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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oy and his frog

 유머  Comments Off on A boy and his frog
Mar 152014
 

A boy was crossing a road one day when a frog called out to him and said, “If you kiss me, I’ll turn into a beautiful princess.” He bent over, picked up the frog and put it in his pocket.

The frog spoke up again and said, “If you kiss me and turn me back into a beautiful princess, I will stay with you for one week.” The boy took the frog out of his pocket, smiled at it and returned it to his pocket.

The frog then cried out, “If you kiss me and turn me back into a princess, I’ll stay with you and do ANYTHING you want.” Again the boy took the frog out, smiled at it and put it back into his pocket.

Finally, the frog asked, “What is the matter? I’ve told you I’m a beautiful princess, that I’ll stay with you for a week and do anything you want. Why won’t you kiss me?”

The boy said, “Look I’m an engineer. I don’t have time for a girlfriend, but a talking frog is cool.”

Engineers find cool one, not a girlfriend.

 Posted by at 8:37 PM

자식에게 고스톱을 가르쳐줘야 하는 10가지 이유

 유머  Comments Off on 자식에게 고스톱을 가르쳐줘야 하는 10가지 이유
Mar 152014
 

첫째 : 낙장 불입(落張不入)

순간의 실수가 큰 결과를 초래..
아이들에게 “낙장불입”을 가르침으로서 인생에서 한번의 실수가 얼마나 크나 큰 결과를 초래하는지 인과응보에 대해 깨우치게 한다.

둘째 : 비풍초똥팔삼

살면서 무엇인가를 포기하여야 할 때 우선순위를 가르침으로써 위기상황(危機狀況)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가르친다.

셋째 : 밤일낮장

밤일과 낮일이 정해져 있다.
인생에서는 밤에 해야 할 일과 낮에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으므로 모든 일은 때에 맞추어 해야 함을 가르친다.

넷째 : 광박

광 하나는 가지고 살아라!
인생은 결국 힘 있는 놈이 이긴다는 무서운 사실을 가르침으로써 광이 결국은 힘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해서 최소한 광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음을 깨우치게 한다.

다섯째 : 피박

쓸 데 없는 것으로 보이는 피가 고스톱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우치게 해서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소흘히 보지 않도록 한다.

여섯째 : 쇼당

현명한 판단이 있어야 생존…
고스톱의 진수인 쇼당을 안다면 양자택일(兩者擇一)의 기로에 섰을 때 현명한 판단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

일곱째 : 독박

무모한 모험이 실패했을 때 속이 뒤집히는 과정을 미리 체험함으로써 무모한 짓을 삼가게 한다.

여덟째 : 고

인생은 결국 승부라는 것을 가르쳐 도전정신을 배가시키고 배짱을 가르친다.

아홉째 : 스톱

안정된 투자정신과 신중한 판단력을 증진시키며
미래의 위험을 내다볼 수 있는 예측력을 가르친다.

열째 : 나가리

인생은 곧 “나가리”라는 허무를 깨닫게 해주어
그 어려운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단번에 이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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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by at 8:35 PM

사람들은 왜 논문을 못 써서 안달인 걸까?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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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52014
 

http://scienceon.hani.co.kr/151818

제19회 카이스트문학상 소설 부문 가작

과학 논문 작성 과정에 관한 고찰

전산학과 박사과정
김창대

초록
논문이란 의미가 있는 걸까? 졸업 말고. 사람들은 왜 논문을 못 써서 안달인 걸까? 박사 4년차가 되어 일저자 논문은 처음인 깜냥에, 나는 되려 의미를 못 찾아 논문을 못 쓰고 있었노라고 항변한다. 처음엔 논문을 읽는 것이 신기했고 쓰는 것은 뿌듯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논문의 아이디어는 다 거기서 거기고, 실험도 겨우 틀어막은 것들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논문을 기반으로 과학은 발전하고 있다. 실생활마저 급격히 바꾸고 있다. 결국 나는 정보화 사회의 부품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논문의 의미는 이것이 합쳐져 이룰 거대한 세상에 대한 상상력에 근거를 둬야 한다. 초록을 너무 대충 썼나… 뭐, 읽고 싶은 사람은 본문을 읽겠지.

영문 초록
Are papers meaningful? Except for the degree. Why people are eager for writing papers? Give up. I am not good at English. My major is Computer Science, not English. Why I should write in English? In fact, I know the answer, but, anyway, I don’t want to write an English abstract for this paper. Just read Korean below!

제1장.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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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이란 의미가 있는 걸까? 졸업 말고. 하는 일도 없이 스트레스나 받으며 술이나 퍼먹다가 간기능과 바꾸어가게 되는 그 놈의 박사학위를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박사 하나 받는 다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대한 늬우스 시절에 다 끝났는데.

사람들은 왜 논문을 못 써서 안달인 걸까? 논문 하나 쓴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도 않으며 벤처 기업 하나 차리는 것도 아니며 작가들처럼 소소하게 목돈 한 번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뿌듯해하며 부모님께 두 손 쭉 뻗어 논문을 내밀어봤자 “이게 뭐다냐. 박사는 언제 되는 것이여?”라고 말씀하실 것이 뻔한데. 뭔지는 몰라도 수고했다며 오리고기에 쌈무 한 번 차려주시겠지만.

그래, 누구는 논문을 많이 써서 교수가 되고, 누구는 논문을 많이 써서 해외 유명 기업에 취직하고, 누구는 논문이 대박 나서 벤처 기업을 차렸다더라. 하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어느 지역에나 카이스트 가는 학생이 한 명쯤은 나오지 않던가. 하긴, 고등학교 때까지는 내가 그 주인공이었는데. 그러나 결국엔 피라미드의 조금 높은 부분 벽돌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나마 한 두 층 높은.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교수가 있고, 해외 유명 기업엔 무수히 많은 노동자가 있고, 또 무수히 많은 벤처 기업들이 있다. 우리는 평범해지기 위해 특별해지려고 하는 걸까?

박사 4년차나 되어 첫 번째 일 저자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주제에 이런 질문을 던질 깜냥은 아닐 터다. 그러나 논문의 의미를 못 찾았기에 아직까지도 논문을 쓰지 못했노라고 항변하련다. 그러면 지금은 왜 논문을 쓰고 있냐고? 당연히 졸업 때문이지. 이제 다시 첫 번째 문단으로 돌아가 볼까? 그래, 논문을 쓰면서도 이쯤 해서 첫 번째 문단으로 돌아가곤 했다.

