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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의 삶을 뒤바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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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012011
 

이 글은 노무현 대통령이 88년 4월 19일 ‘내가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글입니다. 부산민주화 운동의 야전사령관으로 6월 항쟁을 주도한 뒤 정치에 입문해 부산 동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허삼수 후보와 대결하던 때입니다.

당시 마흔 셋의 젊은 정치초년생이었던 노무현 후보는 부산 동구 지역 주민들에게 보내는 ‘출사표’ 형식의 이 글에서 자신의 지나온 삶과 그 삶에서 겪었던 고민과 성찰의 내용들을 진솔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가난으로 인해 쓰리고 아팠던 유년과 학창시절, 잘 나가는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와 재야운동가로 나서게 된 계기와 심경, 그리고 정치인으로 삶의 좌표를 전환하게 된 이유와 그 과정에서의 고뇌의 흔적을 육성 그대로 느끼고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2011년 9월 1일 노 대통령의 65번째 생신을 맞아 이 글을 여러분과 함께 읽으며 그가 생을 다해 지키고 실현하려 했던 ‘사람사는 세상’의 뜻을 다시금 새겨볼까 합니다.

<노무현재단 사료편찬위원회>
노 대통령의 삶을 뒤바꾼 사건 
– 1988년 4월 19일 노 대통령이 직접 쓴 43년 삶의 역정과 철학 ‘내가 걸어온 길’ 

노무현


▲ (왼쪽)1954년 초등학교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오른쪽)가난했던 학창시절엔 잘 곳이 없어 학교에서 잠을 자야만 했던 적도 있다.

뒷간 갈 때 생각과 나올 때 생각이 다르듯이우리 또래의 사람들 중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의 어린 시절도 무척이나 가난했다. 우린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아야 했다. 한 학급에서 나 혼자만 필통을 사지 못해 누님에게서 물려받은 헌 필통을 새 필통과 바꾸자고 옆의 친구들을 꾀다가 급우들로부터 망신당했던 일, 크레용을 사지 못해 미술 시간마다 꿀밤을 맞으며 꾸중을 듣던 일, 사친회비를 못 내어 한 달에 한두 번은 꼬박 꼬박 집으로 쫓겨 오던 일, 고등학교 3년간 한 푼이라도 싼 곳을 찾아 하숙, 자취, 가정교사, 회사숙직실 등을 전전하던 일 등 지내놓고 보면 젊은 시절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지만, 당시는 왜 그렇게도 서럽고 괴로웠던지 눈물로 입을 악다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잘 곳이 없어 초겨울 어느 날 학교 교실에서 이틀을 잤던 일이다. 밤새껏 이를 악물고 얼마나 떨었던지 다음날 이빨이 아파 온종일 밥을 한 숟갈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런 고생과 설움 속에서 나는 이담에 커서 출세를 하면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벗어나 설움도 갚고 나처럼 고생하며 사는 사람을 도와주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돈 걱정 따윈 안 해도 되고 알아주는 사람 많고 굽실거리는 사람도 많아 편한 데로 생각하면 정말 살맛이 나는 생활이었다. 그러다보니 출세해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은 간데온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실 변호사란 직업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없으나 매일반이었다. 돈 없이는 변호사를 이용할 방법이 없다보니 변호사는 돈 있는 사람 편에 서서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결과가 왕왕 생기게 마련이다.

이 같은 일상적인 변호사란 직업에 대해 양심의 갈등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우선 가까운 부모형제들을 돌보아야 하고, 장차 노후를 위해 부동산 따위도 좀 사두어야 하고, 시골에 농장이나 별장 하나쯤 장만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 양심 같은 건 거추장스런 것으로 여겨졌다.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는 심사였으니 뒷간 갈 때 생각 다르고 나올 때 생각 다르다는 경우가 바로 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무슨무슨 수석 합격자가 나와서 장래 법관이 되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거나 의사가 되어 헐벗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자기 포부를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혼자 쓴웃음을 짓곤 했다. 지금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노릇을 하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과거에 그런 포부를 말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해보면, 나 혼자의 쓴웃음은 일종의 양심적 죄책감에 대한 자조적인 웃음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나는 자기직업에 충실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사회에 올바르게 이바지 하는 것이라는 반 어거지적 자기 합리화를 방패삼아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즐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 변호사 초기, 노 대통령은 헐벗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헌신하겠다는 소신과, 개인적 안위, 가족부양 등 현실적인 문제 사이에서 갈등을 하기도 했지만 1981년 ‘부림사건’을 계기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내 양심의 눈시울을 적시던 민주청년 동지들

그런데 1981년 소위 부림사건(1981년 7월 부산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청년 20여 명이 「역사란 무엇인가」「전환시대의 논리」 등 사회과학서적을 탐독했다 하여, 최고 57일간 대공분실에서 불법 감금되어 고문에 의해 좌경용공으로 조작된 사건)의 재판을 맡고서부터 나의 이기적인 삶의 껍질이 균열되기 시작했다. 대공분실에 끌려가 무려 57일간이나 가족들에게 아무 연락도 못하고 짐승처럼 지내야 했던 청년들, 매를 얼마나 맞았던지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버린 몸을 내보이면서도 얼마나 고문에 시달렸던지 변호사마저도 정보기관의 첩자가 아닌가 눈치를 살피던 파리한 몰골의 청년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죽었던 가슴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모진 고통 속에서도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던 청년들,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학교성적이 우수하고 부모님에게는 효성이 지극했던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길래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수십일 동안 밀실(박종철 군이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그런 방)에 가두어 놓고 개돼지처럼 차고, 때리고, 물고문 하면서 만들어 놓은 조서의 내용으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내 눈에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

하물며 조서란 조서는 모두 조작된 것이었다. 오로지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 청년들에게 순수하게 불타던 이상이 죄었고, 순수한 이상을 가진 만큼 남과 달리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조국의 장래를 누구보다 걱정하면서 부정과 불의에 용감히 항거한 것이 죄일 뿐이었다.

그러나 현명하신(?) 재판장은 그들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하고 3년, 5년, 7년씩 마구잡이로 감옥에 처넣었다. 같은 사건으로 따로 재판을 받은 한 사람은 무죄선고를 받았지만 그 후 항소심에서는 어처구니없게 유죄로 둔갑해버렸고, 그 일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던 양심적인 판사는 진주로 쫓겨 갔다가 끝내는 법복을 벗고 말았다.

그 사건의 재판기간 동안 나는 그 청년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 성적도 우수하여 남보다 나은 자리가 보장된 사람들이 왜 부모님들의 간절한 소망마저 내팽개치고 자기 앞날을 스스로 망치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들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차츰 그들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고 자신과 가족, 부모형제끼리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지 이웃의 고통이나 권력의 부정부패, 불의 따윈 모른 체하는 것이 상팔자라고 체념하고 살던 나의 삶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학생사건, 노동사건 등의 무료 변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일을 내일처럼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눈멀었던 나의 눈에 화려한 사회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희생과 고통을 똑똑하게 보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아픔이 가슴에 전달되어 오면서 어린 시절 나의 고통과 울분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 부림사건 이후 변호사 노무현은 학생사건, 노동사건 등의 무료 변론에 적극 나섰고,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도맡게 되었다.

애국 청년들과 함께 군사독재타도 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하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을 해도 겨우 입에 풀칠하기가 고작이고 자식의 대학 진학은 커녕, 쓰러져 가는 자기 집 한 채의 꿈도 가져볼 수 없는 이 땅의 무수한 헐벗은 사람들, 어디를 가도 사람대접 해주는 곳 없는 인생 핫바지들.

그러나 그들에 비하면 대낮에도 골프장에 나가 한 판에 2백만 원짜리 내기골프를 즐기면서 그 짓도 힘든 일이라고 사우나탕에 가서 몸 풀고, 저녁에는 수백만 원이 휴지처럼 뿌려지는 술집에서 여자들을 옆에 끼고 희희낙락하며 농탕을 쳐도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하루에 이자수입만 5천만 원이 넘는다고 거들먹거리며 으스대는 사람들, 어떤 사람은 단돈 2천 원을 훔쳤다고 쇠고랑을 차는데 어떤 사람은 수백억을 꿀꺽하고도 외국이나 들락거리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세상, 이것이 어찌 사람 사는 세상이란 말인가?

이처럼 세상살이 공평치 못한 것은 사람이 잘나고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과 권력을 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빨아먹기 위해 한통속이 되어 법과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나 혼자 하는 무료변론 몇 건 따위는 정말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생각이 들어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했었다.

무료변론도 좋지만, 가난한 사람 동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우리 사회의 모순을 조장하고 있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나라의 정치가 민주화 되어야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사람대접 받으며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독재정권을 물리치는 일에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무료변론 정도야 돈 좀 덜 벌고 시간 좀 더 내면 해결되는 일이었지만 독재정권에 맞서서 민중의 편에 선다는 것은 언제 어디로 끌려가 병신이 될지, 언제 무슨 죄목을 뒤집어쓰고 쇠고랑을 찰지 온갖 위험과 일신상의 불행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그만 농장이나 별장 하나쯤은 소유하고, 내 자식 놈만은 외국에 유학을 보내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우리 부부의 한을 풀어 보겠다는 개인적인 희망조차도 모조리 포기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82년부터 나는 하루하루 양심과 욕망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갈등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갈등 속에서도 나는 하나하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요정이나 싸롱 등 고급 술집에서 발을 끊고 그렇게 좋아하던 요트 타기도 그만두었다. 그때까지 술 먹고 놀고 친척 도와주느라고 모아놓은 재산이 없었으므로 악착같이 아끼면서 돈을 모았다. 그리고 사건의 수임과정이나 처리과정에서도 최대한 도덕적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조그만 약점이 될 만한 일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게 준비는 하면서도 막상 무슨 일에 나서지는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는데 1983년 감옥에 갔던 부림사건의 청년들이 출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들로부터 나에게도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자는 제의가 오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들에게 사무실을 내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걸핏하면 경찰관들이 사무실 앞을 지키고 내 뒷조사를 헤집고 다니는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도 망설임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 출소한 청년 한 사람을 내가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 채용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마음이 곱고, 부지런하고 책임과 있게 일을 처리했다.

그 청년은 고문으로 건강이 매우 나빠 궂은 날이면 신경통으로 결근하기 일쑤였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혼자 월급 받고 편하게 사는 것이 괴로운지 몹시 고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의 망설임은 하나씩 어떤 확신과 신념으로 바뀌어 갔다.


▲ 취미삼아 요트를 타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음에도 늘 어려운 길을 선택했던 노 대통령.

부산 민주세력의 집약체인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결성하고

당시 나는 그의 고통을 볼 때마다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자식 놈의 얼굴이 그 청년의 얼굴에 겹쳐졌다. 이 녀석이 장차, 대학에 갔을 때 나는 무엇이라고 가르칠 것인가? 이 청년이 가고 있는 길을 똑같이 가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못 본 체하고 어떻게든 높은 자리에 앉아 돈이나 벌며 편히 살라고 할 것인가? 양심이니 정의니 말은 하기 쉽지만 그것을 차마 내 사랑하는 자식에게까지 이 청년과 같은 고통을 감수하며 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깊은 고민 끝에 결국 현재의 우리 애비 에미들이 앞장서서 장차 우리 자식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하여 자식들에게 이 불의가 판치는 세상, 이 세상에서 겪어야 할 고통과 절망을 그대로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나는 결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1985년 봄부터 부산에서는 종교인, 지식인들이 모여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어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임에 쾌히 참여했다.

그 이후 전두환 정권의 최대악법 중의 하나였던 학원안정법 결사반대투쟁, 2·12총선, 직선제 개헌을 위한 개헌현판식운동, 부천서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의 규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궐기, 4·13호헌 반대투쟁, 우리국민의 민주승리인 6월항쟁을 치르기까지 강연, 집회, 시위, 상담, 변론 등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투쟁했다.

그동안 ‘노동법률상담소’를 만들어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기도 하면서 1986년 9월 이후부터는 변호사로서 일상 업무인 사건수임을 일체 중단하고 오로지 민주화 운동에만 전념했다.


▲ (왼쪽)1987년 5월 20일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 발족식에서. (오른쪽) 같은 해 2월 7일에는 故 박종철군 추모대회 때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치렀다.

