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와 고성이씨 가문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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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수, 우리 상고사의 발견, <환단고기>의 유래
- 김규순, 고성이씨 가문이 간직한 한민족 고대사
- 박찬화 기자, 안동 임청각과 환단고기, 고성이씨 가문의 독립운동
- 이정훈,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신동아 2007년 9월호 1-6)
환단고기와 고성이씨 가문의 오랜 인연
고성 이씨 가문이 환단고기와 만나는 것은 고려가 몽고침략을 받는 시기부터 시작된다. 이존비李尊庇(1233-1287)는 어느 날 왕자를 가르치는 서연書筵에서 고려의 자주부강론을 역설한다. “우리나라는 환단 이후 북부여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부강하고 자주독립을 지켜온 나라인데 최근 원(몽고)의 내정 간섭으로 나라에 사대주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자주오사自主五事를 상주하였다. (태백일사 고려국 본기)
이존비의 자주독립론을 이어받은 사람이 행촌 이암(1297-1364)이었다. 이암은 이존비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와 똑같은 자주책을 임금에게 상주하고 1) 태백진훈 2) 도학심법 3) 농상집요農桑集要 등 행촌삼서杏村三書를 남겼다. 지금까지 이암에게 삼서만 있다는 사실만 전해지고 그가 남긴 『단군세기』는 숨겨져 있었다. 이암이 『단군세기』를 비롯한 여러 비서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일처럼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천보산天寶山에 올라갔을 때 소전이란 사람이 태소암에 진서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말을 하여 가서 읽어 보니 모두가 환단 시대의 신서神書와 진결眞訣이었다는 것이다. (고려국 본기 제8)
또 한 분, 고성 이씨 문중에 이맥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 연산군과 중종 때 사람으로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아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하도 무료하여 집에 고이 간직했던 고서와 이웃 고노들에게서 들은 구전口傳 그리고 자신이 관직에 있을 때 발견한 내각의 비밀문서들을 참고하여 『태백일사』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이맥이 후손들에게 이 책을 비장(숨겨 보관함)하라 일렀다.
그러니 『태백일사』는 500년간이나 고성 이씨 문중에 비장된 것이다.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의 핵심부분을 이룬다. 만일 이 책이 보존되지 않고 사라졌더라면 민족사는 회복할 길이 없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맥은 물론 그 후손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모르는 일이다.
이암과 이맥이 남긴 비서는 한말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 1909)에 의해 공개되어 『환단고기』(1911년)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원본은 지금 없다. 그러나 원본은 분명 이기와 그 제자 계연수가 읽었다. 대종교와 단군교를 중광한 나철(弘巖 羅喆 1863- 1916)과 정훈모도 읽었다. 이기 나철 그리고 정훈모는 각기 다른 이름의 종교단체를 조직하였으니 이기는 단학회, 나철은 대종교, 그리고 정훈모는 단군교를 창설하였고 단학회를 계승한 이기의 책은 이유립에게 전수되었다.
이유립은 광복 후 『커발한』이란 신문에 『환단고기』 원고 일부를 발표하던 중 일본의 재야사가 녹도승(鹿島昇)에게 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건네주었는데 녹도승이 원고를 넘겨받아 신의 없이 약속을 깨고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내고 말았다.
이존비, 이암, 이맥, 이기 그리고 이유립 등 고성 이씨 문중에 전해 내려 온 경위는 위와 같았으나 출판되어 나온 것이 너무 늦어 세상 사람들이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역사에 불만이 많았던 분들은 크게 환영하여 국론이 딱 둘로 갈라졌다.
북한학자들이 『환단고기』를 인용하고 대한민국에서도 단군학회가 조직되어 활발히 상고사를 연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불안하다. 대학의 강단을 점령하고 있는 한국사 교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멈칫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1. <단군세기>의 저자, 이암李嵒
행촌 이암(1297~1364)
[고려사] <열전>에 올랐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그가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와 관리가 배출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으며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文翰학사 및 進賢館 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의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할아버지 이존비의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후손이 바로 행촌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강화도 마리산의 보제사에 들어가 3년 동안 유가의 경전과 우리 고대사에 대한 기록을 탐독하였다. 부모님이 그리울 때면 마리산 꼭대기의 참성단에 올라, 수천 년 전 그곳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단군왕검의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겼다. 그 때 지은 시①를 보면, 십대의 어린 나이에 나라의 평안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염원을 세우고 있다.
