므로, 중론이 다시 석씨에게로 복귀하였다. 이에 석씨가 다시 자리를 이어, 3세 사이에 정사(征事)가 허다하여, 민물(民物)을 탕진하므로, 크게 시대의 배척을 받았다. 중론이 다시 김씨에게로 돌아가니, 이에 김씨가 다시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第三十三章 오직 우리, 근본을 지키는 족들이 동해에 피하여 살면서, 방비하고, 보수한 지 삼백여년 사이에, 중론의 번복이 이와 같으니, 가히 역외(域外) 풍운이 어떠함을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또 가히 천부의 진리가 사단의 세상에서도 의연하게 살아 있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세 중론이 반드시 이 도가 무너지지 않는 것에 근거하여, 역대 영수가 오히려 중론의 소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과격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능히 조절하여, 보수를 크게 전하였으니, 마침내 오늘의 사람들로 하여금 가히 천부의 실재를 알게 하며, 또 장차 후인으로 하여금 때를 만나 그것을 행하게 하여, 능히 부도를 다시 건설하고, 사해를 통화하며, 인세가 복본하여, 진리를 명증(明證)하게 하면, 당시 석씨의 논이 과연 불행 중에서 행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題詩 [아지랑이 초초(??)하게 흐르는 걸 바라보니, 나그네의 마음도 가을처럼 지는구나. 세간(世間)의 견백(堅白)도 유유(悠悠)한 일도 징강(澄江)을 대하고 앉아 근심을 잊는다.] 觀雪堂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신지 계속 출간중. < 편찬자: 백영해 ,박씨 대종회 >

[1] 부도지에서는 마고성이 실달성(물질계)위에 허달성(정신계)와 나란이 있다 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마고성에서 나온 뒤 마고성을 허달성위로 올려 놓았다 하였으니 이는 물질계에서 접근을 할 방법이 없고 오로지 수련을 통해서 정신계를 통해서만이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2] 마고성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성경에서의 에덴동산과 유사한점을 발견을 할 수가 있다. 우리민족은 천산 태백산을 거쳐 삼신산인 백두산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 이 산들의 공통점은 모두 산 정상에 물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부도지에서는 단군(임검씨)에 이르러 마고성을 세상에 복원을 하였다 하였는데 백두산 정상의 물이나 주위에 흐르는 4개의 강이 에덴동산의 주위 풍경이랑 일치를 한다.(산정상에 물이 있고 주위에 4개의 강이 흐르는 것은 석가모니의 출생지 이야기에도 나오는데 세상에 이런 장소는 백두산이 유일하다 하겠다.)

[3]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인도의 성자 ‘사티아 사이바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신이다, 마찬가지로 당신들도 신이다.

다만 다른점이 있다면 내가 그것을 알고 있는데

여러분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적을 보이는 것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 불과 하다.

신과 인과과의 다른점은 욕망의 유무에 있다.

인간은 세속의 욕망을 버릴 때 마음속에 있는

신성을 발견 할 것이다.”

[4] 지상에서 가장 높다는 말은 하늘과 가장 가깝다는 말이고 이는 하늘의 뜻에 가장 충실하게 이행하는, 즉 본성으로서 살아가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5] 불교나 고대 그리스 철학을 살펴보면 사원소성이 나와 부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6] 황궁씨(黃穹氏)를 말함

[7] 흑소씨(黑巢氏)를 말함

[8] 청궁씨(靑穹氏)를 말함

[9]백소씨(白巢氏)를 말함

[10] 부도지 13장에 보면 마고성을 지을 터전을 설명하기를

[2와 6이 교감(交感)하는 핵심지역이요, 4와 8이 상생(相生)하는 결과의 땅이었다. 밝은 산과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고, 바다와 육지가 서로 통하여 십방으로 갈리어 나가니, 즉 9와 1의 끝과 시작이 다하지 않는 터전이었다. 삼근영초(三根靈草)와 오엽서실(五葉瑞實)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이 금강(金剛)의 심장부에 뿌리를 내려, 전 지역에 두루 가득하니, 이는 1과 3과 5와 7의 자삭(磁朔)의 정(精)이 모여, 바야흐로 물체를 만드는 복된 땅이었다.]