마침내 구속되고 변호사 업무조차 정지명령을 받아

그러다가 1987년 2월 7일 고 박종철군 추모대회 때에는 경찰에 연행되어 3일 동안 구속 영장이 3번이나 청구되기도 했고, 1987년 6월 11일에는 6·10대회건으로 다시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더니, 마침내 1987년 9월에는 대우조선 이석규 노동열사의 장례식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가 20여 일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그러다가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명령까지 받게 되었다. 원래 1986년부터 사건수임을 중단하고 있었으므로 업무정지라 해도 먹고사는 문제와는 별 관계없는 일이었으나 학생사건이나 노동사건의 변론에는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은 6월 민주항쟁, 노태우의 6·29 항복은 분명 우리 국민이 받아낸 민주투쟁의 승리였다. 그 항쟁기간 ‘국민운동본부’는 시민항쟁의 정신적 구심점이었고 나는 그 중심에서 야전사령관(87년 6월 항쟁당시 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이었음) 노릇을 했다.

아내 몰래 호주머니를 몽땅 털어 유인물을 만들고 확성기를 사주고 밤을 세워가며 청년들과 작전회의를 하고 밤 2~3시 모두들 수배된 몸이라 잠자리를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몰라 하는 청년들과 악수를 하고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그 자랑스런 역사의 현장에 뜨거운 동지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받고 있는 박해를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6월 민주항쟁 중에서도 6월 18일 밤, 부산

6월 18일, 그날은 수십만의 애국 부산시민이 한데 엉켜 ‘독재타도’를 합창하며 밤늦게까지 온 거리를 메웠던 6월항쟁 중 가장 당당한 날이었다. 독재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부산시민이 만든 위대한 6월 18일.

그날의 부산시민은 정말 내 가슴에서 눈물을 쏟아놓게 했다. 그날은 ‘국민운동본부’도 재야운동권도 청년·학생들도 모두 부산시민들 속에 한 덩어리가 되어 녹아버렸다. 그날 나는 시민들의 대열 속에 파묻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청년들이 부르는 출정가 ‘어머니’를 힘차게 따라 불렀다.

나는 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는가

이제 내가 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게 되었는가를 말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애석하게도 우리 국민들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분열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부정선거 때문에 군사독재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돈과 관권, 그리고 보도기관을 장악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을 저지른 노태우가 6·29선언은 마치 자신의 민주신념인 양 떠벌리면서 민주시대를 자기가 몰고 온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요, 아직 우리사회가 민주화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어려움과 험난한 고비를 넘겨야 한다. 지금은 그야말로 민주로 위장된 군사독재가 반민주의 극을 달리는 가짜 민주화의 시대이다.

노태우는 과연 누구인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 그리고 이번 국회의원 후보자로 공천을 받은 민정당 사람들은 민주 인사들이 양심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천 명이 감옥에 가고 매 맞아 죽을 때 무슨 일들을 하던 사람들인가?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너무 쉽게 노태우를 믿고 있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야당은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어 총선을 앞두고 통합에 실패함으로서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민족적 범죄자들에게 국회의석의 3분의 2를 넘겨주는 비극이 올지도 모른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노태우와 민정당은 이번 총선에서 절대 다수의석을 차지하면 5년 후 대통령 간선제로 개헌을 하여 영구집권을 음모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재야는 재야대로 분열되어 힘이 없다. 다시 재야를 재건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야 하겠으나 당분간은 그 전열정비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노태우와 민정당에 조국의 운명을 그대로 맡겨둘 수 없는 일은 아닌가? 이 절박한 상황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마침 통일민주당에서 함께 싸워보자는 제의가 있었다. 어차피 나는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검찰은 나를 죄인으로 기소했고 법원은 유죄판결을 내렸다. 소위 6·29선언 이전에 있었던 집회와 시위에 주동자였다는 것이 나의 유죄의 내용이었다. 6월중에 구속되었던 사람들은 다 풀어놓고 나서 한참 후에 새삼 나만을 기소한 것은 보복적 조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과연 내가 죄인인가? 나는 국민 앞에 나서서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심판받고 싶었다. 6월의 거리를 가득 메우고 함께 싸웠던 부산시민들의 심판을 받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나의 민주화 투쟁이 국회의원 한 자리를 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시인도 부인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지난 연말연시에도 달력이나 명함은커녕 카드 한 장 누구에게 보낸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단 몇 사람의 명단도 지역구를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 일도 없었다. 설사 국회의원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평소 선거자금을 모으고 사조직을 관리하거나 달력을 만들어 보내는 따위의 속임수로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대신에 민주주의를 자기 한 몸 기꺼이 내던지는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국민을 기만하지 않는 정직하고 공평하고 정의를 목숨처럼 존중하는 당당한 국민의 대변자로서 부끄럼 없는 그런 정치인이 되고 싶을 따름이다.

 Posted by at 8:45 AM

‘구글’이 의심스러워?…일단 믿어봐

 IT  Comments Off on ‘구글’이 의심스러워?…일단 믿어봐
Aug 302011
 
  

▲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 구글은 2011년 8월 15일 모토로라 모빌리티 부문을 125억 달러에 인수하며 “모토로라를 인수하더라도 개방형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는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구글은 인수 전에 삼성과 LG 그리고 대만의 제조사 HTC에 양해를 구했고 이들은 안드로이드를 특허 공격으로부터 지키려는 구글의 헌신에 환영의 뜻을 보냈습니다.

ⓒ google, motorola
 구글

 

 

또 다시 위기가 닥쳐왔다고 합니다. 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함으로써 한국은 이제 하청 기업으로 전락했다는 우려가 깊습니다. 여태까지 소프트웨어에 대한 대비가 없었음을 탓하자 기업과 정부가 서둘러 대책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재벌 회장의 한마디에, 천대받던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의 주가가 상한가를 기록하고 정부는 토종 운영체계를 만들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정작 IT 현업에 종사하는 엔지니어들은 이 난리판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위기? 책임자는 어디에?

위기가 닥쳤다면 먼저 원인을 분석하고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잘못된 정책을 이끌어 온 정부는 사과를 하고 대비 없이 단기 성과에만 집착했던 기업들은 개선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인물 교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 대책을 수립하도록 해야 제대로 된 정책이 추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 오히려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낼 구실로 삼고 있습니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프로그램 개발자들은 외부에서 위기라고 외칠수록 작업 환경이 오히려 더 가혹해져 왔습니다.
위기이므로 연봉 인상과 같은 한가한 소리할 시간에 열심히 일이나 더 하라고 핀잔 받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해 더 빨리 제품을 만들라고 재촉 받게 됩니다. 어쩌면 위기란 또 다른 야근과 밤샘 작업의 다른 이름으로 엔지니어들을 좀 더 혹사 시키기 위한 좋은 핑계인지도 모릅니다.

소프트웨어는 공장에서 전자제품을 조립하듯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사판처럼 공기 단축이 유행이 되어 외국에서 1년이 걸려도 만들기 힘든 것을 2달 만에 완성시켜야 하는 프로젝트가 일상입니다. 수 년 간의 연구와 노력 끝에 만든 유저인터페이스를 10일 만에 만들어 내도록 했다고 자랑하는 관리자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소프트웨어 품질을 떨어뜨리고 작업 환경을 열악하게 만들어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현장에서 사라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의사나 판사로 전업하고 있는데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소프트웨어 개발보다 훨씬 더 쉽고 편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창의력을 발휘할 시간과 여유가 필요합니다. 뛰어난
아이디어를 높이 사주는 문화도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인재들을 개발실에 몰아 넣고 누가 더 빨리 더 많은 코드를 작성하는지 경쟁시키는 구조에서는 토종 운영체계는커녕 제대로 된 프로그램 하나도 나오기 힘듭니다.
90년 후반 삼성 내에서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전담하는 “소프트웨어 센터” 창설 멤버였던 이유현씨는 “한국은 값싼 산업용 전기를 낭비하듯 인재를 과소비하는 국가다. 기업들은 고급 인재를 연료로 태우며 달리는 연비 나쁜 자동차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소프트웨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엔지니어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기회를 주는 등 인재의 질 향상에 주력해야 합니다. 대기업들이 인재 양성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중소기업에 있는 개발자를 싹쓸이하고 있는 현실은 질 향상보다는 사람 수를 늘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입니다.
이런 행위로 인해 그나마 자생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던 중소기업들이 다시 전멸하게 될 것입니다. 정부와 대기업이 대책을 마련할수록 엔지니어들과 중소기업들은 재앙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위기는 바로 이런 식의 대응이 만들어낸 것임에도 개선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가 정말 위기?

어느 날 갑자기 애플이 아이폰이란 놀라운 스마트폰을 출시함으로써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오바마도 사용하여 화제가 되었던 블랙베리폰은 이동 중에도 이메일을 사용할 수 있는 기능에 특화되어 10년 이상 이 시장을 지배해 왔으나 아이폰 때문에 한 순간에 구닥다리 머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휴대폰 제조 세계 1위였던 노키아는 심비안이란 독자 운영체계를 무료로 공개하면서까지 생존을 도모했으나 경쟁에서 밀려 나고 말았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PC용 윈도우와의 호환성 이외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던 윈도우 모바일 운영체계를 버리고 윈도우폰 운영체계를 다시 만들고 있으나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제품을 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다양한 제품들 블랙베리는 편리한 키보드와 특화된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앱 부족에 시달리자 안드로이드 앱 호환 기능을 추가하여 재기를 노리고 있습니다.(왼쪽) 노키아는 심비안 폰을 계속 만들고 있지만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중간)윈도우폰은 생태계 조성이 여의치 않자 노키아와 연합하여 점유율 확대를 노리고 있습니다.(오른쪽)

ⓒ rim,nokia,microsoft
 블랙베리
애플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완벽한 결합을 이룬 아이폰 하드웨어로 모든 스마트폰을 시장에서 퇴출시켰습니다. 애플은 또 개발자와 창작자가 소비자와 직접 만날 수 있는 콘텐츠 유통 마켓을 만들어 여태까지 휴대폰 시장에서 군림했던 통신사를 배제시켜 버렸습니다. 휴대폰 제조 강국이었던 한국도 아이폰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이를 일거에 만회할 수 있게 해준 업체가 나타났습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등장한 것입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란 오픈소스 운영체제를 제조사들에게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안드로이드 덕택에 삼성과 LG는 노키아를 누르고 휴대폰 세계1위의 꿈을 달성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무료로 제공함으로써 단기간에 시장점유율 50% 이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견제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오라클 등 수 많은 업체들이 특허 공세를 취해왔습니다. 안드로이드 제조사들은 이들 업체에게 기기당 수십 달러 이상을 지불해야 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방어용 특허를 구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캐나다 노텔의 특허를 구입하려 했으나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연합군이 45억 달러에 먼저 사들이자 결국 구글은 모토로라 모바일 부분 전체를 125억 달러에 사들이는 초강수를 두게 됩니다. 125억 달러는 구글 현금자산의 1/3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이런 거액을 안드로이드 특허 방어용으로 배팅했다는 구글의 발표를 아무도 믿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분석가들이 구글이 하드웨어 제조에까지 욕심을 내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점유율이 기대치 이상으로 오르자 구글이 본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하는 해석도 많습니다. 국내 전문가들도 소프트웨어를 등한시 해왔던 한국 기업들은 결국 구글의 하청 기업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는 것도 크게 틀린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토종운영체계? 촌스러운 한국식 해결 방식

구글이 제조업까지 넘본다는 판단으로 인해 한국은 현재 다른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마땅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독점 운영체제를 무기로 제조사들 위에 군림하며 사용 가능한 하드웨어 종류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합니다. 제품마다 비싸게 받아가는 라이선스비용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뒤지자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대안도 없이 모바일 윈도우를 포기해버릴 정도로 무책임한 마이크로소프트를 믿고 사업을 계속하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만 바라 보았더라면 삼성과 LG는 4년이상 스마트폰 경쟁에서 뒤쳐져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폰 점유율을 인위적으로 높이기 위해 노키아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제조사들은 찬밥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토종 운영체제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재 주류가 된 운영체제들을 개발하는데 수십억 달러와 수천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20년 이상 다듬어져 온 것들입니다. 애플의 IOS는 애플에서 쫓겨 난 스티브 잡스가 전 재산을 투입하여 개발한 넥스트스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운영체제입니다. 잡스가 애플에 재 입성한 후 이것을 다시 가다듬는데 또 오랜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도 20년간 수 많은 해커들의 ‘헌신’으로 성장해 온 리눅스란 오픈소스 운영체제 위에서 동작하고 있습니다. 
운영체제는 성능과 안정성 같은 기술적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용자와 개발자를 확보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소위 플랫폼 생태계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업체들의 협력과 자발적인 개발자들의 참여로 가능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타 업체들과 공생하고 참여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상생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경쟁 업체를 도태시킴으로써 PC를 지배할 수 있었던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바일 부문에서는 고전하고 있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혼자서만 만들던 HP는 사업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노키아도 높은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자체 운영체제 심비안을 오픈소스화 시켰지만 개발자들의 동참을 끌어내지 못해 결국 심비안 운영체제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독자 운영체제를 만들겠다는 것은 스스로 국가경쟁력을 말살시키는 선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토종이란 개념자체가 개방과 협력을 통해 업체들과 연계해야 하는 현 상황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관료와 재벌들은 여태껏 외국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국산화를 칭찬하고 국산품 애용을 애국이라 믿던 시대의 사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기업들이 서로 협력하여 운영체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상생 정신은 애초에 우리나라 기업엔 없는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 삼성 바다폰 삼성은 독자 운영체제인 바다를 발표하고 이를 이용한 제품을 만들고 있으나 아직 생태계를 조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운영체제의 핵심인 커널은 자체 개발이 아닌 외국의 상용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때문에 삼성은 바다를 운영체제에 독립적인 프로그램 동작 환경이라고 애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삼성만의 독자 운영체제라 모든 판단이 삼성의 의지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협력 업체를 끌어 모으지 못하고 있으며 소스가 공개되어 있지 않아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점, 개발자들의 참여가 부족해 앱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등 앞길이 험난하기만 합니다.

