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의 시대는 가고, 극복의 시대가 오다
오랫동안 서구 문화는 인류의 보편적 서사를 지배해왔다. 그 서사의 중심에는 늘 ‘정복자 영웅’이 있었다. 그는 강한 힘을 가지고, 외부의 위협적인 적을 물리치며,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여 공동체를 구원한다. 이는 개인의 뛰어난 능력과 의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부터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에 이르기까지, 서구 문화는 ‘타인을 정복하고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성공과 정의의 동의어로 여겨왔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이러한 정복 서사는 더 이상 모두에게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다. 거대한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의 이야기는 매력적이지만, 현실의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악당이 아니라, 구조적인 불평등과 시스템의 부조리, 혹은 개인의 나약함과 불안감이다. 칼과 방패 대신, 현실적인 삶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인들은 더 이상 멀리 떨어진 영웅의 이야기에서 깊은 공감을 찾기 어려워졌다.
이 공백을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K-콘텐츠다. K-콘텐츠는 서구의 ‘정복 서사’와는 전혀 다른 ‘극복 서사’를 제시한다. K-콘텐츠의 주인공들은 막강한 힘으로 적을 제압하는 대신, 우리 사회의 문제인 빈부 격차, 학벌주의, 불공정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힌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으며, 실패하고 좌절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가족, 친구, 동료와 함께 연대하며 나아간다.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가 거대 기업에 맞서 싸우고,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이 시스템의 모순 속에서 고뇌하는 모습은 단순한 개인의 승리가 아닌, 우리 모두가 겪는 문제를 대변한다.
K-콘텐츠의 서사는 개인의 성공이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홍익인간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주인공이 겪는 고난은 단순히 그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의 극복은 곧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는 서구 문화의 ‘승리한 개인’에 환호하는 것과는 다른, ‘함께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깊은 공감과 감동을 느끼게 한다.
결국 K-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이유는 단순히 새로운 소재나 뛰어난 연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개인주의적 영웅주의에 익숙해진 전 세계 관객들에게, ‘나’의 극복이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K-콘텐츠는 지금, 정복의 시대가 끝나고 모두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극복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