논문. 영어로는 paper라고들 부른다.[1] 졸업 논문은 thesis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것은 아직 내가 생각도 못할 신성한 것이고, 어쨌든 paper다. 영어사전에서 paper의 1번 뜻은 당연히 종이, 2번 뜻은 신문, 3번 뜻은 편지나 개인적인 자료 등의 서류, 그리고 6번에 가서야 논문이다. 공통점은 간단하다. “종이” 자체로의 기능을 할 때가 가장 많은 물건이라는 것이다. 하루 뒤적거리고 나면 짜장면 쟁반으로 쓰이는 신문지, 한 번 읽혀지면 서랍을 서랍답게 하는 기능만 하는 편지와 개인적인 자료들, 그리고 한 번 끝까지 읽혀지는 일도 거의 없을, 내 불쌍한 논문.

처음으로 선배를 도와 논문을 썼던 기억이 난다. 석사 1년차 때였다. 교수님과 선배가 둘이서 논쟁할 때, 아니 사실은 교수님만 열심히 말씀하시고 선배는, 네, 네, 혹시 이건 어떨까요? 네, 그렇죠, 라고 대답하던 그 때가 생각난다. 교수님과 학문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선배가 위대해보였었다. 선배는 뭔가 의견을 내고 있는데, 나는 머리만 어지러웠다. 교수님 방에서 나오면 선배가 날 따뜻하게 바라보며 “처음엔 다 그래”했다. 정말 처음에만 그랬다. 조금씩 교수님 말씀을 알아듣게 되었을 땐 정말 뿌듯했다. 나도 ‘혹시 이건 어떨까요?’를 말하게 되었을 땐 심장이 떨렸다. 논문에 내가 생각해낸 내용이 두 문단이나 들어가게 되었을 땐 “나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미니홈피에 올렸다. 지리하게 실험 결과를 정리하고 쪼잔하게 그래프를 다듬으며 밤을 지새울 때도 뿌듯했다. 어쨌든 나도 논문에 무언가를 보태고 있었으니까. 선배의 모니터나 내 모니터나 학교 밖 친구들 데려와서 보여주면 다 똑같아 보일 테니까.

논문이 accept되어 세상에 나왔을 땐, 분명 행복했다. 두 번째긴 해도 내 이름이 박혀 있는 논문이었으니까. 물론 과정이 힘들긴 했다. 하지만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무어가 있겠는가, 어차피 다 힘들다면 내가 재미있고 뿌듯한 일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업으로 삼아야겠다 싶었다. 자신감도 생겼다. 미팅에서 말을 더 많이 꺼내게 되었고 다른 선배들과도 디스커션을 자주 했다. 나와 대화하던 선배들은 때론 내 시선이 예리하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에이, 선배님에 비하면야 새 발의 피고 북한의 고기반찬이죠.”라며 겸손을 떨었지만, 내심은 거만했다. 그래서였다. 박사학위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석박사 통합과정에 진학해서 대학원생활을 조금이나마 빨리 끝내려고 한 건.

운이 거기서 다 했던 걸까? 그 때부터 모든 게 막히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내는 모든 것들이 이미 논문으로 나와 있었다. 내 아이디어를 신통해하며 자리로 돌아갔던 선배들이 정작 내 아이디어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었다. 이것저것 연구하려 하다 보니 아는 건 많아졌지만, 정작 어느 것 하나 깊게 알지 못해서 연구를 시작하기가 힘들었다. 실험 장비, 프로그램 하나 제대로 다룰 줄 아는 게 없었다.

박사를 받으려 했던 게 실수였을까? 그렇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발버둥 쳐왔더랬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는 가장 나은 일이었다고 상대우위라도 추구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이 절대평가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나에겐 다른 것들, 특히 육체나, 사회성을 동반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어렵다. 그래서 공부가 제일 쉬웠다. 그리고 어떻게든 박사만 따면 먹고 살 수는 있다지 않은가. 공학박사는 시간 강사로 전락하는 대신 대기업의 부품이 되는 걸 선택할 수도 있는 참된 기능직 아니던가. 욕심 부리다 하우스푸어만 되지 않는다면, 자식들이 친구들 만날 학원 정도는 보내줄 수 있을 만큼의 돈은 벌 수 있다지 않은가. 이 정도면 절대우위도 꽤 있는 거지. 우리 할아버지가 재산가는 아니니까.

그래, 후회란 게 싫어서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후회하기 싫다. 내 선택은 옳아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 논문 작성이 끝날 때까지 논문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어쩌면 내 삶의 의미를 못 찾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논문 하나를 쓰기 위해 살아왔으니까. 어쩌면 20대 전체를.

그래서 과학 논문 작성 과정에 대해 고찰해보려고 한다. 연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논문 읽기이다. 그것을 2장에서 다룰 것이다. 그리고 나면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3장에서 다룰 내용이다. 그 다음에 실험을 하고 평가를 한다. 그것을 4장에서 다루고, 5장에서 결론을 내려고 한다.

제2장.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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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용은 아기가 언어를 익히는 과정을 무수히 들은 것을 따라하는 것이라고 했다.[2] (사실 뉘앙스는 비슷하지만 정확히 저렇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히 베꼈다간 표절시비나 붙을 테니 인용이라는 이름으로 왜곡을 가미하자. 내 논문에서 표절을 찾아낼 만큼 내 논문을 열심히 읽어줄 사람도 없겠지만. 그리고 저게 인용한 책의 핵심 주제도 아니며 저 책에서 처음 나온 아이디어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3]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이 아니니 제발 좀 믿어달라는 게 “관련 연구”장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걸.) 어쨌거나 논문도 학자들이 사용하는 하나의 언어라고 볼 수 있으므로,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많이 읽어야만 할 것이다.

또, 논문에는 새로워야한다는 강박이 있다. 새롭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니 무엇이 연구되어 왔는지 알아야만 한다. 모든 걸 안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to the best of our knowledge”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는 알아야만 한다. 그러니 논문을 많이 읽어야 한다.

따라서 내 논문 쓰기 과정이 논문 읽기로부터 시작된 것도 당연하다. 때는 학사과정 졸업연구를 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학사과정 졸업연구를 연구로 쳐주지 않는 사람(주로 박사과정 이상)들도 있을 것이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을 첫사랑이라 쳐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하지만 그대가 초등학교 첫 사랑 이후 주욱 솔로였던 사람이라면, 자신을 모태솔로라고 칭하고 싶겠는가? 그러니 이 이야기도 참아주길 바란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참고문헌 몇 개가 더 늘어날 것이니까, 당신은 참아야만 한다.)