ⓒ 삼성
 삼성

 

 

굳이 독자 운영체제를 만들고 싶다면 제가 1억만 받고 6개월 내에 만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무료로 소스까지 공개되어 있는 오픈소스 운영체제 중에 하나를 골라 화면만 그럴듯하게 꾸미면 됩니다. 여태까지 한국형 운영체제 개발 프로젝트가 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아니 아시아 국가들은 거의 비슷한 행위를 해왔습니다. 중국의 홍기리눅스, 북한의 붉은 별 OS, 아시아국가들이 합쳐서 만들었다는 아시아눅스 그외 수 많은 한국형 운영체제들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최근에 정부가 3년 간 90억을 들여 토종 운영체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는데 이것도 결국 공개 운영체제 화면 다듬기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정말로 진행된다면 정부 과제 수행 전문 조직과 기업이 거의 대부분의 자금을 챙겨간 후 하청에 재 하청을 거쳐 실제 개발을 하는 업체는 사실상 1억도 되지 않는 돈을 받고 작업하게 될 것입니다. 거창한 국가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프로그래밍 학원의 과제물 수준에 불과한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오픈소스가 지배하는 세상

현재 운영체제 세계는 오픈소스와 독점 소스의 싸움입니다. 독점 소스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프로그램으로 프로그래밍 저작권을 특정 업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바일 분야에서의 독점 운영체제는 스티브 잡스란 천재가 주도하는 애플이 장악한 상태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노키아 같은 업체들은 애플로 인해 시장에서 퇴출된 상태입니다. 뛰어난 애플 운영체제로 인해 이런 상태는 앞으로 오랫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IOS의 커널 부분은 논외로 함)
독점 소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오픈소스입니다. 오픈소스는 소스를 공개하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합니다. 일단 오픈소스가 되면 독점 소스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오픈소스는 제작자가 소유권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아이디어는 공유되어야 인류에게 이롭다는 신념으로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대가 없이 공개하는 것이 오픈 소스 철학입니다. 오픈소스 철학은 유구한 해커 문화의 산물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얼마나 우아하게 해결했는지 여부를 가려서 가장 뛰어난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을 해커로 칭송하며 존경합니다. 공유 정신을 가진 해커들은 소스를 독점하고 특허로 경쟁 업체를 도태시키려는 독점 소스 기업들과 경쟁해 왔습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구글은 오픈소스 운영체제인 리눅스 위에서 동작합니다. 탄생한 지 20년이 된 리눅스는 전세계 개발자들의 헌신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들여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 왔습니다. 해커들은 사용자들의 감사 표시와 존경이라는 명예만으로도 상용 제품에 못지 않은 운영체제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 재단하고 서로 의심하며,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 먼저 배신하는 극심한 경쟁 속에 사는 한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들의 철학은 현실 속에서도 승리해왔습니다.
  

▲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들 운영체제 리눅스, 웹 서버 프로그램 아파치, 웹브라우저 파이어폭스 등은 대표적인 오프소스 성공 사례입니다. 국내에서는 오픈소스에 기여하기 보다는 이를 가져와 직접 제작한 프로그램인 것처럼 속여서 팔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끄럽게도 이런 기업들은 소스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소송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 linux,apache,firefox
 리눅스

 

 

오픈소스 리눅스는 해커들의 노력 덕택에 세상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중앙제어장치(CPU)를 지원합니다. 새로운 CPU가 나오면 가장 먼저 리눅스가 동작하게 만드는 것이 업계 관행으로 자리잡았습니다. IBM은 이미 위기 타개책으로 십 년 이상 전략적으로 리눅스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대형 컴퓨터인 메인프레임, 초고속 계산용인 슈퍼컴퓨터 그리고 인터넷 서버는 리눅스가 지배적인 운영체제입니다. 스마트폰, 타블렛, 스마트TV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사용하는 공유기, 네비게이션 등 임베디드 머신이라고 불리는 소형기기는 이미 리눅스로 천하 통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늘 접하는 PC를 제외한 전세계 컴퓨터는 오픈소스 운영체계가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픈소스는 누구나 실력만 있으면 가져다가 마음대로 고쳐 쓸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운영체제가 필요한 곳에서는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 리눅스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리눅스는 출시된 이후로 점유율 상승이 멈춘 적이 없습니다. 프로그램 호환성을 무기로 삼고 자사 제품 끼워 팔기로 독점을 유지해 온 마이크로소프트는 PC 다음 시대인 모바일 환경까지 지배하려고 하고 있지만 리눅스에 기반한 구글의 안드로이드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리눅스의 승리로 인해 운영체제는 이제 공기와 같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전세계 해커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오픈소스 운영체제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상 그 누구도 운영체제를 독점하여 돈을 벌 수 없으며 새로운 운영체제가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나더라도 이런 생태계를 다시 만들지 못하는 한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운영체제 독점은 불가능해졌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토종 운영체제 제작과 같은 생각은 포기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양면 시장에서의 한국의 위치

하드웨어 생산 세계 1위를 달성하고 동시에 소프트웨어도 토종 제품으로 세계를 석권하겠다는 것은 매우 한국적인 발상일지도 모릅니다. 전세계 기업들은 각자 독특한 수익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운영체제를 팔아서 수익을 얻습니다. 애플은 음악과 콘텐츠를 유통하는 마켓의 지배력과 뛰어난 운영체제를 앞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드웨어 완제품을 팔아서 수익을 얻습니다. 구글은 운영체제, 소프트웨어, 콘텐츠 등 모든 것을 무료로 나누어주고 검색 광고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업들은 LCD와 모바일 CPU, 메모리 반도체 강국입니다. 거기에 더해 TV와 스마트폰 완제품으로 매출을 올리는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이 잘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 가장 많은 이익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전세계 모든 기업들에게 부품을 공급하고 스마트폰 완제품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데 여기에 더해 소프트웨어까지 지배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소프트웨어 분야에 대한 투자와 발전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지금과 같이 독점을 원하는 태도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운영체제는 오픈소스가 대세가 되어 이것으로는 아무도 수익을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운영체제는 공기와 같아졌는데도 위기를 조장하며 독자 운영체제를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욕심일 수 있습니다. 재벌이 모든 것을 소유하는 한국식 수직 계열화에 길들여진 국민도 이를 바라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고, 모든 업체와 적이 되는 길을 선택하게 되면 국가 전체가 위기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구글의 오픈 정책

구글은 오픈소스의 이념인 개방 정신을 따르는 매우 독특한 기업입니다. 구글은 검색 경쟁력을 위해서 전세계 모든 데이터에 대한 접근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인터넷 업체와 공생을 추구하는 것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검색 결과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애드센스란 광고 기법을 개발해 인터넷 사이트들도 구글 검색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구글은 또한 지도 서비스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위치 정보를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대용량 메일 뿐만 아니라 온라인 오피스 프로그램도 무료로 제공하며 이런 소프트웨어를 모아 크롬OS를 만들고 다시 이것들을 하드웨어에 담은 크롬북까지 출시했습니다. 구글은 크롬북 하드웨어에서 일체의 수익을 얻지 않으며 크롬OS 또한 오픈소스로 만들어 누구나 쓸 수 있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확산을 위해서도 같은 정책을 취했습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와 달빅이란 프로그램 운영 환경도 오픈소스화 했습니다. 각종 앱의 소스까지 무료로 제공합니다. 제조사를 위해 안드로이드 업그레이드도 무료로 해주고 있습니다. 통신사들에는 앱 마켓 운영권을 넘겨 주고 거기서 아무런 수익도 취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구글의 검색 창을 내장할 경우 이를 통해 얻은 검색 수익도 통신사에 나누어 줍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그리고 오라클이 집요하게 안드로이드 제조사들에게 특허 공격을 하는 것은 안드로이드 확산을 막기 위한 전략입니다. 구글이 원하는 것은 스마트폰 검색에서 수익을 얻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안드로이드 생태계가 넓어질수록 이익이 됩니다.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는 안드로이드를 지키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큰 것이라고 판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글이 하드웨어 제조에까지 나서게 된다면 안드로이드 생태계는 일거에 파괴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한해 90억달러 이상의 이익을 내고 있는 인터넷 광고 시장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되는 모바일 광고 시장을 포기하고 적자 상태인 모토로라의 휴대폰 제조에 뛰어들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힘듭니다.
구글이 다른 제조 업체들을 차별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음에도 이를 의심하는 것은 앞에서는 공정성을 내세우지만 뒤에서는 불공정을 일삼는 한국적 현실에 우리가 길들여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구글에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소위 반복 죄수의 딜레마가 좋은 기준이 됩니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

두 용의자가 따로 갇혀 자백을 강요당합니다. 둘 다 서로를 배신하고 자백하면 5년을 살게 되지만 둘 다 자백을 거부하고 용의자끼리 협력하면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한 명만 자백하면 그는 석방될 수 있지만 다른 용의자는 10년을 살아야 합니다. 용의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둘 다 협력을 하면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배신이 가져올 위험을 피하려면 결국 배신을 택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신뢰 없는 상대와의 1회성 게임은 끝내 파국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을 반복해야 할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전에 상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여부에 따른 평판 시스템이 작동함으로써 선택에 있어 참고할 근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의 최선의 전략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실제 게임이론가들이 다양한 전략으로 실험한 결과 소위 팃포탯(Tit for Tat: 눈에는 눈) 전략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팃포탯은 3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먼저 협력하라, 2. 배신에는 즉각 보복하라, 3. 배신자를 용서하라. 이 전략은 복잡하지 않아 상대가 오판할 위험이 없고 보복후의 용서로 인해 상대의 협력을 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연구 결과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도 같은 전략을 쓰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구글은 안드로이드 생태계에 헌신해 왔습니다. 오픈소스 정책에 위배된 일을 한 바도 없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업체들의 특허 공격으로 구글폰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 마이크로소프트와 오라클을 위해 폰을 생산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상황이었으나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로 인해 안드로이드 제조사들의 특허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었습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대한 헌신은 이렇게 국내 휴대폰 제조사에 직접적인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모토로라가 구글 프리미엄을 누리지 않을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은 여태까지 안드로이드 제조사들이 받았던 특허 압박에 비해서는 아주 미미한 수준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구글을 의심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안드로이드 개발 초기 구글은 휴대폰 제작업체들에게 안드로이드폰의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 제조업체들에게 레퍼런스 폰을 제작 의뢰하였으나 국내 업체들은 구글이 제조에까지 나선다고 의심하여 하나같이 거부했습니다. 구글은 어쩔 수 없이 대만의 HTC란 제조사에게 의뢰했고 전략적으로 넥서스원이란 구글폰을 지원한 HTC는 지금 안드로이드폰 시장에서 맹주로 자리잡았습니다. 국내기업들은 뒤늦게 안드로이드 레퍼런스 폰을 제작하겠다고 나섰으나 삼성만 참여할 수 있었고 LG는 아직도 선택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 구글의 레퍼런스 폰 구글은 안드로이드 버전별로 제조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 위해 구글폰을 제조 의뢰 해 왔습니다. 최초의 구글폰은 넥서스원으로 대만의 HTC에서 제조했고 다음 버전은 갤럭시-S의 명명법을 활용한 넥서스-S로 삼성에서 제조했습니다.