17세(1313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암은, 고려가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던 시기의 여덟 국왕 가운데 여섯 분을 모시면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충선왕 때 나라의 관인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시작하여 두 차례 유배를 당하고, 왕의 책봉을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62세(1358년) 때 공민왕의 부름에 환도하여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개혁군주이다. 그러한 공민왕의 곁에 이암이 있었다. 문하시중이 된 그 다음 해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적군 4만 명을 격퇴시켰고, 1년 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경북 안동으로 피난가는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임금 앞에서 자신을 ‘臣’ 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친원파의 간신이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이암은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권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홍건적을 격퇴하고 왕을 호종한 공로로 좌정승에 제수되기까지(1361년) 했지만, 공민왕의 부름에 응한 지 5년 만에(1363년) 사퇴하고 야인이 되었다.
행촌에게는 고려와 조선의 여느 정치가, 학자와는 남다른 면모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 서적만이 아니라 동서문화의 원류인 신교 사서를 탐독하여 신교의 삼신문화에 정통하였다. 첫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3년을 보낼 때도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 등을 연구하는 독서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나(1335년)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머물 때, 소전素佺거사②로부터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환국-배달-조선)시대를 기록한 고서적들을 전수받았다. 신교문화에 통한 이암을 소전거사가 알아보고서 석굴 속에 감춰져 전해오던 사서를 전해준 것이다.
이암은 나중에 그것을 근거로 <단군세기>를 쓰고, 당시 소전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 <태백진훈太白眞訓>을 지었다. 이때 복애거사 범장과 청평거사 이명도 소전거사에게 비기秘記를 전수받아, 범장은 <북부여기>를, 이명은 <진역유기>를 저술하였다. <단군세기>와 함께 이 사서들은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문화의 본래 면목을 드러낸 소중한 문헌들이다.
이암이 언제부터 <단군세기>를 집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그는 67세(1363년)에 사직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건너가 선행리 홍행촌에 海雲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단군세기>의 마지막 손질에 혼신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민족의 현실을 통탄하며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웅변하는 <단군세기> 서문에서 그는 ‘인간은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생겨나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멋진 삶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명쾌한 필치로 밝히고 있다. 인성론을 중심으로 신교의 역사관을 정리한 이 서문은 대학자로서의 지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만고의 명문장이다. 행촌 이암, 그는 동방 한민족의 역사를 유교사관도 불교사관도 아닌 한민족 고유의 신교사관으로 저술한, 신교사관의 정립자이다.
2. <태백일사>의 저자, 이맥李陌
이맥(1455~1528)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며 행촌 이암의 고손자다. 1474년(서종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이때 장숙용(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내세워 분에 넘치는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결국 괴산에 유배되었다(1504). 귀양살이 시절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책들과 노인들에게서 채록한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높은 관직을 제수받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에 머물렀다. 이는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 내에 적이 많았던 때문으로, 1517년(중종12)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에 그가 취한 입장에서도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그는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 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66세 때인 1520년,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인 찬수관撰修官이 되어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춰 둔 상고 역사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금서들의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시절에 정리해둔 글들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태백일사>, 즉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 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서 벗어나는 학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로 인해 그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태백일사>는 한민족의 7천 년 상고 역사를 환국, 배달, 고조선 각 시대별로 세밀하게 다루면서 당시 신교 문화의 신관, 우주관, 인간관, 역사관, 윤리관을 조목조목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교 문화 역사서의 완결본인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가히 한민족 신교문화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3.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세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 「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 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 《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24세인 1930년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 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三育》 7월호에 「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1942년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등 12항을 이유로 강제 폐쇄 당했다.
39세인 1945년 「단학회(檀學會)」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69세인 1975년 5월 8일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東源論)》을 미국의 하버드. 워싱턴. 콜롬비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 갔다.
70세인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제씨와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하신 이듬해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한단고기의 편저자와 출간 내력
1. 《한단고기》의 편저자 계연수.