졸업연구를 위해 교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논문 2개를 건네주셨다. 연구 주제와 관련이 있으니 읽어보라고 하셨다. 영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12쪽. 서너 시간이면 다 읽겠거니 싶었다. 영어를 잘은 못하지만, 공대 교재들은 잘 읽어 내려가는 실력이니까. 하지만 세 시간 뒤, 나는 뭔가 심각히 잘못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난 아직 첫 장을 넘기지 못 했다. 모니터에는 용어를 검색해본 페이지만 열 개도 넘게 띄워져 있었다. 메모장엔 이 논문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은 논문 제목 3개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엎드려 잔 상태라 팔이 저렸다. 내가 대체 얼마나 더 많은 논문을 읽어봐야 하는지가 궁금해져서, 구글스칼라[4]에 키워드를 넣어보았다. 전혀 일반적인 단어가 아닌데도 검색 결과는 10,000개가 넘었다. 논문이 아니라 불로초부터 찾아야할 지경이었다.

일주일 뒤 교수님을 찾았다. 논문 하나를 겨우 읽어낸 다음이었다. 죄송하게도 논문을 하나 밖에 못 읽었다는 나에게, 교수님은 “논문 하나 읽는데 30분을 넘기지 마세요. 정말 자세히 읽을 논문이 아니면.”이라고 점잖게 말씀하셨다. 교수님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은 것이 “How to read a paper”[6]라는 논문이었다. 그 논문에서는 “three-pass method”라는 것을 제안했다. 논문을 집으면 먼저 서론만 빠르게 읽은 뒤, 나머지 부분은 그림과 그래프만 훑어보라는 것이다. 그 다음, 더 자세히 읽을 논문일 때만 “second pass”나 “third pass”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해 나가라고 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게 이 논문에서 이야기하는 “first pass”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비법은 비범한 사람들의 것이다. 나도 30분 내로 읽어내겠노라고 비상(非常)한 집중력을 모으고 논문을 집어 들어 봤지만, 비상(飛上)하지 못했다. 30분 뒤엔 겨우 세 번째 문단이었다. 역시 모니터엔 위키피디아[7]가 몇 개 띄워져 있었고, 내가 가입한 온갖 카페와 클럽들도 띄워져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논문이 신기했다. 어린 시절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잠자리 한 마리를 콕 잡아 채집함에 넣어두고 신기해하며 바라보던, 그런 느낌이었다. 일주일이 걸리더라도 논문을 이해하고 나면 뿌듯했다. 그리고 4일, 3일 만에 논문 하나를 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키가 쑥쑥 자라는 느낌이었다. 1년 반 정도가 지나고, 마침내 30분에서 1시간이면 논문 한 편의 대강을 파악하게 되었을 때, 그 땐 성장판이 닫히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 때부터인 것 같다. 내가 논문을 읽지 않기 시작한 것은. 논문 스터디에 들어가면서도 논문을 더 이상 출력해가지 않게 된 것은. 마음만 먹으면 주요 학회와 저널 논문들을 모두 파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은. 드디어 날개를 달고, 나는 걸었다. 여전히 일주일에 많아야 한 편 정도를 읽었다. 내 연구 주제와 관련된 논문만 읽었다. 조금만 새로운 주제가 나와도 두려웠다.

그러다가 다시 논문을 30분에 하나씩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때가, 바로 “관련 연구”장을 쓰면서였다. “관련 연구”장이 너무 짧거나 “참고 문헌” 개수가 너무 적으면 공부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 그리고 교수님이 논문을 쓰실 때 그토록 그림과 그래프에 집착하셨던 이유를 깨달았다. 모두가 나처럼 허겁지겁 “first-pass”만을 지나갈 테니까. 광고가 30초의 예술이듯, 논문도 30분 내로 이해시키지 못하면 인용 받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나는 서글퍼졌다. 그 사람들도 분명 이십여 년의 공부를 배경삼아 몇 년간 치열하게 노력한 끝에 논문을 썼을 텐데, 나는 그걸 한 두 문장, 길어야 한 문단으로 요약해버렸다. 한 질의 책도 모자랄 만큼 구구절절한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남아있는 것은 단 한 줄의 묘비명인 것처럼.

원래는 (원래가 원래인지 이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관련 연구”가 이 논문을 통해 이 주제를 처음 접할 사람들을 안내 해야 하는 것일 게다. 내가 연구를 시작할 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도 어떤 논문의 “관련 연구”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는, 나는.

어쨌거나 나는 많은 논문을 읽어냈고, 어쨌거나 “관련 연구”장도 써냈지만, 이내 가장 큰 벽에 부딪혔다.

 

제3장. 기막힌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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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아이디어는 사실 그냥 기가 막힌다. 그리고 귀가 막힌다. 어떤 비평도 듣기 싫어진다. 그리고 정말로 기가 막힌다. 이것을 훌륭하다고 우겨야 하는 현실이 너무 비참해진다.

이번 논문을 시작한 건 2년여 전이었다. 나는 드디어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었다. 아르키메데스처럼 발가벗고 뛰쳐나오진 않았어도, 샤워하다가 났던 그 생각을 까먹을까 허겁지겁 닦고 나왔었긴 했다. 속옷만 입은 채로 후다닥 메모부터 했었다. 정말 그럴 듯 했다. 실험만 하면 결과가 예상대로 짜자잔 나올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논문들을 검색해 보았지만 다행히도, 다행히도 그 어느 논문과도 똑같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쓰고 있는 내용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2년 동안 내 아이디어가 교수님[5]의 생각으로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왔다. 내 아이디어는 키워드만 남아있다. 교수님이 옹고집 부리신 거라면 좋으련만, 오히려 내 옹고집을 꺾느라 교수님께서 고생하신 결과다. 내 아이디어가 그 어느 논문에도 나오지 않은 것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가 나쁜 것이기 때문이었다. 키워드라도 남겨 여기까지 연구를 진행시켜 주신 교수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내가 대학원 짬밥을 먹긴 좀 먹었나보다. 교수님이 허락하셨으니 논문을 쓰기 시작하긴 했지만, 논문이 필요해 논문을 쓰기 시작하긴 했지만, 이런 아이디어로 논문을 써도 되나 싶다. 최근에 나온 논문 a, b, c, d에서 풀려고 시도했던 문제 P가 있는데, 이것을 좀 더 오래된 논문 e에서 사용한 방법 M을 사용해서 풀면 결과가 좋아진다는 것이 내 논문의 요지다. 잠깐, 아이디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건가?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다른 논문들을 살펴봐도 다 똑같다는 것이다. 고급용어로 돌려막기다. 돌려막으면서 논문 개수는 점점 더 불어나고, 박사가 양산된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8]는 말이 성경에 나온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교회에 다니고 싶어졌다. 빅뱅 이후에 새 것은 없다. 하다못해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도 98%가 똑같다지 않는가.