ⓒ google,htc,samsung
 구글

 

 

구글이 제조사들을 위해 레퍼런스로 폰을 제작하는 것일 뿐이라고 누누이 설명했지만 이를 믿지 못한 국내 기업들은 결국 안드로이드 시장에서 고전을 해야 했습니다. 이후 국내 엔지니어를 싹쓸이해간 삼성만 겨우 기술적 간극을 따라잡은 상태지만 LG는 아직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레퍼런스 폰을 만든 업체가 안드로이드폰 경쟁에서 특별히 우위에 선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구글은 개발력을 갖춘 업체들에 레퍼런스 폰 제작 기회를 골고루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구글이 모토로라에 레퍼런스 폰 제작을 의뢰할 경우 언론들과 마케터들은 구글이 드디어 모토로라에 특혜를 주기 시작했다고 떠들게 되겠지만 그것을 판단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구글과 모토로라가 불공정 행위를 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안드로이드에 소극적으로 임한다면 안드로이드 생태계에서 퇴출 당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안드로이드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면 개발 주도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구글이 가장 헌신적으로 개발에 임하고 기술적 우위에 있기 때문에 안드로이드를 이끌고 있을 뿐입니다. 안드로이드를 구글 마음대로 독점 소스로 전환하거나 라이선스를 받게 계약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만약 구글이 안드로이드 신 버전의 라이선스 정책을 바꾸어 독점하겠다고 하거나 모토로라에 부당한 특혜를 베푼다면 안드로이드에 참여한 업체들이 독자적으로 안드로이드를 개발하고 구글을 퇴출시킬 수 있습니다. 오픈소스 생태계는 먼저 배신하는 자가 응징 당하는 신뢰성 게임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선택

문제는 우리가 안드로이드에 대해 배신전략을 취하더라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독점 운영체제는 이제 불가능한 모델이고 오픈소스는 안드로이드란 훌륭한 제품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독자 운영체제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독자 운영체제를 오픈소스화 시키겠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안드로이드를 새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어차피 독점할 수 없는 오픈소스라면 그냥 안드로이드를 쓰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비용만 낭비하며 바퀴를 재 발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안드로이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학계에서 모든 아이디어를 안드로이드 위에서 구현하도록 정부가 연구 자금을 지원하고 중소 기업들은 안드로이드를 활용하여 제품을 만듦으로써 기술력을 확보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개발자들이 장기 프로젝트를 통해서 응용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안드로이드 개발까지 주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 안드로이드 개발을 가장 활발하게 진행하는 나라, 안드로이드의 개발 방향을 결정하는 나라 바로 안드로이드 종주국이 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만약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소유하려고 욕심을 부리거나 모토로라를 특별 대우하는 경우 우리나라가 안드로이드 주도권을 가질 수도 있게 됩니다. 구글을 제외한 전세계 나머지 업체들을 이끌고 갈 능력을 길러 놓아야 구글의 배신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사실 쉽고 간단하며 비용이 절약되고 세계 조류에 맞는 가장 상식적인 해결책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들이 이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오픈소스에 대한 이해가 없는 관료,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는 기업, 여태까지의 헌신도 무시한 채 먼저 배신하여 눈 앞의 이익을 챙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조언자들로 인해 이것이 가장 위태로운 선택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안드로이드를 선택하라는 주장이 근거 없이 상대를 믿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느껴진다면 혹시 내가 오픈소스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상호 신뢰 없는 한국적 상황에 매몰된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 자신을 뒤돌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세상은 헌신, 기여, 개방, 공유란 단어를 그 의미대로 지켜온 오픈소스 커뮤니티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에 동참하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에겐 안드로이드 이외의 대안은 없다는 점입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엔지니어들이 필요하다

이 모든 제안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올 대책이 결국 공기 단축을 위해 엔지니어들의 숫자를 늘리고, 월급을 삭감하며 더 많은 밤샘 작업을 요구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습니다. 구박받는 며느리도 가문을 구할 자임을 알게 되면 힘든 밭일을 멈추게 하고 목욕을 시킨 후 안방에서 밥상을 받도록 해주는 법입니다. 한국의 소프트웨어 위기를 해결할 사람들이 결국 엔지니어들이라면 그 해결책은 이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진정성이 없는 방안은 결코 진정한 해결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정말 소프트웨어의 위기라고 절감한다면 엔지니어들의 월급부터 올려 줘야 할 것입니다. 밤샘 작업을 중단시키고 정시 퇴근도 보장해야 합니다. 어쩌면 아이디어를 만들어 올 수 있게 휴가를 보내줘야 할지도 모릅니다. 뛰어난 발상은 연구실에서 밤을 새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휴가지 해변에 누워 있을 때 떠오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오픈소스는 개발자들이 자기 시간을 갖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만들 수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자율성을 가질 수 있게 하자 한류가 꽃핀 것처럼 엔지니어들을 닦달하지 않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한국의 소프트웨어 기술력이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엔지니어들도 자기의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일생에 단 한 번 좋은 대접을 받을 기회를 맞은 며느리가 예전처럼 부엌바닥에서 남은 밥을 마저 먹겠다고 주저 앉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한편 겸손해 보일지는 몰라도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가장 바보 같은 짓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국을 구하기 위해 엔지니어들의 능력이 필요하다면 어떤 조건이 만족되어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고민하여 당당히 필요한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좀 더 자신의 주장을 명확하게 밝히는 엔지니어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현장의 문제점을 알리고 개선책을 요구하는 엔지니어들이 많아져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대기업의 인재 싹쓸이를 막고 공정한 심판관 역할에 충실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대기업들은 인재의 질 향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런 현장의 요구를 묵살하고 또 다시 엔지니어들을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창의력을 말살시키는 정책을 추진한다면 그나마 남아 있던 능력 있는 엔지니어들도 다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격심한 기술 전쟁을 아무런 대책 없이 맞이하게 된다면 그 피해는 사회 전체가 감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김인성 기자는 시스템 엔지니어이자 IT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일반인을 위해 한국 IT의 문제점을 지적한 <한국 IT 산업의 멸망>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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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 Prybyl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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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9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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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ns and the forgotte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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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The Huns and the forgotten Korean

(훈족과 잊혀진 한국인)

 

(American Cable TV ; The Learning Channel)

 

“Atilla the Hun”

(1997 summer & Autumn)

 

Europeans called them “Huns.” Originating From the main land of Korea, they invaded the Roman Empire during the 4th century.

 

유럽인들은 그들을 “훈족(Huns)”이라고 불렀다. 고려(Korea; 고구려의 준말) 지역에서 일어난 그들은 4세기 중 로마 제국을 침입했다.

 

Ancient Greeks historian recorded them, Scythians, and later European called them Mongols.

 

고대 그리스 역사가는 그들을 스키타이인(Scythians)이라고 기록했으며 후에 유럽인들은 그들을 몽골인이라고 불렀다.

 

Around early 4th century, the temperature fell lower than usual for many years in Far East Asia. It caused grains not to ripen, grazing grass land for animals was scarce.

 

4세기 초 무렵, 극동아시아에서는 수년 동안 기온이 평시보다 떨어지는 이상기온현상이 발생하였는데, 그로 인해 곡식은 여물지 못하고 가축들에게 풀을 뜯어 먹일 수 있는 땅은 부족해졌다.

 

For these reasons a large number of semi-nomadic tribes left from what is known today as the Korean mainland to Eastern Manchuria.

 

이런 이유로 인해 상당수의 반(半)유목 종족은 오늘날 Korea라고 알려져 있는 한반도 지역에서 만주 동부로 떠나게 되었다. (번역자 주: 현재의 한국영토를 기준으로 삼은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실제 도래지 면에서는 사실과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Gathering other tribes along the way they proceeded to the Central Asiatic step. From there, the mass of tribes went westward.

 

이동 중에 만난 다른 이민족들을 규합하면서 그들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초원 지대로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종족 대부분은 그곳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Around AD 370, these nomadic people arrived upon the Horizon of the Roman Empire. They established a kingdom along the Danube, on the prairies that are present day Hungary.

 

서기 370년경 이 유목민들은 로마제국의 국경 지역에 도착하여 다뉴브 강 (독일 남서부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흘러 흑해로 들어감, 독일명 ‘도나우강’)을 따라 오늘날의 헝가리 일대인 대초원 위에 그들의 왕국을 세웠다.

 

About AD 443, Attila, the son of King Ruga assassinated his brother Bleda and united all the Hun tribes. He lead the warriors on-to ruthless and savage conquests; destroying anything in sight, looting and merciless killing of innocent people.

 

서기 443년경, 루가왕의 아들 아틸라는 그의 형제 블레다를 암살하고 전(全) 훈족을 통일하였다. 그는 전사들을 이끌고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정복을 감행하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약탈을 하였을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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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완전히 서양인들의 입장에서 쓴 글이니 이 점을 잘 참작하기 바람)

 

He conquered Germany, Eastern Europe and most of southeastern Europe.

 

그는 독일, 유럽 동부 및 유럽 남서부 일대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였다.

 

The Huns were superior horseman and combined with their archery skills were the bane of the Romans ……,

 

훈족은 기마술에 능한 이들로 궁술 또한 겸비하였는데, 그것은 로마인들을 파멸시킨 큰 원인이었다.

(번역자 주: 로마제국의 흥망사의 한 부분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 장군 오도아케르의 반란으로 멸망했다는 점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죠. 다만 훈족도 게르만 족과 함께 로마 제국의 멸망에 일조한 파멸의 한 원인이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They used a short, inverted bow made from few different materials glued together. An iron arrow head was able to pierce any European armor.

 

그들은 여러 가지 재료들이 접착된 복합 재료로 제작된 짧은 역궁(逆弓; 맥궁!)을 사용하였으며, 쇠로 된 화살촉은 유럽 병사들의 모든 갑옷을 관통시킬 수 있었다.

 

Their horses were short in height, but had speed and endurance, they were also agile and smart.

 

그들의 말은 키는 작았지만 빠른 속도와 강한 지구력이 있었으며, 동작이 민첩하고 영민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우리 민족도 고려 후기에 페르시아에서 수입된 대완구라는 키가 큰 말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조랑말을 기병들이 주로 사용했고 이런 경향은 구한말까지도 계속됩니다. 조랑말 타고 적진을 호령하는 우리 기병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길…)

 

Hun warriors, while twisting their upper body, were able to shoot arrows behind them while their horses were running forward (referring picture).

 

훈족 전사들은 말이 전방으로 달리고 있는 중에도 마상에서 상체를 뒤로 틀어 뒤 쫓아 오고 있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었다 (그림 참조요).

 

(번역자 주: 위 ‘그림 참조요’의 그림은 현 중국 집안현 무용총 주실 서벽의 수렵도에 나오는 고구려 기마궁병의 모습과 완전 일치합니다. Orullee Han님의 주; 고구려 기마병 그림은 집안현 그림으로, 다큐에 나오는 인물들의 복장과 거의 같습니다.)

 

When Atilla was young, his father Ruga exchanged his son with a young son of a prominent Roman family, his name was Aetius.

 

아틸라가 어렸을 때 그의 부친 루가는 자신의 아들을 한 유명한 로마 가문의 어린 아들, 즉 그 Aetius라는 이름의 아이와 맞바꾸었다.

 

For ten years Atilla was educated in the Roman court vise versa Aetius from the Hun kingdom. Atilla was probably the first western educated Mongol in its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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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간 아틸라는 로마 왕실에서 교육을 받았고 동시에 Aetius는 훈족의 왕궁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틸라는 아마도 몽골족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서구 교육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번역자 주; 이 문장도 서양인의 입장과 시각에서 쓰여진 것이니 각별한 주의를 요함)

 

Later these 2 men would confront each other in Gaul (today’s France), in 451. Atilla would go on to lose this battle and invaded Italy in 452 with Germanic tribes.

 

이들 두 사람은 이후 451년에 Gaul(오늘날의 프랑스)에서 서로 맞부딪히게 되는데, 아틸라는 계속해서 이 전투에 패배하게 되며, 452년에는 게르만족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침략하였다.

 

His army advanced to Venice (today’s) and negotiated with a Roman representative Pope Leo for 10 hours.

 

그의 군대는 오늘날의 베니스로 진격하여 로마 대표 교황 Leo와 장장 10시간 동안 협상을 벌였다.

 

All the while on horse back, Atilla received tribute from Rome, and would thereafter retreat from Italy. Pope Leo received the title “The great” from the church for his successful negotiations with Atilla.

 

마상에서 아틸라는 로마로부터 공물을 받았으며 그 후 이탈리아로부터 철군하게 된다. 교황 레오는 아틸라와의 이 성공적인 협상으로 인해 교회로부터 “대제(The great)”라는 칭호를 받았다.

 

Atilla married to a German princess, Ideco in AD 453. After his wedding celebration, he died that wedding night, possibly from alcohol poisoning.

 

아틸라는 453년에 독일공주 Ideco와 결혼을 하였다. 그는 불행히도 결혼식 날 밤에 죽게 되는데 아마도 그의 사인은 주독(酒毒)인 듯 하다.

 

His people dammed the Danube River and buried him in the middle of the river. They opened the dam for no on-e, so that none could ever find his grave.