[11] 사방(동 서 남 북)과 사계(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말함

[12] 24절기와 6개의 절기가 모여 1개의 계절이 이루워 지는 것을 뜻함

[32] 앤드류 콜린스가 지은 <금지된 신의 문명>에서 보면 고대문명의 시작으로 알려진 문명을 조사하며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문명을 가진 뱀을 닮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뱀이란 성경을 비롯하여 고대문명의 흔적을 이야기 할 때 반듯이 나오는 테마이다.

[33] 앤드류 콜린스가 지은 <금지된 신의 문명>에서 보면 고대문명의 시작으로 알려진 문명을 조사하며 나오는 이야기중 뱀과 함께 항상 나오는 것이 새의 형상을 한 인간이 나온다.

[34] 여러 부족을 뜻한다.

[35] 마고성에는 청궁(靑穹)씨, 황궁(黃穹)씨, 백소(白巢)씨, 흑소(黑巢)씨와 소희(巢姬)와 궁희(穹姬)가 낳은 4쌍의 남녀 해서 총 12명의 천인이 있다.

[36] 부도지 18장에서 보면 유호씨까 칡을 먹고 오미를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지유 대신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칡을 설정한 것 같음.

[37] 한단고기에 의하면 8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 왔다 함.

일부에서는 3천의 무리라고도 하나 이는 한웅씨의 무리와 착오가 있는 것으로 추정 800이 맞을 것이다.

[38] 분거(分居)해 나간 여러 부족

[39] 지금으로부터 약 11000~12000년 정도 전으로 추정한다.

초고대문명(아틀란티스나 뮤, 레무리아등)의 흔적도 이때 무렵 없어 진것으로 추정하니 어떤부분에 있어 유사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40] 뮤는 원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같이 발전을 한 곳인데 아틀란티스는 뮤로부터 물질문명만 받아들여 뮤우와 자주 전쟁을 하였다. 시대적 배경이 그때 무렵이니 뭔가 연관이 없을까 추정한다. 또한 슈메르나 주변 국가의 기록 또는 에록의서에서 보면 네피림이야기와 같이 천상에서 쫗겨온 천사가 인간과 결혼 높은 문명의 힘으로 惡을 행하다 천상의 신과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이 생김새는 뱀과 같았다고 하고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이들을 뱀으로 묘사를 한다.

[41] 정신계를 뜻하며 이때부터 물질계(실달성)와의 접촉이 끊어져 육체의 힘으로는 갈수가 없고 오로지 정신계(수련)의 힘으로만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42] 약 1만년전의 홍수를 말하는 것으로 노아의 방주도 이때 무렵이다.

[43] 시베리아(사백력, 斯白力) 하늘 밑 바이칼 호수의 동쪽으로 흐르는 흑룡강(黑龍江, 龍江, 天河, 天海)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 됨

[44] 음(音)이 조화로울 수 있도록 잡아주는 기준 음을 말하는 것으로 후손들의 길을 밝혀 스스로 모범이 되어 부도의 법을 확립 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45]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부인과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 같으며 이를 혹자는 북과 칼과 거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부인(符印)이란 종이가 없던 시절 사용하던 대나무로 만든책을 말하는 것으로 고대 문서를 상징한다고 본다.

즉 천부삼인이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세가지 경전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으면 문맥상으로 세가지의 악기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46] 이는 한단고기에 나오는 7대 환인의 환인과 다른 말을 가르키는 것으로 추정 된다.

[47] 안창범의 <잃어버린 배달사상과 동양사상의 기원>을 보면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유래가 되었는 것으로 말하는 내용이 있음.

거기에 나오는 내용중 7세 한인중 석제임한인(釋提壬桓因)이 있으나 불교의 33천 중 주신중에선 석제한인(釋提桓因)있다고 함.

