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이씨 가문이 간직한 한민족 고대사

 

월간사람과산_김규순의 풍수이야기 ::: 2014년 09월호
고성이씨 가문이 간직한 한민족 고대사
글 사진 :: 김 규 순 (서울풍수아카데미, www.location‎‍art.co.kr)

송학동 고분군—송학동 고분군과 거류산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고성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거류산의 정기를 타고 났기 때문이다.
경남 고성에서는 수억년전 공룡의 발자국이 발견되고, 소가야의 고분군이 우리를 반겨주지만, 단군의 역사를 전해준 이암의 정기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생가터가 있으며, 이암의 증조부와 선친의 묘도 남아 있다. 그를 기리는 갈천서원이 옛 앨범사진처럼 남아있고, 그가 뛰어 놀던 무량산과 거류산에 올라보면 남해의 바다가 보인다. 무량산은 이름 그대로 한없는 정기를 머금고 있어 백두산과 같은 기개를 지닌다. 비록 남쪽 바닷가 끄트머리에 살았어도 백두산의 향기를 느꼈던 이암을 생각해 본다.
고성이씨 조상묘소

—회화면 봉동리의 고성이씨 선조의 산소. 고려좌시중 이우(이암의 선친)와 함양군부인 박씨 그리고 이진(증조부)의 묘가 나란히 서 있다. 고성이씨의 조상으로서 가장 선대의 무덤이다.고려시대의 풍수는 능선이 펑퍼짐 한 곳을 선호한다. 신숭겸묘, 광주이씨 이당묘 등이 그런 류이다.

행촌 증조부모와 부모 무덤 무인석과 장명등은 근래에 세워진 것이다.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 있는 무인석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 고유의 무인석과는 차이가 많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문인석만 세우지 무인석은 세우지 않는다. 무슨 근거에서 이런 석물을 세웠는지 안타깝다. 장명등의 위치가 이상하다. 장대석 위 상석과 상석 사이에 자리했는데 장대석 아래에 설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고성의 인물
경남 고성군은 지리산에서 출발한 낙남정맥이 무량산에 진기를 응집하고 바다가로 능선을 펼쳐 남산과 거류산을 만들었으며, 능선 안쪽으로 너른 평야를 안고 있으니 여기가 고성이다. 고성은 해변이지만 농경이 더 적합한 고장이어서 해안마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고성의 진산 무량산無量山과 동쪽의 거류산巨流山이 고성군의 인물을 배출하는 원동력이다. 고성 안마당의 남산은 통영과 거제로 연결 되는 산맥의 연결고리이면서 고성의 등뼈역할을 하고 있다. 고성은 쇠락하거나 흩어진 기운을 다스리는데 좋은 고장이다. 그 기운이 조화를 부려 한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단군세기>를 저술한 행촌 이암이 태어났다. 고성에서 태어나고 고성에서 자랐다고 해서 모두가 이암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조화롭게 소화시킬 내공이 있어야 한다. 그런 내공은 자기 수양을 통해서 가능하다.
무량산은 풍류사상과 불교를 떠올리는 산이고, 거류산은 유교사상을 떠올리게 하는 산이다.

그래서인지 고성에서는 두 분류의 인물이 쏟아져 나왔다. 시인 박목월, 연극인 추송웅, 산악인 엄홍길 등 풍류인과 거론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정치인과 고위 관료층이다.
<환단고기>—<삼성기三聖紀>·<단군세기>·<북부여기北夫餘紀>·<태백일사> 등 4권의 책을 하나로 엮은 책.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필사본만 전하여 위서논쟁에 휘말렸다. <환단고기>의 기원전 1733년의 천문학 기록이 천문학자 박창범(서울대 천문학과교수)에 의해서 사실임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고, 하가점 조개화폐가 출토되어 단군세기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고고학자들의 확인 등 그 내용의 진실성이 고증되고 있어 매우 고무적이다. 2014년6월27일 인하대학교에서 환단학회가 발족되어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환단고기>의 내용을 지속적으로 증명해 나가고 있다. 쌀에 돌이 섞여 있다고 쌀까지 버릴 수는 없다. 돌만 골라내면 되는 일이다. <단군세기>도 그 역사의 진실성만 골라내면 된다. 700년동안 필사로 전해지면서 글자 몇 개 이상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고성이씨의 토착화
고성이씨는 토착성씨가 아니다. 한 무제 때 중서사인中書舍人 이반의 24세손인 이황李璜이 고성이씨 시조이다. 고려 후기 최우의 항몽 전쟁에 임하면서 왕도 개성에서 강화로 천도하고, 백성이나 지방 호족들에게는 ‘바닷가나 섬 또는 산속으로 숨어서 살아라’는 왕명을 내린다. 전시중이라 병부상서 인충麟沖(고성이씨 4세손)은 남해안의 농산물을 강화도로 공급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 때 아들 이진(5세손)과 가족들을 경남 고성에 이주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고성이 본관이 된 유래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행촌자화상 출처 : 고성이씨 문중자료 .행촌의 묵죽墨竹이 석죽石竹을 배경으로 하여 정자에서 책을 보는 모습의 자화상이다. 목은집에 묘사가 되어있는 바위는 준법의 상징이며 대나무는 전형적인 문인화풍의 그림이다. 고려의 전통 일상복인 직영을 입었으며 조선 초까지 썼던 관을 썼다. 수행자의 도구인 불자拂子를 옆에 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가하게 보내던 60대 후반의 모습이다.
민족사관의 선두주자 행촌 이암