 

그의 백성들은 다른 이들이 묘지를 찾지 못하도록 다뉴브 강을 둑으로 막은 뒤 그의 시신을 강 중앙부에 매장하였다. 그들은 그 댐을 어떤 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 그 누구도 그의 무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After his death, the Hun kingdom crumbled and his people scattered from the Europe. He would be known as “the scourge of god” by the Roman Empire because of his cruel acts.

 

그가 죽은 후 훈(Hun) 왕국은 멸망하였으며 그의 백성들 또한 유럽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생전의 잔인한 행위로 인해 그의 죽음은 로마제국 사람들로부터 “신의 천벌”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The Huns left a number of legacies in Europe especially the Chateau area of France, all children born there have a blue round mark in their hip as the Mongolians do today. The country of Hungary got its name from the Huns, to commemorate the Hun Kingdom.

 

훈족은 유럽에, 특히 프랑스 Chateau 지역에 많은 유산을 남겼으며, 그곳에서 태어난 모든 어린아이들은 엉덩이 부위에 오늘날 몽골인들과 동일한 파란 몽고반점을 가지고 있다. 헝가리라는 국명은 훈 왕국을 기념하기 위해 Huns에서 비롯된 것이다.

 

(번역자 주; 여기서 짚고 넘어 가고 싶은 부분은 몽고 반점을 가진 민족은 우리 민족과 몽고족 이외에도 아메리카 인디안, 유대인 등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서로 인종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During the world war ll allied forces refer to Germans as Hun because of their relationship with Huns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Funeral cultures of Europe are also deeply influenced from the Hun.

 

세계 제 2차 대전 기간 중 연합군은 역사적으로 독일인들의 4세기, 5세기에 훈족과의 관련성 때문에 독일인들을 훈족으로 부른다. 유럽의 장례문화 역시 훈족으로부터 깊이 영향 받은 것이다.

 

 

ChunMaChong Gold Crown Kyungju, Korea

 

 

Kyodong Gold Crown Kyungju, Korea Dia 1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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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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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 심백강 –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발췌)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은 동이족이다.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 禹왕)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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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족과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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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62011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한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들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잔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한편, 셋째 아들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비잔틴시대의 기록화.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잔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않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들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전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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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터의 경쟁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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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 252011
 

2010 프로야구 ‘SK 와이번스’ 우승

최근 몇 년 한국 프로야구를 평정한 구단은 SK였다. 그야말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07년, 08년 2회 연속 우승에 이어 2010년에도 삼성라이온스를 내리 4연승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그 동안 SK가 거둔 승리는 가공할만하다. 특히 08년 SK가 거둔 83승 43패는 승률 6할5푼9리의 성적으로 이는 27년 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 높은 승률이다. 2위와는 무려 13게임차가 나는 압도적 승차였다. 뿐만 아니다. SK는 09년 시즌 막판 19연승이라는 프로야구 연승신기록을 세우고 이를 2010년까지 이어가면서 22연승의 대기록으로 남겼다. 투수력, 타력, 수비와 주루능력 등등 야구의 모든 분야에서 최근 3~4년 SK의 전력은 나머지 7개 구단을 완전 압도했다. 전문가들은 SK가 한국 프로야구 수준을 뛰어넘어 일본 프로야구 리그에서도 중상위권에 통할만한 실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SK는 처음부터 강팀은 아니었다. SK는 만년 하위팀 쌍방울을 모태로 2000년 재창단한 구단이다. 하지만 불과 3~4년 사이에 팀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2007년부터는 한국야구가 진작 경험해 보지 못한 최강의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역대로 우수한 선수들을 보유했고 과감한 투자와 더불어 빅마켓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가진 LG, 롯데, KIA의 순위와 비교해볼 때 SK의 괄목할만한 성적의 원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SK 와이번스의 경쟁 시스템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입을 맞춘 듯이 ‘김성근 SK 감독의 지도력과 그에 기반한 특유의 경쟁 시스템’ 을 이유로 든다. 김성근 감독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은 워낙 알려진 바가 있으니 그렇다 쳐도, 여기서 주목을 끄는 건 바로 ‘경쟁 시스템’이라는 단어다.

SK 야구를 이른바 ‘벌떼야구’ 라고 한다. 상황별 선수기용의 폭이 넓은 야구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수들의 수준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SK는 투수, 내야수, 외야수 가릴 것 없이 하나의 포지션에 여러 선수들이 치열한 주전경쟁을 벌인다. 이러다 보니 선수들이 항상 긴장하게 되고 컨디션을 최대로 끌어올리려 노력하게 된다. 사실 김성근 감독은 이런 방면에서 도가 튼 사람이다. 절대적으로 많은 훈련량을 요구하고, 이를 경쟁화 시켜 먼저 목표에 달성한 선수들에게 우선 선발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3,4년 이런 SK의 ‘경쟁 시스템’은 장안의 화제였다. 결국 이는 하나의 전형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다른 팀들에게도 확산되었다. 07년, 08년 SK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고 그로인해 라이벌 구도를 만든 두산베어스도 SK처럼 포지션 경쟁이 잘 이루어진 팀 중 하나다. 결국 SK 와이번스의 성공비결은 ‘효율적인 경쟁시스템 도입과 이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지도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말한대로 SK의 사례가 결과로 입증되자 다른 팀들도 서로 다투어 포지션 경쟁 체제를 만들려고 아우성들이다. 그러나 모두 포지션 경쟁시스템을 만든다고 SK와 같은 성공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한국야구는 선수층이 엷다. 불과 50개 남짓한 고교야구가 선수수급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경기에 나설 선수기반이 부족하다. 우수자원은 한정되고 이로 인해 폭넓은 포지션 경쟁을 시키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선수간에 경험과 기량의 차이가 지나치게 현격하다 보니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경쟁자체가 의미 없어지기도 한다.

결국 SK와 같은 팀 경쟁력을 갖으려면 안정된 선수 수급과 이들을 기초부터 잘 육성하거나 재활용하는 시스템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말해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선 재료를 꾸준히 공급해서 실력을 배양할 토대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SK는 신인 수급도 수급이지만 특히 선수재활용 부분에서 각별한 노력을 기했다. 기회를 재생산 하는 구조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엄청난 훈련량을 요구하는 경쟁시스템을 무리없이 받아들였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경쟁의 승리자들

이렇듯 경쟁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경쟁구도를 인정해야만 이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혁신과 성장이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SK 야구팀의 사례처럼 경쟁이 기업이나 시장의 영역에서 경쟁력을 만들어 내는 사례는 많았다. 90년대 중반 크라운 맥주는 비열처리 맥주인 하이트 맥주를 등장시켜 30년 절대 아성의 OB맥주를 무너뜨렸다. 시장지배력에서 한참을 앞서가던 OB맥주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경쟁제품 극복을 절대사명으로 걸고 신기술 개발과 마케팅에 주력했던 하이트 입장에선 어쩌면 당연한 결론인지도 모른다. 그 뒤 국내 맥주시장은 새로운 브랜드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경쟁구도가 확산되었고 이를 통해 본격적인 시장 확대가 진행 되었다. 이 흐름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이는 경쟁이라는 구도가 가져온 선순환의 흐름(경쟁이 가속화될수록 전체 맥주시장은 거대해졌다)이라고 볼 수 있다.

삼성과 LG가 세계 가전시장에서 일본의 SONY를 제친 것도 비슷한 경쟁신화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미국시장에서 삼성의 제품은 지금의 중국산처럼 싸구려 이미지가 강했다. 미국의 할인매장 월마트의 먼지나는 한구석에서 연중세일 품목처럼 삼성의 전자레인지가 놓여 있었던 것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가전제품은 놀라운 혁신을 달성한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SONY의 제품과 치열한 경쟁구도를 거치더니 이제는 당당히 세계 1위의 브랜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실제 삼성 LCD TV는 북미시장에서 SONY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 마찬가지로 LG전자의 냉장고 에어콘 같은 백색가전제품들도 파나소닉과 필립스 등을 제치고 중국, 러시아 등에서 호평 받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외시장에서 성과) 삼성과 LG의 사례가 반드시 경쟁지상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삼성과 LG는 국내시장에서 볼 때는 되려 경쟁이 없는 독점적 구조를 즐기고 있다. 특히 이들에 기술과 부품을 제공하고 있는 벤처업체, 중소기업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정해진 기득권을 지배하는 독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삼성과 LG같은 대기업들은 시장의 위험요인은 중소 부품업체로 떠넘기고 자신들의 이익률은 고수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전형적인 독점 기업의 모습이다. 솔직히 말해 이건 경쟁이 아니다. 경쟁을 빙자한 일종의 불공정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게 경쟁이라는 구도속에서 미화되고 조작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쟁신화’가 이데올로기처럼 조작 될 수 도 있다는 점이다. 경쟁은 항상 선의로 해석하면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제는 독점을 즐기면서 겉으로 경쟁구도만 만들어 내면 무조건 혁신이 되는 것처럼 상황을 호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경쟁 시스템이 경쟁력이라는 효과를 생산하려면 올바른 경쟁의 기반이 필요하다. 이것이 안 된 상황에서 무조건 경쟁이라는 시스템을 돌리게 되면 경쟁 = 경쟁력의 선순환은 사라지고 독점지배력 강화, 경쟁력 약화라는 악순환이 되어 버린다. 이점을 경계해야 한다.

사실 대한민국에선 경쟁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전적 의미를 보더라도 경쟁이란 생물이 생존을 위해 한정된 자원을 쟁탈하는 본능적 의미를 말한다. 과정을 유추해 보더라도 이건 상당히 공격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결국 경쟁이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르는 대단히 공격적이고 어쩌면 파괴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명사회의 인간이라면 오히려 경쟁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안전장치를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게 옳다.

그러나 희한한건 대한민국의 시류에는 ‘경쟁’ 이라는 단어가 ‘능력’ 과 ‘효율’이라는 개념으로 엄청나게 격상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우리에게 무한경쟁을 기반으로 성장한 성공신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경쟁이라는 단어는 대단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에게 경쟁이 신화처럼 미화된 것은 입신양명이라는 유교적 관습이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과 결합되었고 이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압축 성장의 동력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시스템의 경쟁구도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은 세 가지 독특한 경쟁구도를 가지고 있다.

첫째, 경쟁의 목표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 교육이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학문체계의 다양함과 창조성을 경쟁화 하는 쪽으로 했다면 이는 대단한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시스템이 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성과보상에 대한 결과도 다양하게 제시되었을 것이고 경쟁 결과가 획일화 되지 않고 개인별로 각자의 판단에 맡기는 복잡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았다. 경쟁이 목표가 엄청 단순하고 뚜렷했다. 학벌이라는 간판을 획득하면 경쟁의 승리로 간주하는 그 뚜렷하고 단순한 목표설정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은 엄청난 집중력과 동력을 갖게 될 수 있었다.

둘째는 승자독식 구조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시스템은 경쟁에서 이기는 자가 다음단계로 올라 갈 때 패자의 몫을 완전히 다가져간다. 패자는 경쟁의 결과물은 물론 발언권 자체가 없이 역할에서 완전 배제된다. 결국 이런 구조에서 교육시스템 내부의 경쟁은 학문과 지식의 경쟁이 아닌 이른바 신분의 경쟁이 된다. 교육이 콜로세움에서 신분상승을 두고 벌이는 검투사의 경쟁처럼 되어버린 상황이라면 그 집중도와 몰입도가 도대체 어느 정도이겠는가! 따라서 강요하던 강요하지 않던 그 가공할 에너지 모여서 압축성장의 무시무시한 동력원이 되었다

셋째는 교육경쟁력의 세습화라는 점이다. 교육의 경쟁구도가 본인 세대에 머무르지 않고 자식세대로 세습화 된다는 엄청난 “사회적 합의(?)”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버렸다. 사실 이런 구도를 인정했다는 게 어쩌면 말이 안 된다. 이는 부모의 집중적인 노력으로 자식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막연한 욕심에서 기인한 듯하다. 물론 그 욕심이 100%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식을 잘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부모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선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입장으로 볼 때는 선한의지였더라도 이런 의지들이 한 공간에서 무차별적으로 경쟁된다면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들을 낳는다. 그 기형적인 결과물이 바로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사교육 시장의 폭발이다.

“경쟁신화”라는 건 이렇게 성공에 대한 갈망이라는 밑바닥 에너지가 대한민국 특유의 교육시스템과 결합되어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누군가 보다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얻기를 원한다. 이는 경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를 회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 질서 속에서 사는 우리가 경쟁구도를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게다가 우리는 경쟁을 뚫고 신분상승과 물질적 풍요를 달성한 사람들에게 성공의 가치를 두는 역사적 전통이 있다. 과다한 교육열이 그렇고 뭐든지 빨리빨리 조급하게 해치우려는 습성 역시 결과를 중시하는 풍토에서 기인한 바가 있다.