논문도 98%가 이전 논문과 동일하고 2%가 다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2%밖에 안 다른 인간과 침팬지가 엄청나게 달라 보이는 것처럼, 논문들도 엄청나게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강산이라도 변한 듯이 변모해있다. 물론 강산이 변해도 산은 늘 거기, 강도 늘 거기 있는 것처럼, 논문도 그냥 다 거기 있지만.

2%를 100%처럼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과학 논문의 과학일 것이다. 2% 다른 주제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이며, 기존의 것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나는 이 세상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인간처럼. 그런 면에서 논문은 현실주의 문학[9]이다.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하고, 철저하게 현재를 비판하면서, 철저하게 꾸며져 있다. 논문을 많이 쓰는 이들을, 나는 그들의 글 솜씨로 인하여 존경한다.

사실 현실주의적 관점에서도 논문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나는 이제껏 “연구 이외의” 쓸 모가 있는 논문을 거의 보지 못하였다. 물론 나의 지도교수님[5]은 “연구는 5년 혹은 10년 앞을 내다보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보는 것이에요.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검증되는 기술들이 실제 현실에 반영되는 것이고요.”라며 논문들을 옹호한다. 그 말 자체에 토를 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토를 달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정도면 엄청 친절한 교수님 아닌가? 교수님, 보고 계신가요?) 하지만 내가 본 대부분의 논문들은 분명히 5년 뒤엔 사라져야 마땅한 기술들을 개선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게 무슨 생명체도 아니거늘, 절대로 호흡기를 떼지 않고 이따금 전기충격을 가한다. 실용성이라곤 보이질 않는 것들을 “요즘 많이 연구되고 있는”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연구한다.

물론, 단 2%만 달라도 충분한, 쓸모조차 없어도 되는, 그런 아이디어마저 내 머리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학사과정 졸업연구, 그리고 석사 1년차 때의 그 두 문단, 그것이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새로운 것의 끝인 것 같다.

다 필요 없고, 사실, 이 소설이 그렇다. 요즘 주변에서 다들 논문을 쓰고 있으니까, 논문이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소설이란 장르가 있다는 것을 아니까, 논문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은가. 논문의 의미도 모르면서, 아니, 논문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 소설의 가장 새로운 점은 “논문 작성에 대한 논문 형식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논문 작성에 대한 논문 형식의 에세이”마저 이미 나와 있다.[10] 그러니 별 새로울 것도 없다. 게다가 이미 문학작품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논문 쓰기에 대해 갈등해왔을 것이며, 그 중에 논문 형식으로 된 것이 없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리고 이 소설이 실생활에 무슨 의미를 갖는지도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아, 내가 이 소설은 왜 쓰고 있는 것인가. 이 소설은 5년 뒤, 10년 뒤를 내다본 것이라는 핑계조차 댈 수 없는 걸. 아닐 수도 있겠다. 5년 뒤, 10년 뒤에도 무수한 사람이 논문 작성에 열을 내고 있을 테니.

어쨌거나, 나는 논문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교수님이 허락하신 아이디어니까, 실험도 했다.

제4장. 실험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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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은 밀당이다. 더 시키려는 자와 덜 하려는 자 사이의 지루한 싸움이다. 숫자 하나, 단어 하나를 추가시키기 위해 며칠은 기본, 심하면 몇 달이 더 걸린다. 그리고 나는 빨리 졸업하고 싶다.

교수님과의 밀당이라기 보다는 가상의 리뷰어와의 밀당이다. 하긴, 가상의 리뷰어는 교수님의 입에만 존재하니 결국 교수님과의 밀당일지도. 더 시키려는 자의 논리는 이렇다. 실험을 통해 기막힌 아이디어가 정말 실현 가능하고 재현 가능한 것임을 보여야 하다. 그러려면 이런 저런 가정들을 제거해서 더 현실적인 실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또, 많은 횟수의 실험을 한 후 평균과 분포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일단 아이디어가 현실적이지 않다. 이론뿐이다. 그리고 내가 가까스로 만들어 낸 바로 이 환경에서만 동작한다. 실험 결과가 하도 안 나와서 정말로 교회에 발을 들일 뻔 했단 말이다. 여기서 환경에 현실성을 더하라는 건, 아니 털끝만 건드린대도 나는 싫다. 분명히, 괴상망측한 결과가 나올 게 뻔하다. 비록 지금은 “실험은 이런 환경에서 했다. 하지만 내 아이디어는 다른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통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는 중이지만, 그게, 참, 그렇다. 연구란 걸 ‘세상 아무도 모르는 것을 내가 알아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난 참 연구자다.

더 많은 횟수의 실험에 관해서는, 음, 나는 자고 싶다. 일주일 넘게 종일 연구실에만 있는 중이다. 새벽 3시도 넘어서 들어갔다가, 눈 뜨면 바로 연구실로 향한다. 아침은 샌드위치로 때우고, 점심도 때를 놓쳐 느지막이 라면 한 그릇 먹는 일이 잦고, 그러다보니 밤 9~10시나 되어 치킨 한 마리 시켜 먹기 일쑤다. 왜 학교 근처 치킨집들이 양념치킨에 뜬금없이 밥을 같이 배달해주는지, 실험을 시작하기 전엔 깨닫지 못했었다. 그나마 같이 먹어줄 친구가 있을 때나 치킨도 먹는다. 그냥 삼각김밥 두 개에 우유 하나 같은 “매점 정식”을 먹을 때도 많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자라날 동정이 너무 부담스러워 고백하자면, 솔직히 나는 실험도 더 할 수 있고 잠은 이미 자고 있다.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일주일 넘게 종일 실험실에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종일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험과 동시에 미드(미국 드라마)를 시작했다. 실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보기에는, 한 회에 20분 정도인 미드는 매우 적절하다. 게다가 영어로 되어 있어 놀고 있지만 놀고 있지만은 않은 느낌도 준다. 물론, 한글 자막을 늘 깔아 놓지만. 미드를 보다보면 시간은 20분 단위로 흘러갔다. 때로는 실험이 끝나고 나서도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 하느라 1시간이나 늦게 결과를 확인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보는 예능 프로그램도 늘었다. 긴 실험에 좋다.