행촌 이암李嵒(1297~1364, 8세손)선생은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고성에서 태어나서 고려 공민왕의 문하시중을 지냈던 분으로 유불선에 통달하였다. 행촌의 숙부는 각진국사, 동생은 운암대사로 큰 스님을 배출한 불교가문이었기에 자연히 불교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조부 이존비李尊庇(6세손)는 외삼촌 백문절에게 글을 배웠고 이암은 백이정에게 글을 배웠다. 백이정은 백문절의 아들로 1298년부터 10년간 연경에 머물면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귀국해서 도학과 예학을 발전시킨 조선 성리학의 뿌리이다. 조선의 유학은 백이정_이제현_이색_정몽주로 이어졌다. 고조선의 신교사상을 최치원은 풍류사상, 신채호는 낭가사상郎家思想이라 했는데, 고조선시대부터 도가∙선가사상의 원류로 우리 고유의 사상이다.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을 흠모하여 자기의 자를 고운古雲이라 지었을 정도였고, 낭가사상으로 나타난 한민족 역사의 원류에 대한 내공이 깊었다. 행촌이 주유천하하면서 천보산 태소암에 머물 때, 소전素佺이란 사람에게서 신서神書를 얻어 이를 참고하여 써내려간 책이 <단군세기>라 전한다. <단군세기>의 서문에서 그의 낭가사상의 진면목을 읽을 수 있다.갈천서원—행촌 이암선생을 기리는 서원. 대가면 갈천리에 있다.안산은 일자문성一字文星의 옥대사로 아담하고 다정스럽다.
이암선생이 한민족을 일깨우다
이암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나라를 위하는 길은 사대부의 정신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역사보다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역사가 분명하지 못하면 사대부의 정신을 진작시킬 수 없고, 사대부의 정신이 진작되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분열되기 때문이다.”,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혼魂인대, 혼을 잃은 형이 어떻게 보존될 수 있을까?” 라며 역사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행촌의 위대한 과업은 역사 인식을 분명히 했으며, 고성이씨 후손들이 나아갈 바를 제시한 것이며, 후손들은 그를 정신적 지주로 받들면서 천년을 이어 그 책무를 이어받았다. 이암의 정신은 후손들을 통하여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으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던 이암의 낭가사상은 이 나라를 지탱하고 독립하는데 일등공신이 아닐 수 없다.