이런 분위기에선 누구도 함부로 경쟁을 회피할 수 없게 된다. 괜히 회피 하려는 자는 무능력한자, 용기 없는 자 라는 낙인을 찍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이른바 경쟁 만능주의가 나오고 경쟁이 없는 곳은 마치 모든 것이 뒤쳐지고 도태되는 듯한 느낌도 준다. 이것이 경쟁 공화국을 사는 오늘 우리의 일반적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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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쟁, 그리고 사회적 책임

 


사회에 경쟁구도가 도입되는 이유는 경쟁구도가 새로운 기술과 혁신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소비에트 방식보다 우월한 결과를 만들었다는 이미 증명된 바 있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월이라는 것이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산량과 생산성에 있어서 자본주의 시스템은 소비에트 시스템을 능가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경쟁이 언제나 효율과 혁신을 이끌어 내는 건 아니다. 알다시피 세상에는 경쟁을 빌미로 오히려 자유와 정의를 억압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현재 우리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자리잡은 양극화, 기회의 박탈, 약자의 소외, 물신풍조 등은 모두 잘못된 경쟁 심리로 파생된 개념들이다. 따라서 경쟁구도를 올바르게 바로 잡지 못하면 경쟁이 주는 이득보다 부작용이 사람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든 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다.

경쟁은 이렇듯 양날의 검과 비슷하다. 문명의 발전을 위해 경쟁은 필요하지만 이 경쟁이 되레 인간의 삶을 해치게 만들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우리사회가 경쟁의 조건에 대해 보다 엄격한 잣대를 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경쟁은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든 사회가 경쟁시스템의 합리성을 따질 땐 전제로 하는 기준이 있다.

 

첫째가 공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경쟁하자고 해놓고 불공정한 기준으로 사기 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누구는 100m 앞에서 뛰고 누구는 100m 뒤에서 뛰는 상황을 만들어선 안 된다. 화투 뒷면에 표시를 해놓고 누구는 이것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고스톱을 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행위는 모두 경쟁을 빙자한 사기다.

결국 경쟁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이런 반칙과 특권 그리고 기만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선 이런 식의 무늬만 경쟁인 사기 상황이 태반이다. 이렇게 반칙과 특권 그리고 몰상식이 강하게 존재하는 한 그 바닥에서 경쟁은 비합리를 부추길 뿐 혁신과 효율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둘째, 경쟁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패자부활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패자 부활전이란 다시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재도전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패배를 극단으로 몰고가지 않는 일종의 관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합리적 경쟁구도를 통해 결과물을 쟁탈하지만 그것이 All or nothing 이 되어선 곤란하다. 이런식으로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결과가 반복된다면 경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앞서 말한 특권과 반칙, 그리고 승리지상주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반칙을 저질러서라도 무조건 승리하고픈 유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이 가진 권리와 기회를 침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득권이다.

뿐만 아니다. 경쟁시스템에 관용과 패자부활전이 없다면 패자가 승자에게 쉽게 승복하는 문화도 만들기 어렵다. 이는 패배의 절망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패자가 패배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반드시 후유증을 동반하고 사회전체의 비효율을 만들어 낼 것이다.

째, 비슷한 수준 내에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보면 경쟁할 수준에 있지 않은 사람들끼리 경쟁하는 경우도 있다. 이건 경쟁 자체의 공정성이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이미 불공정한 경쟁 구도다. 어차피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은 생물학적 능력과 사회적 자산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무더기로 이들을 경쟁시킨다면 이건 경쟁을 빙자한 일종의 고문이나 다름이 아니다. 경쟁할 수준과 능력이 안되는 사람들은 (사회가) 보호하고 배려해야 한다. 특히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는 그들이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보고 훈련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이런 조치 없이 경쟁이 무조건 효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찌 보면 우리 대학입시 현실이 이런 형편과 비슷하다. 지금 보면 대학을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아이들까지 입시전쟁을 치르게 하는 일종의 시험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학문연구와 전문기술을 배우기 위해 대학을 갈 아이들과 대신 사회교육, 직업교육을 받을 아이들이 동시에 경쟁한다는 것, 이것 자체가 심각한 모순이다.

예를 들어 체육대회가 벌어지고 있다 치자. 어차피 트로피를 받을 아이들은 1, 2, 3등이다. 나머지는 어차피 트로피 못받는다. 그런데 왜 나머지 아이들까지 1000등, 1001등 이렇게 가슴팍에 등수를 박아줘야 하는것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공정한 기준, 패자부활전, 수준끼리 경쟁 등 경쟁의 올바른 기준이 담겨있는 경쟁만이 혁신과 효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 말은 쉽지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 대한민국처럼 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향한 각개약진을 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어렵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올바른 정치집단과 올바른 언론등이 등장하여 사회구성원을 설득해야 하는데 이런 사회적 합의를 구축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공동체가 경쟁에 대한 합리성을 보유하려면 이른바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이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가진 자, 배운 자, 그리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자 나서는 전통이 있다.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통해 경쟁의 공정성을 사회적으로 담보했다.

영국의 사례를 보자. 80년대,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을 할 당시 영국왕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류 왕자를 전선으로 보낸다. 왕자를 전선에 보낸 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바로 앤드류 왕자의 임무였다. 헬기 조종사로 종군한 앤드류 왕자에게 맡겨진 임무는 적의 미사일이 날아올 때 구축함을 보호하고자 미사일 궤도에서 레이더 교란 장치를 발사하는 것이 이었다. 영국왕실은 이를 왕실의 전통이라며 수용했다.

하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6세도 해군장교로 1차 대전에 참전한바 있고 여왕도 역시 2차 대전에 수송병으로 트럭운전을 손수 한바 있다. 전통은 이어져 내려와 여왕의 손자인 (찰스황태자와 다이애나 사이의 둘째 아들) 해리왕자도 아프간에서 탈레반과 전투에 참가한바 있다. 이렇듯 선진국은 가장 높은 계급인 왕족이 전쟁이 나면 목숨을 걸고 참전하여 가장 어려운 일을 수행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사회구성원들이 사회통합력을 발휘하고 경쟁시스템에 대해서 신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미국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몇 년 전 조지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정부가 상속세를 폐지하는 법안을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빌게이츠와 조지 소로스 같은 억만장자들이 나서서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피력했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빌게이츠는 이때 이렇게 말했다. “내 가족들은 직접 회사를 만들고 키우는데 기여한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상속시 이득을 받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게임의 룰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경쟁의 최일선에서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는 글로벌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부와 자선, 사회활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이런 활동들이 공정한 경쟁시스템을 만들고 경쟁 참여자들의 신뢰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아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언론기사다.

기업의 선량한 사회적 책임이 궁극적으로 일류기업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된 사례는 적잖게 찾아볼 수 있다. 커피 한 잔 값이 직장인들의 하루 점심 값에 맞먹는 스타벅스의 경우 커피를 공급하는 농장이 고용한 노동자를 제대로 대우해주는지를 구매조건으로 삼아 프리미엄을 얹어줘 커피의 품질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기업의 이미지도 좋게 한 사례로 꼽힌다. 이와는 반대로 얼마 전 블룸버그가 제기했던 미국 포드사의 경우 하청업체가 아마존강가의 노예에게 부품을 생산하게 했다는 것이 사회적 비난거리가 됐다.

이 두 사례는 현대사회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는지를 극명하게 입증해준다. 특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 범위가 하청업체에까지 미친다는 점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 기업들 가운데는 제품의 하자나 고객과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참으로 대조적인 상황이다.

13년 전 지역 매체로 출범한 케이블TV의 경우 그동안 일궈온 성장의 과실을 지역주민과 나누려는 다양한 활동이 최근 몇 년간 부쩍 늘고 있다. 수익의 1%를 불우아동과 청소년을 위해 사용하는가 하면 아예 복지재단을 만들어 의료비 지원 사업에 한해 4억 원 이상 후원하는 케이블방송국도 있다. 지역의 장애인을 후원하고 지역채널을 통해 공익 캠페인을 전개하는 일 등은 전국 케이블TV 사업자들의 평상시 일과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변화가 거대통신사와 맞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효과적인 방책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소비자에 대한 인식의 대 전환은 시청자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케이블TV사업자에도 긍정적인 변화의 조짐이라고 보인다. 기업이 성장 과실의 상당 부분을 소비자에게 되돌려주겠다는 자세의 변화는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한국일보 기사참조)

한국의 기업들도 이제는 단순히 경쟁이 효율을 낳고 그 효율이 만든 생산성이 고객만족을 창출한다는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 기업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서 모두가 신뢰하는 공정한 경쟁의 룰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목표가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만족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향후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비즈니스와 별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러한 활동들이 성과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앞으로 고객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겠다”.

(* 한겨레 신문 참조)

위 말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 통신회사 CEO의 선언인데, 현실에서 진짜 저런 마인드로 경영을 한다면 정말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이 올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그 정도 신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런 사고가 유지되는 곳이어야 비로소 경쟁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대한민국은 이런 점이 아직 대단히 부족하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라는 천민의식이 지도층은 물론 사회구성원 전반의 의식에 남아 있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아직 갈 길이 참 멀다고 느껴진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경쟁이라는 단어는 겉으로는 효율이나 능력으로 여겨지지만 본질적으로는 진짜 원시적인 의미 그대로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경쟁구도에 반칙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해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본질적 문제해결을 위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고민하려 하기 보다는 “부자 되기” 같은 희망고문으로 개인이 각자 알아서 해결하려고 한다. (한국사회에) 사회적 책임이 갖추어진 경쟁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아직은 요원한 것 같아 답답한 노릇이다.

출처:(2) 경쟁, 그리고 사회적 책임

 

 Posted by at 11:18 AM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역사  Comments Off on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Jul 112011
 

(민족사학의 큰 스승 “한암당 이유립 선생”)

(편집부)

지구상에 난무하는 사건 하나 하나가 모두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건의 미치는 파장과 영향력이
역사가들에 의해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어야
비로소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역사가들의 임무는
바로 어떤 사건을 역사적인 것과 그 밖의 것으로 구분짓는 데서 그 위력이 잘 드러난다.

따라서
이 역사가가 어떤 사고방식(여기서는 사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사건의 취사선택과 평가는 전혀 달라지게 되는데
민족사관의 경우 역사발전의 주체를 ‘민족’이란 단위로 인식하고
모든 판단의 기준을 ‘민족’에 두고 있는 사관을 말한다.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을 민족사학자라고 말하는데,
이들의 생각은 개인보다는 ‘민족’이란 단위의 생존, 발전, 영광을 우선한다.

우리 겨레에게 있어 민족사관의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 문화와 민속이 이 민족을 단위로 형성 발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민족사학의 입장에서
우리 민족사의 가교역할을 해온 민족사학자들을 시대를 거슬러 재조명 해본다.

우리 사학,
즉 한국사학의 진로 설정에 참고가 될 것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 )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세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
「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 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24세인 1930년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 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1942년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등
12항을 이유로 강제 폐쇄 당했다.

39세인 1945년
「단학회(檀學會)」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69세인 1975년 5월 8일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東源論)》을
미국의 하버드. 워싱턴. 콜롬비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 갔다.

70세인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제씨와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하신 이듬해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1986년이니 이제 15년을 지나고 있다.

다행히 생존해 계실 때 교류하던 인사들이 상당수 있어
그분들로부터 한암당 선생에 대하여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박정학 한배달 치우학회장이 전하는 내용이다)

박정학씨는 한암당 선생을 만난 기억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일로 3가지를 꼽는다.

그 첫째는 빼어난 기억력이다.

한암당 선생과 교류하던 당시
“10여세 때 들었던 내용을 확인하고 싶으니 이러저러한 책들을 구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필요한가를 되물었더니
“옛날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은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40여종의 도서 80여 곳에 대한 복사를 요청받고 국립도서관을 방문.
상당수 책이 귀중본. 희귀본이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것임을 알게 되고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더니 도서를 찾던 담당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도대체 이런 책을 누가 보느냐?”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지하실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이런 책이 수북히 쌓여있다” 며
요청한 자료를 준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원하는 책의 복사부분을 상자에 담아 전해드렸다
(그러나 이 상자를 뜯어보지도 못하고 선생님은 세상을 뜨셨다).

아마 한번 들었던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대한독립소년단 시절 전령으로 활약할 때는 편지대신 외워서 전달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속독에 의한 뛰어난 독서력이다.

한 번은 조선왕조실록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마찬가지로 과거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책을 구해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배달 창립 멤버인 모 회사 사장에게 부탁하여 사장이 직접 책을 전해드렸다.