눈 뜨고 바로 실험실로 향하는 것도 맞긴 하다. 하지만, 그 시간이 11시쯤일 따름이다. 시간이 애매해서 샌드위치를 사오는 것뿐이다. 샌드위치를 그냥 먹긴 아쉬우니 예능을 틀어놓고 먹기 시작하면 바로 1시간이 흐르고, 실험 결과를 잠시 확인하다가 페이스북을 좀 하다보면 학교 식당 점심시간이 이미 지나있다. 그래서 라면을 먹으러 가는 것이다. 에이, 관두자. 동정이 부담스러운 건 둘째 치고 너무 쪽팔린다. 아니, 그보다, 만에 하나 교수님이 보실라.

그래, 내가 이 모양이어서 박사 4년차나 돼서야 일저자 논문을 겨우 쓰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 많은 시간을 논문을 읽거나 다른 공부를 했으면 지금쯤 난 위대한 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멍 때리고만 있었어도, 그동안 자유로이 움직이던 뇌 회로들이 이런 저런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논문이 아무리 완벽하게 이성적인 결과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쓰는 나는 감정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나는 기계가 아니다. 늘 머리가 일정한 속도로 도는 것도 아니고 항상 연구를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다. 미셸 뜨루니에가 말한 대로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11]

나도 법정기준근로시간인 하루 8시간은 채워야하지 않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찾아보니 “법정기준근로시간”이란 하루에 일을 해도 되는 “최대”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최소” 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닌 걸 발견하고는 그만 두었다.[12]

논문을 쓴다는 것은, 소설을 쓴다는 것과 같다. 세상의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열심히 고찰하고, 그 결과를 글로 나타내는 것이다. 소설가는 실험은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모르시는 말씀. 소설가가 얼마나 열심히 취재를 다니는데. 그리고 소설가도 하루 종일 눌러 앉아 글만 쓰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로 놀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그제야 글을 쓰는 것이다. 쓰다가 막히면 또 논다. 그러다 또 쓴다. 비슷한 일을 하는데 나도 그래도 되지 않겠는가? 이럴 때 보면 머리는 참 좋은 것 같은데 말이지.

물론 통장에 인건비가 들어올 때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회사에 다니는 만큼 돈을 많이 받는 건 아니지마는, 회사보다도 훨씬 훨씬 덜 일하니까. 아침에 부모님이 거신 전화를 자느라 받지 못했을 때도 죄송하다. 부모님은 내 등록금 대시느라 아침 일찍부터 일하시는데, 나는 서른 줄에 접어들고서도 철이 들지 않은 것 같아서. 그리고 나도 안다. 제아무리 아이디어가 중요하다해도, 결국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시간 없이는 논문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소설가가 취재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실험하는데 쏟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논문을 쓰다가 사랑을 잃었다. 처음엔 불규칙한 식생활을 걱정해주던 그녀는 결국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날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논문 이야기를 하느니 차라리 군대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난 전문연구요원인데, 그러니까 논문을 쓰는 게 군생활인데.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이 내 직업인데. 그리고 그녀는 떠나갔다. 이게 논문이었다면, 이런 흐름에도 맞지 않는 문단은 삭제 당했겠지. 하지만 내가 논문만 쓰지는 않는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

너무 자세하게 핑계 댄 것 같지만, 본디 “실험과 평가”장은 최소한의 실험을 가지고 최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양을 늘리는 것이다.

제5장.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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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은 의미가 있는 걸까? 지난 논문과 다를 바도 없고 겨우겨우 증명해낸 사소한 논리 따위가 정말 의미가 있는 걸까? 단언컨대 의미가 없다, 고 말하기엔 과학은 너무도 발전했다. 항상 그 자리인 것 같은 논문을 기반으로, 과학은 우리 실생활마저 너무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논문은 원소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원소가 모여 세포가 되고 세포가 모여 사람이 되지만, 아무도 ‘원소’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사람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원소’에 대한 논문에서 ‘이것은 사람을 이루는 구성 물질이니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원소’ 자체에 대해 논할 것이다. 애초에 질문이 잘못 되었다. 논문의 의미를 찾다니.

찰리 채플린은 영화 “Modern Times”[13]에서 인간이 철저하게 부품화되어버린 산업사회를 풍자한다. 사람이 사람을 위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부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보화 사회가 되고, 사람들이 사람을 위한 지식을 만들기 위해 다시 부품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 찰리 채플린과 나의 차이는 2차 산업에 종사하느냐, 3차 산업에 종사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고 부품이 되어버린 사람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단순 노동을 하고 있는 찰리 채플린은 분명 무언가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공사판을 다녀와서 “한강대교 내가 지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의 하루는 의미 있다. “하루 종일 시멘트만 발랐어.”라고 말하는 사람의 하루는 의미 없다. ‘원소’를 생각하며 ‘사람’을 떠올릴 수 없다면 의미 없는 사람이다.

그래, 논문에 대한 의미를 찾을 정도로, 나는 논문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을 뿐이다. 하긴, 모두가 논문만 이야기하는 대학원에서 그러지 않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면 어떡하지? 역시 교회를 가야 하나.

어쨌거나, ‘논문’하면 떠올려야 하는 것은 ‘과학 발전’이니까, 난 이제 ‘과학 발전’의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물음을 위해 우리에겐 “future work”이라는 마법 같은 단어가 있다. 다음에 연구하겠다고 해놓고, 언제 할 것인지는 말하지 않으면 된다. 뭐, 다음에 쓸 거리 없는 사람들이 쓰겠지.

그런데, 이걸로 졸업을 할 수는 없을까?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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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이버 영어사전. 논문을 쓰면서 그 어떤 다른 논문들보다 자주 뒤적거리는 것. 제길, 논문은 왜 영어로 써야 하는 거야?
[2] 정찬용.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 사회평론. 1999년. 16-17쪽. 10년 전에 읽은 뒤, 거들떠도 안 보다가 이번에 20여 쪽을 훑어보았다.
[3]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출판 연도, 출판사 미상. 나는 표절이 두렵다.
[4] http://scholar.google.co.kr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이미 존재한다.
[5]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나의 지도교수님. 교수님이 이 글을 보면 안 되는데…
[6] S. Keshav. 2007. How to read a paper. SIGCOMM Comput. Commun. Rev. 37, 3 (July 2007), 83-84.
[7] http://en.wikipedia.org/ 정말 많이 참고하지만 참고문헌에는 넣을 수 없는 문헌.
[8] 성경 전도서 1장 9절 하반부
[9] http://www.norway.or.kr/News_and_events/press/travel/4/Norwegian-Maters/—The-Playwright-Henrik-Ibsen/–Ibsen-and-Realism/#.UnSr0vlT4aw 혹시 이런 말이 있을까 싶어 찾아봤는데 정말 있다. 참 다행이다.
[10] Roy Levin and David D. Redell. An Evaluation of the Ninth SOSP Submissions; or, How (and How Not) to Write a Good Systems Paper. ACM SIGOPS Operating Systems Review, Vol. 17, No. 3 (July, 1983), pages 35-40. 같은 내용이 다음에도 게재됨. SIGGRAPH Comput. Graph. 22, 5 (October 1988), 264-266.
[11] 프랑스 작가 Michel Tournier. 다음 강연에서 인용한 것을 재인용: 김영하,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 TEDxSeoul 2013. http://www.ted.com/talks/lang/ko/young_ha_kim_be_an_artist_right_now.html
[12] 대한민국 법률 제11270호. 근로기준법 제 50조. (2012.2.1. 일부개정)
[13] Charlie Chaplin, Modern Times – Factory Scene (HD – 720p). 1936. Available at https://www.youtube.com/watch?v=tfw0KapQ3q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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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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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52014
 