[48] 슈메르나 바벨로니아 에록의서에서는 이때 나타나는 문명족에 대해 뱀의 형상을 닮아 있다고 표현을 하였다.

[49] 혹자는 한인의 한국 3301년을 말한다 하여 이를 오천년으로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으나 여기에 이렇게 분명하게 삼천년으로 명시가 되어 있다.

[50] 부도지에서는 한명이 천년을 다스린 것으로 나와 있으나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고 한단고기의 내용과도 상반된다.

내가 보기에는 이는 한명의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법을 말한다고 본다. 자세한 것은 뒤에 다시 보충 설명을 하겠다.

[51] 황궁씨와 청궁씨, 흑소씨와 백소씨를 말한다.

[52] 부도지 2장에 보면

[궁희와 소희는 네 천인과 네 천녀를 낳아, 지유를 먹여 그들을 기르고, 네 천녀에게는 여(呂)를, 네 천인에게는 율(律)을 맡아보게 하였다.]

[53] 부도지 8장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54]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또는 필라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또는 직구다국), 사납아국, 선비이국(또는 시위국, 통고사국이라 함), 수밀이국 합하여 12개의 연방국가 이다.

[55] 부도지 10장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사람은 한국(桓國)이 3301년이니 셋을 합하여 5천년이라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황궁씨, 유인씨 환인씨 셋이 1000년씩 합이 3천년이라는 것은 부도지에도 명시가 되어 있고 한국의 한인이라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말의 고어로 세상에 있는 미개한 부족인 지손족(地孫族)의 눈에서 봤을 때 뛰어난 문명을 하지고 있는 이들 천손족(天孫族)이야 말로 하느님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한인이라 불렀고 이는 부도지에서의 환인씨와는 구별이 되어야 할 것이다.

[56] 임검씨란 무리들 즉 인간들 중에 왕을 말하는 것으로 최초로 인간들 중에서 지도자가 나온 것을 말한다.

이때를 조선으로 추정하는데 하늘이 주신 나라라 하여 ‘쥬신’이라 하였고 이의 이두식 표기가 ‘조선’이 되는 것이다.

[57] 환웅에서 환이란 하늘을 뜻하는 말이고 웅이란 고어로 땅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는 천손족과 지손족이 합하기 시작했음을 말하며 이때를 하늘을 열어 지손족을 받아들였다 하여 개천(開天)이라 한다. 단군신화에서 환웅할아버지와 웅녀와의 결합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58] 이집트의 대피라미드가 약 1만년 전에 내린 큰 비(돌에 깊은 자국을 남길 정도이니 엄청난 비로 추정이 된다)로 돌이 침식된 흔적이 있다 하니 만약 오미(五味)의 화(禍)로 인해 쫓겨난 지소(支巢)씨의 일부 세력이 여기에 흔적을 남기고 그 뒤 큰 변혁이 왔다고 가정하면 시기적으로 일치를 한다.

<신의 지문> 참조

참고로 대피라미드는 이집트의 그 어느 피라미드보다 정교하고, 거대하면서, 전혀 다른 양식으로 만들어 졌고 시대적인 차가 크므로 이집트인이 만들었다기 보다 다른 문명이 만들고 이집트인은 그것을 모방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부장품이나 미이라가 있었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덤이 아님 다른 용도로 쓰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신의 지문> 참조) 또한 안에 거대한 배가(장시간동안 바다를 건너 먼 곳까지 여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진 배다.)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다른 먼 곳으로부터 이주를 해온 것으로 보이며 주변에 큰 인공연못과 길이 어우러져 있고 옆에 비슷한 규모의 피라미드가 있어 사이에 바람이 지나 갈수 있게 만들어 놓았고 이 주변은 당시에는 초원이었을 것으로 가정을 한다면 마고성에서 세상을 구성하는 4가지 원소 기(氣,바람), 나무, 흙(돌), 물이 다 있는 것이니 마고성에서의 여건을 조성을 해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성립하게 된다.

이집트에 보면 아주 옛적부터 주술인들 사이에 내려오는 신비의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수는 천부경의 원리로 만들어 져 동양철학에도 자주 나오는 수 이다.