행촌도촌유허지—무량산에서 통영과 거제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능선 남쪽기슭에 의지한 집터이다. 고려말 혼란기에 몽고가 쳐들어오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 왜적이 쳐들어오면 산으로 올라가면 되는 입지선정이 뛰어난 곳이다. 집터에서 우측에 있는 남산에 올라서면 몽고군의 진로와 왜구의 움직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마을은 바다에서도 쉽게 발견하기 힘들고 뒤쪽 평야나 산에서도 관찰이 쉽지 않는 자리이다. 앞뒤좌우가 조밀하여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에도 안전한 곳일뿐더러 땅이 양명하여 해양과 대륙의 이점을 모두 지닌 훌륭한 자리이다. 안내판이 없어서 물어서 길을 찾았다. 고성에서조차 이암선생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성이씨의 민족사 수호
원나라가 제천의식을 거행하지 못하게 핍박하자, 우리 고유 역사의 보존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서 단순히 단군신화를 언급하는데 그쳤으나, 행촌 이암은 1363년(공민왕 12년) 강화도 해운당에서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저술하면서 고조선이 만주 대륙에 포진한 역사 즉, 1세 단군에서 47세 단군까지 2000년간을 연대기로 기록하였다. 이때부터 고성이씨의 민족사 수호의 고달픈 운명은 시작되었다. 세조는 1457년 고조선비사의 서적을 개인이 소장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럼에도 이암의 후손들은 조상의 업적을 포기할 수 없어서 몰래 숨겨놓고 전했다. 특히 이암의 4세손 이맥李陌(1453-1500)은 아버지 이지李墀의 요청으로 <단군세기>를 필사하여 보존하였고, 또한 북방고대사를 보완하여 <태백일사>를 서술하였다. 그가 <태백일사>를 편찬할 수 있었던 것은 중종 때 대사간과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하면서 세조 때 압수한 고기록古記錄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맥의 아들 이린李嶙은 개천군수(평남)로, 손자 이방李滂은 평북 삭주에 근무하게 된 후 그 후손들은 삭주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변방은 고문서 수거령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황이었기에 그의 직계 후손은 조상의 유업을 지킨다는 책임감으로 <단군세기>와 <태백일사>가 은밀하게 전승하였다. 고성이씨의 갈래로 경기도 부근이나 안동 등 한강 이남에 이거하여 살았던 후손들은 <단군세기>를 간직하지 못했던 것은 고조선 역사서에 대한 수거령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왕실이 수거한 고서들은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면서 사라졌으니 임진왜란 전에 이맥이 편찬하여 보관한 <태백일사>는 과히 우리나라고대사의 보물이라 하겠다.
무량산—고성 들판에 물을 공급하는 귀한 산이다. 높이는 589m에 불과하지만 해수면에서 보는 높이는 상당한 위압감을 준다. 고성 인물의 저력과 끈기를 보여주는 산이다.
620년 만에 공개된 <단군세기>
계연수는 <삼성기三聖紀>·<단군세기>·<북부여기北夫餘紀>·<태백일사> 등 4권의 책을 하나로 엮어서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은 후 필사한 뒤 초판 30권을 인쇄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있다. 이기(1848~1909)는 이맥의 후손이며 계연수의 스승이었다. 계연수는 경신년(1980)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이유립李裕岦에게 남겼으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에 사망한다. 이방의 직계후손으로 독립운동가이면서 민족주의자였던 이유립(1907-1986)은 광복 후 <환단고기>를 지니고 남하였으나 그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야 했다. 그가 지닌 책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비에 젖고 찢어지고 잦은 이사로 소실되어 원본이 사라지고 오탈자와 현대어가 많은 필사본만 남아서 위서논쟁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어쨌든 필사본이나마 공개하게 되었으니 고성이씨 가문의 말하지 못할 응어리가 실로 600년 만에 풀린 셈이고, 영원히 사라질 뻔한 역사를 보전하게 되었으니 고증여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이렇듯 고성이씨의 가문에 의해 대한민국 역사의 원류이자 뿌리인 북방고대사가 전해져 온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한 가문이 한민족의 고대사를 책임지고 700년 성상을 견디어 전했으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위대한 사업이었던가. 이암선생으로부터 이유립 선생까지 26대가 이어온 성공시대의 이야기이다. 이는 26분의 이암이 시대를 이어온 것과 같으니, 행촌 이암 선생의 내공이 얼마나 강력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옥천사—고성군의 천년고찰. 옥천사는 옥천 즉 옥수가 쏟아져 나오는 절이다. 바닷물은 아무리 많아도 마실 수 없다. 민물이야 말고 사람에게는 생명수이다. 기는 물의 모체라고 했다. 물이 있는 곳에는 생기가 서려 있다는 증거이다. 기가 서린 곳에 지은 절이 옥천사이다. 물이 좋고 끊이지 않는 고장의 상징이다.

김해허씨 고가 사랑채에서 바라본 마암면 장산리의 장산숲—대진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고성에 이르면 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고성을 돌아다녀보면 산이 깊은 골골에도 제법 너른 논이 펼쳐져 있다. 고성에는 큰 강이 없고 개천만 있는데도 벼농사가 성행하는 것을 보면 물의 공급이 굉장히 원활하다는 의미이다. 기는 물의 모체이다. 강이 없어도 물이 지속적으로 공급된다는 것은 고성에 진기眞氣가 머무르고 있다는 반증이다. 여행이 아니고서는 이런 묘미를 발견하기 어렵다.
장산리는 김해허씨가 모여 살던 마을이다. 허씨 가문에서 장산숲을 조성할 때는 1000m의 길이였다고 전하나, 지금은 100m 정도만 남아 있다. 마을이 들판으로 열려 있는 것을 싫어한 선조들이 만든 수풀울타리이다. 소위 좌청룡을 대신하게 만든 비보숲이다.
(도움말 주신 분: 고성이씨종중 이영규)

http://cafe.daum.net/gosunglee/1v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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