Comments Bronnie Ware의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한 호주 여성이학교 졸업후 은행에서 일하다가 평생 할일이 아니다 싶어 그만 두고꿈을 찾기 위하여 영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거기서 있는 동안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시작한 일이 노인 병간호.호주에 돌아와서도 틈틈히 작곡공부를 하며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그런데 이 아가씨 붙임성이 워낙 좋았는지 워낙 사람을 편하게 했는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노인들은 이 아가씨에게 평생 사는 동안 후회되는 일들을 묻기도 전에 다들 줄줄이 얘기했다.

이 아가씨는 들은 얘기들을 정리하다가 똑같은 얘기들이 반복된다는 걸 깨달아 가장 많이 들은 다섯 가지 후회와 그에 얽힌 에피소드를 책으로 엮어냈다. 그리고는 바로 베스트 셀러가 됐다. 그 책에 대한 기사다.

[죽기전에 가장 많이하는 후회 TOP5]

1. 난 내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고- 따라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대신내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그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았다.

2. 그렇게 열심히 일 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어야 했다.어느 날 돌아보니 애들은 이미 다 커버렸고 배우자와의 관계조차 서먹해졌다.

3. 내 감정을 주위에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지 못했다.- 내 속을 터놓을 용기가 없어서 순간 순간의 감정을 꾹꾹 누르며 살다 병이 되기까지 했다.

4.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았어야 했다.- 다들 죽기 전 얘기하더라고 한다.” 친구OO를 한번 봤으면… ”

5.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였었다.-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겁이 나서 변화를 선택하지 못했고, 튀면 안된다고 생각해 남들과 똑같은 일상을 반복했다.

* ‘돈을 더 벌었어야 했는데..”궁궐같은 집에서 한번 살았었으면..”고급차한번 못 타 봤네..”애들을 더 엄하게 키웠어야 했는데..’ 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Bronnie ware(브로니웨어)의”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원본▼>>
1. I wish I’d had the courage to live a life true to myself, not the life others expected of me.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방식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더라면…
This was the most common regret of all. When people realise that their life is almost over and look back clearly on it, it is easy to see how many dreams have gone unfulfilled. Most people had not honoured even a half of their dreams and had to die knowing that it was due to choices they had made, or not made.
임종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일이다. 생애가 끝나가는 무렵에 과거를 돌아보면 그 동안 이루지 못한 꿈이 얼마나 많았는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의 절반도 채 이루지 못했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선택을 잘못하여 그리 된 것임을 뉘우치게 된다.
It is very important to try and honour at least some of your dreams along the way. From the moment that you lose your health, it is too late. Health brings a freedom very few realise, until they no longer have it.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건강을 잃은 후에는 이미 늦다. 건강은 사람들에게 생각보다 많은 자유를 부여하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건강을 잃은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

2. I wish I didn’t work so hard.
너무 열심히 일에만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This came from every male patient that I nursed. They missed their children’s youth and their partner’s companionship. Women also spoke of this regret. But as most were from an older generation, many of the female patients had not been breadwinners. All of the men I nursed deeply regretted spending so much of their lives on the treadmill of a work existence.
내가 간호한 모든 남성 환자들이 이를 언급했다. 그들은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과 배우자와의 우정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고 얘기한다. 일부 여성 환자들도 이 항목을 언급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구세대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한 여성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남성 환자들은 일에 너무 매달리며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은 것에 대해 깊게 후회했다.
By simplifying your lifestyle and making conscious choices along the way, it is possible to not need the income that you think you do. And by creating more space in your life, you become happier and more open to new opportunities, ones more suited to your new lifestyle.
삶의 방식을 단순화하고 중요한 순간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면, 자신이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적게 가져도 얼마든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처럼 삶을 단순화하면 더욱 많은 기회가 생기고, 자신이 선택한 라이프스타일에 걸맞은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3. I wish I’d had the courage to express my feelings.
내 감정을 조금 더 솔직히 표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더라면…
Many people suppressed their feelings in order to keep peace with others. As a result, they settled for a mediocre existence and never became who they were truly capable of becoming. Many developed illnesses relating to the bitterness and resentment they carried as a result.
많은 사람들이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압했다고 고백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평범한 인생을 살게 되었고,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또한 가슴 속에 묻어둔 냉소와 적개심이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고 한다.
We cannot control the reactions of others. However, although people may initially react when you change the way you are by speaking honestly, in the end it raises the relationship to a whole new and healthier level. Either that or it releases the unhealthy relationship from your life. Either way, you win.
타인의 반응을 제어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당신이 솔직한 말을 했을 때 타인이 처음에는 격한 반응을 보일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타인과의 관계가 더욱 건강해지고 한 단계 높아지게 된다. 또는 당신에게 있어 이롭지 않은 인간관계를 끊어버리는 역할이라도 하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당신에게는 바람직한 일이다.