[59] 한단고기의 삼성기편에 보면 이때 동녀동남 800명이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왔다고 되어 있다.

[60] 마고가 마고성을 허달성 위로 올려 놓았음으로 복본을 위해서는 정신수련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후세에게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제시 법을 이어나가게 함.

[61] [흠정만주원고]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선(朝鮮)의 나라인 숙신의 나라(肅愼國)가 남녘으론 한밝산(太白山)을 포함하고, 북녘으론 흑룡강(黑龍江)에 닿아 있고, 또 그 안에 길림성 영고탑(寧古塔)이 있다. 숙신의 나라가 서녘으론 구막한국(寇莫汗國)에 닿았는데, 이나라에서 양운국(養雲國)까지는 말을 타고 100일을 가야 하며, 이 나라에서 비리국(卑離國)까지는 말을 타고 50일을 가야 한다. 숙신 나라의 서북녘에 있는 비리국까지는 200일을 가야 다 지날 수가 있다.

[62] 안파견(安巴堅)한인, 혁서(赫胥)한인, 고시리(古是利)한인, 주우양(朱于襄)환인, 석제임(釋堤壬)한임, 구을리(邱乙利)한인, 지위리(智爲利)한인

[63] 혹자는 단군이 개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64] 마야나 잉카등의 고대 문명을 살펴보면 6천년 전에 사람이 와 자신에게 문명을 전파 했다는 대목이 있고 이때와 한웅께서 사해 일족을 다니시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를 함

<신의 지문> 참조

[65] 한단고기 상성기에 보면 [뒤에 한웅씨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의 뜻을 받들어 백산과 흑수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이 모이는 곳을 천평(天坪)에 마련하고 그곳을 청구(靑邱)로 정했다. 천부(天符)의 징표를 지니시고 다섯가지 일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더라. 또 신시(神市)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倍達)이라 불렀다.

[66] 지위리(智爲利)한인

[67] 여기서 서자란 첩의 자식이 아닌 여러 자식 중 하나를 말하는 것 일 것이다.

어떤 이는 서자촌의 자식이다, 다른 이는 서자를 출현 시키므로 장자 우선이 아닌 기회균등을 말하는 것이라 하나 좀 현실성이 없을 것 같다.

[68] 이때를 개천(開天)이라 하였고 우리가 매년 지내는 개천절 행사는 이를 기념하는 것이지 절대 조선의 건국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69] [예기(禮記)]의 왕제편에 따르면 , 동이의 9겨레(九韓) 또는 9이겨레(九夷族)는, 견이(?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가 이다.

[70] 거발한, 거불리, 우야고, 모사라, 태우의, 다이발, 거련, 안부련, 양운, 갈고, 거야발, 주무신, 사와라, 자오의, 치액특, 축다리, 혁다세, 거불단

[71] 부도지에서 천부삼인(天符三印)이라 한것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세가지 경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72] 곡식, 생명, 형벌, 병, 선악을 말하는 것으로

우가(牛加)는 농업을, 마가(馬加)는 목숨을, 저가(猪加)는 병, 구가(拘加)가 형벌, 양가(羊加)가 선악을 담당했다.

[73] 부도의 법을 말하는 것으로 한단고기 내용중 교화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74] 밝은 땅이라는 뜻의 고어로 배달이란 이두식 표현이다.

[75] 인간들중에 왕이란 말이며 이전 한인 한웅때 까지는 마고성에서 나온 천손족중에서 왕이 나왔으나 이때 처음으로 인간들중 왕이 나왔으니 이때야 비로서 천손족과 지손족의 완전한 결합이 이루워 졌다. 기록에서 보면 [단군 한배검께서는 조선의 전체를 3한(三韓, 三王)이 나누워 다스리게 하고, 한배검 자신은 진임금(辰王)인 진한(辰韓)으로써 마한(馬韓)과 변한(卞韓)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때 곰겨레(熊族)의 자손인 웅백다(熊伯多)란 사람을 마한(馬韓, 마임금)으로 삼고 치우(蚩尤)의 후손 가운데 지혜와 슬기와 용기와 힘이 뛰여난 치두남(蚩頭男)을 변한(卞韓)으로 삼았다]라 하여 이들이 완전하게 융화가 되었음을 말한다.