책을 받아 본 선생님은 매우 기분 좋아하시며 책을 펼쳐 보시더니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겨 읽으면서도
필요한 부분을 정확하게 찾아내 쪽지를 끼워 표시해 놓고 원고를 완성하는데 사용하셨다.

순 한문으로 된 책을 그렇게 빠르게 읽는 것은 처음 보았으며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셋째는 빼어난 건강이다.

79세의 노인이 젊은 제자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데
젊은 제자들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산을 오르셨다.
몸이 아주 가벼워 보였다.

< 운초 계연수 선생과의 만남 >

계연수 선생은 호를 운초라고도 하고 일시당(一始堂)이라고도 하는데.
한암당 선생 아버지와는 광복운동을 함께한 관계로 어릴 때부터 가까이서 자주 접해온 사이였다.

그러던 1943년 어느날.
계연수 선생이 집으로 찾아와서 어린 이유립을 부르더니
“너는 머리가 좋고 하니 네가 우리 역사를 공부해라”고 부탁 겸 타이르셨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정치에 더 관심이 있던 이유립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3일 후 목이 잘린 계연수 선생의 시신이 대동강변에서 발견되었다.

불과 몇일전에 자신에게 일렀던 말들이 선생의 유언처럼 들리고.
마침내 운명처럼 ‘우리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틈틈이 계연수 선생에게 들었던 이야기에다
신채호. 이덕수 선생들과 교류하면서 전해 듣는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하였다.

(한암당 선생의 민족사 체계)

“서로의 원수를 잊고
세나라(고구려. 백제. 신라)가 힘을 함쳐 당나라를 쳐 없애자는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장군의 제의는 무시되고.
한, 단, 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 고려로 이어지는 국통, 국학, 사관이 올바로 풀리지 못하고…”

이 말은 한암당 선생의 사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암당 선생의 민족사에 대한 체계는,
물론 한암당 선생의 수많은 논저를 읽고 난 후에야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다음의 몇 가지 주장에서 그 맥락을 읽을 수가 있다.

(1)
우리 민족의 정통성은
한국에서 이주해온 한웅천왕의 배달 건국으로부터 비롯하여
단군조선-북부여(원시고구려)-고구려(본고구려)-대진(大震-중고구려)-고려(후고구려)-조선-임시정부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2)
세계문명은 서(西)에서 동(東)으로 온 것이 아니라
동(東)에서 서(西)로 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민족사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에 있었던 한웅천왕의 태백산 천강과 함께 이룩된
신시개천에서 찾아야 한다.

(4) 단군조선은 엄연히 실존했던 역사이며,
아사달시대(1048년),
백악산 아사달시대(860년),
장당경시대(188년)를 통해 2096년의 역년을 셈할 수 있고,

통치방법으로 신한(진한), 말한(마한), 불한(변한)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본 뜬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적용되었다.

(5) 고구려 건국 연도는 북부여 원년(신시개천 3659년)으로부터 기산되며
보장제(帝)의 27년까지는 907년이 되지만(신시개천 4565년)
해모수 8년(신시개천 3666년)의 부여 고향 수복으로부터는 정확히 900년이 된다.

(6) 기자조선은 환작(幻作)된 것으로서 민족의 정통 역사로 볼 수 없다.

(7)
위만은 요예(遼濊)의 변경을 침략하여 지금의 창려(昌黎-하북성)를 점거해
조선이라고 잠칭하고 있던 떼도적의 두목에 불과하며,
의문 투성이의 ‘한사군’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8)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성제의 위업으로 이룩된 영락대통일은
따무르자주의(漢寇擊退完我舊彊)를 완전히 성취한 것인 동시에 민족사의 영원한 이상을 제시해 준다.

☞ 한구격퇴완아구강(漢寇擊退完我舊彊) : 한나라 도적들을 퇴거하고 온전한 우리의 옛 강토를 되찾자

(9)
신라 ‘삼국통일’이란 허구에 찬것이며,
‘발해삼인당일호(발해 사람 셋이 모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해낸다)’에서도 나타나는
대진의 웅혼한 기상에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

(10)
한양 조선은 신시개천 5816년(1919년)에 종식된 것으로 보며
동년 4월부터 옛 고구려 송강현(지금의 상해)에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법통을 잇는다.

물론 이러한 주장외에도 광범위한 사론(史論)이 펼쳐져 있지만
더 요약한다면

‘고구려 중심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 천부경,
– 삼일신고,
– 참전계경,
– 신시개천경(단군고기),
– 광개토지경(비문),
– 훈민정음경(반포문)을

우리정신. 역사를 찾은 근본서적으로 중요시 하였다.

한암당 선생과【한단고기】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일생을 통털어 최대의 민족사적인 사건은
【한단고기(桓檀古記)】와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사를 논할 때 불가분『한단고기』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럴 때마다 한암당선생은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되고 만다.

『한단고기』의 탄생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

– ‘삼성기전 상편’. ‘삼성기전 하편’.
– ‘단군세기’.
– ‘북부여기’ 상. 하.
– ‘태백일사’를 한데 묶어
『한단고기』라는 제목으로 30부를 발간한 데서 비롯된다.

그 가운데 1부가 한암당 선생에게 전해져 칠십년 대 초반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의정부에서 셋방을 얻어 있다가
너무나 어려워 군산으로 잠깐 내려가 있었다.

그 사이 주인은.
방세도 못내는 노인이 어디 갔는지 나타나지도 않자 책을 내다 팔아 버렸다.
이때 그『한단고기』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한암당 선생은【한단고기】1권 정도는 이병도씨 집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음)

급기야 기억을 되살려【한단고기】를 다시 써야 했다.

워낙 공부를 많이 하고 어려서 전령으로 활동할 때 문건보다는 외워 전달했던 것이나
속독으로 훈련된 탓에 새로이 한단고기 내용을 기억하여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후 잘못된 부분이 몇 군데 제자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맞을 거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선생의 인품을 의심하는 사람은(식민사학자들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문건은
1970년대 후반〈한단고기 정해〉라는 제목으로
서문까지 완성된 상태에서 출판사 선정을 위한 협의 도중

당시 월간《자유》의 발행인인 박창암으로부터
‘출판에 도움이 될 재일교포가 있으니 원고를 달라’는 요청을 받고 건네졌으며.
불과 3일이 지나지 않아 박창암으로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원고를 돌려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에서『한단고기』초판이 나왔는데,
일부 내용의 해설이 임의로 바꾸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초판은 우리나라에 전해져 제일 먼저 김은수 선생의 번역판이 나왔고.
이유립 선생의 ‘한단고기정해’가 대배달 민족사에 실리게 되었으며
이어서 임승국선생의 한단고기.
강수원 선생의 한단고기.
85년 배달문화원에서 발행한 한단고기,
오정윤 선생의 한단고기(도서출판 창해 刊) 등이 연이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 이 외에도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83년에 발행한 ‘한단고기’ 필사본.
– 1979년 조병윤씨가 오형기씨에게 부탁하여 필사한 ‘한단고기’
(광오이해사 발행. 100부 한정판. 이 내용이 일본인 ‘녹도 승’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일본인 ‘녹도 승’이 쓴 ‘한반도의 우가야왕조사-한단고기’등이
한배달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 한암당 이유립과 (사)한배달 >

(역시 이유립 선생을 직접 만났고 (사)한배달의 설립에 결정적인 산파역할을 맡았던 박정학(치우학회장)씨의 증언이다)

1982년에 한미 연합 사령부 교양강좌 때 만났던, 한암당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985년이다.

8월 9일자 신문에「백운대 쇠말뚝 제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는 순간,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말로 우리 겨레의 얼을 찾는 일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다음날인 10일,
이전부터 알고있던 한암당 선생의 제자 전형배군(당시 고려대 대학원 재학중)을 찾아서
함께 김포읍 산자락에 거처하시는 선생을 찾아갔다.

새로 지은 집이었는데 조그만 별채로 방 하나, 부엌 하나였으며,
혼자서 연탄도 반찬도 없이, 그야말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몇몇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라면을 한꺼번에 3개를 삶아 놓고
소금이나 간장을 반찬 삼아 아침, 점심으로 조금씩 끼니를 들고 있던 때였다.

제자의 안내로 선생을 뵙자마자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나는 이제 안합니다.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재차 물으니,
“상황이 쉽지 않습니다. 국사찾기는 이제는 안합니다.
책도 팔아버리고…왕조실록하나 구하려고 해도 돈이 없어 못구하고…나는 안 합니다”
라며 완강히 거부하셨다.

나는 ‘이제는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선생님은 “이제 끝났다”고 말씀하시니 난감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어렵사리『조선왕조실록』을 구해 드렸다.
그리고 다시 댁을 찾아가 보니 책은 펼쳐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다.

3번째 방문할 때는 ‘두 아들’을 데리고 갔다.
절을 올리면서 “우리 이 아이들을 만주를 찾는 선봉장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아내 전유선(한암당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서 현재 ‘한암당 이유립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의
말을 듣고는 마침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우선 거처를 정하여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살도록 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김포에, 부인은 군산에, 시집 안간 막내 딸은 대전에
각각 흩어진 이산가족이 되어있었다.
이런 선생께 1200만원을 마련하여 화곡동에 전셋집을 마련해드리고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살도록 터전을 구해 드렸다.

이후 선생님은 집필에만 전념하여
도서출판 고려원에서【대배달민족사(전 5권)】을 발간하기에 이르렀고.

집을 마련하는데 재정을 지원했던 사람들이 모여
한암당 선생의 제자(현재 부부인 전형배 고성미)를 초청.
우리 역사에 대하여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4월 17일 저녁 7시 인사동 소재 당시 도서출판 고려원 사장(김낙천) 사무실에서
직접 한암당 선생을 모시고 질의응답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9시 20분이 될 즈음)
“이것은 정말 당신들이 해야 될 일이요”라고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셨다.

재빨리 선생을 의자에 앉혀드리고 청심환을 드렸는데,
15분이 지나서도 깨지 않아 인근 혜정병원으로 옮겼다.

뇌출혈이었다.

중구 필동의 성심병원 응급실로 급히 옮겨 하루를 지낸 다음날
아침 잠깐 의식이 돌아오는 듯 했으나 낮 12시쯤 재차 진행된 뇌출혈로 의식불명에 빠졌다.
그 상태로 자정을 넘기고 다음날 새벽 1시에 운명하셨다.

선생의 장례를 단단학회장으로,
강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재정을 부담하여 정성껏 치렀다.

장례를 마친 후
“이것은 정말 당신들이 해야될 일이요”라는 마지막 말씀을 유언으로 해석하여
‘역사 찾기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재정지원에 참가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단체 설립을 준비하여
7월 1일 종로 인사동에서 사무실을 열었다.

그리고 그해 말 마침내 “사단법인 한배달”이란 이름으로 서울시 교육청에 등록되었다.

오늘날 15년의 역사를 가진 사단법인 한배달의 창립은
바로 민족사학자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뿌린 씨앗이 싹튼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역사가 이유립은
그의 호 ‘한암당(寒闇堂)’이 풍기는
‘춥고 어두운’ 분위기 만큼이나(대부분의 광복군과 그의 후예들이 그렇듯이)
어려운 삶을 살았다.

자생 신앙결사인 ‘태백교’의 부활을 꿈꾸기도 하였고.
또 한 때는 정치에 뜻을 두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사론만이 후세에 남아 ‘국사바로잡기’의 험한 길 위에 비치는 찬연한 등불이 되고 있다

< 참고 자료 >

한암당 선생이 남긴 논저들은『대배달 민족사』에 실려있습니다.
필요한 분은 한배달로 연락하시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대배달 민족사(전5권)』(고려원 刊)
– 구입문의 : 월간 한배달사 편집부 (02) 747-8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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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사학자들의 행보 >

우리 배달Baedal 민족의 장대한 역사를 태풍의 격렬한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그 태풍의 중심이 되고있는 태풍의 눈은
배달Baedal의 정신입니다.

그 배달의 정신은
– 천부경,
– 삼일신고,
– 366사(참전계경),
– 단군팔조 등

십수권의 배달Baedal 민족 고유의 경전에서 설명되는
인류의 보편적 진리가 설명합니다. 

<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전래 >

교과서에 없는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 등이 어떻게 지금까지 전래되었는가 ?
라는 의문을 제기해주신 분들의 요청에 의해 그 자료의 전래내용을 첨부합니다.

< 1. 한단고기 >

한단고기는
천부경, 삼일신고의 원문과 366사(참전계경)에 대한 자료등이 실려있는 책으로서
이 책이 전래되는 과정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곧 이 경전들의 전래와 직접관계가 있다.