4. I wish I had stayed in touch with my friends.
친구들과 연락을 계속 유지했더라면…
Often they would not truly realise the full benefits of old friends until their dying weeks and it was not always possible to track them down. Many had become so caught up in their own lives that they had let golden friendships slip by over the years. There were many deep regrets about not giving friendships the time and effort that they deserved. Everyone misses their friends when they are dying.
많은 사람들이 임종 몇 주 전까지 오랜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며, 마지막 순간에는 보고 싶은 친구들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 없이 살아가느라 세월이 흐르면서 친구와의 관계를 잃게 되었다. 그들은 친구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은 것에 대해 깊게 후회했다. 임종의 순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친구를 그리워했다.
It is common for anyone in a busy lifestyle to let friendships slip. But when you are faced with your approaching death, the physical details of life fall away. People do want to get their financial affairs in order if possible. But it is not money or status that holds the true importance for them. They want to get things in order more for the benefit of those they love. Usually though, they are too ill and weary to ever manage this task. It is all comes down to love and relationships in the end. That is all that remains in the final weeks, love and relationships.
바쁜 삶을 살아가면서 우정을 잃게 되는 일은 허다하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는 물질적인 것들을 잊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기 전에 금전적인 문제들을 마무리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돈과 지위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마지막을 정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이 마지막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에는 사랑과 우정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5. I wish that I had let myself be happier.
내 자신이 더 행복해 질 수 있도록 허용했더라면…
This is a surprisingly common one. Many did not realise until the end that happiness is a choice. They had stayed stuck in old patterns and habits. The so-called ‘comfort’ of familiarity overflowed into their emotions, as well as their physical lives. Fear of change had them pretending to others, and to their selves, that they were content. When deep within, they longed to laugh properly and have silliness in their life again.
놀랍게도 이번 항목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행복이 선택사항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옛 방식과 습관에 젖어 있었다. 친숙한 것에 대해 느끼는 “편안함”이 자신의 감정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들의 삶을 지배했다. 변화를 두려워했던 그들은 남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이렇게 합리화했다: “나는 지금 상태로 만족한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그들은 크게 웃고, 삶의 활력소를 되찾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When you are on your deathbed, what others think of you is a long way from your mind. How wonderful to be able to let go and smile again, long before you are dying.
죽음을 앞둔 사람은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모든 허울을 던져버리고 활짝 웃으며 다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Life is a choice. It is YOUR life. Choose consciously, choose wisely, choose honestly. Choose happiness.
인생은 선택이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이다. 의식적으로, 현명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선택하라. 행복을 선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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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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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52014
 

어떤 사람이 영험하다는 스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 저는 사는게 너무 힘듭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스트레스로 인해
너무나도 불행 합니다. 제발 저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을 가르켜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제가 지금 정원을 가꿔야 하거든요. 그동안에 저가방 좀 가지고 계세요.” 라고 부탁을 합니다.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지요. 그는 행복의 비결을 말해주지 않고 가방을 들고 있으라는 부탁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정원 가꾸는 일이 급해서 일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30분쯤 지나자 어깨가 쑤쒀 옵니다. 하지만 스님은 도대체 일을 마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지요.

참다못한 이 사람이 스님께 물었습니다. “스님, 이 가방을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합니까? ”

이말에 스님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무거우면 내려놓지 뭐하러 지금까지 들고 계십니까? ”

바로 이순간 이 사람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신이 들고있는 것을 내려 놓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려 놓으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 지는데, 그 무거운 것들을 꼭 움켜잡고 가지고 있으려고 해서 힘들고 어려웠던 거지요.

우리는?
혹여 내가 내려 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요?
모두 내려 놓으세요. 그래야 행복이 바로 내옆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려놓고, 더 내려놓고 사는 여유롭고 행복한 나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Posted by at 8:30 PM

가장 이상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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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52014
 

가장 이상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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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을 지루해하는 것, 서둘러 자라나길 바라고, 어른이 되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위해서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그동안 번 돈을 다 써버리는 것”

“미래를 염려하다가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 결국 미래에도 현재에도 살지 못하는 것”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살더니, 결국 살았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죽는 것”

 Posted by at 8:28 PM

『환단고기』와 고성 이씨家의 오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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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132014
 

『환단고기』의 있고 없는 것은 이처럼 민족사의 사활과 관련되는 것이다. 고성 이씨 가문이 환단고기와 만나는 것은 고려가 몽고침략을 받는 시기부터 시작된다. 이존비李尊庇(1233-1287)는 어느 날 왕자를 가르치는 서연書筵에서 고려의 자주부강론을 역설한다. “우리나라는 환단 이후 북부여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부강하고 자주독립을 지켜온 나라인데 최근 원(몽고)의 내정 간섭으로 나라에 사대주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자주오사自主五事를 상주하였다. (태백일사 고려국 본기)

이존비의 자주독립론을 이어받은 사람이 행촌 이암(1297-1364)이었다. 이암은 이존비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와 똑같은 자주책을 임금에게 상주하고 1) 태백진훈 2) 도학심법 3) 농상집요農桑集要 등 행촌삼서杏村三書를 남겼다. 지금까지 이암에게 삼서만 있다는 사실만 전해지고 그가 남긴 『단군세기』는 숨겨져 있었다. 이암이 『단군세기』를 비롯한 여러 비서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일처럼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천보산天寶山에 올라갔을 때 소전이란 사람이 태소암에 진서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말을 하여 가서 읽어 보니 모두가 환단 시대의 신서神書와 진결眞訣이었다는 것이다. (고려국 본기 제8)

또 한 분, 고성 이씨 문중에 이맥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 연산군과 중종 때 사람으로 연산군에게 미움을 받아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하도 무료하여 집에 고이 간직했던 고서와 이웃 고노들에게서 들은 구전口傳 그리고 자신이 관직에 있을 때 발견한 내각의 비밀문서들을 참고하여 『태백일사』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이맥이 후손들에게 이 책을 비장(숨겨 보관함)하라 일렀다.

그러니 『태백일사』는 500년간이나 고성 이씨 문중에 비장된 것이다.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의 핵심부분을 이룬다. 만일 이 책이 보존되지 않고 사라졌더라면 민족사는 회복할 길이 없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맥은 물론 그 후손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모르는 일이다.

이암과 이맥이 남긴 비서는 한말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 1909)에 의해 공개되어『환단고기』(1911년)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원본은 지금 없다. 그러나 원본은 분명 이기와 그 제자 계연수가 읽었다. 대종교와 단군교를 중광한 나철(弘巖 羅喆 1863- 1916)과 정훈모도 읽었다. 이기 나철 그리고 정훈모는 각기 다른 이름의 종교단체를 조직하였으니 이기는 단학회, 나철은 대종교, 그리고 정훈모는 단군교를 창설하였고 단학회를 계승한 이기의 책은 이유립에게 전수되었다.

이유립은 광복 후 『커발한』이란 신문에 『환단고기』원고 일부를 발표하던 중 일본의 재야사가 녹도승(鹿島昇)에게 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건네주었는데 녹도승이 원고를 넘겨받아 신의 없이 약속을 깨고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내고 말았다.

이존비, 이암, 이맥, 이기 그리고 이유립 등 고성 이씨 문중에 전해 내려 온 경위는 위와 같았으나 출판되어 나온 것이 너무 늦어 세상 사람들이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역사에 불만이 많았던 분들은 크게 환영하여 국론이 딱 둘로 갈라졌다.