[76] 고기(魚)와 양(羊) 합하면 선(鮮)이란 글자가 된다.

우리나라를 말하는 조선(朝鮮)글에서 보면 조(朝)란 해(日)와 달(月)의 밝음이 합하여 완성이 되는 것을 형상화 시킨 글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조(朝)란 광명, 하늘(天)을 뜻하고 선(鮮)이란 위에서 보듯이 제사를 말하는 것으로 합하면 천제(天祭)를 뜻하여 조선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자격이 있는 것을 뜻한다.

[77] 마야나 잉카등의 고대문명에서는 이가 변질되어 인신공양의 제사가 된 것 으로 추정.

[78] 조선의 정식 명칭은 ‘쥬신’으로 조선(朝鮮)이란 쥬신의 이두식 표기이다.

[79] 마한(馬韓, 마임금)의 첫임금으로는 곰겨레(熊族)의 자손인 웅백다(熊伯多)를 임명하였다.

[80] 변한(卞韓)의 첫임금으로는 치우(蚩尤)의 후손 가운데 지혜와 슬기와 용기와 힘이 뛰여난 치두남(蚩頭男)을 으로 삼았다

[81] 지금의 백두산을 말한다. 백두산의 명칭으로는

개마대산(蓋馬大山), 개마산(蓋馬山), 구월산(九月山), 궁골산, 금미산(今彌山), 단단대령(單單大嶺), 도태산(徒太山), 도태백(徒太白), 도산(塗山=발산), 방골산, 백아강(白牙岡), 백역산(白亦山), 백운산(白雲山), 백주(白州), 부산(釜山), 불함산(不咸山), 신산(神山), 비백산(鼻白山), 삼신산(三神山), 삼성산(三聖山), 삼위산(三危山), 설산(雪山), 아사달산(阿斯達山), 두산(頭山), 대박산(大朴山), 단산(丹山=붉산=발산), 목단봉(牧丹峰=한밝재), 박달산(朴達山), 백계산(白階山), 백산(白山), 백악산(白岳山), 백악(白岳), 백달(白達), 증산(甑山), 천산(天山), 천백산(天白山), 천조산(天祖山), 천신산(天神山), 천성산(天聖山), 천등산(天登山), 태박산(太博山), 태백(太伯), 태백산(太伯山), 태황산(太皇山), 풍산(風山), 장백산(長白山), 조백산(祖白山), 조산(祖山), 함박산(咸朴山), 환산(桓山, 丸山)

[82] 우리나라는 12지지중 인(寅, 陽木)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의 풍습에 신목(神木)이라 하여 마을마다 가장 큰 나무를 정해 신성시 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에 연유를 한 것 같다.

박달나무란 밝은땅에서 나는 나무라는 뜻으로 당시 우리민족을 신성시하는 나무가 아니었나 추측을 한다.

[83] 화(火)는 열기, 빛, 팽창하는 힘, 상승하는 힘, 발산하거나 흩어지는 힘등을 말하는 것이고, 수(水)는 냉기, 어둠, 수축하는 힘, 하강하는 힘, 뭉치는 힘등을 상징 할 것이고, 토(土)는 재료요 형상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기(氣)란 생명력, 에너지등을 상징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중국의 신화에 여와가 흙으로 인간을 빗는 것이 나오는데 이는 흙과 물을 이용하여 형상을 이루고 열과 기로 생명을 만들어 넣은 것으로 해석이 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 중 만물을 이루는 4대 원소로 공기, 물, 불, 흙을 들었는데 당시에는 공기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것으로 볼 때 공기란 기(氣)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이 된다.

그렇다고 보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일치하는 것이 되어 고대 철학의 근간이 이것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가능하리라 생각이 된다.