고려말 좌의정을 지낸 행촌杏村 이암선생은

1313년(충선왕5)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이 그를 아껴 부인符印을 맡겨 비성교감秘省敎勘에 임명했다.
그 후 좌정승을 마지막으로 관직에 물러난 인물로 단군세기의 저자이다.

태백일사를 찬한 이맥李陌선생은

행촌선생의 고손高孫으로
1474년(연산군4)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
중종반정때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성균관사예와 사헌부장령을 겸하고 동지돈영부사에 이르른 인물이다.

행촌선생과 이맥선생은 모두 고성固城이 본관이다.

여기에서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전래와 직접 연관이 있는
또 다른 고성 이씨인 구한말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기李沂선생을 소개할 차례이다.

이기李沂선생을 소개함에는 실로 많은 지면이 필요하나 중요한 내용만 간단히 요약하면

을사5조약이 체결된 후 후일 대종교를 창건하였을 뿐 아니라
혁혁한 독립운동가인 나인영(나철)선생과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 등과 함께 을사오적을 주살할 것을 결의하고

자신회自新會을 조직하여 권중현權重顯을 총살하였으나 실패하고,
박제순朴齊純등에 대해서도 살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던 혁혁한 애국독립투사이며 자주를 주장한 유명한 학자이다.

합방을 예견하고 비분을 참지못하고 단식끝에 운명을 맞았다한다.
이기선생은 단학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지냈다.

한단고기를 전한 계연수桂延壽선생은

이기李沂선생이 한단고기를 직접 감수監修했다고 밝히고 있음으로
스스로 고려말부터 구한말에 이르는 배달Baedal 사상을 잇는
중요한 갈래의 한부분을 담당했음을 한단고기에서 밝히고 있다.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묘향산 단군암에서 한단고기를 쓰는 비용을 역시
혁혁한 독립운동가인 홍범도洪範圖, 오동진吳東振선생이 대어주었음을
한단고기는 밝히고 있다.

계연수선생은

이기선생의 단학회를 이어받아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하여 정신적, 사상적 계몽협조를 했다.

1920년 계연수 선생은 일본인 스파이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그 다음 단학회의 한단고기의 전래는
천마대天摩隊대장 최시흥崔始興선생에게 이어졌고
다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 선생에 이어졌으나
이덕수 선생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침체되었다.

해방후 일제에 의해 수감되었던 이용담선생이 출옥하면서 평양에서 그 맥을 이었으나
기관지 태극에서 신탁통치반대론을 주장함으로서
태극의 주간 이유립선생이 구속되면서 단학회의 활동은 다시 중단된다.

그 후 이유립선생이 월남에 성공함으로서
단단학회를 세워 계연수 선생의 한단고기는 다시 세상에 전해질 계기가 생겨났다.
작고하신 이유립선생은 1979년 한단고기를 세상에 펴낸다.

그러나 1982년 이 이유립선생의 한단고기가 한글로 번역이 되기도 전에
천만뜻밖에도 일본의 가지마가 일본어로 번역하여 발행을 해서 세상에 펴내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라는 배달Baedal 민족 최대의 암흑기에도
위대한 인물들이 마치 릴레이를 하듯 서로 이어받고
그 가난했던 시기에도 자금을 대고해서 전해진 한단고기가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소위 단군이래 가장 잘 살게되었다는 1980년대초에 어이없게도 일어로 먼저 번역된 것이다.

자손만대를 위한 소중한 민족적 지적재산이 국내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는 수모를 우리 모두는 당한 것이다.

그 시대의 우리는 진정 중요한 일을 하는 인물들이 단돈 몇푼의 출판자금이 없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초를 살았던 한국인중 한사람으로
당시에 한단고기의 존재를 몰랐다해도 한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한단고기에는 천부경, 삼일신고가 원문 그대로 전해지며
또한 366사는 참전계경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이유립선생에 의해 전해진다.

한편
이 한단고기는 제대로된 증거조차 제시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위서로 매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위서라는 보편타당성을 갖춘 주장을 아직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만일 제 2의 일본인 가지마가 출현하여
한단고기등에서 전하는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참전계경)을 세계의 문화시장에 내놓고
이를 일본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나 지금이나 일본인은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지식정보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정작 우리의 소중한 지적재산이 무언지도 모르는
이 기막힌 현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이 과연 이 시대에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진다.
 

< 2. 묘향산석벽본(妙香山石壁本) >

천부경 81자에 대한 자료로 잘 알려진 묘향산석벽본은
1917년(丁巳年 正月 初十日) 계연수선생이 묘향산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탑본하여
당시 서울의 단군교 앞으로 서신을 보낸것으로 알려져있다.
단군교부흥경략(1937년)에는 이 서신과 함께 천부경 81자가 전해지며 또한 삼일신고의 원문도 전한다.

< 3. 최문창후 전집 >

성균관대학교 소장의 최문창후전집의 고운선생사적孤雲先生事跡에는
천부경 81자의 원문이 기록되어있다.
다만 이 기록에는 한단고기 태백일사와 묘향산 석벽본의 천부경 81자와는 약간 다른 글자가 보인다.
析을 碩, 衍을 演, 動을 同, 昻을 仰, 地를 中으로 하는 등의 것이다.

이 두가지 출처의 내용은 음은 같지만 표기가 틀린것이 대부분이다.

< 4. 삼일신고 >

삼일신고는 발해의 석실본과 천보산 태소암본, 고경각의 신사기본의 세가지 이본異本이 전해진다.

< 5. 366사(참전계경) >

366사(참전계경)은 단군교팔리, 성경팔리상하, 단군예절교훈, 참전계경등이 전해진다.

< 참고문헌 >

–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 한국정신문화원
– 한단고기 : 계연수저 임승국번역, 주해 1986년 정신세계사
– 단군교부흥경략 : 정진홍 1937년 계신당
– 삼일철학역해종경합편 : 대종교 출판사 1992년
– 한민족뿌리사상 : 송호수저 1991년 기린원
– 커발한문화사상사 : 이유립著 1976년 커발한 개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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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팔조교 >

단군팔조교는 단군Tangun의 위대함을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경전에서 전하려는 메세지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그것은『너희들도 단군이 되거라 !』는 말입니다.

이 경전은 누구나 단군Tangun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간단한 문장에 압축하여 제시한 경전입니다.

스스로가 자아를 말살하고 마치 어린아이나 원시인처럼
원하는 것을 갖게 해달라고 비는 일은 진정한 문명인이 취할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첨단적인 물질문명에서 이같이 유치하고 원시적인 정신상태의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단군팔조교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평등한 수평적 관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단군팔조교 뿐 아니라 모든 배달민족의 고유한 경전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이 개념이 곧 천손사상天孫思想입니다.
우리민족 모두는 하나님의 자손이며 인류 모두가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배달경전에서 전하고져 하는 지식정보는
『너희가 곧 단군이고 너희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위한 방법론이 십수권의 한민족 고유의 경전에 압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아를 말살하는 대신 보호를 요청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사소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건 보호가 아니라 억압인 것입니다.
억압받음으로서 외롭지 않다면 이미 문제가 없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없이 억압받는 사람들은 아무리 권력이 크든,
아무리 재물이 많든 항상 권력과 재물등에 굶주려 있습니다.
따라서 정작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줄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경멸함으로서 자신의 불행을 감추고 싶어합니다.
기회가 닿으면 인정사정없이 불행한 사람을 짓밟음으로서
자신이 불행하지 않음을 증명하려 하는 것은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입니다.

배달민족의 경전들은 자아의 중심이 하나님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신이나 구세주에게 어린아이나 원시인처럼 매달리는 상태를 극도로 경계합니다.

대신 피와 땀과 눈물로 열심히 일을 하여 재세이화하고,
그래서 쌓인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홍익인간을 함으로서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라고 합니다.

단군팔조교는
단군왕검께서 단군조선을 세우시면서 천부경, 삼일신고, 366사의 진리를 압축하여 전하신 경전입니다.

이 경전의 8개 조목중에서 3개의 조목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경전이 우리민족과 완전한 한 덩어리임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은 우리민족이 단군조선이 출발할때의 정신세계가
지금에 와서도 별반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 경전 한권만으로도 유불선을 비롯한 만교가 이미 우리의 정신세계에 포함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을 거듭해서 읽으면
우리 민족의 모두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힘들때면 항상 잔잔하게 들려오던
다정스러운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이며,
무엇을 말해 오던 것인가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단군팔조교(檀君八條敎) >

제 1 조

하늘의 법法은 오직 하나요,
그 문門이 둘이 아니다.
너희는 오로지 순수한 정성이 하나 같아야 하며,
이로써 너희 안(마음)에서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

천범유일 불이궐문 이유순성일 이심내조천
天範惟一 弗二厥門 爾惟純誠一 爾心乃朝天

 
제 2 조

하늘의 법은 언제나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스스로를 살펴서 마음을 바로하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하늘의 법에 부합되게 할 수 있다면
나아가 만방에 베풀어질 수 있는 것이다.

천범항일 인심유동 추기병심 이급인심 인심유화 즉합천범 내용어우만방
天範恒一 人心惟同 推己秉心 以及人心 人心惟和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제 3 조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님으로부터 연유하였으며,
부모님은 하늘에서 강림하셨도다.
오로지 부모님을 바르게 모시는 것이 하느님을 바르게 모시는 것이며,
이것이 나라에까지 미치니 충성과 효도이다.

이 도道로써 부지런히 힘써 정도正道를 이룬다면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반드시 먼저 벗어 나리라.

이생유친친강자천 유경이친내극경천 이급우방국시내충효
爾生惟親親降自天 惟敬爾親乃克敬天 以及于邦國是乃忠孝

이극체시도 천유붕 필선탈면
爾剋體是道 天有崩 必先脫免

 
제 4 조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을 다니는 짐승도 짝이 있고,
다 떨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들 사내와 계집은 서로 화합하여 원한하는 일이 없게 하고,
질투함이 없게 하고, 음탕함도 없게 하라.

금수유쌍 폐리유대 이남녀 이화 무원무투무음
禽獸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無怨無妬無淫

제 5 조

너희들은 열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손가락이 크던 작던 똑같이 아프지 아니한가 ?
서로 사랑하되 헐뜯음이 없고, 서로 도와주되 서로 다툼이 없다면
가정도 나라도 모두 부흥하리라.

이작십지 통무대소 이상애 무서참 호우 무상잔 가국이흥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 無胥讒 互佑 無相殘 家國以興

 
제 6 조

너희는 소와 말을 보아라.
그들도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아니한가 ?
너희는 서로 양보하고, 서로 빼앗는 일 없이 함께 일하며,
서로 훔치는 일이 없어야 가정과 나라가 충실하여 번성하게 되리라.

이관우마 유분궐추 이호양 무서분 공작 무상도 국가이은
爾觀牛馬 猶分厥芻 爾互讓 無胥奪 共作 無相盜 國家以殷

 
제 7 조

너희는 호랑이를 보아라.
힘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스스로 천박하게 되었도다.
너희는 사납게 날뛰지 말 것이며, 사람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항상 하늘의 법에 따라 만물을 사랑하거라.

너희는 남이 기울어질때 붇들어주되 모욕을 줌이 없도록 하여라.
너희가 만일 이를 어긴다면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여
네몸과 가정이 함께 망하게 되리라.

이관우호 강포불령 내작얼 이무걸목이장성 무상인 항준천범극애물
爾觀于虎 彊暴不靈 乃作孼 爾無桀鶩以 性 無傷人 恒遵天範克愛物

이부경 무능약 제휼 무모비 이유월궐즉 영부득신우 신가이운
爾扶傾 無陵弱 濟恤 無侮卑 爾有越厥則 永不得神佑 身家以殞

 
제 8 조

너희가 만일 논의 벼에 불을 질러 벼들의 씨가 멸하면
신神과 인간이 함께 노여워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이를 숨기고져 아무리 두껍게 싼다해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올 것이다.

너희는 항상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니되 간사함을 감추거나, 악함을 숨김이 없어야 하며,
화를 일으킬 마음도 두지 말아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내면 너희는 이로서 복록이 무궁하리라.
너희 오가五加와 64민은 이 뜻을 받들어 공경할지어다.

이여유충화우화전 화가장진멸 신인이노 이수후포 궐향필누
爾如有衝火于禾田 禾稼將殄滅 神人以怒 爾雖厚包 厥香必漏

이경지이성 무회특 무은악 무장화심 극경우천 친우민
爾敬持彛性 無懷慝 無隱惡 無藏禍心 克敬于天 親于民

이내복록무궁 이오가중기흠재
爾乃福祿無窮 爾五加衆其欽哉

☞참고사이트 : http://www.tangun.ca

http://magic.ne.kr/zbxe/?mid=m8&document_srl=33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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