《한단고기》는 일제강점기인 1911년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1920)가 엮은(編著)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 및 〈태백일사〉라는 네 종류의 책을 하나로 엮어서 해학 이기의 감수를 받고 묘향산 단굴암에서 필사하였다.
이기와 계연수는 항일운동을 하는 가운데 우리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고 평안도일대의 고서와 옛 기록들을 수집하였던 듯하다.
〈삼성기〉 상편은 계연수의 집에 전해지던 책이었고, 〈태백일사〉는 이기의 집에 소장된 책이었다. 〈삼성기〉 하편은 태천의 진사 백관묵(白寬默)의 집에서,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2종의 책이 합편된 것을 삭주의 진사 이형식(李亨?)의 집에서 구했다고 한다.
《한단고기》의 범례(凡例)에는 정성을 다하여 필사한 것을 홍범도(洪範圖)와 오동진(吳東振) 두 벗의 자금 마련으로 인쇄하였으며, 이 일은 ‘자아 인간의 주체성을 발견하고 민족문화의 이념을 표출하기 위하여 그리고 세계 인류의 공존을 이루어 가기 위한 것이니 큰 기쁨’이라고 밝혀 놓았다.
《한단고기》는 1911(光武 15)년 3월 16일에 석판(石版) 양식으로 출간되어 처음 선을 보였다. 표지에 원저자 운초 계연수, 교열(校閱) 해학(海鶴) 이기(海鶴)임을 밝혀 놓았고, 내용은 유려한 해서로 정리되어 있는데 필사자는 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초판은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30부 한정판으로 출간되었고, 이 초판본은 1979년에 다시 그대로 영인되어 100부 한정판으로 재판 발행되었다. 현재 숙명여대 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 고 송지영 KBS 이사장이 입수하여 숙명여대 윤태림 총장을 통해 기증한 것이다.
1979년 이유립 옹이 간행하여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한단고기》는 이유립 옹이 1949년 오형기(吳炯基)에 와 비교하면 필체가 다르나 내용은 대체로 같다.
계연수는 평북 선천 출신의 선비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에 사망하였다. 《한ㅋ단고기》는 항일단체인 천마산대 대장 최시흥(崔始興)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를 거쳐 해방 후 평양의 단학회에서 활동하던 이유립에게 전해졌다.
이유립에 의하면 계연수는 《한단고기》를 ‘다음 경신년(庚申, 1980)이 되거든 세상에 내 놓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4종 고기의 저자.
《한단고기》에 수록된 4종의 책 가운데 먼저 〈삼성기〉는 상하 2편인데, 안함로 찬의 상편은 계연수 집안에 소장된 것이고 원동중 찬의 하편은 평북 태천의 백관묵의 집에서 얻었다고 한다.
곧 지은이와 소장자가 다른 별개의 책이었다. 상편의 지은이 안함로(安含老, 579-640)는 고려후기 승려 각훈이 지은 《해동고승전》에 그의 전기가 전하고 있는데 본명이 김안홍(金安弘)이며 신라진평왕대의 명승이었다.
하편의 저자 원동중(元董仲)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삼성기〉는 1421년 조선 세조가 수압령을 내려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20여종의 서지 목록에 들어있다.
〈단군세기〉는 행촌 이암(杏村 李 , 1297∼1364)의 저술로 되어있다. 고려말 공민왕대의 재상이었던 이암은 1363년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도의 행촌에 들어가 〈단군세기〉를 저술했다고 한다.
〈태백일사〉고려국 본기에 의하면 그가 이명(李茗), 범장(范樟)과 함께 천보산(天寶山) 태소암(太素庵)에 머물 때, 한거사로부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많은 ‘기고지서(奇古之書)’를 얻어 행촌은 〈단군세기〉를, 범장은 〈북부여기 상·하〉를 청평산인(靑平山人) 이명은 〈태백일사〉와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나오는 〈진역유기(震域遺記)〉 등 3권을 썼다고 한다.
행촌의 저술로는 〈단군세기〉 이외에도 《태백진훈(太白眞訓)》,《농상집요(農桑集要)》가 있다.
〈북부여기〉의 저자인 휴애(休崖) 범장(范樟)은 금성(錦城) 사람으로 고려가 망하자 만수산에 들어가 살았다.