[84] 현재까지 발견된 고인돌은 세계에 15만개가 있다고 한다. 그 중 10만개가 우리나라 안에 있는데 그 속에서 발견되는 부장품을 보면 누구나 다 만들었고 계층별 차이가 거의 없어 우리 고대 사회가 평등사회 였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을 할 수 있다고 한다.

[85] 1년을 13달 나눠 사용을 하는데 그 달력의 정밀도가 매우 높아 천년이 지나도 몇 초 틀리지 않아 현대의 달력보다 그 정확도가 훨씬 더 높다.

[86] 서양에는 권력자가 역(曆)을 정리를 하여 율리시스력이나 그래고리력이라 하며 만든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데 마야와 같이 천체의 움직임을 체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사욕이 들어가 많이 변조가 되었다. 예를 들어 그들이 12진법을 사용을 하여 12개의 달로 나눴으나 1월(30), 2월(31), 3월(30), 4월(31), 5월(30), 6월(31), 7월(30), 8월(30), 9월(31), 10월(30), 11월(31), 12월(30)로 나누면 365일이 되나 율리시스가 자신의 생일(2월28일)에 맞춰 2월을 28일로 만들고 1월(31), 2월(28), 3월(31), 4월(30), 5월(31), 6월(30), 7월(31), 8월(31), 9월(30), 10월(31), 11월(30), 12월(31)로 만들었다.

[87] 一始無始一에서 시작하여 一終無終一로 끝나는 것에서 보듯 시작과 끝은 하나로 서로가 맞물려 순환하는 원리를 표현하였다.

[88] 종시(終始)로 표현,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 하루 하루가 끝까지 가서 다시

[89] 1년(年)을 말함

[90] 오늘날의 1주일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요일(曜日)이란 것은 여기서 유래를 한 것이다.

[91] 요(曜)가 끝나는 것을 복(服)이라 하니 요복(曜服)이라 함은 각 요일의 시작에서 끝까지 그러니까 7일을 뜻하는 것이다.

[92] 오늘날의 윤년을 말한다

[93] 단기고사에 보면 43세 단군 때 융안(隆安)의 사냥꾼 우화충(于和沖)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를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 시키며 난을 일으키고, 46세 단군 때에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입하였고, 47세 단군 때는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키는등 삼한(조선)의 말기에는 크고 작은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 나게 된다.

[94] 우화충(于和沖)의 반란을 진압하고 단군이 되어 나라의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고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꿔 불렀다. 삼조선이란 신조선(辰韓), 불조선(卞韓), 번조선(馬韓)을 말한다.

[95] 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도(玄 )

[96] 사마천은 조선과 한의 전쟁을 하던 B.C 108년에 한무제에 의해 태사령(太史令)에 등용된다. 태사령이란 비록 그 지위는 낮으나 조정의 문서, 역사, 천문, 역법 등을 관장하는 부서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가 있는 위치였고,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니 이것이 사기(史記) 115권 조선열전(朝鮮列傳)이다. 따라서 당시의 이 기록은 후세의 어느 기록보다 신뢰성이 있는 기록이라 하겠다. 만약 한나라가 조선을 이겨 한사군을 설치를 했으면, 이 중요한 기록이 사기에 빠졌을 이유가 없다.

[97] 번조선의 유민인 조선족 장수 최(最)가 우거를 죽이고, 우거가 죽자 다시 반항하던 성기(成己)를 죽였는데 이 일의 주역이 모두 조선족이다.

[98]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국사에서는 조선의 강역을 한반도로 한정을 했는데 여기에서 보면 최소 발해 연안에서 산동반도까지 인 것을 알 수 있다.

[99] 신라를 세운 인물로 부도지(符都誌)를 만든 박제상의 직계 조상이 된다.

[100] 금(金)이란 고귀한 성스러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척(尺)이란 자로서 사물을 재는 척도로 사용하는 도구로 바른 법도(法道)나 기준(基準)을 뜻하는 것이다. 해서 금척이란 고귀한, 또는 성스러운 법도 즉 부도의 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 김태형의 부도지 해설서 <마고 복본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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