북한학자들이 『환단고기』를 인용하고 대한민국에서도 단군학회가 조직되어 활발히 상고사를 연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불안하다. 대학의 강단을 점령하고 있는 한국사 교수들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멈칫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고 『환단고기』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였기에 그렇게도 말이 많았는가 하는 이야기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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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의 저자, 이암李嵒

[고려사] <열전>에 올랐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그가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행촌 이암(1297~1364)

그는 뛰어난 학자와 관리가 배출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으며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

에 급제하여 文翰학사 및 進賢館 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의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할아버지 이존비의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후손이 바로 행촌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강화도 마리산의 보제사에 들어가 3년 동안 유가의 경전과 우리 고

대사에 대한 기록을 탐독하였다.

 

부모님이 그리울 때면 마리산 꼭대기의 참성단에 올라, 수천 년 전 그곳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단군왕검의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겼다. 그 때 지은 시①를 보면, 십대의 어린 나이에 나라의 평안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염

원을 세우고 있다.

 

17세(1313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암은, 고려가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던 시기의 여덟 국왕 가운데 여섯 분을 모시

면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충선왕 때 나라의 관인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시작하여 두 차례 유배를 당하고, 왕의 책봉

을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62세(1358년) 때 공민왕의 부

름에 환도하여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개혁군주이다. 그러한 공민왕의 곁에 이암이 있

었다. 문하시중이 된 그 다음 해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적군 4만 명

을 격퇴시켰고, 1년 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경북 안동으로 피난가는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임금 앞에서 자신을 ‘臣’ 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친원파의 간신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암은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권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홍건적을 격퇴하고 왕을

호종한 공로로 좌정승에 제수되기까지(1361년) 했지만, 공민왕의 부름에 응한 지 5년 만에(1363년) 사퇴하고 야인

이 되었다.

 

행촌에게는 고려와 조선의 여느 정치가, 학자와는 남다른 면모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 서적만이 아니라 동서

문화의 원류인 신교 사서를 탐독하여 신교의 삼신문화에 정통하였다. 첫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3년을 보낼 때도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 등을 연구하는 독서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나(1335년) 천보산 태소암

에서 1년간 머물 때, 소전素佺거사②로부터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환국-배달-조선)시대를 lrfhr한 고서

적들을 전수받았다. 신교문화에 통한 이암을 소전거사가 알아보고서 석굴 속에 감춰져 전해오던 사서를 전해준 것이

다.

 

이암은 나중에 그것을 근거로 <단군세기>를 쓰고, 당시 소전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 <태

백진훈太白眞訓>을 지었다. 이때 복애거사 범장과 청평거사 이명도 소전거사에게 비기秘記를 전수받아, 범장은 <북

부여기>를, 이명은 <진역유기>를 저술하였다. <단군세기>와 함께 이 사서들은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문화의 본래 면

목을 드러낸 소중한 문헌들이다.

 

이암이 언제부터 <단군세기>를 집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그는 67세(1363년)에

사직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건너가 선행리 홍행촌에 海雲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단군세기>의 마지막 손질에 혼신

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③

 

민족의 현실을 통탄하며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웅변하는 <단군세기> 서문에서 그는 ‘인간은 어떻

게, 왜, 무엇을 위해 생겨나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멋진 삶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명쾌한 필치로 밝

히고 있다. 인성론을 중심으로 신교의 역사관을 정리한 이 서문은 대학자로서의 지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만고의 명문장이다. 행촌 이암, 그는 동방 한민족의 역사를 유교사관도 불교사관도 아닌 한민족 고

유의 신교사관으로 저술한, 신교사관의 정립자이다.

 

<태백일사>의 저사, 이맥李陌

이맥(1455~1528)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며 행촌 이암의 고손자다. 1474년(서종 5) 진사시에 합

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

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이때 장숙용(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내세워 분에 넘치는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결국 괴산에 유배되었다(1504). 귀양살이 시절에, 집안 대대로 내려

오던 책들과 노인들에게서 채록한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높은 관직을 제수받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 때문

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에 머물렀다. 이는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 내에 적이 많았던 때문으로, 1517년(중종

12)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에 그가 취한 입장에서도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그는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

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 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66세 때인 1520년,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인 찬수관撰修官이 디어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

여 궁궐 깊이 감춰 둔 상고 역사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금서들의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시절에 정리해둔 글들

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태백일사>, 즉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④의 역사’ 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서 벗어나는 학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로 인해 그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태백일사>는 한민족의 7천 년 상고 역사를 환국, 배달, 고조선 각 시대별로 세밀하게 다루면서 당시 신교 문화의 신

관, 우주관, 인간관, 역사관, 윤리관을 조목조목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교 문화 역사서의 완결본인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가히 한민족 신교문화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 )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세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
「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 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24세인 1930년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 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1942년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등
12항을 이유로 강제 폐쇄 당했다.

39세인 1945년
「단학회(檀學會)」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69세인 1975년 5월 8일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東源論)》을
미국의 하버드. 워싱턴. 콜롬비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 갔다.

70세인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제씨와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하신 이듬해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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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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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 042014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

좋아하는 건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졌으면  하는것이고,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이 나로 인해
행복해 졌으면 하는 것이다.

좋아하면 욕심이 생기고,
사랑하면 그 욕심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지구가 멸망해서
탈출하는 우주선이 있다면,
좋아하는 사람은 내 옆자리에 태우고 싶은데,
사랑하는 사람은 내 자리를 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좋아해 는
들으면 가슴 설레는 것이고,
사랑해 는
들으면 눈물나는 것이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꽃을 꺾지만,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꽃에 물을 준다.

좋아해 는
웃는 날이 많고,
사랑해 는
우는 날이 많다.

좋아하는 사람은
내 곁에 두고 싶은데,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은 것이랍니다.

좋아하는 것은
감정의 흔들림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영혼의 떨림이라 합니다.

좋아해 는
그 사람이 나 없으면
힘들기를 바라는 것이고,
사랑해 는
그 사람이 나 없어도
행복하길 바라는것이다.

좋아할 땐
가슴이 두근두근,
사랑할 땐
가슴이 시큰시큰.

좋아하는 건
앞서 걷고 있는
당신을 뒤따라 가는 것이고,
사랑하는 건
내 걸음을 당신에게
맞춰가는 것이다.

좋아하는 건
내가 그 사람을 포기했을 때
내가 잃어버릴 것은
당신 하나 뿐인거고,
사랑하는 건
그 사람과 헤어졌을때
내가 잃어버린 것은
당신을 뺀 나머지 모든 것이다.

좋아하는 건 이 글을 보고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이고,
사랑하는건 이글을 보고
누군가가 눈물날만큼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우린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별 못 할때가 많습니다.

 Posted by at 3:17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