저서로는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이 있고 그의 이름은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화해사전(華海師全)》 등의 문헌에 전하고 있다.
2. 《한단고기》를 감수한 해학(海鶴) 이기(李沂)
해학(海鶴)이기(李沂, 1848∼1909)는 한말의 애국지사로서 상고사 연구에 힘을 기울인 민족사학자이자 단학회(檀學會)의 창시자였다.
《한단고기》에 실린 〈태백일사〉는 이기선생 자택에 소장되어 왔던 책이다. 이기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전봉준에게 군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할 것을 제의했으나 김개남(金開男) 등이 이에 반대하고 지방에서 파괴행위를 자행하자 군중을 모아 동학도와 맞서 싸웠다.
이듬해 상경하여 토지개혁의 시급함을 정부에 건의하였고 1898년직접 정부의 전제 개혁에도 관여하였다. 그 뒤에도 자강론(自强論)을 상소하는 등 구국에 힘썼으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이에 나인영(羅寅永, 나철), 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일본천황과 이등박문 등 정계 요인에게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항의각서를 전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귀국한 뒤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암살하려는 거사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여 전남 진도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 석방되어 서울에 올라와 장지연(張 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호남학보》를간행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이기는 구국운동을 함께 한 동지인 나철과 민족사관 정립에 대하여도 뜻을 같이 하였다. 두 사람은 함께 행촌 이암의 유저 〈태백진훈〉과〈천부경〉 〈삼일신고〉, 〈삼성기〉,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 상고사에 관한 책과 기록들을 교열하고 주석하였다.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상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였는데 가장 큰 쟁점은 삼신설(三神說)의 정의와 신시개천(神市開天)과 단군건원 등의 문제였다.
여기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1909년 나철은 단군교(곧 大倧敎)를 창시하였고 이기는 제자들과 함께 단학회를 조직하였다.
단학회는 1909년 3월 16일 창단되어 5월 5일에는 강화도 참성단에 올라고유(告由)하였다. 그러나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이기선생은 자결하였고 이듬해 나라가 망하였다.
3. 《한단고기》를 출간 공개한 이유립.
이유립은 1945년 해방 후 평양에서 재건된 단학회 활동과 그 기관지《태극사》 발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이다가《태극사》는 폐간당하고 그도 일시 구속되었다.
그 뒤 이유립은 월남하여 1949년 봄 오형기(吳炯基)에게 《한단고기》를 정서(正書)하게하였다고 한다. 《한단고기》의 내용은 1960년대에 대전에서 단학회가 간행한 월간 《커발한》에도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다.
이유립은1979년 국내에서 《한단고기》를 간행한 뒤, 다시 번역 해석하여 《한단고기 평주》를 간행하려고 하였으나 책으로 펴내기 직전 사망하였다.
1979년 펴낸 《한단고기》에는 정오표가 달린 책이 있는데 오형기가 정서한 것을 이유립이 원본과 대조하여 교정한 것이다.
그 원본은 1979년 배달의숙에서 영인된 책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립(李裕笠, 1907∼1986)은 평북 삭주 출생이며 행촌 이암의 후손이다.
유년기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1919년 만주 관전현(寬甸縣) 홍석납자(紅石拉子)에 머무르던 중 단학회에서 주관하는 배달의숙에 입학하여 계연수·최시흥·오동진 등의 강의를 듣게되었다.
이후에도 항일독립운동과 민족교육활동을 계속하였다. 1933년 경기도 시흥에 안순환(安淳煥)이 세운 명교학원(明敎學院, 일명 朝鮮儒學會)에 입회, 유학을 수습하면서 이상룡(李相龍)의 《대동광의(大同廣義)》, 이기의 《해학유서》,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전집(飮氷室全集)》을 연구하는 한편,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모색하였다.
이유립은 대전에서 강화도 마리산으로 거처를 옮긴 뒤 단학회의 이름을 단단학회(檀檀學會)로 바꾸었다.
1969년 마리산에 환인·환웅·환검 등 국조 삼성을 받드는 개천각을 세우고 제천을 거행하였다.
1973년《광개토성릉비문역주(廣開土聖陵碑文譯註)》·《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同論)》을펴내고, 1976년 《커발한문화사상사》 I·II를 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